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락~~ 일반적으로 아래로 드리운 넓은 부분을 말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지요. 옷자락이 이에 해당하고 산과 강의 어느부분을 이야기할 때도 사용하는 친근 한 단어입니다. 아무튼 자락이라 하면 무엇인가 여유롭다는 상상을 단박에 하게됩니다. 세상은 물난리로 들썩 거리는데 출행은 몹씨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상들이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잡혀 있는 계획을 허물기에는 유구함이 묻어 있는 강한 존재성이 실행을 부추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서조항이 많은 것을 근거로 슬기롭게 대처하기로 마음을 먹고 전체적인 일정과 목적지에 대하여 다시 조율하기 시작했습니다.
태극무늬가 감고 있는 태백을 떠나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소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백산 서쪽 자락에는 물 길을 잡아주는 물그릇이 무려 물아, 부석, 단산, 순흥, 금계, 그리고 영주 땜도 있어 안전도는 높은 편입니다. 그리고 길은 옛길은 버리고 터널 중심의 신작로가 다시 생겨 접근성도 종전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좋고 개인적으로는 본향인 순흥이 있으니 발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기상조건도 까다롭지 않았고 순례와 걸음 여행을 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결심을 일정으로 완성한 시간은 출행 이틀 전이었습니다. 일정을 잡아 데레사 자매님께 통지한 후 잠들기 전 전반적인 일정표 스크린을 열어 놓고 모든 옛 기억을 살려 소백산 자락을 떠올렸습니다. 달궁에서 2박 3일을 보내며 국망봉을 오르고 그러한 과정에서 생긴 사소한 웃음을 찾고 웃으며 잠을 청한 후 귀경하였습니다. 늦은 오후 시간 동안 서울에 도착하여 동안 비워 두었던 방청소를 서둘러하고 짐을 정리하여 back - peack 채워 놓고 자정 넘어 12시 40분 경에 잠을 청하고 다시 일어난 시간은 3시 30분, 그리고 오늘 지원 나오신 이선생을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고 집을 출발하여 반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이었습니다. 하나 둘 이어지다 약속된 시간에 모두 모였습니다. 넉넉한 크기의 버스, 거리제한 두기에도 적정한 좌석배치라 생각하며 폭우가 거세게 쏟아지는 차창밖을 보면 손전화기 키를 눌렀습니다. 기흥에서 만날 벨린다 자매님에게 출발을 알렸습니다. 폭우를 뚫고 길을 나선 지 한 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비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예정보다 40분 늦은 시간에 도착한 소백산 자락, 주차장 광장에 모여 몸풀기 준비운동을 하였습니다.


준비 운동을 시작으로 걸음 여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근육을 이완 시키고 폐의 기능을 일 깨우고 혈액 순환을 원할하게 하여 컨디션을 적절하게 끌어 올리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준비 운동 후 소백산 자락에 펼쳐진 사과 과수원, 과수원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걸음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촬영 후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오르는 길을 걸어 달밭 마을까지 가는 것이 오늘 초반 일정입니다. 이 곳에서 길은 다시 두 길로 갈라집니다. 좌측 길은 비로봉으로 가는 길, 우측으로 길을 잡아 나가면 잣나무 밭을 지나 잣나무 고개를 넘어서게 됩니다.고개를 넘어 계곡을 우측에 두고 계속 내려서면 달궁을 만나고 아름다운 계곡을 연이어 보면서 걷다보면 국망봉 삼거리를 지나 초암사에 도달하여 산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초암사에서 06km 걸어 내려가면 배점리 탐방 안내소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풍기로 나가 약선당 삼계탕으로 점심을 나누면 오전 일정이 마무리된 답니다.





가끔 촬영 포인트를 만들어 촬영하고 휴식을 취하며 다시 오르는 방식으로 ~~~














달을 맞이하는 마을 달밭골 마을까지 이곳이 半程(반정)입니다



이 계단을 올라서서 0.5km를 오르면 비로사 일주문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걸어 온 길보다 조금 더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등반 길인 비로봉으로 가는 길과 초암사로 나가는 자락길로 나누어 지고 몇개의 펜션이 있는 작은 숲 마을을 지나 오르면 잣나무 숲이 나옵니다.

잣나무 숲 중간 휴식터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누웠습니다.





도시생활, 밝은 문명의 생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댓가는 참 몰 인정한구석이 참 많습니다. 수많은 단절속에서 퐁요의 기쁨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짙은 고독의 그림자를 안고 살 적이 많은 곳이 문명의 생활입니다. 군중속의 고독이란 표현이 아주 적당히 문명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문명은 자연에 반하는 생활이 넘칩니다. 인간위주의 여러가지 편익시설은 인간의 욕심이란 잣대로 그려 놓은 것이 많습니다. 모든일에 욕심이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그림이되고 각종 수단으로 얼룩진 그림을 간수 유지 하려면 불필요한 노력과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요구됨으로 문명의 노예가 되는 것이 문명의 삶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불나방이 타죽는 것도 모르고 불에 뛰어 드는 것처럼 자기만의 독창적 문명을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 방향으로 고장난 폭주 기관차처럼 맹렬하게 달려갑니다. 소통하고 생각할 겨룰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창조적 질서가 온전하게 뜻이 넘치는 자연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면 避靜의 순간을 얻게 됩니다. 문명을 피해 원래의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성찰의 기회를 얻는 것이 순례와 걸음 여행입니다. 창조적 질서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삶의 지혜와 혜안을 얻자는 취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덕목 중 가장 상위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텅빈 충만입니다. 그림을 그리지 말고 있는그대로의 실존적 가치를 찾자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월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바람을 듣고 느끼며 마음속에 젖어 있는 것들을 말려 보는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잠시 피정의 시간을 갖은 덕분일까요? 해맑음, 그 이상 표현은 부적절하여 차라리 입을 닫습니다.

쉼을 멈추고 다시 걸어 잣나무 고개마루에 올라 섰습니다. 마루의 등고선은 약 7부 능선, 인간의 몸을 가장 이상적으로 감지하고 휠링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는 고도입니다. 바람의 선선함이 오르면서 피어낸 열기를 가라앉도록 도와줍니다. 이어서 짚신나물 꽃과 물봉선화가 피어 있는 꽃 ,한 두속을 보며 비명같은 단말마를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야생화~~ 화초는 인간이 키우지만 야생화는 하느님께서 키워주시는 꽃이라는 사실과 함께 내 스스로 야생화적 존재성을 실천하며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 이어서 이어져 나가는 아름다운 길을 내려 가게됩니다. 계곡 안부 쪽으로 펼쳐진 잣나무 고목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흙 위로 뒹굴고 있는 보라빛 꽃, 바로 칡 꽃입니다. 손을 뻗어 한 두송이 잡아 올려 향기를 맡아보면 참으로 고운 향이 페부 깊숙히 파고듭니다. 아름다운 숲 길을 걷다 잠시 계곡으로 내려 가 쉬었다 가기로 하고 계곡으로 내려 섰습니다.

노도와 같이 흐르는 무취, 투명의 액체, 물의 질주 끝은 바다, 망망대해, 지독한 염도가 가득한 물의 본향인 바다, 그곳에 인간의 본향도 함께 해야하는 곳입니다. 인간들이 섭취한 섭생에 꼭필요한 양념인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다른 양념인 고추가루, 깨,각종 장들, 파, 마늘, 양파 등 많이 있지만 그것들은 자신의 흔적을 끝까지 남깁니다. 그러나 단 소금은 자신의 흔적으로 완전히 지워버리고 그 안에 녹아버립니다. 자신을 죽이고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진실하고 정의롭고 위대한 사람이지요. 소금을 닮은 종교인, 믿는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소금을 닮은 인격입니다. 소금의 영성으로 더 나가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걸어 온 길의 영향으로 힘들고 고단했을 육신을 정화하며 30여분 쉬었습니다. 이젠 속보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야 오후 일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 황홀한 단풍 색으로 변신한 이 계곡의 가을 풍경은 참으로 압권입니다. 가을과 비교하기 위하여 녹음의 정수리라 말 할 수 있는 지금 달궁 계곡의 모습을 채집해 두었습니다. 혹시 가을 재방문하여 가을을 즐긴 후, 그 모습과 비교하는 걸음 여행의 계절적 변화를 감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벌써 시간은 12시 40분, 오전 일정을 보면 - 40분이 생겼습니다. 전체적으로 앞으로 남은 초암사 탐방 안내 센타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식당까지 소요시간을 계산하면 아무래도 - 1시간 20분의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일행과 떨어져 속보로 바꾸고 초암사로 걸었습니다. 길은 외길이니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국망봉으로 빠지는 길은 있으나 오르면서 국망봉 산행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기억을 남겨 놓았으니 그리고 갈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 없습니다.

내려 오면서 전화를 걸어 일정에 필요한 조치를 해두며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예약전화를 다시 확인하고 풍기로 나가 점심식사를 끝낸 시간은 2시 40분, 계획한 일정과 오차는 약 1시간, 그리고 다시 오후 일정으로 잡아 놓은 오후 3시 미사참례를 위하여 성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마당에 가득 찬 성당 주차장, 미사 참례자가 많네 하는 인식이 깨진 것은 바로 입당 후였습니다. 교회관계자도 만날 수 없어 겨룩 주임 신부님과 통화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교구청 방침이 3시 미사를 잠정 중지하는 것으로 모아져 ~~~
묵상과 기도로 모든 것을 대신 한 후, 다음 일정으로 수정한 한국천주교 최초 수덕자 농은 홍유한 유적지를 참례하기 위하여 이동하였습니다.





단산면 구구리에 있는 유적지는 성당과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유한은 1726년(영조 2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홍창보(洪昌輔)이고 모친은 창령성씨(昌寧成氏) 훤의 딸이다. 그 선조들의 고향은 안동현 풍산이다. 홍유한 선생은 자(字)는 사량(士良)이며, 호는 농은입니다. 홍유한은 16세 때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750년부터 성호 이익이 제자들과 함께 서학문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직방외기(職方外紀)」등을 공부하였고,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서학의 책들을 읽고 연구하며 수계생활하기를 원하였으므로 문중이나 주위에서 압력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성호 이익 선생이 권하는 대로 산속에 기거하며 치료와 휴양을 하기 위하여 서울 집을 팔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충청도 예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천주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호를 농은이라고 지어 18년 동안 조용하게 수계생활을 하였습니다.
1775년 수계생활에 더욱 적합한 곳을 찾아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소백산 아래 순흥 고을 동쪽 십리에 있는 단산 구구리(배나무실)에 머물게 됩니다. 이곳에서 더욱 전심전력으로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하는 한편, 뜻있는 학자들과 서로 교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의 홍유한의 수계생활은 천진암보다 4년 앞선 것으로 실로 그가 한국교회의 최초의 수덕자임을 알게하여 주며, 실로 경상도 북부지방(현 안동교구 지역)에 최초로 복음의 말씀을 가져온 분임을 시사해 줍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없으며, 1785년 1월 30일(양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나자 그 해 4월 19일(양 5월 27일)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