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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글 Ⅱ.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 1. 42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2. 25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Ⅲ. 25장과 42장과의 존재론적 구조의 비교 분석 1. 보조를 위한 40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2. 25장과 42장의 부정합성과 한정형식이론에 의한 해결 3. 한정형식이론에 의한 해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1장 해석 Ⅳ. 끝맺는 말 |
Ⅰ. 머리글
노자사상에는 존재론이 없다는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노자의 도덕경이 후대로 가면서 다듬어졌고, 다듬어지는 과정에 존재론이 삽입되었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자사상은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처세술이나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한 통치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노자사상에 존재론이 있다는 시각이 많다. 동양의 유학, 불교, 도가 사상 중 불교와 도가사상은 존재론이 있고, 선진유학(先秦儒學)에는 존재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도 송나라 때 가서 불교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유학(新儒學)으로 변모되면서 존재론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이론은 통행본 1장, 25장, 40장, 42장에 잘 드러나 있다. 1장을 제외하고, 25장, 40장, 42장에서 찾은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분석은 필자가 이미 앞에서 실행한 적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42장, 25장, 40장 순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의 정당함을 1장의 해설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 지금까지 필자가 분석한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의 문제점을 찾아 수정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그 문제점을 제시하고, 수정의 핵심에 한정형식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한정형식은 서양 철학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져 온 용어이다. 이것으로 고대 동양철학의 존재론의 구조를 밝힌다는 것은 엉뚱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묘하게도 유용하다는 점을 필자는 발견했다. 장자와 왕필은 필자가 사용한 ‘한정형식’ 대신 ‘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한편 존재론과 인식론이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Ⅱ.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
노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존재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도(道)이다. 그럼 그 도가 아닌 존재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42장을 먼저 살펴보자. 42장은 죽간본에 없기 때문에 후대에 존재론적 구조를 잘 드러내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42장에는 음과 양과 충기라는 특별한 용어가 나오기 때문에, 많은 해설가들이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음양이론에 따라 분석하기도 한다. 이 방식을 여기서는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분석’이라 하겠다. 이 방식은 이론 정연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장과의 정합성(整合性, consistency)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한다. 특히 죽간본에도 있는 25장과의 부정합성을 피하기가 어렵다. 이 부정합성을 피하기 위한 다른 42장의 분석 방식으로 ‘언어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분석’이 있다. 왕필은 이 방식을 ‘언어’ 대신 ‘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필자는 좀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용어인 ‘한정형식’을 사용해서 ‘한정형식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분석’이라 했다. ‘말’이나 ‘한정형식’은 둘 다 언어와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에 넓게는 ‘언어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분석’에 해당한다. 42장에 대한 이 두 가지 분석 중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분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42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고물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인지소교, 아역교지. 강양자, 부득기사. 오장이위교부.
도가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으며, 삼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젊어지고 양을 안고 있는 셈이며, 충기를 통하여 조화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고아가 되는 것’(孤)이나, ‘덕이 적은 것’(寡)이나, ‘복이 없는 것’(不穀)인데, 임금들은 그런 것으로서 자신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만물이란 혹시 거기에서 덜어버리더라도 더하여지게 되고, 혹시 거기에 더한다 하더라도 덜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훈하고 있는 말로서 나도 역시 교훈을 해볼까 한다. 강하고 억센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교훈의 아버지로 삼으려 한다.
42장에는 도가 낳은 숫자 일, 이, 삼이 나온다. 이 숫자들은 각각 무엇을 말하는가? 이 숫자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가 달라진다. 우선 이 장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이라는 숫자이다. 삼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으니, 만물은 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삼은 본문의 해석에 따라 충기(冲氣)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이다. 물론 이때의 충기는 비어 있는 기운으로 음기와 양기가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이다. 이때의 삼(三)은 세 기운이 모두 있지만 아직 만물을 만들기 전이다. 왜냐하면 삼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으니 삼 자체는 만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가 일을 낳는다고 할 때의 일은 충기이며 무로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40장에 만물(萬物)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에서 무가 나오고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도식이 그려진다. 그러면 이(二)와 삼(三)이 모두 유가 되든지 최소한 삼(三)은 유가 된다. 그런데 이(二)에서 삼(三)이 나온다고 했으니 이(二)와 삼(三)을 무엇으로 보아야만 노자의 전존재(全存在)를 설명하는데 무리가 없는가?
이(二)를 음기와 양기로 보면 42장 문맥상으로 봤을 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二)가 결정되면 다음과 같이 일, 이, 삼이 모두 결정된다. 일은 충기(沖氣) 즉 무(無)이고, 이는 음기+양기이며, 삼은 충기+음기+양기이다. 그래야 “삼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말과 일치한다. 필자도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가 맞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발표한 글이나 강의에서도 이(二)를 음기와 양기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이 관점을 수정하고자 한다. 수정하고자하는 이유는 존재론적 지위에 따른 부정합성이 발견되었고, 그 부정합성을 해결하기 위해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방식을 거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42장의 뒤에 나오는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음양 중에서 음이 양보다 존재론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고아가 되는 것’(孤)이나, ‘덕이 적은 것’(寡)이나, ‘복이 없는 것’(不穀)인데, 임금들은 그런 것으로서 자신을 일컫는다.”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고(孤), 과(寡), 불곡(不穀)이 모두 음양이론으로 보면 양보다는 음이다. 왕이 이런 음에 해당하는 것들로 자신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강하고 억센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교훈의 아버지로 삼으려 한다.”에서 노자는 강하고 억센 양의 기운으로 사는 것보다 음(남들이 싫어하는 고(孤), 과(寡), 불곡(不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겠다고 한다.
결국 42장은 음양이론으로 보았을 때, 만물은 세 가지 기운(충기, 음기, 양기)의 조화로 만들어졌으며 그 존재론적 지위가 높은 것부터 들면 충기, 음기, 양기 순이다. 그런데 이것이 25장과의 부정합성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제 25장과 어떤 부정합성 문제가 발생하는지 25장을 살펴보자. 통행본 25장은 죽간본에서는 11장에 나타나고, 백서본에서는 98장에 나타난다. 이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행본 중 왕필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 25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통행본(왕필본) 제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蓼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유물혼성, 선천지생, 적혜료혜, 독립불개,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뒤섞여 이루어진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니, 적막하고 쓸쓸하게 홀로 있어도 바뀌지 않고, 두루 주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그것에 도라고 이름 붙이고, 억지로 크다고 이름 붙였다. 크다는 것은 간다는 것을 말하고, 간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을 말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그러니 우주에는 네 개의 큰 것이 있고, 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그리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
우선 25장의 첫 구절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며 뒤섞여 이루어져 무질서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노자가 말하는 천지(天地)는 뒤섞여 있지 않고 질서 잡혀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플라톤의 우주론과 닮아 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 보면 데미우르고스 신이 뒤섞여 있는(무질서한, chaos) 것을 질서 잡힌 우주(cosmos)로 만들어간다. 즉 데미우르고스 신이 질서 잡기 전에 뒤섞여 있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데미우르고스 신이 ‘질서 잡기 전의 우주’와 ‘질서 잡은 후의 우주’를 구분하듯이 도덕경도 질서 잡힌 천지와 천지보다 더 앞선 것으로 뒤섞여 있는(무질서한) 우주를 상정하고 있다.
노자는 천지보다 앞서 있는 것은 홀로 있다(獨立)고 했다. 그렇다면 천지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이 전제(前提)된다. 천지는 홀로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42장과의 부정합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음양이론으로 살펴보자. 42장에서 천지(天地)는 음양(陰陽)이 함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때의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노자의 존재론은 질서 잡힌 우주라면 음양이 함께 작동해야 하는데 비해 질서 잡히기 전의 우주는 음은 음으로서 양은 양으로서 그 역할에 맞는 작동을 하지 못하고 뒤섞여 있는 상태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천지보다 앞서 있는 것은 독립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개(不改)라 하여 고쳐지지 않은 것이라 했다. 이것은 천지는 고쳐진(改) 것이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즉 이것은 음과 양이 합쳐져서 함께 작동하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따로 있을 때와 다른 새로운 존재로 고쳐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존재(질서 잡힌 우주인 천지)는 주행(周行)하면 죽는 위태로움(끝남)이 있게 되는데 비해 질서 잡히지 않은 우주는 주행해도 위태로움이 없다.(周行而不殆)
여기서 질서 잡힌 상태로 주행한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됨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위태로움이 있게 된다. 거기에 비해 질서 잡히지 않은 상태로 주행한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위태롭지 않기 때문이다. 주행은 이루어지만 생성소멸의 과정이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이 세계가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고 도덕경 25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때의 주행은 어떤 주행인가? 노자는 이 주행을 도(道)라고 말하며, 주행 중에 가장 큰 주행이기 때문에 대(大, 크다)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주행인 도(道)를 노자는 간다는 것(逝), 멀어진다는 것(遠), 되돌아온다는 것(反)이라고 말한다. 도를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꾸어 할 수도 있겠다. 가는 것 중에 가장 크게 가는 것은 무엇인가? 멀어지는 것 중에 가장 멀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되돌아오는 것 중에 가장 크게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크게 가고 가장 크게 멀어지고 가장 크게 되돌아온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곳이 어디인가?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어서 어떠한 한정형식으로도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정형식으로 질서 잡혀 있는 것은 그 사물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정형식이 있는 세계는 유(有)의 세계이다. 거기에 비해 한정형식이 없는 세계는 무(無)의 세계이다. 그래서 가장 큰 도의 주행은 모든 유의 세계가 무의 세계로부터 나오고,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크게 간다는 것(逝)은 생성해서 소멸되어(죽어) 가는 것이다. 가장 크게 멀어진다는 것(遠)은 생성(탄생)에서 가장 멀리 간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되돌아온다는 것(反)은 다시 무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무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래서 도는 억지로 말하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는 25장에서 도도 크지만,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저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고 말한다. 도는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무의 세계에서 유의 세계로 나왔다가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 자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보다 더 큰 과정이 없으니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은 양기 중에서 가장 큰 것이고, 땅은 음기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 중에서 가장 큰 것인가? 만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왕필본에서는 사람대신 왕이 나온다. 이것은 왕이 사람을 대신한 것이며, 왕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만물은 음기와 양기가 충기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만들어 진 것이다.
Ⅲ. 25장과 42장과의 존재론적 구조의 비교 분석
25장에서 천지보다 앞선 것은 유물혼성(有物混成)이었다. 이때의 천지(天地)는 양기와 음기가 충기와 조화를 이루어 나타난 것이다. 즉 유이다. 그러면 유에 앞선 것이 무인데, 이때의 무(無)는 뒤섞인 상태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것(有物混成)이다. 여기에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질서를 잡으면 유가 된다. 25장에서는 유를 천지로 보았다. 천지로 보면 사물을 양과 음으로 대비시켜 보는 것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음과 양으로 대비시켜볼 수 있기 때문에 유의 세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왕필은 이(二)를 음과 양으로 보지 않고 한정형식만 넣어서 풀이하고 있다. 그는 물론 한정형식이라는 용어 대신에 ‘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일, 이, 삼에 대한 왕필의 주석을 살펴보면서 일, 이, 삼에 해당하는 존재 용어들을 정리해보자. 다음은 42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이다.
만물은 가지각색으로 드러나지만 그 귀착점은 하나(一)이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게 하는가? 없음(無)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없음으로 말미암아야 하나가 되니, 하나를 없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無)을 하나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마침내 셋이 생겨난다. 없음(無)에서 있음(有)으로 가는 셈은 여기에서 다하니 이 다음부터는 도의 갈래가 아니다.
왕필은 하나인 무(無)를 무라고 말해버리면, ‘하나인 무(無)와 말로 표현된 무’ 둘이 된다고 했다. 말로 표현된 무는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이다. 왜냐하면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는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 아닌 모든 것과 구분되면서 한정되기 때문이다.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는 유이다. 왜냐하면 무라고 말하기 전에는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서(獨立不改) 무이지만, 무라고 말하는 순간 질서 잡혀 있는 상태로 바뀌어(對立改) 유가 된다. 여기서의 대립은 한정되지 않는 것과 한정되는 것의 대립이 성립되면서 원래의 무에서 개조(改造)된 무로서 유가 된다. 왕필은 이(二)가 나오는 이유를 명쾌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마침내 셋이 생겨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때의 하나는 무이다. 둘은 말해지지 않은 상태의 무와 말해진 후의 무이다. 이때의 하나로서의 무와 말해지지 않은 상태의 무는 다른 무인가 같은 무인가? 같은 무라면 둘을 벗어날 수 없어 셋이 아니다. 다른 무라 해야 셋이 된다. 그럼 다른 무라 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자. 하나로서의 무는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자가 없는 ‘절대무’이고, 말해지지 않은 무는 말해지는 무와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무’로 지칭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대자가 없는 절대무 한 개, 말해지지 않은 상대무 한 개, 말해지는 무(한정형식을 지니기 때문에 사실은 유) 한 개로 세 개가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셋은 만물을 낳는다.”(三生萬物)와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도에서 시작하여 만물에 이르기까지 알관된 존재론적 흐름을 밝혀내는 일이다. 왕필도 충기(沖氣)가 하나(一)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것은 왕필도 충기를 ‘하나로서의 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42장의 글이 일관성을 지니려면, 삼(三) 속에 음기와 양기가 들어가 있다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충기와 음기와 양기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낳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왕필은 이것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필이 노자의 존재론을 음양이론으로 풀이하는 위의 구절(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을 신뢰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통행본 도덕경 81장 중에 음과 양을 언급한 곳은 42장뿐이다. 기(氣)를 언급한 것은 통행본 10장, 42장, 55장이다. 이 중에서 10장과 55장은 기를 음과 양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55장은 죽간본에도 있지만, 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왕필이 음양이론을 신뢰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의 주제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언급에 머물겠다.
필자도 이번 연구가 진행되기 전까지 음양이론을 노자의 존재론에 적용했었다. 그래서 42장의 “도가 일을 낳고” 라고 할 때의 ‘일’은 충기(沖氣 無)로 왕필과 같이 보았다. “일이 이를 낳고”라고 할 때의 ‘이’를, ‘무’와 ‘무라고 말해진 무’의 둘로 본 왕필과 달리 음기와 양기로 보았다. 그리고 이가 삼을 낳고 할 때의 삼은, 하나인 무와 둘로 갈라진 무를 합쳐 삼으로 본 왕필과 달리 충기, 음기, 양기로 보았다. 그래서 삼기(충기, 음기, 양기)가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하면 42장의 구절인 “셋은 만물을 낳는다.”(三生萬物)와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구절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여 무난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보다 깊이 있게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검토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이렇게 하면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에 부정합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노자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것은 도이다. 40장에서 노자는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42장에서 도가 일을 낳는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일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이다. 40장과 42장을 함께 분석하면, 도에서 무가 나오고, 무에서 유가 나오고, 유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 42장에서 도가 일을 낳고, 일이 이를 낳고, 이가 삼을 낳고, 삼이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42장의 일(一)을 충기로 보고, 이(二)를 음기와 양기로 보면, 삼(三)은 충기(沖氣), 음기(陰氣), 양기(陽氣)이다. 이렇게 해도 40장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일(一)인 충기는 무(無)이다. 삼(삼)은 유(有)이다. 왜냐하면 충기와 음기와 양기의 세 가지가 있으면 구체적인 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삼(三)의 세 가지가 어떻게 조화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사물이 만들어져 만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삼(三)이 만물을 낳는다’는 42장과 ‘유(有)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40장과는 정합성이 확보된다. 이제 이(二)가 남는데 이(二)는 무와 유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 즉 음기는 무에 가깝고 양기는 유에 가깝기 때문이다.
위 문단의 내용을 42장의 순서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된다.
도 → 일(一, 무, 충기) → 이(二, 무와 유의 중간, 음+양) → 삼(三, 유, 충기+음기+양기) → 만물(萬物, 충기+음기+양기의 다양한 조화)
위의 구조를 25장과 비교했을 때 부정합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그리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을 때, 음양이론을 적용시키면 땅은 음의 대표이고, 하늘은 양의 대표이며, 사람은 만물의 대표이다. 그래서 25장에서 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혹은 사람의 대표인 왕)도 크다고 했다. 그리고 음은 무에 가깝고 양은 유에 가깝다.
위 25장의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道法自然)에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도가 저절로 그러하지 더 이상 어떤 것을 본받는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25장의 내용을 본받는 순서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된다.
사람(만물) → 땅(음, 무에 가까움)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도(무)
25장의 구조는 42장의 구조를 반대방향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방향을 바꾸어 본받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앞에 두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도(무)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땅(음, 무에 가까움) ← 사람(만물)
25장의 구조를 42장의 구조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25장 : 도(무)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땅(음, 무에 가까움) ← 사람(만물)
42장 : 도 → 일(一, 무, 충기) → 이(二, 무와 유의 중간, 음+양) → 삼(三, 충기 +음기+양기) → 만물(萬物, 충기+음기+양기의 다양한 조화)
노자의 사상에서 양보다 음이 도에 가깝다. 이것은 42장의 “강하고 억센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하고 억센 양보다 음을 강조한다. 노자가 양보다 음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면 42장의 순서는 일치하지만, 25장의 순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양)과 땅(음)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부정합성을 해결하려면 노자가 생각한 하늘은 음양이론에서 말하는 양이 아니거나, 음양이론에서 하늘을 양으로 보는 경우 노자가 음양이론을 따르지 않거나 이다. 아마 왕필은 후자를 택한 것 같다. 노자의 사상에서 음이 도에 가까운 것은 통행본 40장을 보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1. 보조를 위한 40장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
40장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반자도지동, 약자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유약한 것이 도의 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
음양이론에서 약자는 음이고 강자는 양이다. 약자가 도의 작용이라는 것은 음이 도에 가깝다는 말이다. 도에 가까운 것은 유보다는 무이다. 그러면 음이 무에 가깝고, 양이 유에 가깝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유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柔弱勝剛强, 36장),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弱之勝强, 柔之勝剛, 78장) ‘작은 나라 적은 백성’(小國寡民, 80장) 등을 강조하고 있다. 노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였다. 약한 것을 음으로 보고 강한 것을 양으로 보았을 때, 음이 양을 이긴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음의 존재론적 지위가 양의 존재론적 지위보다 높다는 말이 된다.
2. 25장과 42장의 부정합과 한정형식을 통한 해결
25장에서 양의 대표인 하늘의 존재론적 지위가 음의 대표인 땅보다 더 높다. 그 이유는 땅이 하늘을 본받고 하늘이 도를 본받아서, 하늘이 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양이론을 노자의 존재론에 적용했을 때, 25장의 존재론적 구조와 42장의 존재론적 구조 사이에 부정합성이 나타난다. 25장에서는 양의 존재론적 지위가 높고, 42장에서는 음의 존재론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노자가 도덕경에서 음을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양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음을 강조해서 균형을 맞추려고 하였다는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해결책이 되려면 노자가 25장에서 하늘에게 땅보다 높은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말아야 했다. 이것을 부여한 이상 음과 양의 존재론적 지위가 대등하다는 이론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25장과 42장의 존재론적 구조의 부정합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음양이론을 유지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음양이론을 포기하는 길이다. 음양이론을 유지하는 길은 하늘을 음으로 보고 땅을 양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것은 새로운 음양이론을 만드는 방법인데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왕필은 음양이론을 포기하는 두 번째 길을 간 것으로 보인다. 왕필은 장자가 제물론에서 제기한 ‘말로 표현된 존재’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존재’의 구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사용한 ‘말’ 이라는 용어를 필자는 정밀하게 논구된 서구의 존재론적 용어인 ‘한정형식’으로 대치하여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제 1장을 제시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존재론적 구조가 바르게 된 것인지 확인해보자.
3. 한정형식을 통한 해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1장 해석
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라고 (생각해서 말)할 수 있는 도는 (한정된 채 굳어진 구체성을 띄므로 소멸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항상의 도가 아니다. (한정해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한정된 채 굳어진 구체성을 띄므로 소멸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이 한정되지 않)음으로 하늘과 땅이 시작되고, 이름 있(어 한정되어 구체성을 띰)음으로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한정해서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을 때 그 (구별이 없는) 묘한 세계를 볼 수 있고, (한정해서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을 때 그 (구별이 있는) 경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 두 세계는 같은 곳(항상의 도)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유와 무로) 달리 한다. (이) ‘같음’을 일러 모호함(玄)이라 한다. (명석판명한 곳이 아니라) 이 모호하고 모호함이야말로 수많은 묘함의 입구이다.(모호함을 알아야 수없이 많은 묘함을 만날 수 있다.)
도덕경 1장은 노자의 말들을 이해하기 위한 관문이다. 물론 이것은 죽간본에 없기 때문에 후대에 해설가들에 의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많다. 1장의 구절들은 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개괄한 것으로 보인다. 1장이 존재론과 관계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노자사상에 있어 궁극자인 도와 그것에서 나온 무와 유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장이 인식론과 관계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궁극자인 그 도와 그것에서 나온 무와 유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道可道)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도는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은’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러면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도에 대한 한정형식이다. 도를 도 아닌 다른 것과 구분하는 한정형식이다. 그러면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인식된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非常道)는 것이 그 다음 구절이다. 항상의 도가 아니라는 말은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인식된 도는 생성과 소멸을 겪어 항상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역으로 말하면 한정형식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인식된 도는 항상 지속될 수 있는 도라는 말이다.
한정형식이 들어간 도가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정형식이 들어간 도는 구체화된 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체화(concretization)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띈 상태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시멘트와 모래를 섞고 물을 넣은 상태에서 어떤 틀 속에 두면 어느 시간이 지나 그 틀의 형태를 띈 상태로 굳어져 버린다. 굳어진 이것을 우리는 콘크리트라고 한다. 이런 원리를 확대하여 모든 곳에 적용했을 때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콘크리트화(구체화)되면 규정된 채로 장기간 가게 된다. 그래서 파괴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낡아가기 때문에 항상(恒常)을 유지하지 못한다.
어떤 것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有物混成)에 어떤 틀을 넣어서 구체화시키는 것을 ‘한정형식이 진입했다고 한다. 한정형식이 들어가 구체화된 것은 반드시 생성 후 소멸하게 된다. 반면에 한정형식 자체는 항상성(恒常性)을 지닌다. 한정형식에 해당하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eidos),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 모두 영원해서 생성과 소멸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구체화된 사물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생성 소멸을 겪는다.
물질적인 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 콘크리트화된 건물도 100만년 정도를 견디기 어렵고, 지구도 100억년을 견디기 어렵다. 어떤 물체든 구체화되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낡아져서 진입했던 한정형식이 퇴출된다.(빠져 나간다.) 한정형식이 빠져나가면 그 사물은 소멸된다. 정신적인 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하늘은 어떤 것이다.’고 한정형식을 넣어서 규정해야만 우리는 하늘을 하늘이 아닌 다른 단어와 구분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규정된(생각하고 말해진) 하늘에 대한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소멸되고 새로운 하늘의 개념이 생성된다.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늘과 근대인이 생각했던 하늘과 현대인이 생각하는 하늘은 다르다. 왜냐하면 규정된 개념은 변증법에 따라 진전(進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名可名)은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소멸을 피할 수 없어 항상성을 잃게 된다.(非常名)
천지(天地)라고 하면 이미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이 붙여 있다. 그래서 구체화된 세계이며 유(有)의 세계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한정형식이 진입했다는 것이고 어떤 한정형식이 진입했느냐에 따라 수많은 사물(萬物)이 생성된다. 그래서 노자는 유명(有名)을 만물의 어머니라 했다. 거기에 비해 이름을 붙이지 않아 구체화되지 않은 곳은 무(無)의 세계이다. 이 무의 세계를 천지의 시작이라 했다. 무에서 한정형식을 부여하여 이름을 붙이는 데서 천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생각을 하면, 그것에다 한정형식을 진입시켜 그것의 모양(형상)이 드러나서 다른 것과 구분되기 시작한다. 그것과 다른 것을 구분할 줄 알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알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바르게 안다고 한다. 이때의 정의를 영어로 데피니션(definition)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디파인(define, 한정하다. 범위를 정하다.)의 명사형이다. 즉 우리가 무엇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것을 한정하는 형식을 안다는 의미이다. 한정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되는 세계가 유의 세계이다. 무엇의 경계(한정형식으로 형성된 정의)를 보려고 하면 항상 유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물론 이 유의 세계는 25장에서 밝힌 것처럼 개조된 세계이며 변화를 겪게 될 세계이다.
거기에 비해 무엇의 경계(한정형식으로 형성된 정의)를 보려하지 않고 뒤섞여 있어 모호한 상태로 있는 묘한 세계를 보고자 하면 항상 무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현대 형이상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왔다. 즉 철학의 방법이라는 것은 명석⦁판명하고도 확실한 전제를 독단적으로 명시해야 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전제들 위에 연역적 사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명석판명하고도 확실한 전제를 명시하고자 하는 철학적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명석판명하고도 확실한 전제는 바로 한정형식에 의한 정의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구축되는 것이다. 노자는 1장에서 한정형식이 진입하기 이전의 모호한 무의 세계가 전개하는 그 묘함을 보고자 하는 철학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자는 한정형식이 진입하지 않은 무의 세계와 한정형식이 진입한 유의 세계가 모두 같은 곳에서 나왔고 이름이 다를 뿐이다(同出而異名)고 말한다. 그러면 이 둘의 세계는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제처럼 두 아이인가, 아니면 동일한 한 아이인가? 만약에 두 아이라면 도(道)라는 어머니가 무(無)라는 아이를 낳고, 그 다음에 유(有)라는 아이를 낳은 것이 된다. 40장과 42장에 충실히 따르면 도가 무를 낳고 무가 유를 낳았으니, 무가 유의 어미가 되고, 도는 유의 조모가 된다.
그런데 무와 유가 이름이 다를 뿐이라고 했으니 동일한 아이일 수 있다. 다만 이름이 없을 때의 아이와 이름이 있을 때의 아이의 차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김춘수 시인의 눈에 비친 꽃은 동일한데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은 그것이 다른 사물과 뒤섞여서 모호한 상태로 무질서하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이 말은 꽃이라는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다른 사물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자의 무와 유는 도가 낳은 두 아이가 아니다. 동일한 아이이다. 다만 이름을 붙인(한정형식이 진입한) 아이와 이름을 붙이지 않은(한정형식이 진입하지 않은) 아이의 차이에 불과하다. 이것을 두 아이로 보면 노자의 존재론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 구절에서 “같음을 일러 모호함(同謂之玄)”이라 했다. 모호함이란 경계가 없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은 무와 유를 동일함으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동일함을 일러 모호함이라 하고 모호함이 묘함의 입구라면, 그 다음 구절 “모호하고 모호함이 수많은 묘함의 입구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는 말은 결국 동일함을 아는 것이 묘함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동일함을 강조하는 모호하고 모호함(玄之又玄)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무와 유만 동일한 곳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 한 것(同出而異名)이 아니라 도(道)와 무(無)도 동일한 곳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한 것(同出而異名)이 아닌가. 그리고 같은 입장에서 유(有)와 만물(萬物), 나아가 도(道)와 만물(萬物)도 이름만 달리한 것일 수 있다. 한정형식으로 분명하게 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면 수많은 묘한 세계의 문(衆妙之門)을 열어 볼 수 있을 것(故常無欲以觀其妙)이다.
한정형식을 중심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문인 1장을 살펴보니 무리 없이 해석되었다. 이것은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가 한정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한정형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노자의 도덕경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위대한 사상들의 존재론도 모두 해석이 될지 모르겠다. 특히 하이데거의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존재’, 그리스트교의 구약성경에서 스스로 있는자인 ‘야훼’(Yahweh), 불교의 불이사상(不二思想)을 나타내는 ‘공’(空), 신유교의 궁극자인 태극(太極) 등은 모두 한정형식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노자의 도(道)와 어느 정도 유사한 것 같기 때문이다.
Ⅳ. 끝맺는 말
1장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정형식을 통해서 존재론적 구조를 이해하고 보면 노자의 도덕경이 제대로 보인다. 음양이론으로 무장된 복잡한 존재론적 구조로 노자의 도덕경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방해가 된 증거로 42장과 25장의 부정합이 발생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동양의 고전과 서양의 현대 존재론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 서로 통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존재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궁극적인 존재(진정한 실재)가 한정형식이 진입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 존재(진정한 실재)는 한정형식이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아 모두 하나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글을 끝내면서 원효의 미소 띤 얼굴과 일심(一心)사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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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분석은 크게 보면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분석’과 ‘언어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분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필자는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분석을 해오다가 그것에 부정합성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연구는 음양이론을 버리고 보다 적절하게 보완된 언어이론인 한정형식이론을 사용함으로써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음양이론에 의한 구조분석을 하였을 경우 도덕경의 각 장(章)들 사이에 부정합성이 발견된다.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분석은 주로 통행본 1장, 25장, 40장, 42장에서 그 골격이 드러난다. 이 중에서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가 드러난 것은 42장이다. 그런데 이 42장의 구조가 다른 장들(1장, 25장, 40장)과 다르며, 특히 42장은 25장과 부정합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부정합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한정형식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분석’이 바르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1장을 해석해 보았더니 무리가 없었다.
주제어 : 존재론적 구조분석, 한정형식이론, 음양이론, 부정합성
<abstract>
The analysis of Lao-tzu's ontological structure
by means of forms of definiteness theory
Tae-Ho Lee
The analysis of Lao-tzu's ontological structure has been conducted in two ways, which are the analysis of Lao-tzu's ontological structure by yin and yang theory and that by the language theory. Having studied the analysis of ontological structure by yin and yang theory, I recognized that there was a problem, which was that of inconsistency. My study is an approach to revealing Lao-tzu's ontological structure using forms of definiteness theory, leaving from yin and yang theory and more adequately complemented language theory.
When the ontological structure of Tao-Te-Ching was analyzed, I found the inconsistency among chapters consisting of the book. The framework of his ontological structure is chiefly shown in chapter 1, chapter 25, chapter 40 and chapter 42 in the widely-read edition. But in chapter 42, the ontological structure by yin and yang theory can be clearly identified, being different from the others in that point. Furthermore, the chapter 42 shows inconsistency in contrast with chapter 25. To set the inconsistency right, I suggest the analysis of ontological structure in Tao-Te-Ching by the forms of definiteness. I tried analying chater 1 in this way, which proved consistent and meaningful.
key words: ontological structure analysis, the forms of definiteness theory. yin and yang theory, inconsist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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