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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
'호세 게레로(Jose Guerrero)'는 그라나다 출신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다.
하지만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많이 탄생한 스페인에서 호세 게레로라는 이름은 아주아주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질 뿐이다.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그를 처음 만나게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라나다에서 그는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사랑받는 인물이다.
추상 표현주의라.........
미술사에 나름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세잔. 고호. 마네 까지는 나름 공부도 해보았고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지만........... 피카소부터는 너무도 어렵다는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현대 미술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별반 찾아다니지도 않는 편이고 더 공부하려 들지도 않고 있다. 나에게 현대미술은 다분히 기피 대상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호세 게레로를 만났다.
'추상 표현주의'라는 거대한 장벽이 내 앞을 턱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의 전시관이 '무료 입장'이라는 기가막힌 매리트로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곳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성당의 외벽을 따라 골목길 투어를 계속하다 보면 왕실 예배당 입구 쯤에서 다소 신선해 보이는 건물과 전시 포스터를 볼 수가 있다.
<Centro_José_Guerrero>.
그라나다 출신의 화가 '호세 게레로(1914~1991)'의 유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약 40여편의 중요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그라나다 시당국이 직접 운영하는 공개 갤러리이다.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와 보급은 물론 게레로의 삶과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를 위한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게레로 전용 컬렉션 외에도 여러개의 다른 공간들을 통해 현대 미술의 창작을 지원하기도 하고 다양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이런 내막을 알고 들여다보게되면 될수록 참으로 귀하고 부러운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라나다 사람들의 예술적 문화적 수준을 들여다보는것만 같다.
오랫동안 신문사 사무실과 인쇄 창고로 쓰여졌던 건물을 그라나다 시당국이 사들였고, 여기에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공동 작업으로 지금의 건물을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했다.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간이 탄생했다. 너무너무 멋지다.
터키 부르사에 가면 울루 자미(이슬람 사원)의 멋진 지붕 풍경을 한폭의 파노라마 처럼 건너다 볼 수 있는 아주 멋진 (카페 스르티에)가 있다. 마치 그 공간에 들어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울루 자미의 지붕 대신 왕실 예배당의 벽면과 저만치로 대성당의 첨탑들이 금방이라도 거대한 창문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 정말 정말 장관이다.
그냥 이곳에다 테이블과 커피머신만 들여 놓으면 스페인에서 제일 멋진 카페가 되지 않을까?
통유리 너머로 내다보이는 풍경 자체가 거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창문가에 덩그렇게 놓여진 길다란 나무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밖을 내다보노라면......... 더 이상 아무짓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마냥........
어느날 내가 꿈속에서라도 돈벼락을 맞게 된다면........ 나는 이 건물을 꼭 사고 싶다.(빌려주지는 않을테니)
이 의자 옆에 단촐하게 내 전용 책상 하나 놓고....... 출입구 옆면에 책장을 만들어 책이나 수북히 쌓아 놓고........ 그 옆에 커피 머신 하나면 충분하겠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이유. 안될까유? 바로 이 공간....... 이 갤러리만은 꼭 가지고 싶네요. 안되나요?'
다른 책자에서 이 갤러리를 대성당 지붕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보니......... 캭!!!!!! 미티미티..........(그래서 퍼 옮겨본다)
호세 게레로는 하나도 안부럽다.
그저...... 그 공간이 탐난다. 여간해서 남의것 탐하지 않는 나 인데......... 정말 그 공간만은 탐이나도 무지무지 난다.(깨몽)
그라나다에서 출생한 호세 게레로는 일찍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마드리드로 가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장학생으로선발되어 파리에 유학하였으며, 당시에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파블로 피카소와 헨리 마티스에게서 깊은 감명과 가르침을 받았다.
스페인으로 돌아 온 게레로는 주로 시골 풍경들을 그렸다.
새로운 창작욕에 불타오른 게레로는 베른. 브리셀. 런던. 파리. 로마 등 유럽을 여행하면서 몇년을 보냈다. 이 여행의 기간동안에 그는 새로운 추상미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현대 미술과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변모해 갔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1965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 온 그는 그후 바르셀로나와 뉴욕을 오가면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계속하다가 1991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추상 표현주의)는 1940년대에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식 회화로 흔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예술운동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하여 뉴욕은 새로운 서양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음 할 수 있게되었다.
'추상 표현주의자들은 정체 된 전체에 대해 유기체를 평가하고, 존재가 되고, 완벽에 대한 표현, 마무리에 대한 활력, 인식에 대한 변동, 정서에 대한 느낌,
투명에 의해 가려진 이미지...........'
아이고 머리아포.........
현대 미술은 역시 어렵다.
어떤 사람은 알함브라 궁전을 '죽기 전에 꼭 보아야할 명소 중의 명소'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알함브라를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거의 전부라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자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 생각한다면 많이 틀리는 말이기도 하다.
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겠지만..... 굳이 내 생각을 짧게 피력해 본다면.........
'알함브라는 어디까지나 그저 알함브라다. 결코 그라나다가 될 수 없는......... 알함브라는 그라나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빛바랜 낡은 사진이나 고문서나 고지도를 대하게되면 내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타임머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것들은 아주 먼 과거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호기심에 세세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아주 즐겁고 커다란 감동이 수반되는 아주 멋진 여행이 될테니까 말이다.
그라나다 전경(맨 윗 그림)이 담긴 그림 한 장을 손에 들었을때......... 그제서야 비로소 그라나다 여행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감동적이었다.
'그라나다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래 이게 진정한 그라나다야.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헤네랄리페 행궁의 뒷산에서 그라나다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림 지도는 만들어 졌다.
헤네랄리페 행궁은 분명하게 알함브라 궁전에서 별도로 분리되어 세워져 있다. 현재는 성벽이 무너져 사라지고 하나의 몸체처럼 붙어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알함브라 궁전 안쪽에 '카를로스 5세 궁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사벨 여왕의 레콩키스타 운동이 성공하여 보아브딜 아랍왕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되찾았을 시기의 풍경으로 보여진다. 도시의 중심을 내성이 감싸고 알바이신 지역 또한 외성으로 둘러쌓여 보호되고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다로 강은 중심부에서 분명하게 성벽 사이를 흘러들어 가고 있다.
다만, 왼편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으로 당시를 추측한다면...... 시내 곳곳에 있는 커다란 교회들은 당시에는 모두 이슬람 사원이었어야만 한다는 조금은 무리가 따르는 재해석이 필요해 진다. 암튼 그라나다의 옛 모습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아름다웠으리라..........
세번 째 사진을 살피면 그라나다 도심을 유유히 흐르던 다로 강이 도시 재개발 공사의 결과로 사라졌을음 알 수 있다. 누에바 광장에서 시작하여 그란비아 거리를 지나 이사벨 광장을 거쳐 시청사를 지나고 우체국 건물 앞에서 급하게 휘감아 돌아서는 캄필로 광장을 지나 로만 브릿지(로마교)가 있는 지점에서 복개천이 끝나면서 제닐 강에 합류된다. 결국 그라나다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중심대로는 도심을 흐르던 다로 강을 복개하여 중심도로를 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의 가슴을 가장 심하게 쿵쾅거리게 만든것은 바로 두 번째 타일 그림이었다.
앞쪽 여행기에서 나는 분명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과 '제로니모 수도원'의 건설 배경에 대해서 나름 충분하게 설명한 바가 있다.
바로 그 내용이 이 타일 벽화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58.59.60.61. 이라는 숫자는 무역시장(알카이세이라)의 점포를 구분하는 표시이다. 동방에서 온 귀한 비단과 도자기와 향신료와 보석들이 거래되던 시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되찾은 후에 도심 한복판에 있던 '그라나다 알자 마 모스크( Mosque)'를 완전히 헐어내고 자신과 왕족들을 위한 무덤을 건설하게 명령했다. 그렇게 하여 그림 속의 빨간 건물인 '왕실 예배당(Capilla Real)'이 만들어 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인 카를로스 5세에 의해서 지금의 '대성당(Catedral)'이 왕실 예배당이 들어서고 남은 너른 공터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장장 180년 이상이나 걸렸으며, 끝내는 현재까지도 종탑의 상층부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이처럼 처음 건설 당시에는 왕실 예배당과 대성당이 완연한 별도의 건물이었다. 이를 대성당 증축 과정에서 흡수하여 다섯개의 채플중 하나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벽화 속에는 분명하게 아직 대성당의 상당 부분이 훤한 공터로 기초석만 박혀있다.
그 중에서도 벽화타일 속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초록색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었다.
도심 중심가의 모든 건물 지붕이 붉거나 짙은 갈색인데 반하여 유독 한 지붕만 초록색인데다가 'M'이라는 표시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갑자기 궁금해 졌다.
타일 벽화를 바라보면서 그림속의 위치를 비보 람블라 광장을 중심으로 체크를 했다. 알카이세이라를 기준으로 한다면 명확하게 좁은 골목길 사이로 어디까지가 시장인지 구분이 다소 애매모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꾸역꾸역 기어코 그 파란 지붕으로 표시된 건물을 찾아갔는데......... 아뿔싸.........
개.뿔.
찾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담?
좀 전에 다녀간 '왕실 예배당'의 출구 앞이 바로 그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더군,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가............. 등.하.불.명.(燈下不明)
'Palacio de La Madraza'
코란에 적혀있는 바 처럼 이슬람인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신은 위대하시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해 본다.
'이슬람 문화와 예술은 진실로 위대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리고 이 여행에서만...... 여기가 그라나다 이기에 꼭 한마디만 더 해본다면.........
'알함브라 궁전을 보았다고 그라나다를 모두 본 것처럼 말하지 마라. 알함브라 궁전은 그저 크고 넓고 아름다울 뿐이다. 도심 속에 가려진 마드라자를 보라. 그곳엔 작지만 거록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 피안재.
레콩키스타(카톨릭 국토 회복운동)에 의하여 세비야에서 쫓겨나온 이슬람은 최후의 거점으로 그라나다를 택했다.
그라나다에 도착한 이슬람 나스르 왕조의 '유세프 1세(Yusuf 1)'는 우선 산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알카사바를 보완하고 그 안쪽에 궁전(알함브라)를 짓도록 명령했다. 스페인의 카톨릭에게 추격을 당하는 난세임에도 이 유세프 왕은 오로지 알함브라의 건설과 치장에 열과 성의를 다 했다. 그에게는 유능한 신하들과 용맹한 장군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유세프는 냉철하고 감각이 있는 통치자이기 이전에 다소 낭만적이며 소심한 학자풍의 또다른 이면을 가진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던 듯 싶다.
오로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 건설에만 매진하는 왕과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밖으로 스페인군과 전쟁을 치뤄야만 하는 신하들........ 그런데.......
1349년 유세프 왕은 신하들을 향해 또 한가지 명령을 내린다.
'알자 마 모스크(현 대성당) 옆에 마드라자(Madraza)를 세워라.'
신하들은 내외 정세를 들어 마드라자 건설의 부당성을 건의했다. 하지만 유세프 왕의 결심은 이 보다 확고했다.
어떤 이는 이곳을 '마드라사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랍어의 '마드라사'는 영어의 '학교(School)'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혹간 '과학의 집'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스페인 최초의 대학이 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놀라운 이슬람의 과학적 발견과 지식이 유럽사람들에게 전파되었기에 과학의 집으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이슬람 왕조의 미래를 생각해 교육에 투자하겠다는 유세프 왕의 이념만은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심각한 주변 정세와 국가재정의 고갈이었다. 스페인이 사방에서 점차 목줄을 조여오고 있는 상황에, 왕은 오로지 왕궁 건설에만 매달려 국가재정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엔 또다시 원대한 계획아래 그라나다의 최고 중심가에 보란듯이 번듯한 대학을 건설하라는 것이다.
유세프가 생각한 대학은 그저 건물만 멀쩡한 그런 대학이 아니었다. 가능성 있는 훌륭한 인재들을 모아서 주택과 생활비를 제공하고 그들이 학업과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물자를 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그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는 미래지향적 최첨단 대학을 추진한 것이다.
어쩌겠는가?
숭고한 정신으로나 명분으로나 아주아주 그럴싸한 왕의 지엄한 명령이니 따를 수 밖에.......
마드라자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왕의 구제불능성 욕망이 또 이곳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다. 왕은 세상에 내보일 자신의 작품인 대학이 알함브라 궁전 못지않게 화려하고 장엄하고 아름답기를 바랬다. 왕이 직접 나서서 마드라자의 건설을 지휘 감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마드라자는 결코 알함브라 궁전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빼어난 점도 많이 있다.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완성은 까마득한 먼 훗날의 미래이고....... 마드라자의 완공을 왕은 몹시 서두르는데....... 국가 재정은 점점 바닦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결국, 유세프 왕의 위대한 대변인이자 왕을 대신해 그동안 국정을 다스려 온 크리스티안 리완 총리 대신과 '이슬람 신앙의 수호자'라고 불리던 명장 오즈민이 그라나다를 떠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은 알함브라 궁전의 축성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그의 열망대로 마드라자도 준공 되었다.
그리고.........
마드라자가 준공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유세프 왕은 마드라자 앞에 있는 알자 마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리던 중에 암살되었다.(1354년)
유세프 왕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숭고한 유지만은 고스란히 받아들여졌고, 이후 마드라자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슬람 세계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이 그라나다로 몰려 들어서 젊은 인재들에게 종교. 코란 연구. 과학. 법학. 의학. 천문학. 기하학. 논리학. 산술과 역학. 그리고 수피즘을 가르쳤다. 이는 그리이스 시대의 아카데미를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활을 다하기에 이른것이다.
비록 스페인 카톨릭에 쫓겨 안달루시아의 한 도시 국가로 전락한 그라나다 나스리 왕국이었지만,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그라나다는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고 그 한복판에 마드라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드라자 대학의 명성과 업적은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사벨 여왕은 리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아랍인 거점인 그라나다를 최후의 목표로 삼고 총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그라나다 침공에 앞서서 여왕은 전진기지를 세웠으니 그것이 그라나다 인근의 위성도시 '산타페'이다. 우리나라 모 기업의 유명한 차종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철통 같은 포위망을 구축한 채 여왕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서서히 숨통을 조여가기만 했다.
패배의 결과는 아주 참혹할 것이며 알함브라와 마드라자와 수많은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의 모든 문화와 유적이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고 심리전을 펼쳤다.
결과로 문화와 유적의 파괴를 두려워한 보아브딜 아랍왕은 '문화와 유적과 남겨지는 백성들의 안전'을 댓가로 항복을 하게된다. 그러나........
알함브라에 입성한 이사벨 여왕은 협정문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이슬람 인들을 탄압하고 처형해 버린다.
알함브라 궁전을 제외한 모든 이슬람 건축물과 유적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사방에서 약탈과 방화와 살육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곧 이어서 이런 탄압은 유대인과 다른 이교도들에게도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바이신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알바이신 지구를 에워싼 외성과 가파른 언덕과 매우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이용하여 처절하고 참혹한 저항을 벌인 것이다. 스페인군의 진압작전에 관용이나 자비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알바이신 지역을 하나하나 불태우고 허물어트리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최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성벽을 넘어 그라나다 도심의 중심부로 도망쳤다. 그들이 택한 마지막 은신처를 바로 마드라자 대학이었다.
저항과 토벌이 이어졌다. 마지막에 남겨진 것은 토막나고 잘려져나간 아랍인들의 산더미 같은 시체들 뿐이었다.
이 전투를 목격한 스페인 카톨릭계의 중심인물인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대노했다.
그는 군사들을 시켜 마드라자 대학 도서관의 모든 서책을 비브 람블라 광장에서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낮과 밤을 새워가면서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그렇게..... 그렇게 인류 문명의 위대한 자산이 한 종교인의 광기서린 복수심으로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추기경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마드라자 대학에 저주를 내리고 철저하게 파괴하도록 군대에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자 광장에서 불타고 있는 도서관의 서책들을 바라보던 학자와 종교인과 군대의 지휘관들이 이런 극악스런 횡포를 말렸다. 그들은 마드라자 대학 건물의 활용성을 주장해 파괴를 저지한 것이다.
곧이어 건물은 페르난도 2세 아라곤 왕에게 헌정되었고, 왕의 명령에 의해서 마드라자 대학건물은 철저하게 바로코 양식에 따른 유럽식 건축물로 개조되기에 이르렀다. 팔각형 교육기관 건물에 카톨릭 예배당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주 다행스러운 것은.......... 건물을 개축하는 공사 당사자들도 이 위대한 이슬람의 아름다운 문화를 차마 참혹하게 파괴할 수가 없었던 점이었다. 그들은 여러개의 작은 홀들을 나무 판자로 막아 버리거나 벽돌을 쌓아 막은 후에, 그 벽벽위에 바로코 양식의 새로운 치장을 했다. 상당 수의 공간을 고스란히 은페시켜 버린 것이다. 은페시킬 수 없는 공간은 두껍게 회칠을 해서 덮었다.
개축이 끝난 후에는 그라나다 시청사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후대에 들어서는 참으로 멍청한 관리들의 실수로 이 위대한 건물이 부유한 개인의 소유로 넘어가서 마구 훼손되고 구조적 변경이 되는 참화를 격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치를 크게 인식한 지각있는 학자와 관리들에 의해서 20세기 중반에서야 스페인 정부에서 국가 재산으로 다시 구매하기에 이르렀고, 원형의 복원 사업을 계속하면서 '슬픔의 성모 미술 아카데미'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그라나다 대학의 관리 주도하에 복원과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참신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개방되어 각종 전시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참신하고 활기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의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그라나다 마드라자'가 일반에게 오픈된 것도 2011년 말에부터였으니, 아직도 가보지 못했거나 예전 방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행자들도 많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마드라자를 만날 수 있었던것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Palacio de la Madraza'는 무데히르 양식(아랍양식)에서 정통 유럽식 바로크 양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되는 기념비적 인 건축물로 놀랍도록 다양한 스타일을 혼합했다.
'이사벨 카톨리카 광장(PI. Isabel Catolica)'은 다소 엉뚱맞다거나 쌩뚱맞은 느낌이 든다.
현대화된 그라나다 신도심의 가장 중심부에 보란듯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 자체만으로는 기품도 있고 어느정도 위용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라나다에 이사벨 여왕이야 당연히 있어야 하겠으나 뜬금없이 콜럼버스라니..........
스페인 역사에서 1492년은 대단히 중요하고 뜻이 깊은 해였다.
카톨릭과 이사벨 여왕에 의해 레콩키스타가 성공을 이루게 되어 옛 스페인 영토가 781년 만에 새롭게 하나로 통일된 대단히 의미있는 한 해였다.
그런가 하면 같은 해에 이사벨 여왕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대선단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넌 해였다. 그리고 그 해 안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다시 세비야로 귀환하였다.
그렇게 보자면 그라나다에 이사벨 여왕 동상이 있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콜럼버스와 함께라니..........?
콜럼버스기 이사벨 여왕을 두 번 만났던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코르도바에서 대서양 항해를 설명하면서 허락을 받을 때와, 신대륙에서 돌아와 탐험의 성공을 보고드릴 때인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이다. 동상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바르셀로나에나 서 있어야 할 동상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모를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그 후로도 콜럼버스는 신대륙 탐험을 두 번을 더 떠나게 되니, 그 중 한 번쯤 귀국하였을 때 이사벨 여왕이 알함브라에 머문적이 있었는지.......
내가 기억하는 그런 스페인 역사로 볼 때, 이 동상은 바르셀로나에 있어야 하는것이 아니었을까?
동상의 기단부에 있는 부조와 기록을 살펴보아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과 이사벨 여왕의 그라나다 탈환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 그라나다에 함께 붙여놓다니......... 영 어색하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매일 지나치는 이사벨 광장이었지만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오후에 갑자기 분수가 폭폭폭 튀어 오르듯이 솟아나던 풍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라나다 시내 중심부를 흐르던 다로강을 복개하여 만든 중심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간다.
현지인들의 생활모습을 보고, 우거진 도심의 숲과 공원에 놀라보기도 한다.
넉넉하고 푸근한 캄필로 광장에서 쉬었다가 다로 강이 제닐 강과 합류하는 로만 브릿지까지 가 보게 되었다. 이 부근의 예 모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지금의 그라나다가 얼마나 놀랍게 변신하였는지가 실감이 난다.
중세 이후의 건물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는것도 좋았지만, 도시를 재개발 하면서도 공터만 있으면 공원을 만들고 도시 전체가 푸른 숲속에 놓이게끔 만든 그들의 가치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단히 부러운 측면이 많이 있다.
--- 콜럼버스의 대서양 탐험 계획 설명을 듣고있는 이사벨 여왕의 표정이 매우 곤혹스러워 보인다.(코르도바)
---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온 콜럼버스가 신대륙 탐험 성공을 여왕에게 보고하고 있다.(바르셀로나)
알함브라 궁전이 올려다보이는 평지에 우뚝 솟아있는 '엘비라의 문(Gate of Elvira)'은 그라나다 도심을 에워싼 성채의 중심이자 중앙정문이었다.
그라나다를 처음 정령한 무어인들에 의해서 언덕위의 알카사바와 함께 건설되었지만, 세비야를 빼앗기고 그라나다로 쫓겨온 아랍왕조의 유세프 1세 시대에 철벽 방어요새로 재건축되면서 지금의 모양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그라나다를 점령한 카톨릭 여왕은 승리한 스페인 전군대를 이끌고 이 문을 통하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위풍당당한 개선행진처럼 말이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은 그라나다를 점령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된다. 개고생 끝에 상당한 희생을 치고고 입성한 나폴레옹은 저항군의 진지였던 그라나다 성채를 모조리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그라나다의 외성과 내성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점령군은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엘비라의 문'만 달랑 남겨 놓았다. 그나마 심하게 훼손시킨채 말이다.
성벽은 어디론가 온데간데 없이 모두 사라져 버렸고 아치 형태의 성문만 덩그런히 남았다.
하여 그라나다 현지인들은 쉽게 '엘비라의 아치'라고 부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안고 이 성문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먼 길을 달려와 이 문 앞에 서면 가슴이 메여졌을 것이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 부터가 바야흐로 진정한 그라나다인 것이다.
엘비라의 문을 통과하면 딴 세상이 펼쳐졌다. 세상에서 가장 앞선 문물을 가진....... 당시 세상의 중심인...... 별천지가 펼쳐짔을 것이다.
엘비라의 문을 통과하면 수많은 상점과 숙박업소와 귀족과 부유한 사아인들이 오가는 칼데레리아 누에바(아랍인 거리)가 펼쳐졌다. 그나나다의 현지 생활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이 시장의 끝에 바로 누에바 광장이 있었다. 왼편으로 다로 강물이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귀족들과 고위 관리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호화로운 대저택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그 뒤로 중간계급의 사랍들이, 언덕의 위로 올라갈 수록 지위나 부가 적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아갔다. 하층민이나 떠돌이들은 계곡의 훨씬 상류지역 사크로몬테 언덕에 둥지를 틀고 모여 살았다.
누에바 광장에서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내성과 함께 그라나다와 이슬람 세계를 움직이는 심장부가 있었다. 그레이트 모스크와 관청과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알카세이라 거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지금 '칼데이라 누에바 거리'는 아랍풍의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빼곡하고 곳곳에 터키나 아랍풍의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와 타파스들이 들어서 있다.
알카이세리아 거리와는 어딘가 다른 아주아주 색다르고 이색적인....... 여행자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거닐어 보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지역이다.
당시로선 세계 최고의 도시가 그라나다 였다. 모두가 꿈에 그리던 그런 지상낙원이었다.
그 도시의 어느곳에서나 올려다 보면 알함브라 궁전이 보였다.
그리고 그라나다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엘비라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저 쓸쓸하고 조금은 허전하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이슬람의 유적'일 뿐이다. 그나마 웬만큼 과거의 원형대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들 한다.
파괴지지 않은 그라나다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 (누에바 광장)으로 갔다.
가이드의 인솔하에 움직이는 여러 여행단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누에바 광장은 그라나다 여행의 중심적 역활을 하는 곳이다.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서 휴식도 취하고 누에바 광장을 즐겨본다.
이곳에서도 오랜 세월의 참혹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리고나서는 발걸음을 아주 가파른 계단길로 옮겨본다.
이제부터는 (알바이신 지역)이다.
가끔은 멀찌감치 물러서야만 온전한 모습을 감상할 때가 있다.
가까이 다가서면 세세한 아름다움이야 감상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숲 속에서는 나무와 풀과 이름모를 꽃과 벌레는 살펴볼 수 있지만 숲이나 산을 바라볼 수 없는것과 같은 이치다.
알함브라 궁전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늘 황홀하리만치 아름답지만 궁전 전체가 가지는 균형미와 조화로움과 신비로움은 궁전 안에서는 절대로 찾아 볼 수가 없다. 알함브라의 아치형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알바이신 지역은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좁은 골목으로 가득찬 알바이신 미로속에 갖혀서는 저런 먼거리에서의 멋진 조망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알바이신 골목길을 지나사 산 니콜라스 광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알바이신 미로속을 걸으면서 옛 정취를 찾아내고 느껴보고, 이따금씩 골목길 어귀의 텅 빈 하늘에서 반짝 거리며 나타나는 제각기 다른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보고자 함이다. 알바이신의 공터란 공터는 모두가 알함브라를 바라보는 전망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넓고 알함브라를 바라보기 좋은 장소로 '산 니콜라스 광장'이 꼽힌다.
누군가의 은근한 속내를 슬며시 들춰보는것 처럼 알바이신 지역을 걷는 내내 호기심과 신기함이 뒤따랐다.
'여유롭고 평화롭고 한가하다'라는 표현을 지금 여기에서 써도 되나?
앞서 '마드라자 대학'을 소개하면서 그라나다에서의 참극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만........ 이곳이 바로 그 참극이 시작된 현장이 아니었던가?
수많은 무슬림들이 이곳에서 참혹하게 살륙 당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항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중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신념을 당당하게 지켜내는 모습을 후대에 남겨주기 위해서 여기 알바이신 지역 대부분의 곳곳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신은 위대하시다. 승리자는 오로지 신 뿐이시다.'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당당하게 외쳤다.
붉은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자.........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는 자......... 누가 승리자였을까? 누구의 신이 진정 위대한 신이었을까?
그라나다에서의 마지막 아랍 왕 보아브딜은 이사벨 여왕에게 항복했다.
그라나다를...... 그리고 스페인 영토에서의 이슬람 왕국을 고스란히 여왕에게 양도하고 떠난 것이다.
양쪽이 합의한 협정문에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이슬람의 건축물과 문화 유적을 잘 보존하여 준다. 따라 나서지 못하게 된 이슬람 유민들의 재산을 보존해 주고 그들이 이제까지와 처럼 차별없이 살아가도록 배려해 준다.'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다분히 내성적이며 예술가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보아브딜 아랍왕은 그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불타는 용광로 같은 심장을 가진 이사벨 여왕은 애초부터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조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보아브딜이 지브롤터에서 배에 올라 지중해로 나서는 순간에......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에 대한 박해와 토벌을 명령했다. 알함브라 궁전만을 제외한 모든 이슬람 사원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사람들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사람들은 마지 못해 손에 무기를 들었다.
그들의 거주지였던 알바이신 외성 안으로 모두 모여들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 둘 무장을 갖추면서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처절하고 참혹했다. 스페인 최정예 군대가 알바이신 외성을 철저하게 포위했다. 결코 싸워서 이기거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걸고 신의 영광아래 불사항쟁을 벌이는 이슬람의 처절한 저항은 결코 만만하게 볼 사항이 아니었다.
스페인 군도 당황했다. 병사의 숫자와 군비만으로 해결할 사항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바이신 언덕에 설치된 성채도 굳건한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모로코의 메디나를 연상시키는 알바이신의 가파른 언덕과 아주 좁은 골목과 요새와도 같은 가옥 한채한채가 엄청난 자아애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곳의 성벽을 뚫고 들어간 스페인 군대는 전면적인 전쟁이나 토벌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가로막은 가옥 하나를 헐어서 초토화 시키고 나서야 겨우 다음번 가옥 하나를 향해 서너걸음을 겨우 옮길 수 있었다. 창 칼을 든 군대가 아니라 망치와 괭이를 든 폐가옥 철거반의 모습이었다. 이런 전쟁을 처음 겪어보게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변수가 생겼다.
새로운 길 안내자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 왕조는 모두에게 너그러웠다. 평화와 공생과 공존을 추구해왔다.
종교와 민족과 이념과 직업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이슬람 왕조의 신앙은 오로지 하나 이슬람이었지만, 유대인의 신앙도 카톨릭의 신앙도 동방 정교회의 신앙도, 나아가서는 새롭게 불어오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신앙도 차별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비록 이슬람 지배하의 영토에 살게 되었을 지라도 정당하게 세금만 낸다면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의 민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상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슬람 세계에서 조차 차별 아닌 차별을 당하고 설움을 당하는 부족(민족)이 딱 하나 있었다.
이슬람을 떠나면 온 유럽에서 중세새대 이후로 온갖 멸시와 차별을 당해 온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바로 '게토의 유대인' 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오히려 귀한 존재로 어느정도 대접을 받았다. 도축업 처럼 남들이 결코 하려하지 않는 직업적인 부분을 유대인들이 대신하여주었고, 돈을 만지고 셈하고 하는 신성과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셈(회계) 분야에 유대인들이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슬람 세계에서 조차 외면당하고 멸시당한 부족은 바로........ (집시)들이었다.
집시의 유래와 역정은 거의 유대인 역사와 상당히 비슷하다.(여기에서 지면상 집시의 유래와 역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유대인들은 오랜 유랑 생활속에 끈질기에 먹고 살려 노력했으며, 비록 민족은 뿔뿔히 흩어졌지만 소부족 단위로 집단촌을 꾸리고 모여 살았다.
하지만 집시들은 아니었다. 영원히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며 정착하려 하지 않았고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유랑을 하는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항상 수많은 문제와 골칫꺼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집시는 이제 온 유럽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자 어떻게든 떨쳐내고 픈 두통꺼리였다. 거기에 더하여 이슬람에서 조차도 골칫꺼리였던 것이다.
세계의 문화와 부가 모두 모여드는 그라나다였다.
부자 곁에 가야지 떡고물이라도 떨어진다고 꾸역꾸역 집시들이 그라나다로 몰려 들었다. 집시들은 일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허름한 창고나 공터에 모여들어 터를 잡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지냈다. 그들 주변에선 자주 도둑질과 강도질과 싸울질이 뒤따랐다.
이제 그라나다의 이슬람 사람들에게 집시라면 치가 떨리고 끔찍한 존재로 전락했다.
스페인 군의 알바이신 침공이 벽에 부닥쳐 난황을 겪고 있을 때 집시들이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짐시들에게 알바이신 지역은 거의 놀이터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집시들은 이 싸움을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집시들은 자신들이 길 안내를 맡고 반란군 우두머리들의 집과 집무실을 안내해 주는 댓가로 집시들이 당당하게 그라나다에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집시가 가세한 이후....... 전쟁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슬람 사람들은 모두 처참하게 도륙 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이사벨 여왕은 길 안내를 해 준 집시들에게 그라나다에 체류하면서 정착할 것을 정식으로 허락했다. 그들에게 할당된 거주지가 바로 '사크로몬테 지역'이다. 알바이신 골짜기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 언덕을 허락한 것이다. 사크로몬테에 정착한 집시들은 동굴을 파고 그 안에 기거하였다.
사크로몬테는 집시촌이었다.
알바이신 언덕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산 니콜라스 광장에 꾸역꾸역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얼굴 가득 어떤 기대감과 행복감이 그득하다.
석양 무렵의 알함브라 풍광이 절로 입을 다물게 만들고 세상을 깊은 적막속으로 이끌어들인다 라고들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이 짙어갈수록 천지 가득 울려퍼지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끝내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가슴속에 고이 담아 놓을 수 있을 뿐이다.
공간 속에서 머물던 것들이 서서히 시간속으로 저물어 간다.
왜 저무는 것들은 항상 애잔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 것일까?
오죽하면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지구절경 중의 하나'라고 했을까........
여기까지는 그랬다.
'에게게....... 겨우 이거야? 이게 그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는 알함브라의 노을이야?'
불쑥 튀어나오는 챠밍여사의 단호한 일갈.
다행이 앞뒤 주변에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 아닐수가........
롯데가 두산에게 12대 빵으로 지고있는 상황에 롯데 응원석에 앉아서 두산 화이팅을 외치는것 같은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그런데 기실은........ 나의 느낌도 거의 비슷하다고나 할까.
'석양에 물든 붉은 노을'하면 떠오르는 풍경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지중해 위로 떨어지는 산토리니의 노을, 밀림과 2천오벡개의 불탑위로 지는 바간의 노을, 바위 계곡에서 올려다 보던 카파도키아의 노을, 등등등등........
우리의 생각과 느낌 위에 각인된 노을의 모습은 주로 그런 풍경이었다.
그런데 알함브라의 노을은 그런........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붉은 해를 바라보는 그런 노을이 아니었다.
해는 저만치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고......... 그 석양빛이 전혀 다른 언덕위의 사암덩어리 건물에 투영되듯 비춰지면서 점점 붉은 색을 띠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붉은 빛이 거울에 반사되듯이 확실한 선명도와 채도를 가진것이 아니라....... 그냥 불그스레머니(?) 약간 변해가는 느낌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루고 확인해 보는 찍힌 사진에는 제대로 멋지고 아주 빨갛게 석양빛이 반사된 그림이 튀어 나왔다. 아마도 인간의 시각이 카메라 렌주만큼 붉은 가시광선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차이에서 생겨나는 문제인것 같았다.
우리가 경험한 '알함브라의 석양'은 아주 짧은 시간 그저 부그스레해지는 느낌으로 좀 씁쓰레한 여운만을 가득 남긴채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강렬한 붉은 색채도 눈부심도 전혀 없었다. 그저 온통 맹숭맹숭한 느낌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진만은 제대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헐!!!
'이래서 사진빨에 속으면 안되는거야. 모로코와 알함브라의 노을은 순전히 뻥이야. 사진빨만 그럴싸 하잖아? 이걸 보겠다고 여기까지 몇 계단을 올라온거야? 어이가 없네........ 내려갈 땐 버스 태워 줄꺼야? 또 골목길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죽자사자 걸어내려갈게 뻔해. 아이고 다리야.........'
챠밍여사의 솓아내는 푸념을 외면하고 인파속을 헤집고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어쩌겠어? 다시 걸어내려 가야지.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라나다에서 젤 형편없는 볼거리는 당연히 알함브라의 노을이야. 그냥 잡지에서 사진으로나 봐야 될........... 실.망.'
이제는 서서히 그라나다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온전하게 나흘을 머문 그라나다였지만 유독 떠나기가 아쉬운것은 왜일까?
새롭게 유행하는 트랜드 처럼 '그라나다 한 달 살기'를 샐행해도 충분히 좋을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새벽 산책에서부터 시작해 참으로 무던히도 많이 걸어다녔다. 그러고보니 이번 그라나다에선 첫째날 알함브라 궁전까지 가는 빨간 미니버스를 탄것과 바르셀로나행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하여 버스 터미널에 오간것 외에는 오로지 죽어라 걸어서 다닌것이 전부였다.
그라나다를 떠나는 날도 새벽부터 산책을 위해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아직 가보지 못했던 이사벨 여왕 동상 건너편의 '푸에르타 델 솔 스퀘어' 인근과 '산토 도밍고 교회'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라나다 시내 전체를 제대로 걸어서 모두 둘러보게된다는 바람에서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이동하는 여행자들, 상점을 여는 사람들, 출근하는 삶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현지인들의 하루 일상을 시작하는 모습을 만난다.
'올라!'
'올라!'
조용한 새벽 산책길은 사람의 정서를 다소곳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내게 있어서 새벽 산책은 아주 경건한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그라나다에서의 그날 아침 산책은......... 유독 좋았다. 상쾌했다.
거짓말 처럼........
이젠 정말로 우리가 그라나다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굿바이 알함브라.
굿바이 콜럼버스 두상.
고맙고 반가웠어. 그라나다.
기회가 된다면 꼭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보고 싶을거야 그라나다야. 안녕.
우리는 11시간의 야간버스를 이용해 스페인의 북부 바르셀로나로 간다.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되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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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