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기 사서단
2022.04.06.
모호
초등학교 때 나눠주던, 재활용 종이로 만들어진 가정통신문이 떠오른다. 가정통신문의 뒷장 맨 아래 칸에는 어린이 다독상 순위 코너가 있었는데, 매달 1등에는 ‘김지수’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다독’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다독상은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아이에게 주는 상이라는 것. 그리고 지수는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애인데, 매달 놓치지 않고 다독상 1등을 한다는 것. 처음엔 그 사실에 대해 별다른 감정도 감상도 느끼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한 번도 학교 도서관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밖에서 뛰어놀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였고. 오히려 책으로 탑을 쌓아서 노는 아이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수와 친하지도 않았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내가 소리 지르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였으면, 그 애는 조용히 교실 구석에서 책을 읽는 아이였다.
지수와 했던 첫 대화는 도서관 가는 복도 앞에서였다.
점심시간, 나는 급식을 다 먹고 축구공을 살살 굴리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축구공을 굴리면 선생님께 혼났지만, 도서관 앞 복도는 언제나 사람이 없었고 한산했기에 가능했다. 무릎을 이용해 축구공을 통통 튀기면서 복도를 지나가는데, 복도 반대편 끝에서 무거운 책을 안고 걸어오는 지수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은 책들을 안고 걸어가는 지수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볍게 말을 걸었다.
“무거워 보이네.”
나는 지수가 안고 있는, 이제부터 도서관에 돌려놓으려는 책을 흘끗 봤다. 하지만 지수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묵묵히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가볍게 말을 걸었기에, 가볍게 무시한 건가. 당황한 나는 축구공을 손에 들고 그런 지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지수와 나는 도서관 문 앞에서 도착했다. 그런데 지수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망설였다. 아마 두 손 가득 책을 안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축구공을 들지 않은 한 손을 뻗어 도서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수가 나를 향해 “고마워.”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먼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도서관의 문을 닫았다.
“지수 왔니? 오늘은 친구를 데려왔네?”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살짝 놀랐다.
“사서 선생님이셔.”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도서관 안에도 선생님이 계실 줄은 몰랐다. 책만 있는 창고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수는 그 책을 관리하는 사람이 사서 선생님이라고 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함과 머뭇거림을 안고 인사를 했다. 내 인사에 선생님은 따스하게 웃으시곤, 지수가 안고 있는 책을 보며 “무거워 보이네.” 하고 말했다.
“미래에 전자서적이 보급되면 사람은 그 무거움과 무관해지는 걸까. 아니, 그렇게 되면 도서관의 필요성도 의심스러워지려나.”
선생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자, 지수가 말했다.
“글쎄요... 어떨까요? 전자서적이 디지털 사진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는 한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책은 이 무게도 포함해서 책이니까요... 책이란 평면이 아니라 입체죠.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었다고 해서 축구공 수집가가 ‘사진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표지가 있기에 책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진지한 눈빛으로 말은 마친 지수는 왜인지 고개를 푹 숙이며 “반납이요...”하고 안고 있던 책들을 선생님 앞에 내려놓았다.
지수가 길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하지만 지수가 길게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지수가 말한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신기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수의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나저나 반납이 뭐지. 내가 멍하니 책상 위에 쌓인 책을 보고 있을 때, 지수는 그것들을 나눠 들고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꽂기 시작했다. 나는 축구공을 들고 서서 지수가 책장 사이를 능숙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수는 꾸러기 사서단이야.”
그런 나에게 사서 선생님이 말했다.
“꾸러기 사서단...?”
그리고 그 단어는 천둥소리처럼 내 안에 크게 울렸다.
꾸러기 사서단. 그것은 마치 파워레인저 같은. 세일러문 같은. 디지몬 어드벤쳐 같은! 뭔가 멋지고 대단한 울림이었다. 비밀 탐험대와도 같이. 검은 조직같이. 남몰래 악당과 싸움하며 같은 팀원과 동료애를 다지고, ‘우리는 꾸러기 사서단,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같은 구호를 외칠 것 같은! 이럴 수가, 지수가 그런 멋진 걸 하고 있었다니. 다시 보니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날쌘 닌자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현실 속에 그런 멋진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구나, 그것도 우리 학교에! 엄청난 것을 깨닫고 전율하고만 나는 그만 들고 있던 축구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 선생님...”
“응?”
그리고 초등학교 인생 처음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저도, 저도 꾸러기 사서단에 들어가고 싶슴다!”
꾸러기 사서단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는 꾸러기 사서단이 되었다.
‘단’이라고 하면 거창할 것 같지만, 꾸러기 사서단의 멤버는 나와 지수뿐이었다. 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그냥 지수 혼자 꾸러기 사서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우리 학교 아이들은 도서관 속 꾸러기 사서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나 역시 몰랐으니 할 말은 없지만, 꾸러기 사서단의 활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의 첫 활동은 도서관 책에 붙어있는 라벨의 분류법을 배운 것이다. 지수가 알려줬다. 책마다 유형이 있으며 청구기호에 따라 꽂아 놓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야 책을 찾기도, 다시 돌려놓기도 쉽다는 것. 나는 도서관 책장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지수의 뒤를 따라다니며 분류법을 익히고, 대출과 반납(하는 아이들은 적었지만)을 배우고, 책 정리를 했다.
꾸러기 사서단 초기에 이런 과정들이 재밌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툴툴거리는 말투로 지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많은 책을 누가 다 읽어? 어차피 다 읽지도 않을 건데, 책을 왜 이렇게 많이 모아?”
그러자 지수가 말했다.
“나는 다 읽었어.”
“어?”
“여기 있는 책은 이미 예전에 다 읽었어.”
다 읽었다니. 학교 도서관의 책장의 수는 적어도 오십 개, 아니 백 개는 넘어 보였다. 그런데 그걸 다 읽었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어째서.
“다 읽었는데, 왜 그걸 또 읽어?”
“읽었다고 해서. 완전히 알게 된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다시 읽는 거야, 하고 지수는 말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지수의 책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거 같았다. 특정한 책을 좋아한다기보다, ‘책’이라는 사물 자체를 좋아하는 듯한. 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었고, 지수의 책에 대한 진심을 알게 된 것은 2년 뒤, 우리가 5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가정통신문의 다독상 코너에는 이제 지수와 내 이름이 나란히 오르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을까. 점심시간에 컴퓨터실을 개방하게 되면서 학교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줄어만 갔고, 도서관에는 언제나 나와 지수 그리고 사서 선생님, 혹은 간간이 찾아오는 소수의 아이들과 학교 관계자들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점심시간만 되면 꾸준히 도서관으로 향했다. 꾸러기 사서단 활동도 익숙해져서, 눈을 감고도 어느 책이 어느 책장에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도서관에 있는 책도 꽤 많이 읽었다. 지수만큼 모든 책을 독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보다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수와도 꽤 친해졌다. 물론 우리는 도서관에 있을 때만 대화를 나눴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책을 읽는 지수의 옆에 있는 게 좋았다.
꾸러기 사서단으로서 지수와 했던 마지막 대화는 도서관 가는 복도 앞에서였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고, 그리고 평소처럼 도서관의 문을 열었어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굳게 닫혀있는 문. 지수가 오는 걸 기다려봤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고, 이윽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사서 쌤이 쉬는 날인가~’ 같은 생각을 하고선 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도서관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지수(다른 반이었다)도 등교는 하는 것 같았지만, 도서관이 열리지 않으니 우리의 대화 역시 단절된 상태로.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방학을 보내고, 5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점심시간, 처음으로 지수가 우리 반에 찾아왔다.
지수는 같이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도서관의 문이 열린 건가? 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갈 생각에 들떠서 대수롭지 않게 지수를 따라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서관 문 앞 복도에 도착하자, 나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곳에는 문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묵직한 도서관의 나무 문은 없고, 새로 만든 듯 깔끔하고 세련된 흰색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컴퓨터실2’라고 쓰여있는 푯말도 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왜 도서관이 열리지 않았던 것인지 깨달았다.
“책을 위협하는 건 전자서적이 아니라 컴퓨터였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놓치지 않고 지수가 말했다.
“별관으로 이사하면서 규모가 작아진 거지, 도서관이 없어진 건 아니야.”
“아쉽진 않아?”
책을, 그리고 도서관을 좋아했던 지수였기에. 추억의 공간이 사라진 것에 대해 낙심하진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지수는 담담히 말했다.
“난 도서관에서 모든 걸 배웠어. 부모님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을, 여기서 알았어.”
여기는 내 전부고, 세상이야.
“앞으로 새로운 것들은 계속 생기겠지. 그리고 컴퓨터는 그것들을 금방 흡수해서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거야. 그 모든 정보가 정확한 정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에 금방 익숙해지기도 하겠지. 그래도 책은 사라지지 않아. 적어도 나는, 책이, 도서관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네. 나도 꽤 좋았는데. 책 정리하고, 오래된 책과 새 책의 냄새도 좋았고. 그리고 어딘가 책장 뒤에 숨겨져 있을 비밀의 방 같은 거라던가. 분명 우리 학교에도 있었을 거야. 숨겨진 비밀의 장소!”
하지만 그러면 꾸러기 사서단도 없어지게 되는 걸까. 도서관의 규모가 작아졌으면, 우리의 활동도 적어지고 필요 없어질 테니까. 그건 좀 아쉽다. 그렇게 되면 지수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테니까.
“그건, 아니야... 도서관이 없어졌다고 해서, 꾸러기 사서단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와 친구가 된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지수가 말하자, 어째서인지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하. 나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지수는 그런 내 옆에서 같이 웃어주었다.
언제나 도서관 안에서만 대화하던 우리였지만, 꾸러기 사서단이 아니어도. 도서관이 없어지더라도, 책이 사라지더라도. 이렇게 지수와 함께 이야기하며 걷고 싶다고 바라면서. 그렇게 우리는 컴퓨터실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튼 도서관을 향해 함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