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모교 체육대회(5.19.1000~1400)

* 정문에 들어서면 입구 첫 공간에 '목상 46회' 판넬이 부착된 롯데관광버스가 눈에 띈다


■ 공식행사 시작전 학교건물 및 주변 시설을 살펴보았다
*김대중 동산에 올랐어라(뒤쪽 건물은 무아 도서관)


* 김대중 대통령 동상앞



* 본관앞


* 공식행사 시작전 46회 부스앞에선 인물들



* 공식행사 시작전 46회 부스안에선 물만 마시고 환담

* 체육대회 공식행사 직전 46회 모두 모여 촬영(下)
운동장의 타 기수 회원들이 웅성거리며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사진 중앙('제'字뒤)에 정장의 홍순영선생님이 빛나 보인다.




* 체육대회 공식행사(모여~ 앞으로 나란히)





■ 46회 부스 스케치

* 부스 식탁에는 입새주, 홍어삼합 ,감성돔, 갑오징어, 산낙지 초무침 등이 푸짐하게 길게 깔려있다.
접시가 비워지면 무한리필로 채워졌다.




* 46회 부스 유명인사 퍼레이드
박지원/윤소하 국회의원, 시의장, 시의원들, 김종식 목포시장, 박우량 신안군수 등 지역 유관 유명인사들이
46회 부스에 들러 일일이 악수가 이어졌다. 지도 출신인 나는 박우량 신안군수에게 천사대교 홍보, 군정 등
괄목할만 하게 잘하여 고맙다고 인사하자 같이 사진을 찍자고 포즈도 취했다.




* 홍순영 선생님께서 우리46회 부스에 오시어 덕담을 하시며 점심 식사를 하셨다.(上)
당시 ‘상업부기&회계학‘을 담당하셨던 홍순영(洪淳瑛) 선생님은 21대(1993.03.01.~1994.08.31 : 1년 6월) 교장을 지내시고 39년 교직생활을 마감, 정년퇴임하셨다.
홍 선생님은 1946년 9월 모교(목포상업학교) 입학 이수하였으며, 1956년 3월 전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과 동시에 모교 교사로 발령받아 17년을 평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목포중앙여중, 목포상고 등에서 10년 동안 교감으로, 해남중, 제일여고, 목포상고에서 교장으로 12년을 재직하셨다. 퇴임 후 목포시 노인대학장, 노인회장(2014년)도 역임하셨다.
* 형준친구께 선생님과 악수하는 장면을 찍겠으니 액션을 취해 줄것을 큐 사인하고 촬영하였다.


* 우리는 연인사이 


* 龍海 김순옥 시인, 시집 증정
점심식사가 끝날무렵 龍海 김순옥친구가 최근 출판된 시집 <자연속에 살다>를 참석한 친구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서명된 책자를 증정하였다.
순옥친구와 50년만에 만나 한방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틀간을 지내보니 하체 튼튼, 열정적인 카메라 샷, 아직 예쁜 여자 좋아하고... 그는 실제적 자연보다는 마음속의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듯... 시에는 자연만 있는 게 아니라 삶, 인생, 사랑이 있다. 특히 연인간의 불꽃 같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에로스의 사랑이 끝나는 싯점이 되었는데 졸업 50주년에 바라본 龍海는 아직도 활화산 처럼 불타는 청춘이다. 물론 근본은 플라 토닉이겠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정진, 베스트 셀러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 목포친구들의 환송(5.19.1400) 버스내에서 촬영




* 버스 출발 직전 탑승, 환송 인사말씀. 잘 가십시요~ (김성봉 목포회장)

■ '지성이면 감천' 아, 일등상! / "시상! 일등상 고급 TV, 46회 김성봉"
1등상 고급 TV 수상의 기쁨에 예쁜 표정의 김성봉회장 부부
* 귀로 차내에서 수상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성봉 내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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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50주년기념 목포행사 소회
이용우, 김성봉 서을•목포회장님 크게 수고하셨습니다. 양대축으로 조인트, 조화롭게 잘 준비하여 금번
50주년 행사가 성공적으로 원만하게 잘 치러져 46회의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 주시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게 된다는 '지성이면 감천'을 특히 김성봉회장 부부께서는 실천하고 있음을 더욱
상세히 알게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또한 훌륭한 숙소를 연이어 제공해 주신 김춘길친구 고맙습니다.
서울행 버스에 쑥 인절미 떡을 금번에도 실어주신 박태순친구 고맙습니다.
작지 않은 금액을 찬조하신 한형호, 김상주, 천송화, 이영애 친구 고맙습니다.
무엇보다도 알게 모르게 헌신 봉사해주신 서울•목포 친구들 고맙습니다.
교문 입구 도로에 들어서면 ‘46동창회’표지판을 부착한 롯데관광 리무진버스가 마중하는 듯한 위치에서
눈에 띄어 행사 참석 동문은 물론 내빈들까지 들어서자마자 첫 인상에 관심을 끌게 하더니 ‘46동창회
50주년 기념 정기총회 및 체육대회’라는 초대형현수막 앞에 70여명의 많은 인원이 참석, 또 놀랐다고 합
니다.
김성봉 목포회장에 의하면 금번 행사를 계기로 우리 46회의 존재감을 전 동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
으며, 50주년 기념행사는 지금까지 어느 기수에서도 시행하지 않았던 일인데 전 동문들의 축하를 받으며
행사를 잘 마무리, 우리 46회의 단합된 모습과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는 서울, 부산, 광주. 목포
친구들이 하나되어 이루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친구들께 고맙다는 말씀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금번 모교에서의 개교99주년 정기총회(회장 이,취임) 및 체육대회 모교행사에 동참, 서울과 목포, 광주,
부산 등 곳곳에서 모인친구들이 모여 졸업 50주년이라는 화합과 우정의 잔치가 마치 46회의 잔치 마당
처럼 한판 벌어져 ‘명문 목상’ 그중 46회가 크게 돋보일 수 있는 '2019. 총동문회 정기총회 및 체육대회',
감격스러운 '목상 46회 50주년 행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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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환기(金煥基)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미지가 걸 러진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구현해냈다.
출생-사망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안좌) - 1974년 7월 25일
경력
1963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59 ~ 1963 홍익대학교 학장
1954 ~ 1974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1952 ~ 1955 홍익대학교 교수
1948.05 ~ 1959.06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48 ~ 1950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
1947 ~ 1963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고, 이어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나 ‘백만회’(1936)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에는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추상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론도》(1938) 같은 작품을 보면 음악적인 주제와 어울리는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음악적 서정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그룹전을 열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의 멋에 깊이 심취하여 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뉴욕에 정착한 1963년 무렵에 미국 화단의 주도적 경향은 색면회화였지만, 한편으로는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실험적 미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뉴욕 시기 작품은 크게 형상이 남아 있는 1970년 이전과 점과 선만의 완전한 추상으로 화면 전체가 변하는 1970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한 1974년까지는 그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서양미술을 풍부하게 경험했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시대의 문인화가였다. 비록 자연의 외형은 사라졌으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1년과 1972년의 그의 작품에서는 점화의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활형의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1973년에는 활형과 직선들이 교차되거나 어우러져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무한으로 열린 공간의 확장을 상징하고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풍류와 정취를 지닌 인정 많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온몸으로 예술을 살다가 이렇게 61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곁은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지켰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다.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산》(1958), 《달과 산》(1960), 《18-VII-65 밤의 소리》(1965),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Echo 22-1》(1973), 《09-05-74》(1974)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김환기 [Kim Whan Ki, 金煥基] (두산백과) 등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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