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빈 터만…
--------- `박흥숙 사건’ 현장 무등산 덕산골을 가다
▲ 현재 덕산골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열평도 채 되지 않은 빈터에서 박흥숙씨 가족의 생활을 추측할 뿐이다.
“무당골 말인가요?”
사람들은 무등산 덕산골을 지금도 `무당골’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증심사지구관리사무소 공익근무요원 임정섭(24)씨는 “무당들이 살지는 않지만 이곳에 사람들이 자주 와서 기도나 굿거리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무당골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지난 77년 4월 철거반원 살해사건이 일어났던 무등산 덕산골.
의재 허백련미술관을 가기 전 갈림길에서 줄줄이 늘어진 식당을 지나쳐 토끼등으로 연결된 등산로를 따라 20분 정도 걷다 보면 덕산골을 만날 수 있다. 덕산골 길목에 설치된 `산불 조심’이라 씌어진 펼침막이 이곳을 찾은 이들을 맞이했다. 덕산골에 치성을 드리러 온 이들이 촛불을 끄지 않아 산불이 일어날까봐 관리사무소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 중턱에 위치한 덕산골은 일상적인 주거생활을 할 수 있는 입지조건이 아니었다. 일명 `무등산 타잔’이라 불렸던 박흥숙씨 일가가 살았던 덕산골.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ㄷ’자형의 빈터에서 박씨 가족의 생활을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옆에 드문드문 장판이나 방석과 촛불 자리만이 지금의 덕산골을 보여줄 뿐이다.
기도나 굿거리하러 찾는 이 많아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이달 중순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지역 출신 감독과 제작자가 의기투합해 “박흥숙을 통해 70∼80년대 암울했던 시대상을 다루겠다”고 밝힌 영화〈무등산 타잔, 박흥숙〉(감독 박우상·제작 백상시네마). 이번 영화화를 계기로 28년 전 사건으로 묻혀지고 잊혀져 가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의 실체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도 새삼 커지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인 78년 2월 박순천 김옥길 박대선 이항녕 손인실 정희경 박병배 오지호 등 지역 인사들이 모여 `박흥숙 구명을 위한 회’를 꾸렸다. 일명 `무등산 타잔’으로 불러진 살인범 박흥숙을 살리기 위해 뜻을 같이 한 것.
이들은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고도성장의 그늘 아래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웃들을 방치해 온 결과로 발생한 도시빈민지구의 무주택 문제가 첨예화된 표상”이라 규정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이나 개인이 일부 무책임하고 관료적인 말단행정의 횡포 앞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라고 도시빈민층의 아픔으로 설명했다. 이렇듯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도시빈민층에 가한 사회폭력이 빚은 비극으로 읽혀졌다.
77년 4월20일, 광주 학운동 증심사 계곡 무등산 덕산골. 훗날 언론에서 `무등산 타잔’이라 이름붙인 박흥숙(당시 23)은 그날 자신의 집을 불태우고 옆 집까지 무자비하게 철거하던 철거반원 4명을 철거용 쇠망치로 살해했다. 평소 산짐승을 내쫓으려 만들었던 화약총으로 이들을 위협해 묶은 뒤 “시장과 담판짓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다 사건이 일어났다.
산 중턱에 무허가 움막을 짓고 살았던 이들 대부분은 어렵게 살아가던 빈민층이었다. 동네를 형성했다기보다 몇 채의 가구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 70년대 초부터 광주 시내에 본격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일대 땅값이 폭등하면서 주택값 역시 급상승했다.
80년대에 들어서 주택증가율이 인구증가율보다 조금 높아졌지만 서민들의 주택 마련은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었다. 사건 이후 박흥숙씨 가족은 생계가 어려운 탓에 어머니 친구집에서 머물다 동구 운림동 `배고픈다리’ 근처 밭 한편에 천막을 짓고 살았다.
전국체전 대비 대대적 정화사업
철거작업이 이뤄지게 된 배경은 광주시의 정화사업과 관련이 있다. 광주시는 1977년 10월 광주에서 개최될 제58회 전국체전을 대비해 무등산 일대에 대한 정화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때 무등산에 있던 무허가 건물을 철거했다.
박흥숙은 법정에서 “집을 지은 지 오륙 년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어 우리들은 그런 산골에까지 계고장(경고장)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또 그 밑 신림부락에는 그런 종이쪽지가 일곱번이나 나왔지만 그때까지 무사하다고 하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박흥숙의 여동생 박정자씨 또한 “오빠가 철거반원들에게 (위에서) 보이지 않게 땅굴을 파 공부방을 만들겠다고 하자 그들도 이를 순순히 허락했다”고 말했다.
철거작업은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되어 왔다. 전라남도는 1975년 무등산 도립공원 기본계획을 수정 보완한 뒤 원효계곡에 이르는 무등산 관광도로와 함께 증심사에 이르는 무등산 진입로 포장공사를 완공했다. 또 공고된 기본계획에 따라 원효계곡과 증심사 주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는 등 조경사업을 진행했다.
전라남도는 무등산 개발제한구역 내에 살고 있는 원주민 180여 가구를 집단시설지구로 이주하게 해 토산품 매점이나 토산 음식점을 허가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1983년 건설부의 불법건축물 양성화 조치에 따라 몇 해간 이뤄진 철거작업은 백지화됐다.
증심사 자락에 30년 넘게 살았던 한 주민은 “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았응게, 철거한다고 나가라고 해도 답답하고 막막하지. (이사갈) 돈이 어디 있간디. 그래도 박흥숙 사건 후로는 철거 대상자들한테 국가에서 몇 푼이라도 줬제”라고 그때를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