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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위소(羅緯素) 1583년(선조 16)~1667년(현종 8)
강호구가江湖九歌
구성 및 형식
모두 9수이다. 후손 나용균(羅容均)이 소장하고 있는 『나씨가승(羅氏家乘)』에 수록되어 있다.
나위소는 나주 출신으로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이 작품은 수운정의 강호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한 것이다.
내용
제1수는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2수는 강호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3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 성은을 생각하는 강호생활을, 제4수는 반찬 장만도 어려운 시골에서 손을 맞는 소박한 생활을, 제5수는 달 밝은 밤,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6수는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을, 제7수는 낚싯대를 멘 어옹의 그윽한 흥치를, 제8수는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을, 제9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소박하고 한가한 자연생활에서 느끼는 흥취와 성은의 고마움이 주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작자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남인이며 5년 연하인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시조작품으로 평가된다. 작품이 수록된 『나씨가승』은 1979년『송암유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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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①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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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승인 2009.01.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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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목사 그만두고 영간강변에 지은 정자
수운정(峀雲亭)은 조선 인, 효종대의 나위소(羅緯素)가 세운 정자이다.
『전남도지(全南道誌)』에 따르면 영산 영산리 영강(榮江) 위에 있었던 정자라고 하니 그 위치는 지금의 삼영동 영산강변에 해당된다.
나위소는 효종 원년(1650년)에 경주목사로 부임해 그곳에서 3년동안 목민관으로서 일하였다. 그의 나이 70살이 되자 자탄(自歎)하여 말하기를..
"내 이미 늙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쉬리라"
귀향을 결심한 나위소는 진(袗)에게 명하여 금수(錦水, 영산강을 가리킴)의 위에 선영(先塋) 아래 정자를 짓게 하였다. 이곳을 인년치사(引年致仕, 벼슬을 그만둔다는 의미) 후 쉴 곳으로 삼았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수은정(峀雲亭)이다.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雲無心而出峀운무심이출사'라고 한 시구에 착한하여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관가(官家)에 있었지만 평소 도연명의 생활을 흠모한 나머지 귀거래(歸去來)를 원하여 이 정자를 건립했다 할 수 있다.
나위소(羅緯素, 1583∼1667)는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좌랑 등을 지내고,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재직중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서 무기와 군량의 조달에 힘썼다.
뒤에 호조정랑 겸 기주관·직강·사예·임천군수를 거쳐, 1634년 예조정랑·태상시첨정·상의원도정을 역임하였다.
1636년 이후로 풍기군수·원주목사·사예·태상시정 등을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만년에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강호구가 [江湖九歌]
조선 후기에 나위소(羅緯素)가 지은 시조로 모두 9수이다. 후손 용균(容均)이 소장하고 있는 ≪나씨가승 羅氏家乘≫에 수록되어 있다.
나위소는 나주 출신으로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와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이 작품은 수운정의 강호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한 것이다.
제1수는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2수는 강호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3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 성은을 생각하는 강호생활을, 제4수는 반찬 장만도 어려운 시골에서 손을 맞는 소박한 생활을, 제5수는 달 밝은 밤,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靜)으로 되어 있다.
제6수는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을, 제7수는 낚싯대를 멘 어옹의 그윽한 흥치를, 제8수는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을, 제9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등으로 되어 있다. 소박하고 한가한 자연생활에서 느끼는 흥취와 성은의 고마움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남인이며 5년 연하인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시조작품으로 평가된다. 작품이 수록된 ≪나씨가승≫은 1979년 ≪송암유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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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②
영산강 일대 신촌면(新村面)에 있었던 정자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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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승인 2009.01.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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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영(金萬英)은 수운정서(峀雲亭序)에서 '미상화편달술진징사지가구楣上華扁達述晉徵士之佳句'라 하고 나두동(羅斗冬)의 수운정중창상량문에서 '화편시갈華扁始? 개추도영지유사盖追陶令之遺詞'라 함은 정자의 명명(命名)이 도연명의 글 귀거래사(歸去來辭)애소 연유함을 의미한다.
병오년 1666년 나위소가 죽은 후 수준정은 점점 퇴락해 지자 그의 손자 나두하와 나두추, 나두동 등은 정자의 중수를 타협하고, 증손자인 나만상(羅晩相)에게 중수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이 중수 추진은 1695년이고 정중원(鄭重元)이 수중정중수기(峀雲亭重修記)를 쓴 것은 1723년의 일이다.
근래에는 나도선(羅燾線) 등이 편찬한 『나주군지羅州郡誌』에 이 정자는 '재신촌면在新村面 영강상榮江上'이라 하였고, 거기체 참판 이응시(李應蓍), 감사(監司) 이만웅(李萬雄) 등의 수운정제영이 소재된 것을 보면 수운정은 오래도록 보존되어 왔던 건물로 생각된다.
1979년에 나용균(羅容均)이 전한 『송암유집松岩遺集』에는 여러 사람들의 수운정제영을 비롯하여 수운정 건립의 유래와 이의 중수사실 등을 알 수 있는 김만영의 수중정서, 정중원의 수운정중수기, 최서벽의 수운정상량문, 나두동의 수운정중창상량문, 그리고 나소위의 후손들의 수운정완의 등이 있다.
이 중 팔계(八溪) 정중원은 나소위의 외손으로서 정5품의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영조대 인물이다. 한문을 잘하여 나두추와 나두동 등이 수운정을 중수할 때에 중수기를 부탁하였다. 그가 나위소의 사실기(事實記)를 쓴 것도 한문장(漢文章)에 능했기 때문이다. 정중원은 6세에 수운정 외조부를 뵈었던 일을 회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전한다.
'6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수운정 외할아버지를 뵈었다.
83세의 연세에 73세인 李夫人과 해노(偕老)하고 계셨는데, 정신이 흐린 중에서도 수운정의 약사(藥事)만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손들과 종족(宗族) 빈객(賓客)들이 모여 청야(淸夜)에 풍류를 울리고 노래를 불렀는데, 백발을 한 외할아버지께서 기쁨이 가득하여 안석에 기대고 있는 모습은 마치 끔속의 일처럼 의의(依依)하다.'
그리고 약헌(藥軒) 나두동은 문학과 논변이 뛰어나고 박고통금(博古通今)한 명사로 알려진 숙종대 인물이다. 사례요람(四禮要覽)과 가례주해(家禮註解), 의례집록(疑禮輯錄), 상례보주(喪禮補注), 기축록(己丑錄) 동사(東史) 등을 저술하여 나주군지에서도 나주의 역대인물 47인 중의 한 사람으로 들고 있다.
따라서 나두동은 수운정의 주인공인 나소위의 직손(直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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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③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333호] 승인 2009.02.06 00:00:00
나위소의 손자 나두동 수운정 중수 중심 인물
수운정의 주인 나위소(羅緯素)에게는 보(補), 반(襻), 진(袗)의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중 셋째 진에게 두춘(斗春), 두하(斗夏), 두추(斗秋), 두동(斗冬) 등 4남이 있었으니 약헌(藥軒) 나두동은 나위소의 손(孫)에 해당된다.
수운정완의(峀雲亭完議)의 끝에 나위소의 손(孫)인 두장(斗章, 보의 아들), 두하, 두추, 두동과 증손(曾孫)인 만상(晩相), 만치(晩致) 등이 연명하여 글을 이루되 두동이 초(草)를 엮었다고 함을 보면 약헌은 수운정중수에 중심인물이며, 또 한문에 비범한 사람이었음은 물론이다.
나두동은 수운정상량문을 스스로 작성했고, 후대에 전할 선부군(先父君, 나위소를 가리킴)의 가상(家狀)도 처음 두삼(보의 아들)이 섰던 것을 다시 약가산삭(畧加删削)하였다. 그러므로 약헌은 조부 나소위의 유업을 기리는 데에 적극 참여했던 나문(羅門)의 효손이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송암유집(松岩遺集)에는 수운정제영으로 나위소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김만영, 이만웅, 이안로, 정철 등의 누정시가 전한다.
김만영(金萬英)의 수운정제영
翼然高閣海山東익연고각해산동
鶴擧四湖千古月학거사해천고월
登臨?覺心魂夾등임두각심혼협
攪舊下順興感慨교구하순흥감개
나위소의 수운정제영
강호구가(江湖九歌)
其一
어버이 나하셔날 님금이 먹이시니
나흔 德 먹인 恩을 다 갑곤랴 하였더니
조연(條然)이 칠십이 무니 할 일 업서 하노라
其二
어이 성은이야 망극할손 성은이다.
강호안노(江湖安老)도 분(分)밧긔 일이어든
하물며 두 아들 전성영양(專城榮養)은 또 어인고 하노라
其三
연하(烟霞)의 깁피 곧 병약이 효험(效驗)업서
강호에 바리연디 10년 밧기 되어세라
그러나 이제디 못 죽음도 긔 성은인가 하노라
其四
전나귀 밧비로리다 졈은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구즌 뫼여 찬물(饌物)이 아조 업다
아희야 비내여 띄워라 그물 노하 보리라
其五
달 밝고 바람 자니 물결이 비단일다
단정(短艇)을 빗기노하 오락가락 하는 흥(興)을
백구(白鷗, 갈매기)야 하 즐겨말고려 세상 하노라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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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④
영산강변 경치 시로 표현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334호] 승인 2009.02.13 00:00:00
수운정제영(峀雲亭題詠)을 지은 김만영(金晩英)은 조선 숙종대의 나주인으로 호는 남포(南浦)이다.
그는 나라에서 정9품의 세마(洗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깊은 학문을 갖춘 그는 학행이 있는 위인이므로 나주군지에서는 그를 나주의 역대인물 47명의 한 사람으로 들고 있다. 그는 을사년(1665년)에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序)를 섰다. 이는 나주군 왕곡면에 있는 금사정(錦沙亭)에 현액(現額)되어 있다.
금사정은 원래 중,명종대에 임붕, 나일손 등의 선비들이 중국 왕의지의 난정고사(蘭亭古事)를 염두하여 11인계를 조직하여 세운 정자엔데, 용사(龍蛇)의 도섭(島燮)에 소실되었다. 을사년 영평(永平)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 11인의 옛 계권(契券)을 중수하였다 하니, 금사정도 이때에 중수되고 그 계회(契會)의 중수(重修)를 기록한 글이 앞에서 말한 금강중수계회(錦江重修?序)이다.
앞에 든 김만영의 한시는 그의 수운정서에 덧붙인 누정시이다.
이 시의 서두에서..
해산(海山) 동쪽에 나래 펴고 나는 듯한 높은 정자,
봉래(蓬萊) 등 선산의 기세를 압도하는 구나
학(鶴)은 천고(千古)의 달빛을 좇아 서호(西湖)를 찾고,
붕(鵬) 새는 창천(蒼天)의 바람을 타고 남극(南極)에 이르는 구나.
라 함은 선계(仙界)와도 흡사한 수운정 주변 임천(林泉)의 경개(梗槪), 그리고 서호(西湖)의 학거처사(鶴去處士)로 알려진 옛날 중국의 임포(林逋)와 같이 탈속(脫俗)하여 자연과 벗아난 나위소의 풍류를 말한 것이다.
그는 평소에 이 수운정의 주인과 정의가 유별했기 때문에 나위소가 세상을 떠나자 깊은 정을 담은 만장(挽章)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위에 든 나위소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수운정의 주인이다. 그의 자는 계빈(季彬)이요, 호는 송암(松岩)이다. 집 뒤에 있는 바위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이를 즐겨 스스로 송암이라 자호(自號)한 것이다.
송암은 인조 1년에 문과에 등제(登第)한 후 봉사직장(奉事直長) 및 옥과 현감을 거쳐 승정원판교겸판수관(承政院判校兼編修官),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 경주목사 등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71세 때에 치사귀향(致仕歸鄕)하고 수운정에 돌아와 강호에 자적(自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운정 아래 흐르는 장강과 두 개의 섬, 상하 백리에 이르는 강외사저(江外沙渚)와 이곳의 연하(煙霞)를 벗삼는 생활과 자오(自娛)하였다. 이 무렵 수운정에서 강호의 흥치(興致)와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한 것이 앞에 든 수운정인경 3수와 수운정인사 3수, 그리고 시조례(時調禮)의 강호9가이다.
지친 해오라기 모래 사장에서 조울고, 놀랜 갈매기 물 위에 오락가락
기러기 나타남이 또 승경(勝景)인데, 우짓는 소리에 구름도 날리는구나.
병(病)이 오래 됨이 잠 못 이루고, 밤이면 자주 이불 제치고 앉아있더니
강(江)에서 들리는 야화(夜話), 이는 고기 잡는 사람의 목소리임을 알겠구나.
구름은 처마 끝에 머물러 잠이 들고, 물결은 정자 앞에 밀치어 철석인다.
세사(世事)는 오직 술로 즐길 뿐이요, 생애(生涯) 또한 배를 타고 고기 낚는 삶이로다.
위 글은 송암이 물가에 있는 수운정의 자연에 임하여 즉흥적으로 그 광경을 노래한 수운정인경 3수의 내용이다. 이는 철에 따라 갖가지 새가 찾아 드는 영산강변의 승경과 이러한 자연의 몰입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술을 벗하며 어부의 생애로 자족하는 송암의 마음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때문에 이 시에서 말하는 작자의 병은 자연의 포옹에 감기어 헤어 나올 줄 모르는 그의 성격이라 해도 무방하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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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⑤
9수로 제작한 누정시조의 하나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335호] 승인 2009.02.20 00:00:00
강호구가(江湖九歌)
지친 해오라기 모래 사장에서 조울고, 놀랜 갈매기 물 위에 오락가락
기러기 나타남이 또 승경(勝景)인데, 우짓는 소리에 구름도 날리는구나.
병(病)이 오래 됨이 잠 못 이루고, 밤이면 자주 이불 제치고 앉아있더니
강(江)에서 들리는 야화(夜話), 이는 고기 잡는 사람의 목소리임을 알겠구나.
구름은 처마 끝에 머물러 잠이 들고, 물결은 정자 앞에 밀치어 철석인다.
세사(世事)는 오직 술로 즐길 뿐이요, 생애(生涯) 또한 배를 타고 고기 낚는 삶이로다.
위 글은 송암(松岩) 김만영이 영산강 물가에 있는 수운정의 자연에 임하여 즉흥적으로 그 광경을 노래한 수운정 즉경(?景) 3수의 내용이다. 이는 철에 따라 갖가지 새가 찾아 드는 영산강변의 승경과 이러한 자연의 몰입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술을 벗하며 어부의 생애로 자족하는 송암의 마음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이 시조는 국문학상 누정문학으로는 한시(漢詩)로 된 누정제영을 비롯하여 백상누별곡(百祥樓別曲)이나 면앙정가 등의 누정가사와 옥경현(玉鏡軒) 장복겸(張復謙)이 고산(孤山)의 불고정(不孤亭)에서 제작한 고산별곡(孤山別曲)과 같은 누정시조(樓亭時調)를 주요내용으로 들 수 있는데, 강호구가(江湖九歌)는 송암이 수운정에서 연시조(連時調) 9수(首)로 제작한 누정시조의 하나이다.
이 시조의 내용을 요약하면 제1곡은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를, 2곡은 강호(江湖)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 주신 성은(聖恩)을, 제3곡은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 성은을 생각하는 강호생활, 제4곡은 찬말(饌物)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골에서 손을 맞는 소박한 생활, 5곡은 달 밝은 밤,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情), 제6곡은 갈매기와 함께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 제7곡은 낚싯대를 멘 늙은 어부의 그윽한 흥치(興致), 제8곡은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 제9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등을 노래하였다.
특히 송암이 퇴관(退官)하여 고향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그의 두 아들 보와 탄으로 하여금 나주의 가까운 읍 근처에 머물도록 하면서 벼슬하도록 하여 양친(養親)에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하여 송암은 매양 군은여천(君恩如天)의 감사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강호구가의 제2곡에서 ‘두 아들 전성영양(專城榮養)’이라 함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는 ‘연궐(戀闕)’시에서도 ‘十載江湖抱病身십재강호포병신 愛君丹?老彌新애군단곤노미신’이라 하였다.
강호에서 편안하게 노닐고 있지만 항상 임금의 성은을 잊지 못하는 이 같은 심정을 담은 것이 강호구가 제2곡의 내용이다.
이밖에 제3곡부터 7곡까지 그리고, 제9곡은 그의 어부생활의 흥을 주로 한 내용이다.
한시체(漢詩體)의 제영(題詠) 중 수운정즉경의 제3수와 수운정즉사의 제1,2수도 같은 성격의 즉흥이다. 이를 볼 때 수운정에서 영위했던 송암의 풍류는 곧 고산(孤山) 윤선도가 가졌던 어부생활의 흥치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제2곡의 내용을 보면 이 강호구가는 그의 70세 이후의 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히 70이 무니 할 일 업소 하노라’라고 함이 이를 말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수운정의 건립이 효종 2년, 송암이 경주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때가 효종 3년이니 강호구가도 이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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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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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호] 승인 2009.02.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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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 윤선도와 친분 두터워
송암(松岩) 김만영(金萬英)이 은퇴하고 가장 가까이 사귀었던 인물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이다. 둘 사이에 오갔던 서신(書信)과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尹仁美)가 송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양가문간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암이 76세 때 송강(松江) 정철을 받들던 사람들에 의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다시 거론되었다. 나씨 문중에서 건립한 인재사당(因齋詞堂)이 이때에 헐리었다. 그러나 고산 윤선도는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때문에 송암은 이때의 고산에 대한 감사함을 항시 잊지 못하였다.
고산보다 5살 연장이지만 양자(兩者)는 매우 가까운 지기지간(知己之間)이었는데, 고산이 보길도에서 어부생활을 영위하여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제작한 효종 2년은 송암이 강호구가를 지은 때와 거의 같은 무렵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같은 풍류생활의 동일성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수운정제영(峀雲亭題詠)의 작자 중 감사(監司) 이만웅(李萬雄) 역시 송암과 친분이 두터웠다. 송암에게 보낸 그의 서신 내용을 보면 이점을 알 수 있다.
이만웅의 수운정운(峀雲亭韻)
루(樓) 밖에 흐르는 호광(湖光), 창태(蒼苔)에 물결짓고,
루(樓) 안에 이는 협기(浹氣), 번양(煩?)을 씻네.
창(窓)에 들이 보이는 고운(孤雲), 산(山) 위에 오락가락,
하늘에 닿는 너른 들, 정자(亭子)를 안고 도네.
포구(浦口)를 찾는 상고 배, 썰물에 닻을 내리고,
버드나무 늘어진 어촌(漁村)에 안개 자욱하네.
기약없이 만난 것도 가회(佳會)이러니, 술잔을 주고 받는 정(情)이나 나눠보세.
다음으로 수운정제영을 남긴 이응시(李應蓍)를 보면, 그는 조선조의 대군(大君)의 후손으로 나주에 살았으며, 호는 취죽(翠竹)이다. 취죽(翠竹) 역시 송암과는 가까운 사이었다. 취죽이 송암에게 보낸 여러편의 서신이 『송암유집松岩遺集』에 전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둘 간의 정분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서신은 참판의 벼슬로 관계에 있던 취죽이 수운정에서 여유러운 생활을 즐기고 있던 송암에게 보낸 글이다.
이응시는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인조에게 여색(女色)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직산(稷山)에 이배(移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사간(司諫)이 되고 이어 승지·도승지·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를 역임하였다.
1655년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주민이 월경(越境)하여 청나라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청나라의 항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도승지에 다시 기용되었다. 1658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에 승진, 효종이 죽자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0년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를 겸임했다. 글씨도 뛰어났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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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문학 - 5. 수운정(峀雲亭) ⑦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337호] 승인 2009.03.13 00:00:00
'안개 걷히니, 흥예 다리 물결 위에 솟아 있고...'
수운정제영(峀雲亭題詠)을 남긴 이응시(李應蓍)는 조선조 대군(大君)의 후손으로 나주에 살았으며, 호는 취죽(翠竹)이다. 취죽(翠竹) 역시 송암과는 가까운 사이었다. 취죽이 송암에게 보낸 여러편의 서신이 『송암유집松岩遺集』에 전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둘 간의 정분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취죽(翠竹)이 수운정운(峀雲亭韻) 3수(首)를 지은 까닭은 송암(松岩) 김만영과의 두터운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詩)에서 '그림처럼 경개(景槪) 좋은 수운정에서 어찌 우국치신(憂國致身)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오만은 석양(夕陽)에 술자리를 펴고 보니 번잡(煩雜)한 마음이 밀려온다'라면서 시정(詩情)을 통해 수운정에서의 술회(述懷)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수운정운의 3수 중 처음시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높게 서 있는 수운정(峀雲亭), 삼면(三面)이 강호(江湖)에 접해 있어, 경치(景致) 좋기는 한 폭의 그림이라.
안개 걷히니, 흥예 다리 물결 위에 솟아 있고, 하늘 맑으니, 청산은 물 위에 우뚝하다.
항시 술집에 이르면 빈주(賓主) 마주 앉아, 선경(仙景)을 찾고자 그 유무(有無)를 묻는다.
흰 머리 여윈 얼굴에 나이는 여든이니, 그대는 흡사 학을 닮아 호리호리 하구나.
또 정철이 제작한 7언율(言律)의 수운정운이 있다.
창태(蒼苔)를 쓸고 돌길에서 마지해 준 임,
손을 잡고 높다란 수운정(峀雲亭)에 오르니 객회 (客懷)도 시원해 진다.
산 봉우리는 높은 정자를 보고 좋게 둘러 있고,
고기 잡는 배 서둘러 나아갔다. 저녁 밀물에 돌아온다.
행인은 쌍 다리 건너 아득히 사라지고,
양 언덕에 방초(芳草), 무성하기만하다.
왔다갔다 서성거리다가 갈 길이 어두워짐을 잊었으니,
원컨대 물가에 나라가 또 술 한 잔 하고저.
영산강 변에 있었다는 수운정에는 정철과 이응시 등 당대에 걸출한 인물들이 이곳에 와서 누정시를 지으면서 김만영과 교류를 하였다. 지금은 수운정의 자취도 찾을 길이 없지만 여러 인물들의 누정시를 통해 영산강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그 경치가 마치 선경(仙景)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수운정이 지금의 가야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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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감상
其一
어버이 나하셔날 님금이 먹이시니
나흔 德 먹인 恩을 다 갑곤랴 하였더니
조연(條然)이 칠십이 무니 할 일 업서 하노라
其二
어이 성은이야 망극할손 성은이다.
강호안노(江湖安老)도 분(分)밧긔 일이어든
하물며 두 아들 전성영양(專城榮養)은 또 어인고 하노라
其三
연하(烟霞)의 깁피 곧 병약이 효험(效驗)업서
강호에 바리연디 10년 밧기 되어세라
그러나 이제디 못 죽음도 긔 성은인가 하노라
⇒ (1~3연)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其四
전나귀 밧비로리다 졈은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구즌 뫼여 찬물(饌物)이 아조 업다
아희야 비내여 띄워라 그물 노하 보리라
其五
달 밝고 바람 자니 물결이 비단일다
단정(短艇)을 빗기노하 오락가락 하는 흥(興)을
백구(白鷗, 갈매기)야 하 즐겨 말아라 세상 알까 하노라
⇒ (4~5연) 달 밝은 날 밤 배를 띄어 즐기는 강호한정
其六
모래 위에 자는 백구 한가할샤
강호풍취(江湖風趣)를 네 지닐지 내 지닐지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은 너도 나만 못하리라
⇒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
其九
식록(食祿)을 그친 후로 어조(漁釣)를 생애(生涯)하니
헴 없는 아이들은 괴롭다 하건마는
두어라 강호한적(江湖閑適)이 내 분(分)인가 하노라
⇒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
▣ 핵심 정리
■ 특징
▪ 자연을 매개로 하여 화자의 가치관을 표현
■ 주제 : 소박하지만 한가한 자연 생활에서 느끼는 흥취
▣ 이해와 감상
조선 후기에 나위소(羅緯素)가 지은 시조로 모두 9수이다. 후손 용균(容均)이 소장하고 있는 ≪나씨가승 羅氏家乘≫에 수록되어 있다.
나위소는 나주 출신으로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와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이 작품은 수운정의 강호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한 것이다.
제1수는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2수는 강호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3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 성은을 생각하는 강호생활을, 제4수는 반찬 장만도 어려운 시골에서 손을 맞는 소박한 생활을, 제5수는 달 밝은 밤,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靜)으로 되어 있다.
제6수는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을, 제7수는 낚싯대를 멘 어옹의 그윽한 흥치를, 제8수는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을, 제9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등으로 되어 있다. 소박하고 한가한 자연생활에서 느끼는 흥취와 성은의 고마움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남인이며 5년 연하인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시조작품으로 평가된다. 작품이 수록된 ≪나씨가승≫은 1979년 ≪송암유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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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위소 강호구가( 江湖九歌) ▣ 본문 감상 其一 어버이 나하셔날 님금이 먹이시니 나흔 德 먹인 恩을 다 갑곤랴 하였더니 조연(條然)이 칠십이 무니 할 일 업서 하노라 其二 어이 성은이야 망극할손 성은이다. 강호안노(江湖安老)도 분(分)밧긔 일이어든 하물며 두 아들 전성영양(專城榮養)은 또 어인고 하노라 其三 연하(烟霞)의 깁피 곧 병약이 효험(效驗)업서 강호에 바리연디 10년 밧기 되어세라 그러나 이제디 못 죽음도 긔 성은인가 하노라 ⇒ (1~3연)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其四 전나귀 밧비로리다 졈은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구즌 뫼여 찬물(饌物)이 아조 업다 아희야 비내여 띄워라 그물 노하 보리라 其五 달 밝고 바람 자니 물결이 비단일다 단정(短艇)을 빗기노하 오락가락 하는 흥(興)을 백구(白鷗, 갈매기)야 하 즐겨 말아라 세상 알까 하노라 ⇒ (4~5연) 달 밝은 날 밤 배를 띄어 즐기는 강호한정 其六 모래 위에 자는 백구 한가할샤 강호풍취(江湖風趣)를 네 지닐지 내 지닐지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은 너도 나만 못하리라 ⇒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 其九 식록(食祿)을 그친 후로 어조(漁釣)를 생애(生涯)하니 헴 없는 아이들은 괴롭다 하건마는 두어라 강호한적(江湖閑適)이 내 분(分)인가 하노라 ⇒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 ▣ 핵심 정리 ■ 특징 ▪ 자연을 매개로 하여 화자의 가치관을 표현 ■ 주제 : 소박하지만 한가한 자연 생활에서 느끼는 흥취 ▣ 이해와 감상 조선 후기에 나위소(羅緯素)가 지은 시조로 모두 9수이다. 후손 용균(容均)이 소장하고 있는 ≪나씨가승 羅氏家乘≫에 수록되어 있다. 나위소는 나주 출신으로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와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이 작품은 수운정의 강호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한 것이다. 제1수는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2수는 강호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주신 임금의 은혜를, 제3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 성은을 생각하는 강호생활을, 제4수는 반찬 장만도 어려운 시골에서 손을 맞는 소박한 생활을, 제5수는 달 밝은 밤,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靜)으로 되어 있다. 제6수는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을, 제7수는 낚싯대를 멘 어옹의 그윽한 흥치를, 제8수는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을, 제9수는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등으로 되어 있다. 소박하고 한가한 자연생활에서 느끼는 흥취와 성은의 고마움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남인이며 5년 연하인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시조작품으로 평가된다. 작품이 수록된 ≪나씨가승≫은 1979년 ≪송암유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 해 설 - <제2수> 어와 성은(聖恩)이야 망극(罔極)할사 성은(聖恩)이다 강호(江湖) 안로(安老)도 분(分) 밧긔 일이어든 하물며 두 아들 정성을 다해 봉양함은 또 어인가 하노라 (아아, 임금의 은혜로구나. 끝이 없는 임금의 은혜로구나. 강호에서 편안하게 늙어가는 것도 내 분수에 넘치는 일인데 하물며 두 아들이 정성을 다해 봉양하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하노라.) [어와 : 아아. (감탄사) / 망극할사 :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가 한이 없구나. / 봉양 : 부모나 조부모와 같은 웃어른을 받들어 모심.] <제3수> 연하(煙霞)의 깁픠 든 병(病) 약(藥)이 효험(效驗) 업서 강호(江湖)에 바리연디* 십년(十年) 밧기 되어세라 그러나 이제 다 못 죽음도 긔 성은(聖恩)인가 ᄒᆞ노라 (자연을 좋아해서 깊이 든 병이 약이 효과가 없어서 자연 속에 버려진 지 십년이 넘게 되었구나.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임금의 은혜인가 한다.) [ 연하 : 안개와 노을. 자연을 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 / 병 : 자연 속에 묻혀 지내고자 하는 마음을 비유한 말이며,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고 함./ 강호 : 강과 호수. 자연의 대유. =연하 / 바리연디 : 버려진 지 / 긔 : 그것이. ‘못 죽는 것이’. 강조의 기능. / 성은 : 임금의 은혜] 강호가도(江湖歌道) : 조선시대 시가문학에서 보이는 자연예찬의 풍조 <제4수> 전나귀 바삐 몰아 다 저문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거친 밥에 찬물(饌物)*이 아조 업다 아희야 배 내어 띄워라 그물 놓아 보리라 (다리가 저는 나귀를 바삐 몰아서 해질 무렵에 손님이 오셨는데 보리 껍질로 만든 거친 밥만 있고 반찬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아이야 배를 내어서 띄워라 그물을 놓아서 고기를 낚아 보아야겠다.) [전나귀 : 다리를 저는 나귀 / 찬물: 반찬이 될 만한 것 ] <제5수> 달 밝고 바람 잔잔하니 물결이 비단 일다 단정(短艇)*을 비스듬히 놓아 오락가락 하는 흥(興)을 백구(白鷗)야 하 즐겨 마라 세상(世上) 알가 하노라 (달 밝고 바람 잔잔하니 물결이 비단 이라 작은 배에 비스듬이 누어 유유자적하는 흥을 갈매기야 너무 즐겨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알까 두렵다.) <제6수> 모래 우희 자는 백구(白鷗) 한가(閑暇) 할샤 강호(江湖) 풍취(風趣)를 네가 지닐 때 내가 지닐 때 석양(夕陽) 반범귀흥(半帆歸興)은 너도 날만 못하리라 (모래위에 자는 갈매기 한가하다 자연의 풍취가 네 것인가 내것인가 석양의 작은 배와 돌아오는 흥이야 너도 나만 못하리라) <제9수> 식록(食祿)을 긋친 후(後)로 어조(漁釣)을 생애(生涯)ᄒᆞ니 혬 업슨 아이들은 괴롭다 하지마는 두어라 강호한적(江湖閑適)이 내 분(分)인가 하노라 (벼슬을 마친후에 낚시로 살아가니 생각없는 아이들은 괴롭겠다 하지마는 (가만히)두어라 강호한적이 나의 분수인가 하노라) [식록: 녹을 받아 사는 삶 / 어조:낚시 / 생애:삶 ] 안분지족과 유유자적의 삶을 노래 [출처] 강호구가|작성자 생각쟁이 ........................... 전라도정자詩로 만난 인물-나위소(羅緯素) by 오인교의 녹색건강 고달픈 해오라기 모래 사장에서 조을고 놀란 갈매기 물 위에 오락가락 기러기 나타남이 또한 승경(勝景)인데 우짓는 소리에 구름도 날리는구나. 병이 오래 됨에 잠 못 이루고 밤이면 자주 이불 제치고 앉았더니 강에서 들리는 야화(夜火) 이는 고기 잡는 소리임을 알겠구나. 구름은 처마 끝에 머물어 잠이 들고 물결은 정자 앞에 밀치어 철석인다 세사는 오직 술로 즐길뿐이요 생애는 배를 타고 고기 낚는 삶이로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나위소(羅緯素 1582 선조15~?)가 지은 시다.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岩), 본관은 나주(羅州), 정개청(鄭介淸)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재주와 학식으로 소문이 났던 사포서 별검(司圃署別檢)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낸 나덕준(羅德峻)의 아들이다. 12세에 모친이 별세하였고 그 뒤 11년이 지나 부친이 별세하였다. 게다가 부친상을 마치기도 전에 계모마저 별세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생원(生員)이 되고, 인조 1년(162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제찰사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군량 조달에 힘썼다. 호조정랑(戶曹正郞)․사예(司藝)․임천군수를 거쳐 인조 12년(1634)에 예조정랑.상의원도정(尙衣院都正)을 역임했다. 병자호란(1636) 이후로 풍기군수.원주목사.태상시정(太常寺正) 등을 거쳐 효종 원년(1650)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끝으로 사임하고, 71세가 되어 고향 나주(羅州)로 돌아와 나주시 삼영리(지금의 삼영동) 영산강변 택촌(澤村)마을 향리 선영 아래에 수운정(岫雲亭)을 짓고 주위의 경개하며 유유자적하며 한가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곳에서 영산강변을 바라보며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노래하며 지은 시로 귀래사로 이렇게 회후에 찬 감흥을 흘렸다. 산과 물의 생김생김 환상인 듯 진경인 듯 천가지 만가지로 정성어린 솜씨로다. 낚시는 마쳤으나 도롱이 입었으니 뱃사람 불러오고 어부를 모셔보자. 하찮은 공명인들 노경에 어찌하리 만년지도 닦을 곳은 백구 노는 강호로다. 홍료화 물가에 도롱이 걸쳐 입고 밝은 달빛 아래 낚시하는 흥이로다. 연비어약은 자연스런 득도이니 그대 힘이 아니요, 남의 힘도 아니로다 형형 색색은 곳곳에서 느껴지니 조물주의 조화가 새롭기만 하다. 그곳엔 무성한 소나무와 긴 대나무 밭이 있고 긴 강에는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바깥의 언덕배기엔 여기저기 고목들이 서 있고 그 사이로 안개가 상하 백리에 걸쳐 뻗어 있다. 공은 날마다 그곳에서 노닐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지냈다. 호남문학의 특징으로 단가작가로는 정온(鄭穩), 이진문(李振門), 정충신(鄭忠信), 정훈(鄭勳), 윤선도(尹善道), 나위소(羅緯素), 윤두서(尹斗緖), 김상직(金商稷), 위백규(魏伯珪), 기정진(奇正鎭), 심계택(沈繼澤) 등이 유명하다. 이중에서도 윤선도의 작품은 호남뿐 아니라 조선조 시가사(詩歌史)에 있어서도 단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나위소(羅緯素)도 이에 속한다. 그는 어느날 곡성 능허정(凌虛亭)에서 백부(伯父)인 구암(龜菴)의 나덕명(羅德明) 시에 치운한 시에서는 삼공, 삼정승의 벼슬은 영화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며 이렇게 노래히고 있다. 인조 원년(1623)에 광해군 말기의 과거를 취소하고 재시험을 보였을 때 공은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정원을 거쳐 형조 좌랑으로 승진되었다가 외직인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을 때 였다. 대지가 상량하니 몸도 상량해 강물이 맑으니 마음 또한 맑다. 산색은 아침비에 젖어 있고 물결에 섞여 들리는 소리 다듬이질이라. 속세의 칠귀는 먼지처럼 더럽고 삼공의 영화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짝이 되는 벗이 없다 말하지 말라 물가에 나는 새와 한정을 즐기느니 그의 말년에 인생무상(人事無常)을 느끼게하는 인간애가 돋보인다. 도 멀리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사향시인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강항(姜沆)의 문인으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익혔으며, 당대의 문장가 장유(張維)와 절친하였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는 등 의병장 남간(南磵) 나해봉(羅海鳳 1584 ~ 1638)의 정자 계정(溪亭)에서 지은 시는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성터에 다가서니 둘린 산에 눌리는 듯 집이 높아서 땅위에 둥둥 떠 있는 듯 소나무 세로에 안개 흩어 있고 대나무 울타리에 연기 자욱하다. 고운 녹엽은 계곡따라 쌓여 있고 남은 꽃들이 물에 비춰 흘러간다 때때로 북쪽 하늘 바라보며 정자에 기대지 않은 날이 없다. 한적(閑寂)한 생활을 하면서 노후의 영산강을 배경으로 하는 심경을 시조로 읊어서 강호구가(江湖九歌) 9수가 유명하다. 성은에 대한 1~3절을 감상해 보면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의 은혜에 대해- 1어버이 나ㅎ셔늘 임금이 먹이시니 /나흔 德 먹인 恩을 다 갑곤랴 ㅎ엿더니 /悠然히 七十이 무니 할일 업서 ㅎ노라 임금이 먹이시니 /낳은 덕 기른 은혜 갚고 싶어 하였더니 /어느덧 일흔 고갤 다다르니 할일 없어 하노라. 煙霞痼疾에 빠져 성은聖恩을 생각하는 강호생활(江湖生活)에 대해 2煙霞의 깁피 곤 病藥이 效驗업서 /江湖에 ㅂ리연디 十年 밧기 되여셰라 /그러나 이제디 못 죽음도 긔 聖恩인가 ㅎ노라. 안개 노을에 깊어진 병 약이 효험 없어 /강호에 버려두어 10년밖에 되었어라. /그러나 이제 다 못 죽음도 /그 성은인가 하노라. 또 수운정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나주의 색채를 드러내어 지역 문학의 면모를 담아내고 있다. 4~9절을 감상해 보면 饌物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골에서 손은 맞는 素朴한 생활, 4전나귀 밧비모라 다 점은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그즌 뫼예 饌物이 아조 업다 /아희아 비내여 띄워라 그믈 노하 보리라 젖은 나귀 바삐 몰아 다 저문 날 오신 손님 /보리피 궂은 뫼에 (뫼=메=밥) 반찬꺼리 아주 없다. /아이야 배 내어 띄어라. 그물 노아 보리라. 갈매기와 함께 하는 석양의 돌아오는 돗배의 흥 반범귀흥(半帆歸興)은 영산강에서 400여년 전에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하는 그의 시에서는 5모래 우희 자는 白鷗 閑暇할샤 /江湖風趣를 네 디닐때 내 디닐때 /夕陽의 半帆歸興은 너도 날만 못ㅎ리라 모래위에 자는 기러기 한가로와라. /강호 풍취를 네 지닐 때 내 지닐 때 /석양의 반쯤 돛을 내리고 돌아오는 흥은 너도 나만 못 하리라. 낚싯대를 멘 어옹(漁翁),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일 것이다. 그윽한 흥취(興致)를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6가는 비 빗긴 ㅂ람 낫대 멘 뎌하나바 /네 生涯 언마치라 슈고롬도 슈롤샤 /生涯를 爲호미 아니라 漁興계워 하노라 가는 비 빗긴 바람 낚싯대 멘 저 할아범아 /너의 생애 얼마를 치랴 수고롭게도 수고롭다 /생애를 위함이 아니라 고기잡이 흥겨워 하노라. 여름날 모기불 피워놓은 어느 집에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이 아늑하게 다가 온다. 7피燒酒 무우저리 우옵다 어룬 待接 /늠은 셔닐은 말이 草草타 ㅎ거마는 /두어라 니도 내分이니 分內事인가 ㅎ노라 피로 내린 소주, 무우저리 김치 어려운 어른 대접 /남은 선일을 말하여 초초타 하건마는 /두어라 이도 내분수이니 분내사인가 하노라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남인이며 5년 연하인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시조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이 수록된 《나씨가승》은 1979년 《송암유집》 등이 있다.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는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만사를 올린다. 공이 찾아와 문답한 때가 얼마나 지났다고 이별의 눈물 뒤이어 애도의 눈물 흘리는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벼슬길 여든다섯 해 옳다 그르다 하는 일 없이 마친 한 생애 見公書問幾多時 哀淚還隨別淚垂 不顯不卑躋耋五 無非無是委生涯 항상 눈이 즐거웠던 도원의 송국이요 그저 턱을 끄덕였던 곽제의 아손이라 늙은 이 몸 어찌하여 못 잊으며 슬퍼하나 손잡고 그리운 정 토로할 길 없어져서 陶園松菊常娛眼 郭第兒孫只點頤 何事老腸悲婉孌 終乖握手訴相思 정자는 흔히 당대의 대표적 교양인이요 지식인이라 일컫는 사대부 사족들의 소요서식처(逍遙棲息處)요. 강도지소(講道之所)라 함은 이를 의미한다. 나위소도 일대에서 정신적지주로 많은 역활을 했다. 문화.오인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