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82년 6월에 왕비인 민씨가 세력을 잡은 후로
친일(親日)하는 것을 대원군과 그 일파인 수구파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던 중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비는 궁녀복으로 변장하여 급히 대궐을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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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서울 화개동 윤태준의 집에서 은신하다가,
사태가 위급해 지자 전 임천 군수 이근영의 경기도 광주집을 거쳐
민영위의 본가인 여주로,
그리고 다시 장호원의 민응식 집으로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도 신변이 불안하게 느껴진 민비는
충주 노은에 있는 국망산(國望山) 아래로 피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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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파평 윤씨계의 한 무당이
서울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민비에게 나타나
곧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있어
환궁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민비는 이 반가운 말을 듣고 뒷산에 올라
서울 나라님인 고종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렸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로 국망봉(國望峰)이란 산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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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당 윤씨의 예언대로
본궁에 환도하게 되자
민비는 윤씨를 서울로 불러 칭송을 하며
‘진령군’ 작호와 함께 여대감의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민비가
윤씨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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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내려온 진령군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이 나타나 내가 살집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꿈에 나타난 부처님은
억정사(億政寺) 절터에 방치되어 있는
철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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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은 즉시 상경하여
민비에게 절 지을 소원을 말하고
내탕금을 받게 되어
지금의 백운암을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