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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2024년 8월 4일 / 스가랴 13:1-9
슥 13:1-9 /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먼저 설교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주일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15:1-20을 되새겨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다른 사람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거나 아니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호기심에 이끌리어 왔으면 좋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들은 흠을 잡으려고 왔다. 이때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보았다. 꼬투리룰 잡았다고 생각하여 비난을 한 것이다. 이 비난은 곧 예수님에게 이어졌다. 예수님은 저들의 잘못된 정곡을 찌르면서 말씀하셨다. 마 15:3-6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왜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4) 하나님의 율법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누구든지 부모를 욕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5-6) 그런데 너희는 그 말을 ‘네 부모에게는 필요한 것을 못해 줄지라도 그 대신 돈을 하나님께만 바치면 용서받는다고 고쳐 말한다. 이렇게 너희는 인간이 만든 규칙으로써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다.
이어서 책망의 말씀까지 하셨다.
마 15:7-9 /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한 예언이 너희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 8) 이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말로만 나를 섬기고 높이며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이 나를 경외하며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은 나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중을 불러 저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셨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잘 깨달아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 12) 그때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지금 하신 말씀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나 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다. 14)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맹인이 맹인의 손을 붙들고 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11-15절)
베드로가 ‘그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였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뱃속을 거쳐 다시 뒤로 나가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그 말하는 사람을 더럽힌다.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말, 중상 같은 악한 생각들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환경부가 발표한 국민 한 사람이 배출하는 쓰레기는 평균 1일 1kg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으나 1주에 3번 수거해 가는데 편리를 위해 쌓아놓은 곳을 지나가려면 코를 막고 가야하며 사람이 쓰레기를 피해가야 하는 실정이며 명절 때는 엄청나게 배출이 된다.
오랜 전 통계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이 70년 동안 배출하는 쓰레기가 55톤에 이른다고 한다. 사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쓰레기도 계속 만들어진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성은 끊임없이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지난 주일 결론으로 말씀드린 것을 다시 새겨본다.
■ 바리새인과 세리의 쓰레기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눅 18:9-14 / [바리새파 사람과 세관원의 기도]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누가 청소를 잘하였는지 예수님은 정확히 판단해 주셨다. 이 평가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판단이셨다. 누구의 기도가 상달되었는지, 누구의 기도가 상달되지 않았는지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는지? 상달되고 있지 않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도를 많이 했다는 분들에게 답변을 ….
▶ 바리새인이 자칭 청소부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듯이 자신이 아무리 정결한 척할지라도 결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라는 말씀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바리새인 vs 세리처럼 ‘단지 쓰레기 배출량이 많으냐? 적으냐?’ 뿐일 것이다. 아무리 쓰레기 배출량을 적게 줄일지라도 전혀 배출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배출된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자신의 집 앞에는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이게 될 것이다.
인격수양을 통해 마음의 쓰레기를 지워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처리 불가능한 내면의 쓰레기를 성경에서는 죄와 더러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죄와 더러움을 굳이 구별한다면 죄는 하나님을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것이고, 더러움은 하나님을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에 벌어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영적인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라고 하였다. 영적 쓰레기를 없애는 획기적인 길이 등장한 것이다. 본문을 통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언제, 누구에게 열리고, 이 샘이 열리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샘이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언제 누구에게 열린다고 했는가?
슥 13:1 /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현대어성경 :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샘이 하나 터져 나와서 다윗의 후손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범죄와 불순종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깨끗이 씻어 줄 것이다.)
우선 그 샘이 열리는 날은 ‘그날’이다. 앞장인 12:11에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찔러 죽이고 자신들이 죽인 자가 메시아임을 깨닫고 흘리는 회개의 애통함이었다. 바로 이 애통함이 있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고 했다.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이 샘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샘은 보혈의 샘이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주실 수 있다.
이 땅에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시는 청소부는 예수님뿐이다.
마 1:21 / 그러니 마리아가 아들을 낳거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다.
♬ 255. 너희 죄 흉악하나
❶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빛 같은 네 죄 주홍빛 같은 네 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
❷ 악한 죄 벗으라고 주님 너를 부르네 악한 죄 벗으라고 주님 너를 부르네 하나님 크신 사랑 한이 없어라 악한 죄 벗으라고 악한 죄 벗으라고 주님 너를 부르네 주님 너를 부르네
❸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아니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하시네 너희 죄 사해 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기억 아니하시네
슥 13:7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칼에게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도록 허락하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죽임당하신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참 목자이다. 그 목자는 하나님과 짝된 분이다. 짝이 되었다는 것은 연합과 일치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다. 우리를 돌보도록 보내신 목자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고, 창으로 찔러 죽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샘은 누구를 위하여 열렸는가?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했다. 이 말은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을 의미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창에 찔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애통하는 모든 자를 말하는 것이다. 스가랴 12:12에서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라고 했다. 온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애통함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에게 이 샘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나에게 어떻게 적용을 시켜야 하는가?
과거에 더럽혀진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이 정결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계속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기를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이에 몇 가지 성경구절은 우리를 모두를 위하여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할 성경구절이다.
머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땅에 사는 동안 받아 누려야 할 복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러한 사람이 복이 있으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복,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마 5:3-10).
이러한 복을 받기 위하여 이러한 찬송을 기도로 삼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 279. 인애하신 구세주여
❶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❷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❸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❹ 만복근원 우리 주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후렴 :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아멘
♬ 285.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❶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후렴 :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아멘
❷ 좋은 날 내 천한 몸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늘 섬기리
❸ 새 사람 된 그 날부터 평안한 맘 늘 있어서 이 복된 말 전하는 일 나의 본분 삼았도다
2. 그 샘에서 씻으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2-6절까지 기록했다. 이 말씀은 그 샘에서 씻으면 어떤 치료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지를 말하고 있다.
1. 슥 13:2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우상이 사라진다. 우상의 이름을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다. 우상을 섬겼던 모든 흔적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무엇인가를 예배하고 살아간다. 공백 상태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전에도 무엇인가를 예배하고 살려고 했다. 그것이 우상이다. 그런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고, 그 샘을 맛보고, 그 샘에서 씻은 사람은 우상과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좇았던 삶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날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2. 거짓이 사라진다. 3절 말씀은 좀 끔찍하게 생각될 수 있다.
슥 13:3 /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그 샘에서 씻으면 눈이 밝아져 분별력이 생긴다.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는 모든 거짓말이 드러나고 부모라 할지라도 그것을 묵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칼로 찌른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으로 그 거짓된 것을 밝혀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그 샘이 열리고 그 샘에서 씻으면 분별력이 생기고 거짓 선지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4절에서 말하는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라는 말은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엘리야처럼 보이려고 털옷을 입고 다녔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에는 분별력이 없으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따라갔고 속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털옷을 입고, 환상을 말하고, 자신이 선지자라고 했던 과거의 전력이 드러나면 부끄럽게 되고, 정죄를 받게 되어 털옷도 입지 않고, 자신은 농부라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슥 13:6 /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은 선지자 아니었다고 발뺌을 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이 그렇게 발뺌하는 거짓 선지자에게 그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상처가 네가 거짓 선지자라는 증거가 아니냐’고 추궁을 하는 장면이다.
어떻게 상처를 보고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가 대결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알 선지자는 천둥과 번개의 신이었기에 번제물을 태우는 대결을 했는데, 아무런 일이 안 일어났다. 그때 바알의 선지자들이 한 행동이 28절에 기록되었다.
왕상 18:28 /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를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당시 이방의 선지자들은 황홀경에 빠지거나 신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자해를 했다. 자해 흔적을 보고 너 거짓 선지자가 분명하다고 추궁을 하자 아니라고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라고 둘러대는 모습이다. 과거에는 싸해 보이려고 호랑이 문신, 해골 문신을 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부끄러워 문신을 지웠다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고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고 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행 19:19 /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을 행하는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러워졌고, 마술을 하는데 사용되었던 책을 가지고 나와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샘이 열리면 사람들은 그곳에서 죄와 더러움을 씻게 된다. 이것은 한 개인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그들의 영적 분별력이 살아나게 되면 우상과 거짓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 주님의 다스림이 더욱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역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기를 소원한다.
3. 하나님의 손이 드리우리라
7-9절은 그 날과 관련된 또 하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슥 13:7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삯군 목자는 양을 공격하는 짐승 앞에서 도망가지만 참 목자는 목숨을 바쳐 양을 지킨다. 그런데 양을 지키던 목자를 칼이 쳤다. 그러면 양은 흩어지게 된다.
마 26:31 /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들이 도망하는 것을 통해 스가랴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런데 스가랴의 말씀에 흩어진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도 하였다. 작은 자들이라는 것은 제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당시 사회에서 주목받던 사람이 아니었다. 의지하던 스승이 죽자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적은 무리였다. 하나님의 손은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진 제자들의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위에 드리우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손이 흩어진 제자들을 찾고 이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는 것이다.
슥 13:8-9 /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3는 멸망하고 1/3은 거기 남는다고 했다. 2/3, 1/3도 수치적으로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쪽을 2/3라고 하고, 적은 쪽을 1/3이라고 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애통해하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나오는 자가 적다는 것이다. 이 작은 자들을 하나님의 손이 드리워져서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한다고 하셨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연단하신다. 그런데 그 연단은 불 가운데 던져져서 이루어진다. 은을 제련할 때 불로 연단해서 불순물을 계속 거두어 낸다. 언제까지 제련을 하면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어 제련사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칠 때까지 계속 불로 연단을 한다고 한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지만, 실제의 삶에서도 우리의 불순물이 제거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연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드리우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은 버려진 것이다. 2/3의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연단없이 자기 뜻대로 살다가 멸망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칭찬도 하시지만, 성도들을 예리한 책망도 하시면 경고도 하신다.
계 2:4-5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3:14-20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위로의 말씀도 있지만 책망의 말씀은 더욱 귀중히 여겨 필히 시정해야 한다.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터져 나온 보혈의 샘에 나와 씻음 받고 거룩해져가는 과정이다. 단련한 금과 같이 우리 안에 주님의 형상이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자원하여 주님의 손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 그 연단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난이고 희생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에 있다는 증거이며, 주님의 품에 안기울 수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고 싶다.
히 12:1-13 / [하나님의 훈련]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4) 여러분이 죄나 유혹과 맞서서 싸우고는 있지만 아직 피 흘릴 정도로 심한 싸움을 치른 경험은 없지 않습니까? 5) 하나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신 것을 여러분은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주께서 네게 징계를 내리실 때 너는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네 잘못을 책망하실 때 너는 좌절해서는 안 된다. 6) 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것은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너를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내리는 시련을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실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을 단련시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 만일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녀가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듯 하나님의 질책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도 가족도 될 수 없습니다. 9) 비록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우리를 꾸짖고 야단 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0)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우리의 앞날을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우리를 훈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누어 주려고 언제나 바르게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11) 무슨 벌이든 벌받을 때는 즐겁기보다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아 믿음이나 성격이 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느슨해진 주먹을 힘껏 쥐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일으켜 세우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이 걸어가기에 똑바르고 평평한 길을 열어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뒤따라가는 이들이 비록 약하고 절름거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넘어지거나 부상당하지 않고 오히려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258장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라는 찬양이다. 이 찬양의 작사자는 윌리암 카우퍼라는 영국이다. 그는 6살 때 어머니를 잃었지만 최선을 다해 변호사가 되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그 마음을 지배했다. 일에 대한 중압감에 병을 얻기도 하고, 낙오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우울증이 찾아와 몇 번의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은 정신착란이 와서 33살의 나이에 18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21년간 정신병으로 투병하면서 존 뉴튼 목사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안정을 찾았다. 건강을 회복하게 되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시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찬송가 가사를 작사한 것이다. 그가 쓴 여러 찬양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라는 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었던 도적과 같은 자신이 그 보혈에 씻김을 받았음을 깨닫고 쓴 찬양이다. 새찬송가에는 207장 ‘귀하신 주님 계신 곳’이 실려있다.
그는 세상을 떠나갈 때,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제가 이 순간도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다가 주님 앞으로 평안히 갔다.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 있어 각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려야 한다. 예수님을 찌른 죄인임을 깨닫고 애통하는 자에게 이 샘이 열렸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내일이 아닌 당장 열렸으면 한다.
이 샘에 와서 씻는 자는 그 눈이 밝아져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되어 그 삶에서 우상과 거짓이 사라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함으로 이 땅에서 연단을 받게 되지만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된다. 이 샘에 와서 씻어야 한다. 주님의 손에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보혈의 샘을 여실 것이다. 승리의 그 날까지 우리는 마르지 않는 보혈의 샘물에서 씻음으로 정결함과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승리의 날에 죄의 원인을 제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날까지 그들의 공격에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을 지켜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서 연단하심을 통해 우리를 더욱 정결하고 순결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승리의 그 날까지 정결한 삶을 살도록 은혜를 구하며 견고히 세워져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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