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정경희
오십대 초반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다. 연말이 되어서야 미루고 미루었던 건강검진을 겨우 받았다. 잘 지냈으니 별 탈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도 검사결과지 나오는 며칠 동안 움츠러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결과지에는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처음으로 접하는 경고 수치에 두 눈을 크게 떠서 다시 보았다. 식사 후에는 가방 속에서 약봉지 찾느라 부스럭거린다던 선배들 말이 생각 난다. 나도 그 길을 가고 있는가 보다.
평소에는 자동차로 출퇴근하였고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았다. 남들 다 입는 두꺼운 외투와 내의 없어도 씩씩하게 생활하였다. 어느 날 내가 추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니 평소보다 더 많이 피곤하고, 추위도 더 느꼈다. 거금 들여 모양새 나는 외투를 사 입었다. 나이 들어 당연한 현상이지만 남들 앞에서 오들오들 떠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검진 결과는 그 겨울날, 유난히 춥고 피로한 이유를 수치가 설명하고 있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겪는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의사는 갑상선 기능저하와 고지혈증 약 복용을 권한다. “왜 벌써, 내 인생에도 겨울이 닥친 것인가?” 차가운 겨울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가까운 친구와 선배에게 전화 하였다. “약 먹을까?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운동하면 괜찮아지겠지, 안 먹어도 되겠지? 세상이 무너진 듯 심각하게 걱정보따리 풀어 놓는 내가 한심한지 웃기만 할 뿐이다. 지나고 보니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 챙기고,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 산책하기 좋은 곳 찾아 걷고 달리며 자연을 벗 삼는다. 그래, 추운 겨울이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날은 있을 것이다.
어릴 때는 겨울이 좋았다. 농번기에 할 일 없으니 좀 더 신나게 놀았다. 양지바른 곳에서 숨바꼭질할 때는 봄날 같다. 집채만 하게 쌓아놓은 짚더미에 숨어 있으면 그대로 푹신한 이불이다. 몇 차례 들락거리다보면 꽁꽁 갈무리해두었던 짚단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한 손에 회초리 든 화난 주인의 호통에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달아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끝까지 따라오지 않고 소리만 크게 지르는 주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이 그때의 인심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놀이터는 얼음 꽁꽁 언 연못이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연못이 있으니 쉽게 갈 수 있다. 잘 나가는 동네 오빠는 멋진 스케이트화 신고 날렵하게 달린다. 두 손을 뒤로 한 채 목에 두른 머플러 휘날리는 모습은 꽤나 멋지다. 어린 우리들은 집에서 만든 썰매를 탄다. 양반다리 하고 앉아 끝에 못 박힌 막대기로 얼음을 지친다.
그나마 썰매도 없는 아이들은 연밥 찾아 얼음판 위를 헤맨다. 미처 수확하지 못한 딱딱한 연밥은 두껍고 투명한 얼음 속에서 구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돌로 얼음 깨느라 손이 얼얼하다. 찔끔찔끔 위로 올라오는 물 때문에 발이 젖는다. 앉아서 썰매 타던 아이들 바지도 오줌 싼 것처럼 얼룩덜룩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르르 몰려 근처의 둑으로 간다. 커다란 돌을 깨어서 비스듬하게 축대 쌓아 놓은 곳이 새로운 우리의 놀이터이다. 돌 틈 사이에 나뭇가지 모아놓고 불을 붙인다. 위험하지만 무리 중에서 성냥 갖고 다니는 아이 한 명쯤은 꼭 있다. 머리 맞대고 피어오르는 불꽃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라고는 없는 행복한 순간이 된다. 언 발 녹이는 동안 열에 약한 나일론 양말에 구멍이 뻥뻥 난다.
어린 시절 겨울날 추억은 어느 시집의 삽화처럼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내 인생의 봄날에 맞이하였던 겨울 그림은 마음속에 고이 접어둔다. 인생의 겨울이 된 지금, 봄날 같은 그림 그릴 준비를 한다. 사계절 뚜렷한 우리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사계절 내내 기다리는 마음이 나는 더 좋다. 더운 여름에는 눈송이 날리는 겨울을 그린다. 추운 겨울에는 비 내리는 여름날 창 넓은 찻집의 낭만을 기다린다.
건강검진의 경고 수치에 기죽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겨울 향해가는 내 몸을 보며 슬퍼할 수만은 없다. 만나자는 친구 연락에는 하던 일 멈추고 뛰어 나간다. 평생교육기관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배운다. 이런 것이 무슨 의미 있을까싶기도 하지만 봄날은 그냥 오지 않는다. 추운 겨울을 견디어낸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난다. 비록 마음의 봄날이지만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여고 동기생 몇 명이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 적게 먹는 것이 좋다고 그렇게들 말하지만 가방에는 먹을 것이 끝없이 나온다. 다른 이에게 터놓지 못하였던 건강 상담도 많이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 운동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멀쩡해 보이는 친구들도 나처럼 약 하나 정도는 달고 있다. 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의 자동차에서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소녀감성이 그대로 있다.
오십대 초반의 건강검진 결과에 충격 받고 호들갑 떨던 일은 아스라한 옛날이 되었다. 식사 끝난 후에 부스럭거리며 약봉지 찾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틈날 때마다 강변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여유를 부린다. 사소한 일 하나 하나가 봄날의 삽화 되어 추억의 책장에 쌓이고 있다. 후배 한 명이 목 길게 늘이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지난 날 나와 어쩌면 꼭 같은지, 한참을 웃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던 옛 어른의 말이 떠오른다.
(20250325.)(20250329.수정)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
塞翁之馬라고 건강검진으로 더 열심히 살게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정경희님!
응원 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