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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제국 중 하나입니다.
작은 도시에서 거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힘이 어떻게 성장하고, 결국 어떻게 쇠퇴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건국
로마 공화정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의 테베레 강 하류에 도시 국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초대왕은 로마의 건국 신화인 로물루스로 알려져 있는데,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와의 전쟁에 패한 뒤 가족들과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고 라티움에 상륙하게 됩니다.
라티움의 왕인 라티누스왕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왕이 되었고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세웠죠. 이후 그의 후손들은 도시를 평화롭게 통치했지만 13대 후손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왕의 두 아들은 싸움을 했고, 그중 왕이 된 동생의 형의 자손들을 모두 죽여버립니다. 무녀가 된 딸 레아 실비아만 빼고요.
전쟁의 신 마르스는 아름다운 레아 실비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레아 실비아는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쌍둥이 아이들을 강물에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약한 시종이 쌍둥이를 바구니에 실어 멀리 보내주었습니다. 다행히 강을 지나던 늑대가 바구니를 발견했고, 자기 새끼처럼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합니다. 그러다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쌍둥이를 발견하고 데려다 자신의 아이처럼 키웠다고 합니다.
성인이 된 쌍둥이는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듭니다. 하지만 동생 레무스가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물루스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전쟁의 신 마르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로물루스가 바로 로마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격변하는 정치 제도 초기의 로마는 여느 나라처럼 왕의 지배를 받는 왕정체제로 시작하였으나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모여 ‘원로원’을 만들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합니다.
전쟁에 참여한 평민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역할이 커지자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며 결국 귀족과 평민 사이에 신분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신분 투쟁에서 귀족은 평민의 요구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여 호민관직과 평민회를 설치하고 12 표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에서 평민은 형식적으로는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더 넓은 땅과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우선 가까이 있는 남과 북쪽을 정복하여 기원전 4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합니다. 이어서 기원전 3세기엔 지중해 서쪽을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지중해를 차지합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까지 제패하면서 굉장히 빠르게 성장합니다.
무력으로 대외 팽창에 성공한 로마는 노예 노동을 이용한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경영합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자영 농민들은 몰락했습니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들은 자영농의 몰락을 막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파로 나뉘어 대립이 일어나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때 로마공화정을 로마제국으로 만드는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로마에 왕을 탄생시키는데 기초를 닦은 인물이죠.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평민파에 속해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사들을 일끌고 현재의 프랑스 쪽에 위치한 갈리아 지역과 영국의 브리타니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평민파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귀족파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권력이 점점 세지는 것이 두려워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하였지만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시내로 진격해 버립니다.
그가 진격할 때 외친 말이 바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입니다.
그렇게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힙니다.
반대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쫓아간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 정치를 주도하고 여러 개혁을 펼쳤지만 자신이 믿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가 죽자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로마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제2차 삼두 정치의 시작입니다.
로마는 이집트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하필 독방지역을 통치하게 된 안토니우스 또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혹되어 이집트와 연합하여 로마를 배신하게 됩니다.
레피두스는 얼마 못 가고 제거되어 옥타비아누스가 서방까지 다스리게 됩니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서 해전을 벌이게 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두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옥타바누스는 로마의 군대와 재정을 장악하고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금기
팍스 로마나
로마 제국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시작된 황금기 동안 크게 번영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년간 5 현제(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렐리우스)라 불리는 현명한 황제들이 등장하며 최전성기를 누립니다.
이때를 가리켜 ‘팍스 로마나’ 라 부릅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유능한 인물을 뽑아 제위를 물려주었으며 5 현제 시대동안 평화를 누립니다.
로마의 영토는 이 시기에 최고점에 달했고, 경제와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법률과 건축, 토목, 도시 설계 등 실용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법률은 로마가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입니다. 도시 국가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12 표법은 로마 시민을 위한 시민법으로 발전하였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면서 제국 안의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또한, 로마는 정복지 곳곳에 계획도시를 세우고 도시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하였으며, 각 도시에는 원형 경기장, 개선문, 공중목욕탕 등의 건축물을 세우고 상수도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문학에서는 라틴 문학을 꽃피웠고, 헬레니즘 문화에서 탄생한 스토아 철학이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과학 분야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천동설을 주장하려고 당시의 종교적 세계관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로마제국의 영광은 곧 수많은 피지배 민족의 굴욕과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로마의 가혹한 착취와 박해 속에 신음해 온 피압박 민족들은 이스파니아, 갈릴리, 게르마니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시칠리아, 동방의 나라들 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좌절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으로 저항을 계속해온 민족은 유대 민족으로 유일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혹독한 지배 속에서도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유대인 정복에 관계된 로마의 장군들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크랏수스, 케사르 등입니다.
이때 등장한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민족과 신분을 초월한 보편적인 사랑과 평등을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는 위협을 느끼고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통해 제국 전역에 전파되어 각지에 교회가 세워졌고 ‘신약 성서’가 편찬되었습니다.
원래 로마는 다신교 국가로 다양한 종교를 차별 없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크리스트교도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트교과 확산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지만 크리스트교의 교세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삼위일체설에 기초한 정통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크리스트교는 세계 종교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로마는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여 고전 문화를 완성하고 크리스트교라는 보편적인 유일신 신앙을 수용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전통을 융합한 로마 신화는 그리스 문화와 더불어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부와 외부의 위협-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족의 대이동
막강한 힘으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로마는 내부에서 정치적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3세기가 되자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여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가 펼쳐졌고 50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는 등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또한 정복 전쟁이 끝나면서 토지와 노예, 전리품의 공급이 끊겨 경제는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도시와 상공업은 쇠퇴하여 중산층 자유 시민이 몰락하였고, 농촌과 농업은 피폐해졌으며 농촌에서는 부자유 소작농을 뜻하는 콜라나투스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3세기말 디오클레디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효율적인 통치를 꾀하고 전제 군주제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였으며 화폐 개혁과 군사 개혁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한편, 제국을 하나로 합치고 수도를 옮겨 로마의 부흥에 힘썼는데 새로운 수도는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습니다.
그 무렵 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유럽의 역사를 떠맡게 될 게르만 민족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눈에 황색 머리털과 장대하고 튼튼한 체구를 갖춘 이 민족은 이미 제정 초기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라인과 도나우를 이은 장성 가까이 접근해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있기 이전 서고트족은 중앙아시아의 날렵했던 유목민이던 훈족의 공격을 피해 로마 국경으로 도망갔고 로마 황제에게 로마 영토 안으로의 이주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처음에는 고민했으나 황폐화된 국경지대에 서고트족이 정착하면 세입이 증가하고 국경방어 병력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이주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훈족에게 멸망한 동고트인의 일부가 이주 허가 요청을 했고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던 동로마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곧 게르만인 측과 로마 측 대립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게르만인을 얕잡아본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기의 3만 명 군대를 동원하여 서고트군 1만 8천과 싸웠으나 기동성이 뛰어난 서고트 기병대는 발렌스의 기병대를 쉽게 제압하고 나머지 보병까지 포위 섬멸했습니다.
이 패전으로 발렌스 황제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첫 무대를 장식한 아드리아노플 싸움입니다.
이 패전으로 동로마 제국의 방벽은 무너지고 게르만인은 밀물처럼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이 세력은 먼저 트라키아 일대를 유린하고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습니다. 이때 발렌스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가 서고트의 침입을 저지하고 그들을 도나우강 쪽에 정착시켰습니다.
그러나 476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제 네포스를 추방시켜 버린 것이었는데요.
오도아케르는 황제란 칭호대신 스스로 국왕이라 칭하고 게르만인의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로써 과거의 로마 제국은 오직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로마 제국 하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부활운동
성 소피아 성당
동서 2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던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 하나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다시 하나의 로마 제국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는 나라가 이것입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후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인 부족 국가들이 수립되는 대대적인 변동이 있었으나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처음에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약간 피해를 입었을 뿐 동서 무역의 중심지이면서 제국의 수도이기도 한 콘스탄티노플이나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지는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국력은 전과 다름없었고 황제 중심의 강력한 권력 체제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전 세계의 주인에 해당하는 것이 곧 황제 자신이며 지상에 신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재정복의 발을 내디딘 지 20년 만에 민족적, 종교적 분열과 내분이 그칠 사이 없던 반달 왕국,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등 게르만인 부족국가는 차례차례 명망 하고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의 연안 지방 및 서지중해의 여러 섬들은 다시 로마인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지중해 세계를 거느렸던 로마 제국이 부활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유스티아누스 법전은 편찬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 등을 세워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았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최후-십자군전쟁
십자군
11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이 셀주크 튀르크에게 영토를 상실하며 크리스트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빼앗기자, 위협을 받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투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우르바투스 2세는 성지 회복 외에 동로마 황제권 제압 내지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재합일이라는 또 다른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직속의 군대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독일 황제와 대립 중이었으므로 동원이 가능한 프랑스군 확보를 위해 프랑스 플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여 연설했습니다.
“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 밖의 도시들에서 크리스트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튀르크인의 진출은 그칠 줄 모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가오고 있으니, 성지의 형제들을 구하자. 예수의 성묘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신이 그대들에게 내린 토지이다. 이 땅에서 불행한 자와 가난한 자는 그 땅에서 번영할 것이다.”
이렇게 연설을 하였고, 선동가들을 각지에 파견해 성지 탈환의 큰 뜻을 알리고 동방에는 성유골 외에도 금은 재보와 미녀가 많다는 것을 과장해서 선전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가족과 재산은 로마교회에서 직접 보호해 줄 것이며 성전에서 희생된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수천 명이 성지와 성유골 탈환을 위해, 혹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혹인 미녀를 얻기 위해, 종군을 자원하며 1096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099년 3년 만에 목적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슬람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모아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1147년에 제2차 십자군을 조직해 맞섰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패하고 맙니다.
이후 이슬람에서는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재상이 되더니 얼마 안 가서 군주의 지위에 올라 압바스조의 칼리프한테서 술탄이란 칭호를 얻고 누레딘이 죽은 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독지배자로 성장하여 1187년에는 예루살렘 왕국을 정복하였습니다.
십자군은 200년여 년에 걸쳐 제8차까지 동원되긴 했으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본래의 목적은 잊고 정치적, 경제적 타산이 앞서서 좌절되고 십자군 운동은 아무 성과 없이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 후 계속해서 쇠퇴한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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