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33) 여포의 배반과 진류왕의 즉위
이숙이 돌아가고 삼경이 되었을 때,
여포는 칼을 빼어들고 양부 정원의 침소로 들어갔다.
"아니, 이 밤중에 네가 웬일이냐?"
잠을 자다가 놀라 깨어난 정원이 여포를 보고 말했다.
여포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 당당한 대장부로서 당신의 양자 노릇을 안 하려 하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정원은 기가 차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여포가 달려들어 정원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렸다.
여포는 한 손에는 피뭍은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정원의 머리를 들고, 중군으로 나와 자고 있던 병사들을 깨우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모아 놓고,
"정원이 옳지 못한 짓을 하기에 내가 목을 베었다. 너희들 중에 뜻있는 자는 나를 따르고 내게 불만이 있는 자는 형주로 돌아가거라!"
하고 외쳤다.
병사들은 한동안 소란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대부분의 병사들은 여포를 따랐다.
날이 밝는 대로 여포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탁의 진지로 넘어 오니 이숙은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준다.
동탁이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동탁은 이미 성대한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자신이 군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여포는 동탁을 발견하자 타고오던 적토마에서 내려 동탁에게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대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어른을 위해서는 죽음조차 아끼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소신은 이제 장군을 주공(主公)으로 모시게 된 것이 다시없는 기쁨이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고마우신 말씀이오! 내가 장군을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얻은 듯한 기쁨이오....자, 어서 들어가 환영의 축배를 나눕시다."
동탁이 이렇게 말하자 여포는 어쩔 줄을 모르도록 기뻐하였다.
더구나 여포는 환영연 자리에서 동탁으로부터 황금 갑옷과 비단 도포까지 선물로 받고 나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저는 오늘부터 장군님을 의부(義父)로 모시겠사옵니다."
하고 제 입으로 그런 말 까지 지껄였다.
동탁도 여포의 환심을 사려고 즉석에서 여포에게 기도위 중랑장 도정후(騎都尉 中郞將 都亭侯)라는 거창한 벼슬을 주었다.
여포를 손에 넣자 동탁의 위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동탁은 황제를 갈아치우려고 또다시 커다란 연회를 베풀며 문무 백관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앗다.
그리고 이날 연회에는 여포가 무장한 궁사(弓士) 백 여명을 거느리고 동탁의 뒤에 서서 시위하였다.
연회에 참석한 문무 백관들에 대한 동탁의 위압감이 최고조에 이르른 무력 시위였다.
자연스럽게 연회의 분위기는 삭막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리하여 연회에 참석한 문무 백관들은 서로 눈치만을 살피며 동탁의 행동거지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을 뿐 술좌석에서 있는 의례의 왁자지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동탁이 의도한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가 이어지는 순간, 동탁은 가슴에 칼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좌중을 향하여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오늘 이 성스러운 자리를 통하여 문무 백관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국사를 논하게 된 것을 본인은 지극히 만족스럽게 생각하오. 언젠가도 말한 바 있듯이 지금의 금상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어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역량(役糧)이 부족하오.
그에 비하면 선제(先帝)의 차자(次子)인 진류왕은 의지와 심중이 굳고 학문이 도저하여 국가의 백년 대계를 이끌어 가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오. 그리하여 진류왕을 새로운 천자로 책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제경들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와중에 중군교위 원소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동 장군! 그건 안 될 말씀이오. 금상께서는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런 잘못을 한 것도 없으신데, 동 장군은 무슨 연유로 폐위를 주장하시오? 이것은 모역(謀逆)을 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오! "
그러자 동탁은 얼굴에 노기를띠며 가슴에 안고 있던 칼을 새삼스럽게 손으로 옮겨 잡으며 소리친다.
"천하 만사가 모두 내 손에 달려있거늘, 내가 하려는 일을 뉘라서 감히 막으려는 것이냐? 나를 거역하는 자는 내 칼이 용서치 않으리로다!"
그러자 원소가 칼을 뽑아 들며 대답한다.
"그대가 칼을 쓴다면 나도 칼로 응수하리라! "
동탁이 대노하여 칼을 높이 쳐들고 원소에게로 향하자, 이유가 몸을 날려 가로막는다.
"대사를 정하기도 전에 칼을 쓰는 것은 옳지 않은 줄로 아뢰옵니다. 진정하시옵소서."
동탁이 걸음을 멈추고 칼을 내리자, 원소도 칼을 칼집에 꽂으면서,
"이런 더러운 자리에는 더 이상 있지 않으련다! "
하는 말을 던지고 분연히 밖으로 나가 버린다.
원소는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자기 고향 땅으로 떠나 버렸다.
원소가 연회장을 나가 버리자 동탁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원소의 숙부 원외를 굽어보며 말했다.
"원외 공! 그대의 조카 원소의 행실이 심히 무례하나, 내 특히 그대의 낯을 보아 용서하겠소."
원외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황공 무비하옵니다."
"그대는 폐립지사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동 장군의 말씀이 지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음....? 그렇다면 그대의 목숨은 용서하리다. ....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생각하오?"
동탁은 손에 든 칼을 흔들어 보이며, 만좌를 굽어본다.
그러자 겁에 질려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 공론을 막거나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라!"
동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지자 좌중의 백관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수그리며,
"존명(尊命)이 지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복창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동탁이 황제 폐립의 결의를 억지 춘향으로 만들어 놓고나서 시중(侍中) 주비와 교위 오경(伍瓊)을 돌아다보며 말하였다.
"원소란 놈이 필시 제 고향 기주로 도망을 쳤을 것이니 차제에 그놈을 추격하여 죽여버렸으면 싶은데."
그러자 주비가 이렇게 대답한다.
"원소가 화가 동하여 나갔으니 급히 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시끄러울 수가 있사옵니다. 그는 평소에 많은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온 관계로 그가 들고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것이니 섣불리 다루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단 말인가?"
"원소가 일시 분개하여 퇴장했으나 사람됨이 본래 독종은 아니오니, 자기 고향 근처에 군수 벼슬이나 하나 주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교위 오경은 어찌 생각하는가?"
"저 역시 원소에게 벼슬을 주어 무마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대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하기로 하지. 그러면 원소로 하여금 발해 태수에 봉한다고 전하라! "
이렇게 원소는 발해 태수에 봉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구월 초 하룻날,
동탁은 가덕전(嘉德殿)에 열 세살인 황제를 불러 앉혀 놓고, 문무 백관을 굽어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천자가 우매하여 천하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므로 이제 그를 폐하여 홍농왕(弘農王)이라 부르고, 진류왕을 천자로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할지니 만조 백관은 모두들 그리 아시오!"
예정된 계획 그대로였다. 모사 이유가 그 뜻을 받들어 미리 작성해 두었던 책문(策文)을 거침없이 읽어내렸다.
만조 백관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체념하에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긍정의 표시를 하였고, 옥좌의 어린 황제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덕전은 일순간 무덤속 같이 적막하였다.
"아아, 이런 법이 어디있단 말이냐! "
문득 흐느끼는 소리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 태후였다. 그녀는 흐느껴 울며 아들인 황제를 쳐다보며,
"누가 뭐래든 당신은 한나라 천자이시오! 죽어도 옥좌에서 내려오지 마십시오!"
하고 울부짖으며 외쳤다.
그러자 동탁이 크게 노하며 좌우의 시위를 돌아다보며,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서 저 소년과 여인을 당장 끌어내거라!"
그러자 그때, 별안간 칼을 빼들고 동탁에게 덤벼들며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역적 동탁아! 하늘을 속여 대권을 빼앗는 네놈을 그냥 둘 수는 없도다! "
그는 상서 정관(尙書 丁菅)이었다.
동탁은 몸을 날려 칼을 피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유가 검을 휘둘러 정관의 목을 베어 버렸다.
용상 앞은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참혹한 현장이 되었다.
동탁은 용상앞을 얼른 치우게 하고 잠시 후에는 진류왕을 불러다가 옥좌에 앉히고, 문무 백관으로 하여금 조하(朝賀)를 올리게 하였으니, 이때 새 천자의 나이는 불과 아홉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