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제의 호족 목씨
백제의 호족 목씨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일본서기 神功紀에 의하면 369년 백제. 왜 연합군은 탁순(대구)에 집결하여 신라를 친 다음 가야7국을 평정하고 전라도지방을 휩쓸었다. 백제의 근초고왕부자도 친히 군을 이끌고 이 개선군을 마중했다. 이때 木羅斤資라는 백제의 장군이 활약한다. 한편 382년 왜는 신라를 치기 위해 소쯔히코라는 자를 파견했지만 그는 신라의 미인계에 빠져 신라 대신 대가야(고령)를 쳤다. 이리하여 대가야의 왕 및 왕족들이 모두 백제로 피난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백제는 목라근자를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대가야의 사직을 회복시켰다.
일본서기에는 또 木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곳 여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라고 한다. 목만치는 부친의 공 덕분에 가라에서 왕처럼 전횡을 부렸으며 가라와 백제를 오가며 정치를 했다. 하지만 백제에 나이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王母(전지왕의 왕후)와 淫行을 일삼았으므로 천황이 그를 일본으로 소환했다.
위의 일본서기 기사가 날조된 것임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일본서기 편자들은 중국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3세기)를 神功황후라고 생각하고 이들 기사를 히미코의 시대인 249년과 262년에 각각 배치한 것이지만 근초고왕부자가 나오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이를 120년 뒤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편자들이 이 기사를 날조한 것은 6세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즉 500년대에 임나일본부가 한반도남부를 지배한 것으로 보이는 사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왜가 언제부터 한반도남부를 지배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369년 기사를 조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내에서도 임나일본부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 또 4세기에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만한 통일정권도 없었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여전히 이 369년 기사를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사실로 간주하고 있으며 또 신묘년에 왜군이 광개토왕과 싸웠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목라근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목만치는 475년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문주를 옹립하고 웅진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이 목만치를 369년에 활약한 목라근자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年代가 맞지 않는다. 이것도 369년의 기사가 조작이라는 유력한 증거이다.
목만치는 475년 웅진 천도 후 정계에서 밀려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소가만치로 등장한다. 소가(蘇我)는 그가 정착한 곳의 지명이라고 한다. 소가만치의 계보는 (蘇我)滿智-韓子-高麗-稻目-馬子-蝦夷-入鹿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韓子와 高麗는 일본서기가 369년과 475년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꾸며낸 가공인물이다.
소가씨는 소가이나메(蘇我稻目)의 代부터 천황가와 인척관계를 맺어 천황가의 피를 온통 소가씨 일색으로 만들었다. 이후 일본천황은 모두 소가씨의 가까운 혈족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약 100년 간 소가씨는 천황의 즉위와 폐위를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이 아스카시대에 일본은 야마토국가의 기초가 만들어지는데 이 아스카시대는 소가씨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아스카(飛鳥)시대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이다. 불교는 백제의 성왕에 의하여 欽明천황에게 公伝되었지만 야마토(大和)조정 내에서는 이의 수용을 놓고 찬반대립이 있었다. 천황은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소가씨(蘇我馬子)는 반대파 物部氏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불교를 도입했다. 그는 백제로부터 화공. 기와공. 건축공 등 모든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절(飛鳥寺)을 세웠다. 이후 일본의 호족들은 앞 다투어 절을 짓게 되어 일본 땅에 아스카문화가 꽃을 피게 된 것이다. 이 아스카시대의 절터에서 출토되는 기와는 모두 백제의 여덟잎연꽃문양으로 되어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시대의 불상들, 예를 들어 ‘백제관음’ ‘구세관음’ 등은 백제에서 전래된 것 또는 백제기술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소가씨가 백제의 기술자들을 불렀다는 것은 그가 백제계로서 그의 친척 木氏가 백제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또 속일본기에 의하면 아스카는 인구 10명 중 8, 9명은 한반도계였다고 한다. 고대 일본의 첫 수도 아스카(飛鳥)는 제2의 백제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적한 농촌으로 변모하여 나라현 高市郡 明日香村(아스카촌)이 되었다.
소가씨는 645년의 궁정 친위쿠데타로 몰락한다. 일본서기편자가 목만치를 王母와 음행을 한 것으로 기술한 것은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서 아니라 천황가를 좌지우지한 소가씨를 폄하하기 위하여 꾸며낸 것이다. 소가씨의 이름을 馬子(우마코). 蝦夷(에미시). 入鹿(이루카) 등의 천한 한자로 표기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일본의 유력호족 가운데 紀氏가 있는데 이 紀氏도 木氏의 후예이다. 木 즉 나무를 일본어로 ‘기’라고 하기 때문에 기씨가 된 것이다. 일본서기 応神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応神3년 壬申에 백제 진사왕이 천황에게 礼를 잃었다. 그래서 紀角. 羽田. 石川. 木菟 등을 파견하여 그 무례를 추궁했다.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했다. 紀角 등은 阿花(아신)를 즉위시키고 귀국했다.
잠꼬대 같은 소리지만 진사왕은 신묘년(391)에 석현 등 10여 성과 요충 관미성을 광개토왕에게 빼앗기고도 나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제의 호족들은 왕을 죽이고 아신을 세웠다. 여기서 紀角. 石川. 木菟 등은 木氏인 것이다. 목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씨라고 했지만 일명 石川氏라고도 했던 것이다. 700년경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일본조정은 각 호족들에게 그들의 족보와 조상들의 事績을 제출케 했다. 위의 기사는 아마도 紀氏가 제출한 조상의 사적을 사료로 했을 것이다. 紀氏의 조상 木氏는 일본에서 파견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호족으로서 진사왕 폐위에 관여했던 것이다.
소가 우마코(馬子)의 뒤를 이어 소가가문을 이끈 이루카(入鹿)는 林臣 또는 林太郞이라고 불렸는데 이 林氏는 백제의 귀족 木氏의 후손이라고 新撰姓氏錄에 명기되어있다. 신찬성씨록은 일본의 고대명문가의 계보를 적어 놓은 책이다. 또 일본서기도 백제의 중신 목만치를 천황이 소환했다고 함으로써 그의 渡日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그 渡日의 年代가 맞지 않는데 그것은 일본서기가 그의 부친 목라근자를 무리하게 369년에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첫댓글 귀거래사님이 언급하신 기사는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이 마한(영산강 유역)을 정벌하였다고 주장하는 기사입니다.
삼국사기 어디에도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벌했다는 기사가 없는데도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어 마한(영산강유역)을 정벌했다는 기사로 둔갑하여져 있는 곳이죠.
영산강유역(남당유고 - 월내국)의 정벌은 비유왕대(A.D.431)에 해당하니까요.
그 이전의 백제와 왜의 교통은 신라와 통하던가 아니면 가야를 통하여야만 올 수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교통이 근초고왕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서기 369년의 조를 가지고 근초고왕대에 백제가 마한을 통합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369년의 진실은 근초고왕이 고구려에 대한 대비책으로 신라와 가야제국, 마한의 왕들에게 친선사절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기에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일본서기 편자들이 백제왜연합군의 그 지역 정벌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봅니다. 백제가 전라도지방을 실질적으로 영유하게 되는 것은 동성왕대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왕이 전라도지역의 호족들에게 侯. 王의 작위를 수여한 것, 동성왕대 이후 담로제가 실시되어 전라도에 22 담로가 설치된 것 등도 결국 그 지역의 병합과정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또 일본서기에도 513년의 조에 왜가 백제의 임나 4현2군의 영유를 인정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남원, 곡성, 구례, 하동 등으로 비정되는 지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