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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화)부터5/28(화) 영월단종대왕 유배길 3개구간으로 실시
영월단종대왕 유배길
단종대왕유배길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솔치재에서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청령포에 이르는
단종의 유배 행로를 따라가는 관광 코스이다.
한양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영월군에 이르는 단종의 유배 행로 중 강원도 영월군 구간의 길을
2012년 강원도 영월군이 문화 관광 자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단종은 1457년 6월 한양을 떠나 강원도 영월에 도착했으며, 그 해 10월 청령포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단종대왕유배길은 단종의 슬픈 역사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관직을 버리고 평생 재야에 있었던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길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면서 영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지니고 있는 곳이므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단종대왕유배길은 총 43km의 길이로, 다음과 같이 3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통곡의 길]은 솔치고개에서 주천삼층석탑까지 10.5km 구간으로,
이 곳에서는 단종이 영월에 처음 들어온 솔치고개, 물을 마셨다는 어음정, 단종이 쉬었다는
느티나무 쉼터 등을 볼 수 있다. 청령포 모형을 비롯해 궁궐형태의 화단, 사육신을 의미하는 돌탑 등의
조형물과 함께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충절의 길]은 주천삼층석탑에서 배일치마을까지 17km 구간으로
이 구간에서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는 군등치, 말에 달린 방울이 떨어져도 모르고 넘어갔다는
방울재 등을 볼 수 있다. [인륜의 길]은 배일치마을에서 청령포까지 15.5km 구간으로 이 구간에서는
단종이 해를 향해 절을 했다는 배일치재, 단종이 왕비를 생각하며 이름을 붙였다는 옥녀봉,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등을 볼 수 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함께 걸어보면서 당시 단종의
심경을 헤아리고 끝까지 단종에게 신의를 지켰던 신하들의 충절을 기리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A 단종대왕유배길 1코스(통곡의길)
솔치재입구 에서 주천3층석탑
총거리 10.5km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B 단종대왕유배길 2코스(충절의길)
주천3층석탑 에서 배일치마을
총거리 18.1km 소요시간 약 5시간 30분
C 단종대왕유배길 3코스 인륜의길
배일치마을 에서 청령포
총거리 15.5km 소요시간 약 4시간
슬픈 역사가 강물 따라 흐르는 땅 ‘영월 단종 유배지’
강원도 영월은 예부터 명산준령과 산간계곡이 조화를 이룬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산간 오지 마을로 꼽혀왔다. 그런데 깊은 산골에서 한과 슬픔이 묻힌 역사의 현장으로 바뀐 것은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의 유배지가 되면서부터다.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당한 뒤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장릉에 묻히기까지 영월 곳곳에는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종의 자취를 따라 가면 슬픈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멀고 먼 영월 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1456년 음력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해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순원 주막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단종의 유배 행렬은 험준한 군등치를 넘고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배일치에 힘겹게 올랐다. 배일치 고갯마루에 이른 단종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배일치를 넘고 물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청령포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청령포는 3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이면서도 외딴 섬이나 다름없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는 천혜의 유배지인 이곳에서 단종은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3분 남짓 걸린다. 맑은 강물과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가 유배지가 아닌 유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까지나 청령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곳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단종에게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을 터. 배에서 내려 소나무 숲에 발을 디디면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그 옆에 단종어소가 있다. 처음 단종이 유배되어 왔을 때에는 따르는 궁녀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일이 지나자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에서 4명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따르고 6명은 영월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당시 영의정 정인지가 궁녀들이 따라가 노산군을 시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세조에게 누차 고했으나 세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한다. 단종어소는 육간대청처럼 큰 기와집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이처럼 좋은 집에서 기거했다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홍수로 떠내려간 건물을 1996년에 새로 지으면서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올린 느낌이다. 단종어소 방 안에는 단종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인형과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단종어소 앞에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단묘유지비가 있다. 단종이 기거했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다. 본래 있던 건물이 소실되자 영조 39년(1763) 원주관아에서 어소가 있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단종어소에는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굽은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묻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려 '엄홍도소나무'라고 불린다. 단종어소를 나오면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 웅장하게 서 있다. 키가 30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 아랫부분에서 두 줄기가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모습이 품위 있고 자태가 아름답다. 관음송은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본 증인이다. 그래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볼 관(觀)', '소리 음(音)' 자를 써서 관음송이라 이름 붙였다. 뒷산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종이 정순왕후를 그리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 층암절벽 위에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자주 오르던 노산대도 볼 수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쓰인 청령포금표비가 있다.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은 영월읍 중심부에 자리했다. 담장 앞으로 도로가 나고 상가 건물이 바짝 들어서서 자칫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한적하다 못해 쓸쓸함이 가득한 것이 단종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관풍헌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가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권근이 세운 누각으로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다. 그러다 단종이 관풍헌으로 옮겨오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라는 시를 짓고 나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나니 /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홍도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누구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용기를 내 부임했다. 어느 날 박충원의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 산 속에 묻힌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어 봉분을 정성스레 조성했다. 그후로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고 영월 땅도 평안했다고 한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의 제사와 무덤 조영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서 선조 때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숙종 24년(1698)에는 단종을 복위시켜 그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죽어서도 한을 풀지 못했던 단종이 숙종에 의해 241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장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도 예외 없이 소나무들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다. 신기한 것은 소나무가 예를 갖춰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는 모양이 많다는 사실. 우연이겠지만 비통한 죽음을 맞은 단종의 넋을 기리는 듯하다.
강원도 영월은 예부터 명산준령과 산간계곡이 조화를 이룬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산간 오지 마을로 꼽혀왔다. 그런데 깊은 산골에서 한과 슬픔이 묻힌 역사의 현장으로 바뀐 것은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의 유배지가 되면서부터다.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당한 뒤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장릉에 묻히기까지 영월 곳곳에는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종의 자취를 따라 가면 슬픈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청령포 안의 단종어소
외딴 섬 같은 천혜의 유배지, 청령포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멀고 먼 영월 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1456년 음력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해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순원 주막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단종의 유배 행렬은 험준한 군등치를 넘고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배일치에 힘겹게 올랐다. 배일치 고갯마루에 이른 단종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배일치를 넘고 물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청령포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청령포는 3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이면서도 외딴 섬이나 다름없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는 천혜의 유배지인 이곳에서 단종은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서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 전경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3분 남짓 걸린다. 맑은 강물과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가 유배지가 아닌 유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까지나 청령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곳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단종에게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을 터. 배에서 내려 소나무 숲에 발을 디디면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그 옆에 단종어소가 있다.
처음 단종이 유배되어 왔을 때에는 따르는 궁녀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일이 지나자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에서 4명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따르고 6명은 영월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당시 영의정 정인지가 궁녀들이 따라가 노산군을 시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세조에게 누차 고했으나 세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한다.
단종어소는 육간대청처럼 큰 기와집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이처럼 좋은 집에서 기거했다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홍수로 떠내려간 건물을 1996년에 새로 지으면서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올린 느낌이다. 단종어소 방 안에는 단종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인형과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단종어소 안에 재현해놓은 단종의 생활 모습
단종어소 앞에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단묘유지비가 있다. 단종이 기거했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다. 본래 있던 건물이 소실되자 영조 39년(1763) 원주관아에서 어소가 있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단종어소에는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굽은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묻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려 '엄홍도소나무'라고 불린다.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는 엄홍도소나무
단종어소를 나오면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 웅장하게 서 있다. 키가 30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 아랫부분에서 두 줄기가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모습이 품위 있고 자태가 아름답다. 관음송은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본 증인이다. 그래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볼 관(觀)', '소리 음(音)' 자를 써서 관음송이라 이름 붙였다.
눈이 내려앉은 단종어소
뒷산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종이 정순왕후를 그리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 층암절벽 위에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자주 오르던 노산대도 볼 수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쓰인 청령포금표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관음송
단종이 사약 받고 승하한 관풍헌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단종의 마지막 유배지가 된 관풍헌
관풍헌은 영월읍 중심부에 자리했다. 담장 앞으로 도로가 나고 상가 건물이 바짝 들어서서 자칫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한적하다 못해 쓸쓸함이 가득한 것이 단종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단종이 사약을 받은 관풍헌 마당
관풍헌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가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권근이 세운 누각으로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다. 그러다 단종이 관풍헌으로 옮겨오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라는 시를 짓고 나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나니 /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단종이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오르던 자규루
슬픈 역사가 강물 따라 흐르는 장릉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홍도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은 단종의 무덤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누구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용기를 내 부임했다. 어느 날 박충원의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 산 속에 묻힌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어 봉분을 정성스레 조성했다. 그후로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고 영월 땅도 평안했다고 한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의 제사와 무덤 조영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서 선조 때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숙종 24년(1698)에는 단종을 복위시켜 그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죽어서도 한을 풀지 못했던 단종이 숙종에 의해 241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영천에서 바라본 장릉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장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도 예외 없이 소나무들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다. 신기한 것은 소나무가 예를 갖춰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는 모양이 많다는 사실. 우연이겠지만 비통한 죽음을 맞은 단종의 넋을 기리는 듯하다.
장릉에 조성된 문인석과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