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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 여인에게서 배웁시다
2026년 8월 2일 / 열왕기상 17:8-16
왕상 17:8 /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의 식수(食水)였던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궤지(供饋地)를 일러주셨다. 그곳은 곧 사르밧(Zarephath)으로(9절) 엘리야는 가뭄이 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왕상 17:9 /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사르밧은 ‘염색하다’는 뜻에서 온 명칭이다. 따라서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등과 마찬가지로 베니게(Phoenicia)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 불리우는데(눅 4:26) 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이다. 그런데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이다. 이 점은 마치 바로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받은 모세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이다(출 2:10).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無力)한 과부에게서 찾아졌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배교(背敎)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인바(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할 것이다.
‘공궤하게’ - 공궤(供饋)란 문자 그대로 ‘음식을 제공함’을 말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공궤하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간직하다’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에 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왕상 17:10 /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을 삼을 수밖에 없는 과부의 극빈을 나타낸다. 만일 과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종을 부려 땔감을 해오게 하였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땔감을 샀을 것이다.
‘물을 … 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낯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시험(test)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붓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 24:17; 요 4:7).
왕상 17:11 /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청컨대 …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 앞서의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식량이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데 목적도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 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
왕상 17:12 /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당신의 하나님’ -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리어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교류가 많던 베니게의 한 여인으로서 이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신을 호칭한 것뿐이다.
사실 이 과부가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그 순간이다(14, 15절). 아무튼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이 주목된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이다.
‘나는 …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과부에게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눅 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사 42:16; 마 4:16; 골 1:13).
왕상 17:13 /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 말고’ - 두려워에 해당하는 의미는 ‘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지혜의 토대로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라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단순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본절에서 엘리야가 지적하는 과부의 두려움은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기보다 차원이 높은 정서의 대체로서 완결된다. 즉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에’ -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께로의 두려움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개재된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왕상 17:14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처럼 엘리야가 ‘너의 하나님’이 아닌 객관 서술형의 ‘이스라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이방인이며, 적어도 아직은 개종한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
왕상 17:15 /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저와 엘리야와 식구’ - 12, 13절에 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본절에서 ‘식구’,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러 날’ - 여러 날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공궤(供饋)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으로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왕상 17:16 /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통의 기루가 …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혹자는 본절에 묘사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익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써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막 6:41-43).
● 현대 물질문명의 혜택으로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옛날보다 점점 완악해지고 있다. 그 특징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보아도 감사보다는 원망이 많고, 가정에서도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르밧 과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환경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때는 아합왕(874 B.C-853 B.C)의 통치시대였다. 이 아합왕에 대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왕상 16:30)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사람들 보기에도 악한 왕이었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Ethbaal: 바알의 사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 우상을 궁전에 끌어들였고 자신도 바알 신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시어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라고 경고하였지만 돌이키지 않자 비는 물론 이슬까지 3년 반 동안 그쳐 농사를 짓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내까지 마르게 되었다.
이런 가뭄 속에서 요단 앞 그릿시냇가에 살면서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에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던 엘리야는 시냇물이 마르자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라는 말씀을 듣고 일어나 약 12km 떨어진 사르밧으로 갔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본문 속에서 ①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많고 많은 사람 중 이 여인에게 보냈을까? ②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③ 이 여인은 어떻게 순종하는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 중에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잣집으로 보내지 않고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셨는데, 이것이 ‘하필이면’일까? 아니면 ‘다행히도’일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왕의 궁내 대신 오바댜에게 보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하였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이라도 엘리야를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진 것도 없고, 수입도 없고,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원리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
고전 1:26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뜻이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이라고 하셨다(마 19:23-24).
특히 우리 믿음의 식구들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라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헌신하고 봉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연보에 넣는 많은 금액의 헌금보다도 어떤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을 칭찬하셨다. <렙돈>은 당시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인데 탈무드에 보면 연보 궤에 한 렙돈을 넣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부자들이 거창한 목적을 위해 거액의 헌금을 하면 하나님의 일이 쉬워질 것 같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가 정성과 믿음으로 겸손히 드린 적은 헌금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눅 21:1-4).
그뿐 아니라 벳세다 광야에서도 나름대로 어른들, 부자들도 있었겠으나 가난한 어린아이를 통해 수천 명을 먹이는 데 쓰임 받도록 하셨다(요 6:9-11).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적으로 나은 것이 없고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드리자. 그리고 가진 것 없이 가난한 우리를 선택하셔서 세상적으로 적은 것을 드리지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2.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보니 한 여인이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이 여인은 가난한 과부였다. 아들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엘리야는 그녀를 불러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라고 했다. 이때는 가뭄이 극심한 때였다. 물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마실 물이 조금은 있었다.
이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그녀를 불러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라고 한다. 이 여인은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왕상 17:12 /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떡은 없었지만 떡을 만들 수 있는 한 움큼의 가루와 병에는 조금 남은 기름이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쓰시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 3:1-10에 보면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은과 금은 없거니와’ 하고 끝나기 쉽다. 많은 헌금을 드리려고 보니 돈이 없다. 시간을 드리려고 보니 시간이 없다. 재능을 드리고 싶은데 그 재능이 없다. 이처럼 ‘나는 주께 드리고 싶지만 ….’ 하고 실망하고 포기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쓰시려 할 때도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가진 것이 있었다. 왕궁에서 배운 지도력이 있었다. 온유한 성품(민 12:3)이 있었다. 말 잘하는 형 아론(출 4:14)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
3.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라.
여인이 가진 것이라고는 두 식구의 마지막 식량뿐이었다. 그런데 엘리야가 뭐라고 하였나?
왕상 17:13-14 /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을 하는 선지자도 어려운 부탁이요. 여인도 순종하기 쉽지 않은 명령이다.
엘리야가 우리 같았다면 그는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 모른다. ‘하나님, 왜 저런 대책 없는 여자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저 사람은 나를 먹여주기는 고사하고 자기도 먹을 것도 없답니다.’라고 항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보내신 것은 내가 저 여자의 도움을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저 여인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즉각 깨달았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인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명하셨다(왕상 17:9). 그럴지라도 사르밧 여인의 순종 역시 강한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엘리야의 말에 여인도 담대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에게도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도 마음이 흔들렸듯이 사명자들에게도 고난의 파도는 몰아쳐서 흔들리게 한다. 유라굴로라는 광풍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미리 말씀해 주셨다(행 27:23-24). 엘리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르밧에 왔지만, 현실은 상황과 달랐다. 그럴지라도 즉시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증거했다.
▶ 사람들은 종종 먼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그것으로 드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드려라. 그 후에 너와 네 가족을 위하여 주리라’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처음 것을 요구하셨다. 계명 중 첫 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다. 농산물 중에는 첫 소산(민 18:12), 첫 열매(출 23:16), 첫 이삭(레 23:10), 첫 태생(민 3:12)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십일조를 드릴 때도 소득에서 맨 처음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야 한다.
엘리야가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환경이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어느 시대, 어느 장소가 되었든지 ‘먼저’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은 조금 있는 양식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질 때 넘치도록 풍성해진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떡은 자기의 생명과 같은 마지막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것이 그렇게 많아 보일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과부의 두 렙돈이나 떡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믿음에는 항상 선택이 따른다.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영적으로 살 것인가? 육적으로 살 것인가?’ 이럴 때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는 점점 커진다. 엘리야가 처음에는 물 한 그릇을 요구했으나 다음에는 떡까지 요구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커진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적은 것부터 요구하며 차츰차츰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순종함으로 이런 복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 여인은 적은 것을 하나님과 함께 나눔으로 많은 양식을 얻었다. 두 사람이 한 끼니밖에 먹지 못할 것을 가지고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으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러나 하나님 것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그와 같이 부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에게 드림으로 그 여러 식구가 먹었으나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벳세다의 소년은 자기가 가져온 보리떡과 생선을 자신이 먹기 전에 먼저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흡족히 주고도 남을 수 있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수많은 과부들이 이스라엘에도, 이방에도 많았는데 왜 하필이면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보냄을 받았을까? 그것은 그녀가 가난하고, 불쌍하고, 자신의 자녀도 돌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기적, 특별한 복을 받길 원하지만 특별한 믿음을 얻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받을 만한 특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환경이 좋아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다. 사르밧 여인은 최악의 상태였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특별한 믿음을 소유하라.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라.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복이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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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행복한 8가지 이유
➊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등에 옷이 걸쳐져 있으며, 비바람을 막을 지붕이 있고 잠잘 곳이 있다면, 당신은 지구상의 75%의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➋ 만약 당신의 은행계좌나 지갑에 돈이 있고 얼마의 동전이 접시에 담겨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8%의 부유층에 속한다. ➌ 만약 당신이 오늘 아침에 병들지 아니한 채로 일어났다면, 당신은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보다 축복받았다. ➍ 만약 당신이 전쟁의 위험을 경험한 적이 없고 외로운 감옥생활을 해보지 않았으며, 고문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고 배고픔의 고통이 없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고통을 당하는 또 다른 500만 명보다 행복하다. ➎ 만약 당신이 체포 고문 혹은 죽음의 위험이 없이 종교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세계 30억 명의 사람들보다 축복받았다. ➏ 만약 당신의 안녕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보낸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의 축복은 곱절이나 더하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이 20억 명이나 있으니까. ➐ 만약 당신이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를 들고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오직 성숙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으며 사람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➑ 만약 오늘 당신이 누군가와 손을 맞잡을 수 있고 포옹할 수 있으며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치유의 손길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뉴욕에 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이 레스토랑에는 그 주변의 나이 드신 까다로운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주방장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 “손님은 왕이다. 절대로 싸우지 말아라! 손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어라.”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하루는 한 점잖은 할아버지가 오더니 음식을 주문하는데, 감자를 튀겨서 달라고 했다. 감자를 튀겨 오니까 너무 크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썰어서 튀겨 오니까 이번에는 너무 두껍다고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다. 이렇게 몇 번에 걸쳐서 주문하니까, 주방장이 그만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그래도 주인은 옆에서 “순종, 순종, 순종”이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한입에 쏙 들어가게 다시 튀겨서 갖다주었다. 그랬더니 손님이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었다.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그 감자튀김을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은 그 감자튀김 때문에 유명해져 손님이 더 많이 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포테이토 칩’이라는 새로운 메뉴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까다로운 손님의 주문을 다 들어주다 보니까 새로운 메뉴 하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여도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순종하면 ….
❚ 실화(實話) / '카타콤 소식'지 132호(모퉁이돌 선교회 발행)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중국의 감옥에서 출소한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29년 동안 감옥에 계시면서 어떻게 그리 건강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뜻밖에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감옥에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고통당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29년 동안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목사님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가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달걀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달걀이 정말 먹고 싶은데요'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아침, 일어나 눈을 떠보니 땅바닥에 하얀 것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모양은 달걀 같은데, 달걀보다는 좀 작게 생긴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해서 제 몸을 꼬집어보았다. 달걀의 색깔이 약간 파랗게 보였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오리알이었다. 도대체 이 오리알이 어디서 굴러왔는지 생각하며 온 감옥 안을 다 살펴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엉겁결에 오리알의 양 끝을 톡톡 쳐 구멍을 내고는 빨아먹었다. 오리알을 먹고 나서도 '설마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까지 들으시겠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 오늘 달걀 대신 오리알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말씀드린 후 잠을 청했다. 아침에 깨어 보니 어제와 똑같은 그 자리에 오리알이 와 있었다. 참으로 이상해서, 그날 저녁 '하나님! 세 번도 하실 수 있어요?' 하고 기도한 후 잠을 청했다. 다음날 여전히 같은 자리에 오리알이 와 있는 것을 보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도대체 누가 이 오리알을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그리하여 네 번째 날 저녁이 왔을 때, 오리알이 어디서 오는지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기다리다 지쳐 잠을 자려는데 새벽 세 시쯤 되었을 때 구멍으로 오리알이 하나 데굴데굴 굴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커다란 쥐 한 마리가 옆에 있는 오리집에서 오리알을 하나씩 훔쳐다가 그 감옥 안에 갖다 놓는 것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쥐가 물어다 주는 오리알을 먹고, 29년 동안 감옥에서 꼭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목사님은 봄에 감옥의 철장 밖에서 사과꽃 향기를 맡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가을이 되었을 때, '하나님! 사과는 안 돼요?'라고 기도했다. 기도했을 때 '내가 그걸 왜 못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날 밤 하나님은 또 다른 쥐를 통하여 가장 맛이 좋은 붉은 사과를 굴러오도록 하셨다. 그렇게 해서 29년 감옥에 계신 그 목사님은 감기 한번 앓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어떻게 기이한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공급해 주시는가에 대한 감명 깊은 이야기이다.
❚ 성 마틴(St. Martin)과 거지 (전승) / 이 예화는 본문의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라는 대목을 설명할 때 가장 고전적이고 강력한 예화이다. 4세기 프랑스 투르의 주교였던 마틴(Martin)이 아직 군인이었을 때의 일이다. 추운 겨울날, 그는 성문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며 신음하는 한 거지를 발견했다. 당시 마틴에게는 줄 돈이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군용 망토뿐이었다. 마틴은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자신의 망토를 반으로 잘라 거지에게 덮어주었다. 사람들은 반쪽짜리 망토를 입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었지만, 마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밤, 마틴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틴이 낮에 거지에게 주었던 그 반쪽짜리 망토를 입고 계셨다. 주님은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망토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청년 마틴이 나에게 입혀준 것이다.’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이 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다 /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적선을 원하며 다가왔다.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 도와주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거지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받을 때 큰 감격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 마틴' 각색(脚色) /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작은 자'가 누구인지를 구체화할 때 유용하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내일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할아버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온종일 창밖을 살폈다. 하지만 기대했던 주님은 오지 않고, 추위에 떠는 청소부, 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여인,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소년만이 가게 앞을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실망하면서도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목도리를 둘러주고, 화해를 붙여주며 하루를 보냈다. 밤이 되어 할아버지가 ‘주님, 왜 오지 않으셨나요?’라고 묻자,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마틴아, 나는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아갔단다. 네가 차를 대접한 청소부가 나였고, 네가 목도리를 준 여인이 나였으며, 네가 용서한 그 소년이 바로 나였단다.’ 예수님은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인도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 / 테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선행에 대한 교훈을 듣고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테레사에게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라고 말하며 선행을 격려하곤 하였다. 수녀가 되어 오직 주님께 헌신하던 테레사 수녀가 ‘제2의 부르심’이라 부르는 사건을 접하였다. 인도에서 삼등 열차를 타고 다르질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어떤 신비적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무심코 마태복음 25장을 펼치고 읽고 있었는데, 본문 말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테레사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 성서 말씀이 폐부 깊숙이 꿰뚫는 것 같았습니다. 거룩한 말씀의 광채 앞에서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처럼 멈추어 서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테레사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그 부르심 이후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자들이 있는 콜카타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병 환자들을 도울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만지듯 부드럽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십시오.’ 테레사와 함께했던 수녀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봉사가 곧 예배였다. 그들은 손가락 다섯 개를 차례대로 하나씩 구부리는 손짓을 서로 피곤할 때마다 인사처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의미는 ‘You / did / it / to / me’의 다섯 개의 단어로, 마태복음 25장 40절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 마지막 시험 / 현대적인 맥락에서 ‘무관심’과 ‘실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때 효과적이다. 미국의 한 신학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설교 과제를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지금 당장 옆 건물로 건너가 설교 평가를 받아야 한다. 늦으면 점수가 깎인다.’라고 재촉했다. 학생들이 급히 복도를 지나갈 때, 문 앞에 한 남자가 쓰러져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대해 설교하러 가던 학생들 대다수가 신음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심지어 그를 밟고 지나간 학생도 있었다. 머리로는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실재하는 고통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반면, 성적이 낮고 평범했던 한 학생은 설교 시간에 늦을 것을 각오하고 그를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 그날의 설교 합격자는 1명뿐이었다.
❚ 13살의 바비 힐이라는 미국 군인의 아이 / 어느 날 이 아이는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책을 읽고 유럽 지역 미 공군 사령관 리처드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산 아스피린 한 병을 보냅니다.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처 박사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린제이 장군은 이 감동스런 소년의 이야기를 방송국에 전해 주었고, 이 이야기가 방송에 나가자 유럽 사람들은 40만 달러어치의 약품을 모아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제공한 비행기 편에 바비 군까지 동승시켜 슈바이처 박사에게 그것들을 보냈다. 그 약은 아프리카 빈민들을 치료하는 데 귀중하게 쓰였다. 한 어린이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큰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다.
❚ 『새벽을 깨우리로다』란 책으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 / 70년대 청계천 뚝방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건강도 연약해지고, 아무리 도와주어도 좋은 결과도 나오지 않자 낙담하여 빈민 목회를 그만 접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떤 집에서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세 아이가 기진해 누운 채 힘없이 울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우느냐’라고 물으니 그 중 큰 애가 힘없이 ‘배고파요’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행상하는 어머니가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구류되는 바람에 아이들이 사흘 동안 굶고 있었다. 그 중의 막내 아이가 김진홍 목사님을 바라보며 ‘배고파요’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 아이의 눈에서 순간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장면을 김 목사님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때 세 살배기 막내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엄마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살짜리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눈물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불과 2, 3초였지만 분명히 예수님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에 포개져 나타나 나를 깊은 눈으로 보시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 컴패션(Compassion-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 에버렛 스완슨 목사는 한국 전쟁 중인 1952년에 미군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집회를 마치고 종로 부근의 한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눈 쌓인 종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쓰레기 차에 쌓인 쓰레기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이 있는 것을 보고 뛰어나갔다. 손짓과 발짓해 가며 어린아이의 손을 보았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목사님은 직접 쓰레기 차 위에 올라갔다. 트럭 위에 올라갔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추운 날씨에 종로에서 얼어 죽은 전쟁고아들의 시신이었다. 그는 지난밤 그 아이들과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편히 잤다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 있는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에버렛, 보았느냐? 이제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래서 시작된 사역이 ‘컴패션’이다. 주님의 음성 앞에 응답했던 한 사람을 통해 전쟁고아 수십만 명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
❚ 탤런트 최불암(2026년 기준 만 85세) 씨는 가톨릭 신자이다. 연예인 교회에서 예배 후, 점심 식사하는 자리에서 어떤 분이 최불암 씨에게 물었다. “제가 볼 때, 최 선생님은 최고의 연기자인데, 그 연기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특이한 웃음을 띠며 이렇게 말했다. “늘 연기를 하면서 가장 처음 받은 연극 수업을 기억하는데, ‘내가 얼마나 빨리 그 대사에 나오는 인물과 같아지기 위해서, 나를 비우고 또 비워서 극 중 인물의 인격으로 나를 채우느냐?’라는 것이 나의 연기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나를 잘못 비워서 내가 내 멋대로, 내 성품대로 하려고 하면, 나도 연기를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최불암 씨의 말 중에 ‘연기자가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또 비워서 극 중의 인물의 인격으로 채워야 한다.’라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채워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엡 4:22-24).
❚ 프랑스에 레오날드 우드경(Sir. Leonard Wood)이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더니 반가워하며 내일 식사나 같이하자고 초대했다. 레오날드 경이 다음날 왕궁에 들어갔더니 왕이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저를 식사에 초대해서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왕이 ‘어제 식사에 초대할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안 오는 줄 알았소.’라고 말할 때 명언을 말했다. ‘폐하! 왕의 초대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 록팰로우 어머니 열 가지 교훈 / ➊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기라. ➋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기라. ➌ 주일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리라. ➍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정하라. ➎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➏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➐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➑ 아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 ➒ 남을 도울 수 있다면 힘껏 도우라. ➓ 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그는 어머니의 교훈을 항상 마음에 두고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는 돈을 사용하는 3대 원리를 말했다. “첫째 열심히 벌어라. 둘째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셋째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 목사는 무엇보다 많이 나누어 주라는 세 번째 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인생은 돈이 잘 벌어질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돈 벌어서 저축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함께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