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 성지
다락골 최양업 신부 출생지(충남 청양)
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박해라 일컬어지는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다락골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 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 무덤을 이루고 있다.
이 무덤이 있는 산은 경주 최씨(최양업 신부 집안)의 문중 산으로 이 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줄무덤의 총수는 37기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가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1, 2, 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 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 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1 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 줄무덤이 있다. 제3 줄무덤은 제1 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 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최경환은 충청도 홍주 지방 다락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을 나 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