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3월 3일(금) 느헤미야 3:14-19 찬송 258장
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5.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6.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 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개역 개정)
서쪽 성벽 재건에 이어 오늘 말씀은 골짜기 문에서부터 시작하여
군기고 맞은 편에 이르는 예루살렘 성벽의 남동쪽 지역을
건축한 자들에 관해 소개하고 있다.
성전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은 성 굽이(19절)가 있는 돌출부이다.
이렇듯 본문에 이 돌출부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 것은
본문 기록의 사실성을 증거해 준다.
한편 이 지역 공사는 7지역으로 나누어지는 바 그 가운데 6지역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방의 방백들이 책임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의 혜택
곧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가지고 기꺼이 공사에 참여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자신의 현실적 이해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다만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헌신해야 된다는 사실을 교훈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셨듯이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만 한다.(요일3:16-18)
17절)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레위 사람 르훔은 그일라 지방 절반씩을 다스리던
하사바, 바왜 등과 성벽을 중수하는 일에 참예하였다.
물론 이 세 사람은 성벽의 한 부분을 함께 중수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구역을 맡아 중수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르훔이 레위 사람으로서
성벽의 한 구역을 담당하여 중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구역을 담당하였던 하사바나 바왜 등과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레위인들은 본래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생활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정상적일 때에는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좋지 못할 때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비록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정상일지라도 부유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였다.
하여튼 레위인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훔은 한 구역을 맡아 성벽을 중수하였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성벽 재건에서 뒤로 빠질 수도 있었고
보조자 역할만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성벽 재건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그의 이름이 성벽 재건 공사 공로자의 명단에
당당하게 올라간 이유를 알려준다.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드고아의 귀족들은
분명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에 동참하지 않음으로 불명예를 얻은 반면
르훔은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벽 재건에 적극 동참함으로 명예를 얻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함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핑계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일에 참예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지 못한 처사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빈부와 관계없이 모두 동참해야 한다.
물론 빈부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는 범위가 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빈부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중시하시는 것은 분량이 아니라 ‘할 마음’이다.
성경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며
이와 같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이 부자들의 것에 비해
참으로 보잘것없는 분량이었음에도
주님께서 가장 많은 것을 드렸다고 칭찬하신 까닭이 이것이다.(막12:41-44).
또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히 가난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고후8:2-4)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가르친다.(고전1:28)
우리는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헌신을 받기 위함이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도 가난한 분이셨으며, 위대한 사도 바울도 가난하게 살았으나
하나님의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헌신하였다.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있어 가난하다는 것은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고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12:43b-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