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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御製 (단종어제) 子規詩 (자규시)
沙月 李 盛 永(2008, 9, 13) 올림
<단종 임금이 지은 자규시>
단종(端宗: 李弘暐이홍위) 어제(御製)(세조3년,1457)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두견화)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이 하소연 어이 못 듣고
何乃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자규(子規: 소쩍새)
소쩍새는 자규 외에도 두견, 망제혼, 귀촉도, 불여귀, 접동새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이는 한밤중 처량하게 피맺히게 우는 솟쩍새 울음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데서
이렇게 많은 별명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시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귀양 가 있을 때 영월 영흥리에 있는 자규루 (子規樓)에 올라 지은 시다. 나는 1990년 이 시를 단종의 최초 유배지로 알려진 영월 청령포(淸 ?令 浦) 의 관광 안내간판에서 처음 구했다.
2008년 다시 가보니 이 시를 소개한 관광 안내간판은 없어지고, 대신 영월군에서 발간한 ‘영월여행’이라는 홍보 책자 속에 들어있다.
이 시에서 단종은 스스로를 궁에서 쫓겨난 한 마리의 새, 이 산 저 산 푸른 산 속을 옮겨 다니며 밤새도록 울어대는 소쩍새로 생각한 것이다. 밤이 와도 잠은 안 오고 해가 가도 한이 끝이 없다는 그 애틋한 심경, 어린 열 다섯 살 나이에 너 무 가혹하지 않은가?
마지막 두 구절은 정말 심금을 울린다.
그렇게 만사에 능하다고 믿어온 하늘이 이 애틋한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 귀머거리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근심 많은 자신(단종)의 귀에만 이 한 맺힌 소리가 들리는가?
청령포 단종 유배지는 영월의 서강(西江) 강물이 서, 북, 동쪽으로 회돌이 치며 둘렀고, 남쪽은 험한 절벽으로 된 국지산 줄기가 가로막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유배지 유적들을 복원 해놓았고, 단종이 걸터앉아 울부짖거나 시름을 달랬다는 소나무는 지금 낙낙장송이 되어 그 끝을 볼 수 없도록 자랐는데 사람들은 ‘관음송(觀音松)’이라 이름을 붙이고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울부짖는 그 소리(音)를 들으며 자란 소나무(松)' 란 뜻이다.
청령포 유배지를 건너다보는 서강 북안 솔밭에는 세조 3년에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降封)되어 영월로 귀양 갈 때 의금부 금부도사로서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괴로운 심경을 읊은 왕방연(王邦衍)의 시조 한 수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어떤 자료에는 세조가 단종에게 내린 사약을 전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하였다)
千萬里 머나먼 길의 고은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듸 업서 냇가에 안쟈시니
져 물도 내 안(마음) 갓도다 울어 밤길 예놋(간)다.
단종어제 자규시와 자규루에 나오는 '자규(子規)'는 소쩍새를 말하는데 중국 촉나라 황제 망제(望帝: 杜宇 두우)가 믿었던 신하로부터 배척 당해 쫓겨나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다가 죽어서 그 혼이 이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새다.
그래서 한이 맺혀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목과 가슴에 피가 나도록 밤새 운다고 한다.
소쩍새 울음소리는 한 밤이 지새도록 울어 그 애틋한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시적 감흥을 일으켜 예부터 많은 시의 구절에 올라왔다.
사람들은 소쩍새를 자규(子規) 외에도 두견, 망제혼, 귀촉도, 불여귀, 접동새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다.
촉나라의 황제 ‘망제 두우가 죽어서 그 혼이 새가 되었다’ 하여 두견(杜鵑) 또는 망제혼(望帝魂),
그 울음소리가 중국사람들에게는 마치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으로 들려서 귀촉도(歸蜀途), ‘돌아가고 싶다’(돌아가느니만 못하다)하여 불여귀(不如歸),
가난했던 사람들에게는 '풍년이 올 터이니 솥이 적다'고 알려 준다 하여 소쩍새라 하였다 한다.
접동새는 '평안도 백천 진두강가에 살던 오누이가 계모에 학대받다가 그 누이가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고, 계모 밑에 남겨둔 아홉 오라비들을 찾아 밤마다 슬피 울고 다닌다는 전래 민간 전설'인데 김소월 시 '접동새'가 나오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천지가 고요하게 잠든 여름 밤 홀로 한 맺힌 울음으로 뭔가를 온 세상에 하소연하는 소쩍새 울음소리와 어린 단종의 한 맺힌 시 한 수가 그 뭔가 공명을 일으키며 가슴에 와 닿는다.
< 두견(杜鵑)새에 관한 구전설화(口傳說話)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촉왕본기(蜀王本紀)> 및 『화양국지(華陽國志)』<촉지(蜀志)>에 실려 전해지는 '중국 촉(蜀)나라 왕 망제(望帝)의 혼(魂)이 두견새가 되었다'는 내용의 전래민담(傳來民談)은 내용이 조금씩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다.
옛 중국의 촉(蜀: 지금의 스찬성 지역, 四川省)에 이름은 두우(杜宇) 제호(帝號)는 망제(望帝)라고 불린 어린 왕이 있었다.
어느날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지날 때 산 밑을 흐르는 강물에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망제 앞에서 멈추더니 눈을 뜨고 살아났다.
이상하게 여긴 망제는 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란 사람으로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졌는데 어찌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망제는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령에게 집과 벼슬은 내리고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망제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했다. 정승 자리에 오른 별령은 은연 중에 불측한 마음을 품고 대신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심복으로 만든 다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때마침 별령에게는 천하절색의 딸이 있었는데 그는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며 국사를 모두 장인이 된 별령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미인 아내와 소일하며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별령은 여러 대신과 짜고 망제를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난 망제는 촉나라로 돌아기지 못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온종일 울기만 하였다.
마침내 망제는 울다가 지쳐서 죽었는데, 한맺힌 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 돌아가니만 못하다, 돌아가고싶다)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이 두견새를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하여 된 새'라 하여 두견(杜鵑), 촉혼(蜀魂), 원조(怨鳥), 두우(杜宇), 귀촉도(歸蜀途), 망제혼(望帝魂)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補)2015. 8. 13일자 조선일보 『그림으로 보는 자연』에 '소쩍새' 이름과 울음소리에 관한 이야기가 두 가지 실렸다.
(1) 옛 사람들이 '솟쩍 솟쩍'하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솥 적(다) 솥 적(다) '라고 운다고 여겨 그해는 풍년이 들거라고 기대하였다. '솥이 작으니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생각 한 것이다.
(2)옛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소화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소화의 부모 님은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시어머니는 소화에게 밥을 두 번 하면 밥이 남아 찬밥이 생겨 낭비하지 않도록 한 번만 하도록 각별히 당부를 하였다.
소화는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정성껏 밥을 지었지만 솥이 작아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밥을 뜨고, 남편, 시누이 밥을 퍼고 나면 저 먹을 밥이 없어 굶게 되었다. 이런 일이 매 끼니마다 일으나니 소화는 배곺음을 못참아 울다가 그만 굶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굶어 죽은 소화가 소쩍새가 되어 밤마다 살던 집을 바라보며 '솥적 솥적'하고운다고 한다.
'두견(杜鵑)'에 관한 구전설화는 동물변신담(動物變身談)에 속하며 한(恨)이 많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잘 어울려 서정주(徐廷柱)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오영수(吳永壽)의 소설 「소쩍새」등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로 쓰여왔다. <출처: 두견새 설화>
자규(子規)의 여러모습
두견새가 이 산 저 산 가릴 데 없이 울고 다니는 것처럼 봄에 이 산 저 산 가릴 것 없이 온 산에 널려 피는 진달래꽃을 사람들은 두견화(杜鵑花)라고도 부른다.
이 꽃 닢의 색깔이 두견새가 피를 토하며 우는 것 같이 붉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두견새가 이 산 저 산 다니며 울면서 흘린 눈물이 씨앗이 되어 돋아나 이 꽃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두견새와 두견화는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돌아오는 봄날에 산에 올라 두견화(진달래꽃)를 보거든 두견새(소쩍새)를 생각하고, 고요한 시골 밤에 두견새 울거든 단종의 애 끊는 하소연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규시를 소개한다.
<단종애사(端宗哀史)>
○ 단종(端宗)의 일대기
조선 제6대왕(1452~55).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文宗), 비(女比: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비(妃: 처)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세종 30년(1448)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문종1년(1450)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문종 2년(1452)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즉위하였다.
문종이 승하하면서 '단종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삿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등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단종 1년(1453)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을 보이고, 온성(穩城)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았으며 나난(羅暖), 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이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 한명회의 계책에 따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죄명을 씌우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고,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공신책록을 하였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사사되었고, 그 아들 우직(友直)은 진도에 유배되었다.
단종2년(1454)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며, 이 달에 양성지(梁誠之)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단종3년(1455) 윤 6월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과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급박한 주변 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다.
세조 2년(1456) 6월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등에 의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김질(金 石質)의 고변으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종은 세조3년(1457)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24일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숙종 7년(1681)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되고, 숙종 14년(1698) 복위(復位)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추증(追贈)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한국사대사전)
< 단종애사 약사(略史) >
- 세종23년(1441)-세조3년(1457), 수17세, 조선 제5대 문종의 독자, 휘 홍위(弘暐), 8세(세종31년, 1448)에 왕세손(王世孫) 책봉, 10세(문종원년,1450)에 세자(世子) 책봉, 12세(1452)에 제6대왕에 등극, 재위 3년.
- 문종은 죽을 때 세자가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領相), 김종서(金宗瑞:左相), 정분(鄭분:右相) 등 원로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할 것과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등 신진들에게 좌우 협찬을 부탁하는 유언.
-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인지(鄭麟趾),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과 결탁하여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암살하고, 그 외에도 많은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제거하면서 왕을 위압하여 왕위를 강탈하여 제7대왕에 등극.
- 세조1년(1455) 성삼문, 박팽년 등 세칭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동료 김질(金石質)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참형.
세조3년(1457) 6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영월(寧越)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8월 큰 홍수로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김
그 해 가을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경상도 순흥(順興)에서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
그 해 12월 24일 영월에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함
숙종 때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가 이어 복위(復位: 임금으로 복권) 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 사류(士類) 중에는 수양대군의 패륜(悖倫) 행위에 분개하여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숨어서 산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등 생육신(生六臣) 같은 사람도 많았다.
○ 영월지역 단종애사 관련 유적(遺跡)
- 세조3년(1457) 처음 영월로 유배된 곳 청령포(淸령浦) 경내에
단종어소(端宗御所),
유지비(遺址碑),
금표비(禁標碑),
관음송(觀音松),
망향탑(望鄕塔),
노산대(魯山臺),가 있고,
서강 북안에 왕방연시조비(王邦衍時調碑)가 있다.
- 3개월 후 큰 홍수가 나서 적소(謫所: 유배지)를 옮긴 관풍헌(觀風軒)
- 제2 적소(謫所) 관풍헌에 있는 동안 어느 날 그 동쪽에 있는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지은 후 누각의 이름과 현판을 바꾼 자규루(子規樓).
- 세조3년(1457) 12월 24일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시체는 동강 물에 버려 진 것을 이곳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수습하여 암장(暗葬) 하였다가 숙종 때 단종(端宗)으로 복위된 후 축조된 단종의 묘소 장릉(莊陵)과 경내에
영조9년에 세운 단종비각(端宗碑閣)
한식날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단종애사 관련 268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단종제 후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제 때 물을 쓰는 우물 영천(靈泉).
삼족멸문지화를 각오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 지역 출신 엄흥도(嚴興道)의 충신정려비각(忠臣旌閭碑閣)
단종의 암장한 묘를 찾아 내어 장릉으로 치제하는데 공을 새긴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
-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되자 절 이름을 지덕사(旨德寺)에서 노릉사(魯陵寺)라 개칭하였다가 단종이 승하하자 다시 절 이름을 개칭한 장릉(莊陵) 보덕사(報德寺)
보덕사 말사인 지덕암(旨德庵)을 단종의 꿈에 보았던 암자와 비슷하다 하여 개명한 금몽암(禁夢庵)
-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 영모전(永慕殿)과 엄흥도, 정사종, 추익한 등 충절을 모신 충절사(忠節祠)
- 단종이 승하하자 적소생활을 돌보던 궁녀와 관비들이 동강(옛 금강) 벼랑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낙화암(落花岩)과 이들의 넋을 모신 사당 민충사(愍忠祠: 지방문화재자료제27호)) 그리고 아름다운 금강을 조망하는 낙화암 위의 금강정(錦江亭).
-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과 엄홍도, 박심문 등 충절을 모신 사당 창절사(彰節祠)
◆ 영월(寧越)의 역사
영월군
영월(寧越)은 강원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이며,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이었다.
고려 초 영월현(寧越縣)으로 고쳐 원주(原州)에 소속 되었다가 공민왕 21년(1372) 영월군(寧越郡)으로 승격하여 공양왕1년(1389)에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조선 숙종24년(1698) 영월부(寧越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고종32년 다시 영월군(寧越郡)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국사대사전)
◆ 청령포(淸령浦)
청령포(淸령浦) 는 영월읍내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으며,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曲流)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었다. 동, 북, 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육륙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유배되었던 단종(端宗)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것은 세조 3년(1457) 6월이다. 그 해 여름에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침수되자 8월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겼다. 단종은 영풍헌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10월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유지비(遺址碑)와 후세에 세운 청령포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려고 쌓은 것이라고 하는 돌탑(속칭 망향탑)이 유지비각 서쪽 절벽 위에 서 있다.
청령포 안내 표석
청령포 안내도
① 단종어소 ② 행랑채 ③ 유지비 ④ 관음송 ⑤ 금표비 ⑥ 망향탑 ⑦ 노산대
서강 북안에서 바라보는 청령포(2008.9.5.촬영)
단종어소
단종어소(端宗御所)는 세조3년(1457) 6월 22일 조선 제 6대 임금인 단종대왕이 영월로 유배되어 처음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며, 3개월 정도 살다가 큰 홍수가 나서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이곳에 단종어소는 소실되고, 영조 39년 (1763년)에 이 유지비(遺址碑)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전하다가 후에 복원하였다.
유지비각과 유지비
「端廟在本府時遺址碑」(단묘재본부시유지비): 단종 임금께서 본 영월부(寧越府: 寧越都護府)에 계실 때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터를 표지하는 비석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涕敬書令原營竪石 淸령浦」(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체경서령원영 수석 청령포): 때는 명 황제(毅宗)의 숭정(崇禎) 연호가 시작된 무진년(戊辰年: 조선 인조6년, 서기1628년) 후 세 번 째 계미년(癸未年: 순조23년, 서기 1823년, 淸 宣宗 道光 2년) 늦가을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글을 써서 원영(原營 ?)으로 하여금 청령포에 빗돌을 세운다.
금표비
「淸령浦禁標」(청령포금표)(청령표에 출입을 금하는 표지)
관음송
관음송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의 크기로 1.2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이곳에 유배된 15세의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영월의 관음송은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노산대(魯山臺)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이곳 청령포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주 이곳 높은 곳에 올라 시름에 잠겼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노산대(魯山臺)라 명명하고 돌에 새겼다.
망향탑
노산대 망향탑(魯山臺 望鄕塔)은 청령포 서쪽 층암 절벽 위에 위치하고있다. 단종이 귀양살이할 때 왕비 송씨를 생각하시면서 주위에서 돌들을 주워 날라다 쌓아 올렸는데 이것이 망향탑이 되었다 한다. 1974년 영월군수 금명한 의 주선으로 허물어졌던 돌탑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 왕방연의 시조비
옛날(1990년)
지금(2008년)
왕방연(王邦衍)은 조선 단종 때 시인이며, 세조 때 금부도사(禁府都事: 義禁府 都事: 종5품)로 있으면서 세조3년(1457)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있은 후 왕명을 받아 상왕(上王: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 책임을 맡았다. 당시 너무도 괴로웠던 심경을 시조로 읊은 것이 위 시조다.(한국사대사전)
◆ 관풍헌(觀風軒)
관풍헌
관풍헌(觀風軒)은 영월군(寧越郡) 동헌(東軒: 군수가 집무하는 건물)에 딸린 객사(客舍로서 조선 태조7년(1398)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큰 홍수가 나자 이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계속 하다가 세조3년(1457)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또 조선조 말기 방랑시인 김삿갓(본명은 炳淵 병연, 호는 蘭皐 난고)이 이곳에서 치룬 백일장에서 제시된 시제(詩題)의 인물 전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을 신랄하게 지탄을 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후에 그 인물이 바로 자신의 조부(祖父)인 것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늘 삿갓을 쓰고 방랑 길에 나섰다고 한다.(한국사대사전)
* 김익순(金益淳): 순조11년(1811)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관서지망을 장악하자 선천부사로서 즉시 항복하고, 홍경래의 사령장을 받았다. 후에 홍경래가 관군에 잡히게 되자 그는 자기 죄를 면하려고 돈 천냥을 주기로 하고 농민 조문형(趙文亨)을 시켜 자고 있는 적장(賊將) 김창시(金昌始)를 목 베어 자기가 죽인 양 꾸며서 조정에 바쳤으나,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 않자 조문형이 고발하여 사형을 당했다.
* 조선조 때 공공건물의 격(格):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
◆ 영월 자규루(子規樓)
자규루
자규루 (子規樓)는 영월군(寧越郡) 영월읍 영흥리(永興里)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누각(樓閣)이다.
세종 10년 (1428)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에 귀양온 단종(端宗)이 관풍헌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子規: 소쩍새)를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子規詞(자규사)」 와 위 「子規詩(자규시)」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조 38年(1605) 대 홍수로 누각이 폐허가 되었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관찰사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이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내어 중건케 하여 단종의 「子規詩(자규시)」를 봉안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 은 누기(樓記)를 윤사국이 직접 쓰고,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상량문을 이동욱(李東郁)이 썼다.
이 누기와 상량문의 탁본을 모은 책 자규루첩 (子規樓帖)이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마루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6호.(국사대사전)
* 위 자규루기문(子規樓記文)를 쓴 이복원(李福源)은 나의 방계(傍系: 判事公派) 선조로 정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는데 그 차자 이만수(李晩秀)가 순조 때 대제학에 올라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으로 연안이씨는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 李廷龜-李明漢-李一相 : 전 성씨에 4집)에 이어 부자대제학(전 성씨에 7집)도 배출하였고, 또 장자 이시수(李時秀)가 정조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자연상(父子連相) 집안도 되었다.
◆ 장릉(莊陵)
장릉
장릉(莊陵)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제6대 임금 단종의 능(사적 제196호),
경내에는 단종비각, 정자각, 배식단사, 영천엄홍도 충신정려각, 박충원 낙촌비각 등의 유적이 있고, 단종역사박물관이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영조9년(1733)에 세움. 전면에 「朝鮮國端宗大王莊陵」(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라 새겨져 있음
『장릉지(莊陵誌)』는 장릉에 대한 사적(史蹟)을 기록한 책으로
효종 때 윤순거(尹舜擧)가 세종23년(1441)∼효종4년(1653) 간의 단종과 관련된 사적을 적은 「노릉지(魯陵志)」2권에
현종3년(1662) ∼숙종30년(1704) 간의 사적은 속록(續錄: 이어서 기록함)하고
노릉지에 약간의 증보(增補: 보태고 고침)를 가하여 『장릉지(莊陵誌)』에 개재한 것이다.
숙종35년(1709) 박팽년(朴彭年)의 9대손이며, 장릉의 초대 참봉인 박경여(朴慶餘)가 안동인 권화(權和)와 함께 편찬하여 숙종37년(1711)에 간행하였는데,
「노릉지(魯陵志)」의 사실(事實), 분묘(墳墓), 사묘(祠廟), 제축(祭祝), 제기(題記) 등에 관한 기록과 복위(復位), 봉릉(封陵), 육신복관건사제문(六臣復官建祠祭文)등을 첨가하였다.
위 장릉지에 영조9년(1733) ∼순조6년(1806) 간의 사실(事實)과 증보하여 고종26년(1889)에 완성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장릉지이다.(국사대사전)
정자각(丁字閣)
한식날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곳으로
丁자 모양으로 되었기 때문에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르며, 배위청(拜位廳)이라고도 부른다.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애사 관련 268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한식날 단종제 후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정조5년(1781) 정조 임금의 어명으로 건립되었다.
영천(靈泉)
단종제 때 물을 쓰는 우물로 정조 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였다.
박기정(朴基正)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음직(蔭職)으로 현감(정7품)을 지내고, 정조8년(1784)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정5품), 승정원 승지(정3품), 참판(종2품)에 이르렀다.
정조20년(1796) 왕명으로 이의준, 이서구 등과 함께 『장릉지(莊陵誌)』를 교정하고,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하였다.
엄흥도(嚴興道)의 충신정려비각(忠臣旌閭碑閣)
정조15년(1791) 임금이 엄홍도의 절개를 의롭게 여겨 충신(忠臣)에 정려(旌閭)하고,
정려비를 세웠다.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
엄흥도(嚴興道)는 단종 때 영원의 호장(戶長: 향리의 으뜸, 村主).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생활 중 세조의 사약을 받아 승하하였으나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엄홍도는 단종을 동정하여 삼족의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밤중에 남몰래 자기가 죽으면 쓸려고 만들어 놓은 관(棺)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고, 아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도망쳤다.
현종 때 우의정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왕에게 건의하여 그 자손은 관직에 등용하였고, 영조 때 그를 공조참판(종2품)에 추증하고, 제문(祭文)을 하사하였다.(국사대사전)
윤사국(尹師國)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 자는 빈경(賓卿), 호는 직암(直庵), 칠원인(漆原人),
영조35년(1759) 문과 알성시 급제, 영조36년(1760) 한원(翰苑: 藝文館)에 들어가 누진하여 도승지(都承旨: 정3품)에 이르고,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 나가 자규루를 중수하였다.
정조17년(1793) 공조판서, 강화유수(江華留守: 종2품), 전설사(典設司: 식전용 장막 제조)와 전생서(典牲署: 제수용 가축)의 제조(提調: 겸직 우두머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2품, 역사)를 지내고, 기사(耆社: 정2품이상 70세 이상 퇴직 원로원)에 들어갔다.
순조7년(1807) 80세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가자)에 올라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왕실종친관리)를 지냈다.
서예에 특재가 있어 조정의 금보옥책(金寶玉冊) 뿐만 아니라 사찰, 누각의 편액을 많이 썼다.(국사대사전)
박충원(朴忠元) 낙촌비각(駱村碑閣)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암장한 묘를 찾아 내어 장릉으로 치제한 낙촌 박충원의 공을 새긴 비
박충원(朴忠元)은 조선 명종 때의 명신.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 시호 문경(文景), 본관 밀양(密陽),
중종26년(1531) 문과(文科) 급제, 호당(湖堂)에 선발, 중종36연(1541) 영월 군수(郡守: 정5품)로 나갔는데, 그 때 영월에는 노산군(단종)이 죽은 후로 군수들이 연이어 7명이나 급사하는 흉지(凶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박충원은 군수로 나가자 마자 제물을 잘 차리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밤 박충원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였으며, 그 후로는 흉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벼슬은 좌찬성(종1품)에 이르고, 밀원군(密原君)에 봉군되었다.
◆ 보덕사(報德寺)와 금몽암(禁夢庵)
보덕사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되자 절 이름을 ‘노릉사(魯陵寺)’라 개명하였고,
단종이 세조의 사약을 받아 승하한 뒤 숙종31년(1705) ‘장릉보덕사(莊陵報德寺)’로 개칭하였다.
보덕사(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안 서기 668년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여 지덕사(旨德寺)라 하였고, 고려 원경국사(元敬國師)가 중수하고, 조선 영조 때 보덕사(報德寺)로 개칭하여 장릉(莊陵)의 능사(陵寺)로 삼았다.
지금은 오대산 월정사에 속한 사찰로서 많은 불자들의 수도처가 되고 있다. 극락보전의 삼존불(三尊佛)은 목조불(木彫佛)로 문화적 가치가 높다.
금몽암(禁夢庵)
지방문화재자료 제25호
신라 문무왕20년(680) 의상조사가 창건한 암자로 원래는 지덕암(旨德庵)이었으나
단종이 옛날 궁중생활을 할 때 꿈 속에 보았던 암자와 흡사하다고 하여 금몽암(禁夢庵)으로 개명하였다.
◆ 충절사(忠節祠)와 창절사(彰節祠)
충절사
영월지역 출신의 충신 엄흥도(嚴興道), 정사종, 추익한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절사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 과
생육신(生六臣)인 김시습, 남효온 그리고 충신 박심문, 엄홍도 등 10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절사(彰節祠)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를 따르며, 비장한 최후를 마친
사육신 등의 절개(節)를 길이 표창(彰)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숙종 임금의 사액 사당이다.
◆ 낙화암(落花岩)과 금강정(錦江亭)과 민충사(愍忠祠)
낙화암과 금강정
단종이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와 관비들이 동강(당시 錦江)변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동강물로 뛰어내려 죽었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岩)이라 하였다.
금강정(錦江亭)은 낙화암 위에는 세종10년(1428) 영월 사람 김복항(金福恒)이 건립한 정면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다.
또 『영월제영(寧越題詠)』 에 따르면 이자삼(李子三)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錦江: 동강)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정자를 지었다고 되어있다 한다.
민충사
낙화암 언덕 위 뒤편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 궁녀와 관비들의 넋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 영모전(永慕殿)
영모전과 영모전에 모신 단종 영정
영모전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단종의 영정은 백마를 탄 단종 앞에 추익한이 산머루 바구니를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이 영정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끝까지 한 임금을 섬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충신의 절개를 담고 있다
○ 단종애사 관련 피화자(被禍者)-典故大方抄
- 황보인(皇甫仁: 領相), 김종서(金宗瑞: 左相), 정분(鄭분: 右相)- 이상 세칭 삼상(三相)
- 안평대군(安平大君: 瑢, 세종3자), 금성대군(錦城大君: 瑜, 世宗6子), 한남군(漢南君: 王於, 世宗 別子), 영풍군(永豊君, 王泉, 瑜同母弟), 화의군(和義君: 瓔, 世宗別子, 朴彭年 妹弟), 이양(李禳, 太祖8男 宜安大君 孫)- 이상 세칭 육종영(六宗英)
- 송현수(宋玹壽: 礪良府院君, 端宗國舅), 권자신(權自愼: 端宗內舅, 外叔), 정종(鄭悰: 寧陽尉, 端宗妹夫), 정효전(鄭孝全, 太宗駙馬 日城尉), 권완(權完: 敦寧判官)- 이상 세칭 오의척(五懿戚)
- 민중(閔仲: 吏判), 조극관(趙克寬: 吏判), 김문기(金文起: 吏判, 金寧人)- 이상 세칭 삼재(三宰)
- 박중림(朴仲林: 吏判, 朴彭年父), 성승(成勝: 武, 成三問父), 박정(朴靖: 雲劍)-이상 세칭 삼운검(三雲劍)
-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이상 세칭 사육신(死六臣)
* 김녕김씨(金寧金氏) 집안에서는 사육신 중 유응부(兪應孚) 대신 김문기(金文起: 三宰의 한사람)를 사육신에 포함하여야 한다고 법정투쟁을 진행해 왔다고 함.
- 김시습(金時習: 梅月堂, 五歲神童), 조여(趙旅),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원호(元昊)-이상 세칭 생육신(生六臣)
- 이외 136여 충신(忠臣), 의사(義士), 현인(賢人) 등이 피화(被禍)
○ 단종애사 관련 훈록자(勳錄者)-淸選考抄
◆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38인
단종원년(端宗元年) 황보인, 김종서 등 주살 공로
수양대군(首陽大君: 王柔유 第7代 世祖)
- 일등(一等) 12인
정인지(鄭麟趾: 領相, 河東君), 한확(韓確: 左相, 西原君), 이사철(李思哲: 左相, 甑城君), 박종우(朴從愚: 太宗女壻, 雲城君), 김효성(金孝誠: 崇政, 延山君), 이계전(李季甸: 輔國, 漢城君), 박중손(朴仲孫: 崇祿, 密山君), 권람(權擥: 左相, 吉昌君), 홍달손(洪達孫: 左相, 南陽君), 최항(崔恒: 領相, 寧城君), 한명회(韓明澮: 領相, 上黨君), 봉석주(奉石柱: 江城君)
- 이등(二等) 8인
신숙주(申叔舟: 領相, 高靈君), 권준(權준: 判書, 安川君), 유수(柳洙: 崇政, 文城君), 홍윤성(洪允成: 領相, 仁山君), 전균(田畇: 河陰君), 윤사균(尹士균: 判書, 鈐平君), 유하(柳河: 崇政, 文山君), 곽연성(郭連成: 淸城君)
- 삼등(三等) 17인
이흥상(李興商: 吏判, 鷄林君), 이예장(李禮長: 兵議, 全城君), 강연(康?: 兵使, 信川君), 유서(柳서: 嘉靖, 文川君, 柳洙弟), 권언(權偃: 福城君, 權近曾孫), 유사(柳泗: 資憲, 文原君, 柳洙弟), 홍순노(洪純老: 嘉靖, 唐城君), 임자번(林自蕃: 兵使, 襄陽君), 안경손(安慶孫: 嘉靖, 公山君), 유자환(柳子煥: 箕山君), 설계조(薛繼祖: 玉川君), 권경(權擎: 嘉靖, 永原君, 權近孫), 홍순손(洪順孫: 嘉靖, 唐川君, 洪達孫弟), 송익손(宋益孫: 嘉靖, 礪山君) 한명진(韓明진: 西原君, 韓明澮弟) 한서구(韓瑞구: 嘉靖,淸原君), 이몽가(李夢哥: 驪川君)
◆ 수충위사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 佐翼功臣) 41인
세조원년(世祖元年) 사육신 등 주살 공로
- 일등(一等) 7인
증(王曾: 柱陽君, 世祖弟), 운(王運: 翼峴君, 王曾弟), 한확(韓確: 左相, 西原君), 윤사로(尹師路: 領川君, 世宗女壻), 신숙주(申叔舟: 領相, 高靈君), 권람(權擥: 左相, 吉昌君), 한명회(韓明澮: 領相, 上黨君)
- 이등(二等) 12인
정인지(鄭麟趾: 領相, 河東君), 이사철(李思哲: 左相, 甑城君), 정창손(鄭昌孫: 領相, 逢原君), 윤형(尹炯: 右贊成, 坡平君), 윤암(尹巖: 知義禁府事, 坡平君, 太宗女壻), 이계전(李季甸: 輔國, 漢城君), 이계린(李季린: 贊成, 漢山君, 季甸兄), 강맹경(姜孟卿: 領相, 晉山君), 홍달손(洪達孫: 左相, 南陽君), 최항(崔恒: 領相, 寧城君), 전균(田畇: 河陰君), 권반(權攀: 禮參, 花山君, 權近孫),
- 삼등(三等) 22인
이증석(李澄石: 判中, 梁山君), 권공(權恭: 駙馬, 花川君), 황수신(黃守身: 領相, 南原君, 黃喜子), 박강(朴薑: 正憲, 錦川君), 박원형(朴元亨: 領相, 延城君), 윤사균(尹士균: 判書, 鈐平君), 구치관(具致寬: 領相, 綾城君), 홍윤성(洪允成: 領相, 仁山君), 원효연(元孝然: 禮判, 原城君), 조석문(曺錫文: 領相, 昌寧君), 이예장(李禮長: 兵議, 全城君), 황효원(黃孝源: 贊成, 南山君), 한종손(韓宗孫: 崇政, 淸城君), 윤자운(尹子雲: 領相, 茂松君), 한계의(韓繼義: 右贊成, 西原君) 조효문(曺孝文: 禮判, 昌城君, 曺錫文弟), 김질(金 石質: 領相, 上洛君), 윤극배(尹克培: 領相, 履陵君), 권개(權愷: 兵判, 福川君), 이극감(李克堪: 刑判, 廣城君, 克培弟), 정수충(鄭守忠: 崇政, 河原君), 조득림(趙德琳: 巴山君, 世祖潛邸時蒼頭)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