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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
신명기 33:7-11
(33: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그가 이르기를, 주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를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또 그의 손이 그에게 충분하게 하시고 주께서 그의 원수들로부터 그를 돕는 도움이 되옵소서.(33: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33: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33:10)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33: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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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지파가 12지파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은
일체감을 해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가능성을 통하여
도리어 ‘하나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그 안에 내장시켜 놓았습니다.
그 지파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산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땅’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이해합니다.
땅이 없음에도 ‘산다’가 성립된다면 사람들은 좀 의아해할 것입니다.
레위지파가 있다는 말은 곧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을 대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각각 분산된 채 자신의 땅들을 분배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독자적인 생존이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생존 보장은 곧 자기만의 목적 추구가 보장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남의 일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자기 생존활동에만 열중하면
그것으로 괜찮은 삶을 보낸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오늘날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은 일에 구태여 관심 둘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전체’에 합세되지 아니하면 복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각자 개개인의 일을 하면서
어떻게 전체 의식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하여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섞이지 않고 초월적 위상을 가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연결된 지파입니다.
그들은 일반 지파들처럼 땅을 소지하고 그것을 경작해서 소득을 얻어 생존하는 지파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땅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타의 12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면서 나오는 부산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지파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갖고 나오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묻기를 소홀히 한다면
레위지파도 와해될 판입니다.
나머지 11지파가 가지고오는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레위지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위지파의 흥망성쇠는 이스라엘 전체 신앙의 척도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소홀이 레위지파의 존속을 위태롭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결속도 와해됩니다.
12지파를 배후에서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
각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가지고 나올 때나 가능합니다.
곧 자신들은 스스로 자립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행위를 해야만 하는 겁니다.
‘나는 나의 것으로 산다’는 정신으로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레위지파의 존재로 산다’가 될 때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왜 레위지파는 땅이 없어야 할까요?
그것은 땅 가진 자들의 여유나 집착에 의해서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지파들의 의지를 견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유다 지파의 경우, 지도자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지도자, 곧 왕을 찾는 것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왕이 대신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즉 영웅의 덕을 보자는 겁니다.
잘나가는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의 힘든 노동이 경감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존경받고 능력 있는 당회장 목사가 와서 교인을 불게 하면,
교회를 운영하는데 있어 개인당 돌아오는
경제적 부담이 적어지게 될 것이라는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이 참된 이스라엘의 축복된 모습일까요?
사람들은 대단한 왕의 출현을 소모하는 그것으로 질서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은 반(反)-작용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反)-작용은 바로 레위지파가 담당합니다.
레위지파의 기능은 법적인 조치입니다.
즉 생존이 아니라 법 시행을 의한 죽음 유발입니다.
출애굽기 32:26-29에 보면,
“이에 모세가 진영의 문에 서서 이르되,
주의 편에 속한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하니
레위의 아들들이 함께 모여 그에게로 오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허리에 칼을 차고 온 진영을 문에서 문으로 두루 들락날락하며
각 사람이 자기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이에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그 날 백성 중에서 삼천 명 가량이 죽었으니
이는 모세가 이르되, 너희 각 사람이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를 쳐서
오늘 너희를 주께 거룩히 구분할지니
그리하면 그분께서 이 날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의 반-작용은 결코 인간들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겁니다.
즉 “우리편 이겨라!”가 문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편 이겨라!” 정신에 동조하시지 않습니다.
무질서에서의 질서는
하나님의 제사법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곧 ‘희생’입니다.
레위지파로 하여금 전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희생의 띠’로서 전체가 하나의 이스라엘이 되기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희생이란 곧 자신의 혈육까지도 포기하는
레위지파의 정신을 말합니다.
같은 동족인 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이다 는 정신을 잊지 않는 겁니다.
민수기 25장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그 두 사람 곧 그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으니
이에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치니라.
그 재앙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더라.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켜서
내가 질투 중에 그들을 진멸하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는 말하라. 보라,
내가 그에게 내 화평의 언약을 주리니”(민 25:7-12)
즉 레위지파가 자기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만 행사한 것이 헌신이요 희생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레위지파의 정신, 곧 제사장 정신을 통해 성도를 낳았습니다.
벧전 2: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세상이 답답하고 성도 없다고 한탄할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머무는 곳 바로 그곳이 주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성도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성도들의 하나됨을 각자가 과정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의 과정으로서 성도는 참여하고 있는 겁니다.
179강-신 33장 7-11절(레위지파)20180408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7-11절입니다. 구약성경 316페이지입니다.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 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 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모세가 열두 지파에게 이렇게 축복을 할 때에
평면적으로 보게되면 마치 개별적으로 축복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모든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이 내부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결속이 되어 있는데,
지파가 분명히 열두 지파 맞습니다.
나타난 것은 열두 개가 맞는데
하나를 열두 개로 엮어내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누가 하느냐하면 레위지파가 하게 돼요.
지파 숫자는 열두 개지만
레위지파는 뒤에 각 지파와 각 지파를 결속시키는 그런 역할로 나와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은 열두지파이고 그 내부에는 동일한 레위지파의 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파를 구원할 때에 우리가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보다 많은 축복을 받은 지파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 한 것처럼 특정 지파 특정 지파가 나타날 때에
그 나타난 것에 거기에 마음 두지 말고
그 특정지파를 하나로 단일체로 하나로 결속시키는 그 요소에
우리가 눈을 돌려야 돼요.
안 그러면 열두 개가 다 산산조각 나버리니까
하나의 이스라엘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하나님이 아니고 레위지파의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죠.
전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로 항상 일어나는 것을 결속 시키는 그런 일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개인적으로 일을 보다 보니까
자기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남의 일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신명기 이야기를 쭉 보게 되면
여기 신명기 이야기와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는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고 따질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신명기 34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이야기를
하나의 마차라고 봅시다.
마차는 누가 타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주인이 있다는 말이죠.
그걸 쉽게 말해서 나귀,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열두 지파가 하나의 마차, 마차보다 정확한 전차, 전쟁하는 전차로 본다면
거기에서 열두 지파의 전차를 몰고 가시는 분,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가치 있는 걸로
독자적으로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우리 자신들은 하나의 뭐가 되냐 하면
주님을 보여주는 과정으로써 개입하게 되어있어요.
내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이 보여주는 하나의 과정인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께서 택한 백성들이 하나로 결속된 채,
하나의 전차가 되어서 주께서 타시고 움직인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저는 엘리야가 죽었을 때에
하늘에서 불마차가 내려온 것을 굉장히 의미 있게 봐요.
왜냐하면 마차라 하는 것은 전쟁용이거든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지고 곱게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전쟁하게 하는 겁니다.
군복은 입었는데 20년 동안 보초만 서고 전쟁도 못해보는 그런 군인들도 있잖아요.
그 군인 말고 실제로 전쟁을 맞닥뜨린 그런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을 할 때 내가 전쟁에 지면 어떻게 하냐는 거죠.
내가 지면 다른 사람이 승리하고 그러는 것이냐 하는데,
주님이 하시는 이 전쟁은 좀 특이한 전쟁이에요.
어떻게 특이하냐 하면
꼭 연극 무대 같습니다.
연극에는 3요소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 하는데
연극에는 관람 관객이 있어야 되고, 무대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배우가 있어야 되겠죠.
그 배우들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됩니다.
영화는 시나리오, 연극에서는 희곡이 있어야 되죠.
연극에서 희곡과 배우와 관객이 연극의 3대요소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 연극할 때 보게 되면 아주 순진한 관객 중에 이런 관객이 있어요.
특히 어린아이들이 뮤지컬 할 때 그런 일이 많은데,
주인공이 이렇게 있는데 그 뒤에 주인공을 해치기 위해서 몰래 다가갈 때
아주 순진한 관객들, 그 연극에 몰입한 관객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의하세요. 조심하세요. 저 뒤에 당신을 죽이려는 자객이 와 있습니다.”하고 소리치게 되어 있어요.
어른들은 그걸 참지만 아이들은 못 참아요. 안타까워하죠.
갑자기 연극하는 것에 관객이 흡수되고 말았어요.
그러고 난 뒤에 보게 되면, 그러면 연극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쉿, 쉿, 가만히 있어.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이건 연극의 각본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 각본대로.
사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 혜택이 있고
주님의 하는 일에 포함이 되면서
내가 짜지 않은, 설계하지 않은 계획대로
내 인생이고 세상 모든 것이 그 계획대로 움직이고
배우도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는 우리의 과정에 포함이 되는데,
간혹 가다가 자기가 마치 주인공인 냥 착각을 해가지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요.
===>모든 배우들이 다 그렇지만 연극배우도 자신은 연극의 배역을 맡아 표현했을 뿐인데
자신이 마치 연극속의 당사자인냥 행동하려한다는 것이죠....
내가 망쳤으니까 주의 일이 망치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열두 지파들이 바로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세상을 살면서 그 세상은 자기에게 의미가 있을 때에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각본이 주어져요.
각본이. 뭐냐 하면 모세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모세의 축복이 주어지면
개인적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이 아슬아슬함과
실제로 주께서 이루고자 하는 그 목적과 동떨어져 있어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실컷 울 일인데 돌아보면 울 일이 아니고, 실컷 웃을 일인데 돌아보면 웃을 일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깜짝깜짝 경끼(경풍)나는 인생, 이 경끼(경풍) 나는 인생이고,
또 경끼(경풍) 날 것을 미리 생각해서 경끼(경풍)나는,
걱정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당겨서 염려하고 미리 당겨서 대처한다고 하다 보면
무엇과 괴리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의 계획은 생각 안하고 내 각본, 나를 위한 시나리오,
내 인생이 잘 되기 위한, 잘 풀리기 위한 그것만 계속해서 거기에만 몰두했다는 것이 드러나죠.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뜻과는 전혀 완전히 떨어져 있게 되는 겁니다. 착각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착각을 뭐로 대비하느냐 하면
레위지파를 통해서 그걸 결합시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레위지파를 결합시킨다는 말은
서로 의논 맞춰가지고 하나 되라는 뜻이 아니고
각자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성질대로 다 살게 해요.
다 살게 해 놓고 “아, 저기 뒤에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 주의 하세요. 주님 그렇게 일하시면 안 됩니다."
혼자서 연극무대에 자기가 다 뛰어 들어요.
관객이면서도. 자기가 추진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기 뜻대로 되어야 세상이 잘 되는 것처럼 하다가
레위 지파를 통해서 ‘아, 우리는 혜택을 입는 사람이지
내 행동이 내 운명을 바꾼다든지 내 미래를 결정짓는 그런 요소는 나에게는 없다’는
그런 가벼움이 주어져요.
주어집니까?
이게 돌아보면 그게 주어져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설쳐봐야 주의 일이 변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람객이라니까요. 너무 소리 지르면 안돼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컴퓨터에 올린 사람이 있어요. 질문이 뭐냐 하면 ‘최희준의 사망일자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올려놨어요. 서울 법대 나왔던 가수 최희준, 하숙생이라는 노래 불렀던 최희준의 사망일자가 언제냐고 물은 거예요.
최희준은 아직 안 죽었어요. 살아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질문했느냐 하면 최희준이 옛날 사람이니까 얼추 이쯤하면 죽어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을 한 겁니다. 듣는 최희준 굉장히 기분 나쁘죠. 그게 뭐냐 하면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유다지파, 레위지파, 스블론 지파, 르우벤 지파, 모든 지파, 특히 르우벤 지파는 자기 서모하고 관계한 지파인데 이 모든 것이 일단은 출발점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의 편협한 생각으로부터 출발이 되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의 과정인데 본인이 본인 인생의 목적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러면 레위지파의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각 지파에게 그들 고유의 그때그때 발생되는 목적을 때려 부수고 그것을 무산시키는 기능을 레위지파가 배후에서 해주는 겁니다.
구약의 마지막에 보면 말라기가 나와요. 그 말라기에 나오는 주제가 뭐냐 하면 레위지파의 연속성을 이야기 합니다. 레위지파의 연속성. 말라기 마지막에요. 그래서 십일조가 거기에서 거론되고 있는데 그 레위지파가 마지막까지 거론되는 것은 뭐냐 하면 무질서에서 질서로 전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무질서한, 성경에서는 이 세상을 무질서로 보지만, 사실은 개개인으로 봐서는 절대로 무질서 하지 않아요. 자기 나름의 반듯한 각진, 아주 체계 있고 착실한 인생을 살아 온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무질서의 요소가 되는 겁니다.
주님 중심의 연극을 자기중심의 연극으로 전환시켜버리면 경배의 대상이 주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자, 쉽게 한번 해 봅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이것이 주님이 기쁘게 생각하시겠느냐는 생각 안 해요. 그 행동이 어떤 해악을 끼칠까 또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까를 먼저 생각한단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있으나마나한 식으로 우리는 생활하고 있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왜냐하면 이익과 손해를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지파가 다 그래요. 하나가 안 된다는 뜻을 계속 설교시간에 이야기 하는 것이, 결코 인간은 여럿이 자력으로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가 안 되면 주님이 다 같이 모으는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을 못 받지요. 분리되면 안 되니까. 거기에 가담되지 않으면, 언약 속에 담기지 않으면 복을 못 받으니까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대책이 레위지파예요.
유다지파, 레위지파를 같이 생각을 해줘야 합니다. 그럼 유다지파는 뭐냐 하면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유다지파에서 왕이 등장합니다. 왕. 굉장히 우리에게 호감이 있는 개념이에요. 왕이 등장하면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자기 일을 태만히 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왜? ‘왕이 알아서 하는데 내가 일할 것이 뭐가 있나?’ 이런단 말이죠. 어떤 교회 목사님 오시면서 목사님 하는 말이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해가지고 백 명 교인을 일 년 내에 이백 명 모으겠습니다. 그 소리 듣고 교인들이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빡세게 기도 안 해도 되고, 백 명에서 이백 명 되면 이 부동산을 운영하는 관리비가 수월하게 반 토막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돈 적게 내니까 세상에 돈 적게 내도되는 그런 목사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약 그 교회가 이백 명이 아니고 천명이 온다면 자기는 푼돈 내도 괜찮아요. 대번에 그 목사를 청빙해 버리는 겁니다. 비전 있다고.
완전히 교회가 회사예요. 그분이 빡세게 기도한다는데 내가 빡세게 기도할 필요 없잖아요. 그분은 또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까 나는 기도할 필요 없잖아요. 왕이 있다는 것을 작용이라 합니다. 그리고 왕에 대해서 그 작용이 되면 이것은 다 주의 일이 아니고 개인의 일이 그대로 숨겨져요. 죄가.
거기서 반작용이 있어야 돼요. 작용과 반작용. 그게 레위지파입니다. 밀고 당기는 게 있어야 돼요. 각 지파끼리 모아놓게 되면 하나 되기 위해서 억지로 공통점을 뽑아냅니다. 그런데 공통점 있다고 해서 개념이 같은 게 아니에요. 보통 인간 보고 개념 없다고 하잖아요. 같은 행동, 같은 취미, 같은 식사를 원해도 인간이 같은 질의 인간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억지로 친구 삼으면 문제 생깁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각자 자기 일이 있어요.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남의 일에 간섭할 필요도 관여할 필요도 없고, 간섭 안 해서 좋고, 내 일만 해서 편합니다. 각자 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잘났다 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지역 지역마다 각자각자 일이 다 있어요. 농사 짓는 사람 있고, 소금 생산하는 사람 있고, 또는 뭐, 고기 잡는 사람 있고, 전부 다 달라요. 그런데 모든 일에 거침없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직업이 딱 하나 있어요. 뭘까요?
어떤 직업이라도, 목사도, 신부도, 중도 관계없이 어떤 직업도 거침없이 들어 갈 수 있는 직업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형사입니다. 압수 수색 영장 받아서 들어가면 그 사람의 직업과 상관없이 모든 법의 집행을 할 수 있어요. 그게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지파.
들어갈 때, 칭찬해 주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들어가는 게 레위지파입니다. 오늘 본문에 8절에 보면 “주의 둠밈과..” 안 그래도 발음 안 좋은데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유다지파는 유다지파 나름대로의 자기 농사 짓는 데가 있어요. 자기의 땅 분배할 때 전부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에요. 스블론 지파도 농사 짓는 사람 있고 농사 지으면 농사 짓는 사람 나름대로의 자치 제도가 형성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아무리 자치로 자기주장, 자기목적이 있더라도 그 목적에 대해서 우열적인 지위에서 초월적인 지위에서 수색영장 가지고 침범하는 것은 레위지파밖에 없습니다. 9절 끝에 보면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10절에 보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침이라”
주의 율법의 가치를 전부 다 가르치는 역할은 레위지파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말라기에 주제가 레위지파의 연속성이라고요. 오늘날 이걸 신약 적으로 이야기 하면 성령은, 성령은 레위지파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독자적인 자기 욕정, 자기 목적만 챙기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갑자기 들어옵니다. 수색영장 들고 들어옵니다. “너를 기쁘게 힐거야? 아니면 주의 일 기쁘게 할 거야?” 우리는 핑계를 댑니다. “나의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주의 목적을 잊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네가 쓸데없이 관객이 되어 가지고 연극을 꾸미는데 관여한 샘이 돼요. “ 저 뒤에 원수 조심하세요. 아저씨.” 이런 식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긴 하지만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주의 하시는, 일방적으로 하시는 연극에 혜택을 입을 뿐이지 우리가 관여해서 주의 일이 성사되는 건 아니에요.
성사는 주께서 홀로 하시는 이유가 우리는 너무 철이 없어서 그래요. 우리는 너무 주제 파악을 못해요. 그게 주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범죄자가 관여 해봐야 그 안에 죄 짓는 것밖에 안돼요. “주님이여, 내 식대로 되어야 합니다.” 이게 기도 아닙니까.
내 식대로 되어야 되고, 우리 아이는 이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 아빠는 이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 처남은 이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 올케도 교회 나와야 하고,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를 자기가 다 결정해요. “오, 안되는데, 안되는데, 중보기도 할 테니까 처남 나오게 하옵소서.”
그거는 우리 관할 사항이 아니에요. 왜 같은 남자인데 이쪽은 처남이라는 이유로 교회 나와야 하고 저쪽은 지옥가도 괜찮습니까? 그거는 말이 안 되거든요. 뭔가 주인공이라는 거, 이 세상에 주인공이라는 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려요.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수색 영장이 필요합니다.
자, 수색영장 발급 되어가지고 쳐들어갔죠. 9절에 보면 나옵니다. 9절에 “그는, 레위지파입니다,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레위지파가 같은 형제를 작살을 내는 겁니다. 32장에 모세가 시내산 올라간 뒤에 밑에 아론이 남았거든요. 백성들과 함께 송아지를 가지고 금가락지를 빼서 녹여서 황소를 만들었고, 여기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여호와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즐기니까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출애굽기 32장 27절부터 29절까지를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이 레위지파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형사입니다. 형사는 모든 직업에 다 관여한다고 했죠. 초월적 위상을 가지고 있어요. 이 레위지파에서 나온 자가 누구냐, 바로 레위지파에서 나온 형사 중에 형사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이에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오늘날 성도를 뭐라고 하냐 하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어요.
고린도 전서 6장에 보게 되면 “세상 판사가 너희를 평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천사도 너희들이 재판관이 된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세상을 평가하는 형사들이다”라는 이 말이죠. 법의 집행자예요.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에 기준해서 해야 됩니다. 옛 언약에 기준 하는 게 아니에요. 새 언약에 기준해서 집행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는데, 왜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느냐? 내가 너희들을 집행하리라”는 이런 기능을 하기 위해서 성도가 있는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죄인이죠. 이 레위지파의 헌신이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민수기 25장에도 있는데 시간 관계상 그걸 다 못 보는데 민수기 25장에 보면 “바알브올에게 음행할 때에 거기에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거기에 남녀의 배를 꿰뚫어 창으로 찔러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또 다시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 헌신했어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 형사의 집행이 아주 강력한 집행이죠. 인간의 어떤 행위나 노동 이런 걸 일체 인정하지 않고 주의 법만 일방적으로 적용 시켰는데 왜 그러면 레위지파가 이렇게 할 수 있고, 왜 그러면 다른 지파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그 다른 지파에게는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구태여 하나님 믿지 않더라도 살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거예요. 근데 레위지파의 생존은 뭐냐 하면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 가져오면 밥 먹고 살 수가 없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좌복하면서 양들의 제물을, 속죄제 그런 걸 안 가져오면 레위지파가 살 수가 없어요.
따라서 레위지파의 생존은 어디에 걸려 있느냐 하면 백성들이 얼마나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고 회개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레위지파가 유지되느냐 무너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 말로 쉽게 하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자가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을 평가할 때에 대한민국 헌법에다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만 연극무대에서 적용이 되니까 그저 십자가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없이는 나는 못살겠다 하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제사장들입니다. 성도예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 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사는 자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죠. 그래서 레위지파의 이 기능은 형제도 없고 애비도 없고 자식도 없고 오직 주님의 언약에 꽂혀 버린 사람, 그리고 그 언약 때문에 계속 존재하게 되는 사람들 이 세상에 등장하고 출현되는 사람들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에요.
레위지파가 레위지파대로 기능을 한다는 말은 배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가동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이런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성도가 한 명 있다면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는 겁니다. 만약에 권찰회, 권찰회 하니까 오랜만에 이 말 하니까 이상한데, 권찰회 구역예배 이렇게 했을 때 권사님이 한 열 명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성도라면, 참 이건 기적에 속한 거지만, 그중에 한명이 성도라면 그 권찰회에 주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번 강남 강의에서 성도를 USB라고 했어요. 정보를 어디에 꽂으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되도록. 하늘나라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살기 좋다는 말이 아니고 레위지파의 기능, 형사의 기능을 형사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십자가의 기준으로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 안에 주와 함께 있는 지극히 작은 자로서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거기 가서 왜 성도 없느냐고 짜증내지 마시고 본인이 성도하면 돼요. 성도 할 때에 어떤 마음 가짐이냐하면,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보자, 주께서 일하는 거.” 이 이야기 하면 돼요. 이 이야기.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나밖에 모르지만, 봐라, 연극무대에서 주께서 다 이루었잖아.” 그 이야기만 하면 된다구요.
근본적으로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 편 이겼다”하는 이게 문제예요. 우리 편 이겼다가 문제라니까요. 무슨 우리 편이 있어요. 거기에. 제가 올해 이스라엘 갔는데, 이 이스라엘 이거 언제까지 울 겨 먹는지 보자, 이스라엘 갔는데 거기에 경찰들 지키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서 유대인들이 서벽, 서쪽 성벽을 향해서 거기서 통곡을 하고 있어요. 이거 여러분 많이 봤을 거예요. 티비도 많이 나오고. 제가 그 자리에서 뭘 생각했느냐 하면 저렇게 벽보고 통곡할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똑똑하다고 하는데 저보다 머리가 나쁜 것 같아요, 암튼 통곡할 것이 아니고 그 서벽을 무너뜨리면 돼요.
서서 통곡할 자리가 아예 없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해결책이에요. 그건 게 있으면 자꾸 거기에 통곡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어 해요. 그걸 없애 버리란 말이죠. 없애 버리면 위에 황금 돔도 같이 무너질 것이고 아예 불도저로 확 밀어버려야 돼요. 이스라엘에 중장비가 오죽 많습니까.
그럼 뭐가 되느냐, “그렇게 밀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주의 일은 주가, 메시아가 알아서 합니다.”를 보여주는 그런 자세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속에서 유일한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나는 혜택 입은 관람객이고 나는 주의 일의 과정에 하나의 과정으로써 참여된 것이지 내가 이 세상 내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아님을, 주 예수를 믿는다는 그 티를, 진짜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을,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면 우리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