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아기가 하나 있다
아기 라기엔 조금 큰, 세 돐 반 아장아장 토들러 단계를 막 넘어선, 어린이가 되어가는 중의 작은 사람이다.
이 작은 사람은 아주 매력 덩어리여서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졸음에 겨운 눈꺼풀이 스르르 덮여 내리는 때까지,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사랑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하는 찬사와 손길과 입술을 귀찮을 정도로 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잠들어 있는 시간이 그 중 가장 매력적인 순간인지도 몰라서, 잠자는 그 얼굴 위로 부모라는 이들의 찬탄어린 눈길이 머물고 입술이 머물고 손길이 어루만져지는 그런 아이다.
눈을 뜨면 "효재 잘 잤어" 하면서 걸어와서 고사리 손으로 부엌일에 바쁜 내 옷자락을 당긴다. 그리고 첫 일성 "안아줘 안아줘". 때로는 가락과 리듬을 섞어 "안아주세요 업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노래말처럼 한다.
그 천진스런 요구에 냉담하기란 어지간해선 불가능한 일이어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보글보글 찌게 간을 보다가도 기어 애를 안고 한바퀴 돌고 볼에 목에 온몸에 키스 세례를 퍼붓고는,
엄마: "누가 이렇게 이쁜 아기 낳았어?"
아기: ."...효재...."
엄마: "엄마가 ~해야지..".
아기: "엄마가 해야지 "
또는,
엄마: Do you love me? I love you so much.
아기: I love you too.
엄마: How much ?
아기: So much!
등등의 간지러운 말장난을 무슨 의식처럼 지겨운줄도 모르고 하고 또 하고 한다.
혹은, "어느 별에서 왔어?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엄마 뱃 속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서 뭐 했어?"
이건 정말 너무 궁금해서 얘는 어디서 온 건지 너무 이상해서 묻는 거다.
정말 누가 이 아이를 만들었을까. 혼자 곰곰히, 화두라도 들듯 골똘해질 때가 있다. 분명 내가 몹시 배아파 하며, 순간 정신이 아득해하며 그렇게 어렵게 세상에 내놓은 애인건 맞는데, 그래도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바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가르친 적이 없다. 모든 엄마들이 그러듯 혼잣말을 던지고 받고 했을 뿐.
내가 걷기를 뛰기를 구르기를 가르친 바가 없다.
이렇게 이쁜 짓을, 착한 마음 씀씀이를, 정확한 분별을, 깜찍한 판단을 하라고 가르친 바는 더더구나 없다.
침을 발라 벗기는 스티커 인형처럼 점점 더 드러나는 아기의 숨겨진 면모...
이 아이의 내부의 어떤 것이 씨앗처럼 단단히 옹아리져 감춰져 있다가는 어느 순간 씨앗이 터지고 , 새순이나오고 잎이 패고 꽃대가 나오듯 그렇게... 어떤 필연성도 없이...목적도 없이 까닭도 없이 그렇게 ....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라기엔, 백지로 태어나 외부환경으로부터의 자극을 흡수한 결과라기엔, 그 발달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 인과의 연결 고리를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아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이 신비감은 익숙해질 줄을 모르고 매일 매순간을 환희로 축복으로 기적으로 느끼게 한다.
물론 힘들다. 특히 미국에 와서 얼마 전 간신히 비교적 저렴한(?) 어린이집을 찾아내기 전엔, 매일 "아이구 누가 한 시간만 좀 데려가 봐주면 살겠다" 그러면서 애 봐줄 사람 때문에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미국은 특히 보스톤은 데이케어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한국 구립어립이집을 기준으로 하면 족히 대여섯 배를 넘는다) 결심을 절박한 심정으로 여러차례 했었고 ,
데이케어를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주말이면 어서어서 기나긴 주말이 지나가 거기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월요일 아침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며, 떼어 놓고 돌아서는 순간 휴 하고 이고 있던 큰 짐덩어리를 내려놓은 듯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나온다.
물론 화도 낸다. "아이구 엄말 왜 이렇게 힘들게 해? 저리가서 책보고 혼자좀 놀아" 꽥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그런 엄마에게 느낀 배신감과 좌절감을 여지없이 으앙 울음으로 터뜨리는 아이에게 "아이구 미안해, 그래그래 티비틀어줄께, 사탕줄께 사탕, 초콜렛 먹어" 이렇게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달래고 타협하며 뇌물을 동원해서라도 아이에게서 해방되는 순간을 꾀한다.
그렇지만 아이를 데리러 들어선 어린이집 입구에서 " 마미!" 외치며 달려오는 아이의 온몸을 받아 안는 순간의 휘리릭 전기라도 오른듯한 그 환희심, 넘치는 희열감은 번번이 예외가 없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한 티비 드라마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가 주체못할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던 그 장면이, 우리집에선 이 작은 사람을 대상으로 매일매일 연출, 아니 자연발생된다.
이 작은 사람은 종일 바쁘다. 안기고 조르고 먹고 뒹굴고 울고 떼쓰고 응가하고 쉬하고 까이유를 보고 포코요를 보고 스토리타임을 요구하며, 슬라이드(미끄럼틀)가자 슬라이드가자, 줄리(미국친구)가자 줄리가자, 종일 쉴틈없이 언니에게 갔다 오빠에게 갔다 공부하는 아빠 무릎에 앉았다 스스로도 분주하고 당연 엄마도 녹초가 되게 한다. 그러다가도 졸음이 엄습하는 오후가 되면 "효재 타이어드" 하면서 스스르 정말 순식간에에 거짓말처럼 잠이 들어 버린다.
천사가 따로 없고 요정이 따로 없고,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어여쁜 사람이다.
어린아기가 있으니 집이 다 순결해지는 느낌이다. 이불에 지도를 그릴지언정, 이 안 닦으려고 밤마다 엄마 하이드앤 식 놀이하자 도망을 다녀 애를 먹일지언정, 미국서도 예외없이 발생한 슬픈 아토피로 북북 긁어대는 통에 엄마까지 잠을 설치는 날이 하루이틀사흘...일지언정.
그래도 그래도 너무나 어여쁜, 너무나 정결한 우리집 행복의 화신.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고등학교때 국어시간에, 열 여섯의 내가 마음으로만 그려봤던 미래의 그 아기천사랑 지금은 같이 살고 있으니, 한 번 대어 보기로 한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쓴 그 글.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볕 좋은 첫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 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나래, 비단결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 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늘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잠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라.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 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서 우리가 싫어할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부처보다도 야소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꾀도 갖지 않는다. 아무 획책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어서 부르면 웃고 즐긴다. 싫으면 찡그리고 아프면 울고 거기에 무슨 꾸밈이 있느냐.
시퍼런 칼을 들고 핍박하여도 맞아서 아프기까지는 방글방글 웃으며 대하는 이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아이가 있을 뿐이다.
오오 어린이는 지금 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잔다.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이 편안하게도 고요한 잠을 잔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생각이 다른 번루한 것에 미칠 틈을 주지 않고 고결하게 순화시켜 준다. 사랑스럽고도 부드러운 위엄을 가지고 곱게 순화시켜 준다.
나는 지금 성당에 들어간 이상의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스러운 하느님 -위엄 뿐만의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고- 의 자는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 ...*
방정환 선생의 이 글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다.
내가 매일매일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애들은 세살까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대요. 그 이후로는 돈 먹는 하마, 성가신 하마로 바뀌는 거지요.
그래도 자식은 예뻐요.
이쁘죠, 이뻐요^^ 그 중 잠자는 모습이 제일 이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