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 -사카이 마사토;2016 nhk대하 <사나다마루>주인공인 유키무라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될지 대략 난감한데요...이미 위키백과나,이런 저런 카페,블로그 군기물 웹글등에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더 써봐야 군더더기 사족밖에 안될듯 싶은데.....말입니다.
일단 사나다 유키무라의 이 유키무라라는 이름은 당대에는 불려진 이름이 아니구요...
에도시대에 군기물에 등장함으로서 오히려 본명 노부시게보다 더 유명해진 이름이 되었구요...[사나다마루 타이가에는 노부시게가 유배된 고야산 구도마을에서 탈출하여 오사카성으로 입성하려고 마음먹은 시점에서 즉,고야산 구도마을에서 막 탈출하기 직전에 이름을 노부시게에서 유키무라로 개명한 걸루 나오는데,이는 이 사나다마루 타이가 극작가인 코키센세의 창작으로 보고 싶네요!!^^]지금은 오히려 본명 노부시게보다 유키무라가 더 유명하고,유키무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되버렸다고 봐야겠죠...
1603년 아버지 마사유키로부터 가독 승계를 받았다고 하는데...이 역시 진위 여부가 불투명 하구요...어찌보면 아버지 마사유키의 유명에 가려서 늦게 빛을 보지 않았나 싶구요...지금은 그냥 흔히들 전국시대 제일의 용사라고 별칭하지만,이또한 1615년 여름전투에서 그 용맹으로 도쿠가와 본진까지 육박한 그 용맹의 공을 인정받고 과대평가되어 전해진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봅니다.즉,노골적으로 말하면 1614,15의 오사카 겨울,여름전투에서 유키무라가 보여준 임팩트가 너무나 강ㅇ렬했기 때문에 그 한방의 활약 하나로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ㅇ는 역사 인물이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요...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유명에 가려서 역사에서 한두줄도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만....제가 보는 입장은 그렇습니다....
흔히 아버지만도 못한 자식이 즐비한데...이 유키무라만은 그 오명??에서 벗어난 케이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유...
사나다가문은 1985년 nhK신대형 와이드극으로 전파를 탄적이 있는데...여기서 유키무라역을 쿠사카리 마사오상(2016년 nhk대하 사나다마루에서는 유키무라 아버지인 마사유키역을 함)이 하셨고,그의 형 노부유키역을 와타세 츠네히코님이 하셨는데...이 대하극이 한동안 판도라 동영상으로 굴러다닌 적이 있어서 저 또한 몇십편 본 적이 있는데...지금은 찾을 수가 없데유...ㅠㅠ 그리고 NHK대하 <풍림화산>(2007)에는 유키무라의 할아버지 유키타카 이야기가 배우 사사키 구라노스케분으로 해서 그런대로 잘 그려져 있다고 봅니다만...
그럼 도대체 이 사나다가의 출신 족보는 어디냐 했을때 이게 참 ...
이에 대해서는 링크하나 걸겠으니 참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xtaiji83/140144515897
위 링크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키무라의 행적과 공적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렇게까지는 화려무비하다고는 말할수 없다고 할 수 있지요...즉,별로 언급해 줄 내용이 없다고 한다면...이것 의외다 하실지 모르겠으나,그게 엄격한 객관적 역사적 사료적 평가이니 그렇다 치구요...그러나 이야기 서사적인 측면에서는(좀더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드라마,영화,연극무대의 구성적인 측면에서는)상당히 흥미있는 요소가 하나 분명히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몇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바로 대부분 오사카 겨울,여름 전투의 활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이 전투에서 오사카 3인방(고토 모토쓰쿠,모리 카츠나가,유키무라)으로 불리우며,죽기살기로,아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것이 높게 평가되어,그 유명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보겠으며,전국무장의 비주류인물로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물론 일부는 사실이고,일부는 야담,전설이 섞인 사나다 십용사 이야기까지 곁들여져서 말입니다.
끝으로 유키무라의 죽음에 대하여서만 예전 제가 다른 카페에 간단히 써놓은 것이 있어 펌,복사 해옵니다.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중 6월 3일(양력날짜임) 오전 도묘지전투에서 유키무라공 못지않은 중요인물인 고토 모토쓰구가 죽고,즉 오전에 선봉에 나선 고토 모토쓰구부대 2600기가 도쿠가와 군세(혼다 다다마사,마쓰다이라 다다아키,다테 마사무네)23000기와 맞다뜨려 퇴각하지 못하고 안개속에서 고토는 부상을 입고 헤매다가 결국,고토 자결하고,다시 전진하는 마사무네 군세를 스스키다 가네스케가 막아보려고 했으나, 이 또한 역부족으로 패배 전사하면서 도묘지 오전전투가 종결되고,이에 따라 더이상의 전력손실을 우려한 유키무라공이 오사카군의 오사카성으로의 퇴각을 명령했지요.그리고 이 퇴각과정에서 이에야스 6남 다다테루가 추격공격을 하지않고 그냥 유키무라에게 항복종용 정도로 끝낸것이 후에 문제가 되어 다다테루는 이에야스에게 처벌을 받았고요...
그리고 다음날 6월4일(음력으로는 5월 7일) 텐노지전투가 발생하고.단,이 텐노지전투에서 유키무라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유키무라는 시텐노지까지 쫓겨서 여기서 총탄에 맞아 절명했을 걸로 보는 것이 하나의 유력한설?
유키무라공의 죽음에 대한 또다른 설은 이미 지쳐서 기력을 잃은 유키무라공이 6월 4일 시텐노지에서 더이상의 퇴각을 포기하고 <내가 사나다 노부시게다(노부시게가 진짜 유키무라 본명임)나는 이미 지쳤고 더이상 싸울 힘조차 없다.자,내목을 취해 공을 세우라>고 외치면서 니시오 니자에몬에게 순순히 그 목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끝으로 사족성 한마디 덧붙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마즈 요시히로옹의 입에서<서군이 졌다>고 말한 순간에 세키가하라전투는 끝이 난거고요,그리고 <오사카 전투>는 유키무라공이 죽는 순간에 끝이 났다고 봅니다.일본 전국시대의 최후의 최후를 장식한 인물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여담:유키무라공이 시텐노지로 후퇴하기전에 이에야스본진 몇백?미터까지 돌격하여 거의 이에야스의 목을 취할정도까지 육박해 들어갔는데(아마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이 꼼짝없이 죽지 않을까 까지 생각하고 자결을 하려고까지 했다고 하지요...)...그러나 전력의 역부족 속에서 패퇴하여 시텐노지까지 쫓길 수 밖에 없었고,거기서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조]2016년 nhk대하의 제목인 이 <사나다마루>란 무얼 말하는가?
사나다 마루는 오사카 겨울진(1614)에 유키무라공이 오사카성 남쪽에 반원형으로 세운 보루랄까 임시성루(=일본말로 야구라를 쌓았다고 말합니다.)입니다.도쿠가와측 공격을 뎃포사격으로 여러번 패퇴시킨 전력이 있는 아주아주 중요한 성루입니다.오사카겨울 전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활을 한 성루라고도 볼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이 견고한 성루를 도쿠가와측이 뚫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전략을 바꿔서 유럽산 일본산 포함한 17대의 대포를 동원하여 오사카성안 본진(즉,혼마루천수각)을 향해서 연방 대포를 쏘아 대었고, 이에 겁에 질린 요도도노(챠챠)가 너구리 영감(=이에야스)이 제안한 화평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서 오사카겨울 전투가 종결됐다고 봐야 하겠지요...그리고 나서 도쿠가와 이 너구리 영감님(+비서실장 혼다 마사노부)이 꼬닥수를 내서 오사카의 해자란 해자는 모두 메워버렸기 때문에, 오사카성은 성으로서 그 방어효과가 무용지물이 되버렸고,그래서 결국은 오사카군은 오사카 여름전투시 그 전략상 야전으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며,이 야전에서 쪽수(대가리수)의 절대적 열세로 오사카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봐야겠죠,,,
사나다 노부유키-오오이즈미 요-노부시게의 형;이분 전국시대 인물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 사셨죠,94세까지인가 그렇죠...원래 사나다가는 첫째가 단명하여 아명이 겐타로가 아니라 셋째에게 주는 겐자부로 였더랬죠!!그래야 오래 산다는 미신이죠!!드라마에 보며는 첫째부인은 사촌누이(그러니까 노부유키의 아버지인 마사유키의 형의 딸과 결혼한 것)이고,너구리 영감 이에야스의 압력으로 첫부인과 이혼한뒤,이에야스의 자랑이라고 일컫는 혼다 다다카츠의 딸과 재혼했죠!!물론 재혼하고도 첫부인과 절연하지 않고 한집에서 하인(그러니까 재혼한 후처의 하인노릇을 하면서)같이 살면서,또 후처몰래 성관계도 맺고서 나중에는 아들까지 얻게되죠!!이 아들로 가독이 승계되지요....드라마상에서 오오이즈미 요가 노부유키역을 참 잘해낸걸루 보겠음.즉 요연기가 노부유키와 120% 씽크로율된 연기를 펼친걸루 나 하나님은 높이 평가함...요상의 손바닥에 나 하나님이 <참 잘했어요!>하면서 도장 5개 찍어준다!!!^^ㅋ
키리-나가사와 마사미-노부시게의 어릴적 친구;역사상의 실존인물이기는 하나 드라마에 나오는 키리의 역활은 초반부 유년시절만 개연성있는 사실이고, 성인시의(즉 유키무라를 따라 교토에서의 맹활약등의) 모든 행동역활들은 모두 120% 이 드라마 작가인 코키센세의 천재적인 오리지널 창작이라고 보겠음.역사드라마든,일반드라마든 드라마가 재미만 있으면 됐지,역사드라마니까 이건 역사사실이다,아니다고 시시콜콜 따지며 꼰대,꼰년식으로 역사드라마 보면 재미없음!!^^ㅋㅋ
사나다 마사유키-쿠사카리 마사오-노부시게 아버지;
제가 전국인(센고쿠진)에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나다 유키다카의 3남으로 태어나(1547) 위로 형,노부쓰나와 마사테루가
나가시노의 시타라가하라전투(1575)에서 전사하자 가독을 승계.
전국시대말에 5번이나 배반을 해가면서 (이에대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사유키를 겉과 속이 다른 남자로 평함....이는 비난이 아니라 칭찬임)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 분투했으며,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부자에게 보기좋게
두번이나 패배를 안긴 (1차 우에다전투,2차 우에다전투)지장이자,맹장이자,모장입니다.
큰아들은 노부유키로 이에야스의 자랑이라 불리는 혼다 다다카츠의 딸과
사돈을 맺었고 둘째아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히데요시의 인질로 보내졌다가
미츠나리의 절친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과 사돈을 맺게 되죠.이런 인연으로
세키가하라합전(1600)에서 큰아들은 동군, 본인과 유키무라는 서군에 합류하여
싸웠으나 결국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참수형에 처하여 질것을 큰아들 노부유키의
구명으로 결국 쿠도산에 유폐되었다가 1611년에 사망합니다.
마사오상 연기도 마사유키와 참 잘 어울린 연기였다고 높이 평가함.거의 이 드라마 35회까지는 마사오(마사유키) 이분이 이 드라마 주인공이신가 착각들 정도임.1985년에 nhk가 신대형 와이드극을 편성해서 【사나다 태평기】라는 드라마를 마치 타이가처럼 방영한 적이 있었더랬는데,이때 마사오상이 마사토성아가 한 노부시게(유키무라)역을 했더랬음!!^^
카오루-타카하타 아츠코-노부시게 어머니;아츠코 이분 여자 나마세 카츠히사로 불릴정도로 코믹연기에 일가견 있으신 분이죠!!^^이 【사나다마루】드라마에서도 자신의 코믹연기의 장기를 지대로 보여주심!!^^자신이 쿄토의 유명 공가귀족 출신임을 입이 닿도록 자랑하시는데,실제로는 그 공가 공주히메의 여종이었던걸루 드라마에는 밝혀지네요...진짜 역사사실 여부는 모르겠음!!여담하나 추가한다면 이 드라마 주인공 마사토성아는 nhk 타이가【아츠히메】에서 아츠코상과 첫번째 모자관계를 공연한 이래로, 이 【사나다마루】에서 두번째 모자관계의 인연을 맺었네요!!오로지 nhk 타이가로만 모자인연을 두번이나 맺었는데, 흔하지 않은 케이스라고 봐야겠죠!!^^
마츠-키무라 요시노-노부시게의 누나;남편이 오야마다 가문[하나님특별주:오야마다가문은 가이 군나이지방의 대호족임.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가 어렵게 어렵게 복속시킨 가문이며,(기실은 서로 사돈관계를 맺으며 화친함)거의 반독립적인 영지지배권을 행사할 정도로 가이 남부지방의 아주 아주 유력한 호족임.그래서 이런 호족을 고쿠진중에서 특별호칭으로 지역적영주라고 부르기도 함]이다보니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참 많이 겪었으나 말년은 부부해로 하며 해피모드로 마감!!
토리-쿠사부에 미츠코-노부시게의 조모;남편이 바로 사나다가문을 중흥시킨 유키타카(=이분 이야기는 nhk 타이가 【풍림화산】에서 사사키 구라노스케분의 연기로 잘 극화되어 있음)로 참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죠!!【사나다마루】드라마에서는 여장부 기질이 농후한 분으로 나오네요!!특히 기소의 그 유명한 기소 요시마사를 극중에서 아이 다루듯 갖고 노네요!!여담하나 또 한다면 오다-도쿠가와-호조연합군의 다케다가 영지인 가이,시나노 침공시 오다군은 이 기소 요시마사(다케다 신겐의 사위임)의 다케다가 배반으로 이 기소 요시마사가 서시나노=기소지방의 길을 터주고 안내했기 때문에 오다군은 순식간에 시나노를 통과해서 가이로 진격할 수 있었지요!!^^추가여담:기소 요시마사 가문은 서시나노의 유력호족으로서 이 가문은 먼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다케다 신겐과 같은 일문으로서, 소위 말하는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를 고시조로 하는 세이와 겐지의 후손들이며,또 이 기소가문은 nhk 타이가 【요시츠네】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기소 요시나카의 후손임.
우메-쿠로키 하루-노부시게의 첫사랑;노부시게의 첫부인으로 딸을 낳고 이에야스의 우에다 1차침공때 전사한걸루 드라마에는 나오는데 역사사실 여부는 모르겠음!!이 말은 노부시게가 첫딸을 우메에게서 얻은 것은 사실인데,과연 우메가 1차 우에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냐는 것임!!이 부분도 코키센세의 센스있는 창작으로 보겠다는 뜻임!!
홋타 사쿠베-후지모토 다카히로-우메의 오빠;노부시게와 우메사이에서 낳은 딸을 자신이 친아비인냥 하면서 기르는 것으로 드라마에는 나오네요...이것 말고도 참 많은 활약을 하시는데,...이는 그냥 패스!!^^
하루-마츠오카 마유-유키무라의 정처;세키가와라합전의 주역인 이시다 미츠나리의 절친인 오타니 요시쓰쿠의 딸로서 유키무라의 정식의 정처라고 할수 있으며,유키무라의 고야산 유배시 고난을 함께하며,유키무라는 오사카합전시에 자신의 가솔의 안전과 후사를 다테 마사무네에게 몰래 비밀리에 부탁하는데,이를 다테 마사무네가 흔쾌히 수락하여,오사카 여름전투가 종결된뒤, 다테 마사무네의 거성인 센다이에서 생명을 보존하고,생활하게됨.재미있는 여담은 유키무라와 하루사이에서 낳은 딸이 마사무네의 오른팔인 가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과 혼인하게 된다는 사실임.추가여담:다테 마사무네에게는 오른팔,왼팔이 있었는데, 지(智)에 오른팔의 가타쿠라 카게츠나가 있었다면,그 왼팔에는 마사무네의 사촌동생으로 다테 시게자네가 있었는데,시게자네는 무용이 뛰어난 맹장으로 무(武)의 대명사라고 불릴정도 였지요!!시게자네는 투구에 지네 장식을 달고 다녔는데,이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하지요!! 1987년 nhk 타이가 【독안룡 마사무네】를 보시면 미우라 토모카즈의 연기로 다테 시게자네의 용맹무쌍함이 잘 형상화 되어 있습니다!!^^이 드라마 보시면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배우들의 정말 팔팔했던 젊은 시절의 모습에 새삼 반갑고 놀라게 될겁니다.예컨대 너구리 영감의 골칫덩이.개구쟁이,말썽장이,악동이었던 다다테루를 제가 좋아하는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가 연기 하는데,그의 상대인 부인 이로하(다테 마사무네의 큰딸임)히메역을 바로 【과수연】의 간판스타 사와구치 야스코가 하는바,이 둘의 정말 앳된 모습에 찬찬히 보지 않으시면 처음에는 잘못알아 보실겁니다!!^^ㅋ【독안룡 마사무네】는 일본 전국시대 관련 드라마로 저 하나님이 【풍림화산】과 더불어 지인들에게 반드시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는 전국시대 타이가입니다.
사스케-후지이 다카시-닌자;전국시대 거의 유력 고쿠진,다이묘 가문이 그렇듯,이 사나다 가문도 닌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그런데 드라마에서 이 사스케의 활약이 아주 엄청나네요...여담이지만 예전 1985년 【사나다 태평기】에서는 여자닌자를 등장시켜 그당시 유키무라역을 한 마사오상과 러브모드라인을 조성시켜 극중재미를 배가시켰던 기억이 나네요...
타카나시 나이키-나카하라 다케오-키리의 아버지;마사유키를 옆에서 충실하게 보좌하는 필두가로.그런데 이 사나다 가문을 추종하는 직신가문이 이 타카나시 가문말고 누가 있었지??? 드라마 속에서는 이 타카나시 가문 말고는 다른 직신가문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음.중견배우 테라지마 스스무가 연기한 이데우라 마사스케는 다케다가의 직신이지 사나다가의 직신은 아니며,그냥 다케다가가 멸망한뒤,사나다 마사유키의 뜻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절친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할듯함!!^^아무리 사나다 가문이 비록 고쿠진급 정도에 불과한 가문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3~4명의 직신가문은 거느렸을텐데,드라마상에는 이 타카나시 가문 말고는 전혀 등장하지 않네요!!^^ 이 추가 가문을 줄줄이 말할 수 있어야지 사나다 오타쿠 또는 전국시대 지식 레벨 중급수준 이상은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저는 따라서 전국지식 레벨 초보하수임!!^^다만 이 타카나시 가문은 저의 일본 전국시대 짧은 짬밥으로는 북시나노의 유력 호족가문들중의 하나로 알고 있는데...맞는지는 모르겠다???ㅎㅎ 여담이지만 아직 고쿠진이 뭔지 모르시겠다는 분은 일본 전국시대 관련지식 레벨 왕초보,초하수라고 봐야겠죠!!^^ 고쿠진 관련 저의 이 카페에서 이미 올렸던 글들중의 하나 링크겁니다: http://cafe.daum.net/towardtruth/55zC/218
야자와 산쥬로 요리유키-사코다 다카야-사나다가의 중신;정확히는 사나다가문과 인척가문인 마사유키의 숙부의 아들 되겠음.극중에서는 유키무라의 친구이자,추종인물로 묘사됨.이 가문이 주로 사나다가의 전략적 성중의 하나인 누마다성을 충실히 지켰지요!!
오야마다 시게마사-다카키 와타루-마츠의 남편;바로 가이 시나노를 지배했던 다케다가문을 배반한 오야마다 노부시게와 같은 혈족가문 되겠음.가이 군나이 지방의 지역적영주인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배반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오다군의 가이 침공이 시작되기 이전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고즈케(上野) 이와비쓰성(岩櫃城)에서 때를 기다릴 것을 진언했고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이와도노성(岩殿城)에서 오다군을 영격할 것을 제안했다. 가쓰요리는 이와비쓰성에서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정했으나 이후 이와도노성으로 후퇴하여 오다의 대군을 영격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가쓰요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참인 사나다 보다 혼인관계도 있는 오야마다씨가 더 신뢰가 갔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가쓰요리는 병사들을 이끌고 군나이의 이와도노성을 목표로 도망갔다. 그러나 가쓰요리를 맞이한다던 오야마다씨의 모습은 없었고 인질로 있던 노부시게의 어머니도 그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가쓰요리는 노부시게가 배신 한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군나이 진입을 단념한 가쓰요리는 덴모쿠산(天目山)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일족과 같이 자살했고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씨는 멸망했다. 가쓰요리를 배신한 노부시게의 최후도 비참했다. 가쓰요리 사후 노부시게와 그 일족들은 노부나가 [정확히는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하나님주]에게 붙잡혀 젠코사에서 참살당했고 오야마다씨도 다케다씨를 따라 멸망했다.>>(이 인용은 인터넷 웹글에서 따온 것인데요... 다만 이번 <사나다마루>극중에서 처럼 다케다 가츠요리와 유키무라가 만났다는 설정은 역사적 사실로는 확인 안되는 코키센세의 순전한 창작이라고 봐야 할듯...^^)
사나다 노부타다-쿠리하라 히데오-마사유키의 동생;저는 마사유키의 동생이 있는지는 이 드라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됐는데...이 부분 역시 코키센세가 없는 동생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으며,역사사료로 확인해 볼까 하다가 귀차니즘으로 그냥 패스함!!그래도 궁금한건 조금 못참는 성질이라 확인해 보니,유키타카는 총 5명의 아들을 두었더랬는데,첫째 노부쓰나와 둘째 마사테루는 그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하고,그래서 셋째인 마사유키에게 가독을 물려주었고,마사유키 아래로는 【사나다마루】드라마상에서 간자로 맹활약[정말 간자역활을 주임무로 하였는지 이부분은 정말 일본 전국 역사사료로 확인하고 싶다!!ㅋ]하는 노부타다가 있었고, 그리고 막내아들로 다카카쓰가 있었네요!!^^
코우-나가노 사토미-노부유키의 첫번째 처;골골하게 병약한 몸으로 이리저리 시달렸으며,너구리영감 이에야스 압력으로 강제이혼도 당하고유ㅠㅠ, 어찌어찌 아들하나 낳아 이 아들로 사나다가문은 가독 승계되고, 1868년 명치유신후까지 살아남아 백작가문으로 존속하게 되지요!!^^
야자와 요리츠나-아야타 도시키-마사유키의 숙부:앞에 쓴 야자와 산쥬로 아비!! 사나다가문의 주요성인 누마다성을 충실히,고집스럽게 지킴!마지막 여담하나 한다면,누마다성은 사나다가문의 거성인 이와비츠성,그리고 그 유명한 우에다성과 더불어 사나다가를 지켜주는 극히 중요한 전략적인 성인데,이 성을 두고서 사나다가문은 호조가문과 그 소유권을 두고서 여러번의 분쟁을 하였지요.결국 원숭이 히데요시의 중재로 누마다성은 호조소유로 하고,이 누마다성을 감시할수 있는 나구루미성은 마사유키의 요구대로 사나다가문이 소유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는데,여기에 히데요시의 미묘한 암수(=술수)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 이를 바라보는 전국시대 관전자들의 중론인데요.【사나다마루】 타이가에도 나오지만,호조가문은 이후 누마다성으로는 양이 다 차지 않아서 곧바로 나구루미성까지 탈취하고 마는데,이는 호조가문이 히데요시의 1586년 12월의 총무사령=소지부레이[관동,동북의 다이묘들에게 사사로운 전투행위를 하지 말라는 원숭이의 중대명령:하나님주]를 어긴것이 되므로, 곧바로 원숭이는 호조의 오다와라성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거지요!!따라서 히데요시가 1589년에 누마다는 호조것,나구루미는 사나다것으로 양분해서 준 것에는 만일 호조가 누마다로 만족 못하고 나구루미까지 탈취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 경우, 이를 빌미로 호조가문을 치겠다는 히데요시의 미묘한 암수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지요!!^^그리고 익히 잘들 아시다시피 1590년에 원숭이가 호조의 난공불락의 거성인 오다와라성을 공격하고, 호조가문은 <오다와라회의:공격이냐 항복이냐의 의사결정을 확실히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떼우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비꼬는 말:하나님주>끝에 결국 한심한? 항복으로 드디어 1백여년의 일본 전국시대의 종지부가 찍히게 되는 거지요!!우리의 마사토성아가 사나다마루를 세워서 맹활약하는 1614,1615 오사카 겨울,여름진은 일본 전국시대를 조망하는 아주 크고 긴 눈으로 본다면 전국시대 디저트[는 세키가와라합전 1600]라기 보다는 그냥 커피타임 정도였다고 비유해서 말하면 너무 심하게 말했나!!^^ㅋ 아마 너구리 영감도 오사카진을 그냥 커피타임 정도로 생각하고 슨푸(하마마쓰성인가??위키백과인용:
- 센고쿠 시대
에이쇼 연간(1504년 ~ 1520년) 무렵 도토미 이마가와 가문의 이마가와 사다스케가 사나루 호히쿠마 성(曳馬城/引馬城)으로 불리었다. 단, 축성에 관해서는 이설도 있다.
도토미 국 슈고 시바 가문과 스루가 국 슈고 이마가와 가문과의 세력다툼에서 히쿠마 성주 오코치 사다쓰나는 시바 가문측에 가세해 이마가와 가문에 대항하지만, 이마가와 우지치카에 패배하여 1517년이오 노리쓰라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1565년이오 쓰라타쓰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에 의해 슨푸(현 시즈오카 시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68년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이마가와 가문에서 벗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1570년 이에야스는 시나노의 다케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거처를 오카자키 성마쓰다이라 노부야스덴류 강 인근 현재 이와타 시
1573년 다케다 신겐이 하마마쓰 성을 무시하고 하마나 호 인근의 호리에 성미카타가하라 전투미카와
1582년 무렵 확장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었지만, 이에야스는 1586년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
1590년 도요토미 정권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카이 지방에서 간토로 이봉되었고, 도카이 지방의 하마마쓰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호리오 요시하루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호리오 가문은 동군에 속해 참전하였고, 그 공으로 영지를 가증받아 이즈모 국 마쓰에 번미노 국 가나야마 번에서 마쓰다이라 다다요리
- 에도 시대
1609년슨푸 번도쿠가와 요리노부의 가신 미즈노 시게나카1619년 슨푸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기이 국 기슈 번으로 이봉되자, 무사시 국 이와쓰키 번에서 고리키 다다후사1638년),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1638년 ~ 1644년), 오타 가문(1644년 ~ 1678년), 아오야마 가문(1678년 ~ 1702년), 혼조 마쓰다이라 가문(1702년 ~ 1729년, 1752년 ~ 1758년), 오코치·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1729년 ~ 1752년), 이노우에 가문(1758년 ~ 1817년, 1845년 ~ 1868년신판 다이묘 도쿠가와 가문을 뺀 도합 9가문 21명이 성주로 지낸 후다이 다이묘
- 메이지 시대
-
- 1873년(메이지 6년)에 공포된 폐성령1949년(쇼와 24년)1949년(쇼와 24년)에 따라 파각되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공원으로 정비되 1950년 개원하였다. 1958년(쇼와 33년) 하마마쓰 시 시민들의 모금을 토대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천수가 재건되었다. 단, 기록상에는 하마마쓰 성에는 천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혼마루의 2층망루를 천수로 삼았었다. 1959년(쇼와 34년) 성터는 하마마쓰 시 사적에 등재되었다. 현재 천수의 내부는 자료관으로 사용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성터 주변은 벚꽃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도시계획에 따라 공원으로 정비되 1950년1958년(쇼와 33년) 하마마쓰 시 시민들의 모금을 토대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천수혼마루의 2층망루1959년벚꽃
- 출세의 성
일반적으로 하마마쓰 성주가 막부의 요직에 임명된 일이 많은 탓에 하마마쓰 성은 출세성으로 불린다. 출세에 대해 대표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미즈노 다다쿠니이다. 그는 히젠 국 가라쓰 번주였지만, 수도 에도에서는 너무 먼 곳이기 때문에 출세길이 막혔다는 판단하에 막부의 요인에게 접대와 뇌물 공세를 폈다. 이리하여 하마마쓰 번주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좌천되고, 다다쿠니가 번주로 입성했다. 이후 다다쿠니는 지샤부교에 올랐으며, 1828년에는 막부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노중의 자리에 올랐다.
요하치-곤노 히로키-사나다향의 마을사람;그냥 마을사람!!^^ㅋ
제 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Chapter 7: Self-Knowledge and Self-Realisation
제7장 : 자아인식과 자아실현 (즈나나 요가)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프리다의 아들아, 마음을 오로지하여 내게 매달리고 나를 의지하여 요가를 닦으면 네가 어떻게 철저하게 의심없이 나를 깨닫게 되는가를 들을지어다.
The Supreme Lord said: O Arjuna, listen how you shall know Me completely
without any doubt, with your mind absorbed in Me, taking refuge in Me,
and performing yogic practices. (7.01)
거룩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아르쥬나여,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을 바쳐 나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나를 피신처로 삼아 구도행(求道行, yogic practices)들을 완수하여,
아무런 의심 없이 나를 충실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해 들어라."
(다른 판본)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said: Now hear, O son of Pritha,
how by practicing yoga in full consciousness of Me,
with mind attached to Me, you can know Me in full, free from doubt.
2. 내가 이 지혜와 아울러 지식을 남김없이 네게 이르리니, 네가 그것을 알면 이 세상에서 다시 더 알 것이 없으리라.
I shall fully explain to you the Self-knowledge together with Self-realization
after knowing that nothing more remains to be known in this world. (7.02)
이제 나는 너에게 '진정한 나(眞我)를 깨닫는 법'과 더불어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혜'를 모두 다 설명해 주리라.
이것을 알고 나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은 남지 않느니라.
(다른 판본)
I shall now declare unto you in full this knowledge,
both phenomenal and numinous.
This being known, nothing further shall remain for you to know.
I shall declare to thee in full this knowledge
combined with direct realisation,
after knowing which nothing more here remains to be known.
지혜 즈나나(jnana), 정신적 지식.
지식 비즈나나(vijnana), 분별적 지식.
즈나나, 비즈나나 하는 낱말은「기타」의 가르침 속에 다섯 번 여섯 번 나오는데 샹카라(Shankara)는 언제나 그것을 지식(knowledge)과 체험(experience)(자아실현의 의미로)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즈나나도 다름 아닌 자아의 실현이다. 그러고 보면 즈나나와 비즈나나라고 하면 같은 말의 중복이 돼버린다. 다른 번역자들, 예를 든다면 틸라크(Tilak) 같은 이는 비즈나나는 물질세계에 대한지식이라 한다. 라다크리슈난 박사는 그것을 존재의 세세한 면을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하고, 즈나나는 존재의 공통적인 밑바닥을 옹근 채로 아는 것이라 한다. 내 생각에는 그 설명은 삼캬(samkhya, 理論派)에서 쓰는 관례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거기서는 즈나나는 자아의 체험이고, 비즈나나는 자아를 자아 아닌 모든 것에서 구별해서 보는 분별적인 지식이다. 삼캬파의 카리카(Gaudapada Karika)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이 되려면 오직 나타나 뵈지 않는 것과, 나타나 뵈는 것과, 그것을 아는 이와를 분별할 줄 아는 지식이 있어야만 될 수 있다”고 했다.「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을 보고 듣고 생각하여서, 자아 아닌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이 분별적인 지식을 두고 한 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즈나나는 지혜로 번역되는 것으로 직접적인 영적 광명을 말하는 것이고, 비즈나나는 존재의 원리에 대한 자세하고 합리적인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상대를 초월한 절대를 알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가지가지 나타남도 또한 알아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 안에도, 자연 안에도 계신다. 그것들이 그이를 한정지울 수는 없지만.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는 이미 제3장에서 아르쥬나에 대해 욕망이니 노염이니 하는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감각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의 영적 지식(즈나나)과 개별적인 지식(비즈나나)을 다 망쳐버린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우선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감각의 제어가 필요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는 또 앞장에서 요가를 성취한 사람은 감각을 제어하고 난 후 즈나나와 비즈나나로 만족함을 얻어(6:8), 모든 피조물 속에서 최고의 자아(parameshvara)를 보며, 최고의 자아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본다는 것을 말해주었다(6:29). 그러므로…… 그는 아르쥬나에게 즈나나는 무엇이며 비즈나나는 무엇임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고, 또 최고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게 하는 카르마 요가의 방법을 그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틸라크는「기타」의 목적을 카르마 요가를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아주 잘라서 강조한다). 만물을 뒤덮는 그 유일 불멸의 최고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즈나나요, 그 영원한 최고의 자아에서 어떠한 길을 밟아서 억만 가지의 유한한 만물이 나와서 존재하게 되느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비즈나나다.(13:30)
……그러나 최고의 자아는 비록 하나라 하더라도, 예배의 자리에서 볼 때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느껴 알 수 없는 것 즉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과, 느껴 알 수 있는 것 즉 경험적인 것이며 실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고의 자아를 이성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느껴 알 수 없는 것을 느껴 알 수 있는 형상을 예배함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게 되느냐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가 열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두 길이 자동적으로 동시에 감각의 억제와 최고의 자아에 대한 깨달음의 두 가지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이 두길, 즉 지식의 길과 신앙의 길은 해탈의 공부에 있어서 파탄잘리 요가보다 더 우승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주의할 것은, 이 모든 설명들은 카르마 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한 부분이지 그 자체로 독립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기타」를 세 편으로 나누어서 처음 여섯 장을 카르마에 관한 것으로(倫理品), 다음 여섯 장을 신앙에 관한 것으로(神理品), 그리고 나중 여섯 장을 지식에 관한 것으로(心理品)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 —틸라크
3. 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겨우 완전(成滿位)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줄을 알며 그 노력하여서 완전에 이른 천 사람 중에서도 나를 참으로 아는 자는 겨우 하나뿐이다.
Scarcely one out of thousands of persons strives for perfection of Selfrealization.
Scarcely any one of the striving, or even the perfected persons, truly
understands Me. (7.03)
'진정한 나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천 명에 한 명도 찾아보기가 힘드느니라.
더구나 그렇게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 '크리슈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완벽해진 사람들(眞人)'이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드느니라.
(다른 판본)
Out of many thousands among men, one may endeavor for perfection,
and of those who have achieved perfection, hardly one knows Me in truth.
Among thousands of men, one perchance strives for perfection;
even among those successful strivers,
only one perchance knows Me in essence.
천 사람 중에 다른 번역에는 ‘천 명의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로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에 이르고 싶어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통이나 권위의 명령에 따라 더듬을 뿐이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자 중에서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것이고, 발견한 자 중에서도 그 본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은 하나도 이루기 어렵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어려우며, 그대로 살기도 어렵고, 정법(正法)을 얻어듣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우며, 깨닫는 자로 태어나기는 더욱 희귀한 일이다. —「법구경」(182)
싹이 나고도 이삭이 패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삭이 패고도 알이 들지 못하는 것이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논어」
나서 살고, 들어서 죽는데, 사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죽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사람이라고 나서 움직이다 죽을 데로 가는 것들이 또 열에 셋이다. 왜 그러냐, 그저 삶을 살기를 두텁게만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者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노자
4.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의 여덟 갈래다.
The mind, intellect, ego, ether, air, fire, water, and earth are the eightfold
transformation of My Prakriti. (See also 13.05) (7.04) ( That which creates
diversity, and all that can be seen or known is called Prakriti. Prakriti is also
the material cause or the material out of which everything is
made. Prakriti is the original source of the material world consisting of three
Gunas, and eight basic elements out of which everything in this
universe has evolved according to Saamkhya doctrine. Prakriti is also referred
to as Asat, perishable, body, matter, nature, material nature,
Maya, Mahat Brahma, field, creation, and manifest state.)
나의 '프라크리티(自性, 本質)'는
변화된 여덟 가지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것은 마음과 이성(理性), 자아 의식(ego)과 에테르(氣),
공기와 불과 물과 흙이 바로 그것이니라.(13장5절을 참조하라)
- 원저자주
(That which creates diversity,
and all that can be seen or known is called Prakriti. Prakriti is
also the material cause or the material out of which everything is made.
Prakriti is the original source of the material world consisting of three Gunas,
and eight basic elements out of which everything in this universe
has evolved according to Saamkhya doctrine.
Prakriti is also referred to as Asat, perishable, body, matter, nature,
material nature, Maya, Mahat Brahma, field, creation, and manifest state.)
차별성을 일으키는 것,
볼 수 있는 것, 알려져 있는 모든 것을 '프라크리티'라고 부른다.
'프라크리티'는 물질의 원인인 동시에
모든 것이 물질화되어 만들어져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상키야 학설에 따르면 '프라크리티'는
자연의 세 가지 내적 속성(Guna)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질 세계의 최초의 근원이기도 하고,
이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온
8가지 기본요소들이 발원한 근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프라크리티'는 참이 아닌 것(Sat), 사멸하는 것, 몸, 물질, 성질,
물질적 자아, 환상의 공간(Maya), 공간(場), 나(我)라는 의식, 창조물,
그리고 정의할 수 있는 상태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프라크리티(Prakriti) : 자연 물질의 본성 또는 자성(自性)
구나스(Gunas) : 만물과 사람의 여러 가지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한자로는 성(性) 영어로는 Nature 또는 Mood로 번역된다.
이 구나스는 착한 바탕(사트바 sattva) 화를 내는 바탕(라자스 rajas),
게으른 바탕(타마스 tamas)이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을 세 가지 바탕(三性)이라 한다.
- 역자주
Jnana-yoga is also called Saamkhya-yoga, Samnyasa-yoga,
and yoga of knowledge.
A Jnana-yogi does not consider oneself the doer of any action,
but only an instrument in the hands of divine for His use.
The word Jnana means metaphysical or transcendental knowledge.)
'즈나나 요가'는 또 다른 말로 상키야 요가, 산야사 요가
그리고 지혜의 요가라고도 불리워진다.
'즈나나 요가'는 자기자신을 어떤 행동의 행위자로 여기지 않고
그 분의 의지에 따른 신성한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즈나나'라는 말은 형이상학적, 초자연적 지식이란 뜻이다.
(다른 판본)
Earth, water, fire, air, ether, mind, intelligence and false ego
-- all together these eight constitute My separated material energies.
Earth, water, fire, air, ether, mind, intellect and egoism
Thus is My Nature divided eight-fold.
바탈 프라크리티(prakriti), 자성(自性).
이것들은 나타나 뵈지 않는 바탈, 곧, 프라크리티가 나타나 뵈게 될 때 가지는 모양들이다. 이것은 초기의 분류이고, 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스물네 가지로 분류된다. 13장 5절을 보라. 감각(色, 聲, 香. 味. 觸)과 마음(識)과 이성과, 5근(indriyas, 眼, 耳, 鼻, 舌. 身)과 마음(manas)과 부디(buddhi, 感覺分別力)는 낮은 것, 곧 물질적 바탈이다. 왜냐하면 삼캬 심리학에 의하면, 그것들은 다만 감각의 대상과의 접촉을 할 수 있게 해줄 뿐이요, 의식이 성립되는 것은 정신적인 주체, 곧 푸루샤가 그것을 비쳐주어서만 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베단타에서는 그 설명을 받아들인다. 자아가 비쳐줄 때에야 감각과 마음과 이성의 활동은 지식의 과정으로 변하여 대상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다. 아함카라 혹은 자아의식은 대상(境) 쪽에 붙어 있다. 그것은 나(ego)가 대상을 제 자신에다 가져다 붙이는 법칙이다. 그 결과 몸과 정신적 주체를 하나로 보게 하는 잘못이 생기고 거기 따라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5. 그렇지만 마하바후야, 그것은 나의 낮은 바탈일 뿐이니라. 너는 나의 다른 더 높은 바탈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얼이라고 하니 이 세계가 그것으로 버티어 있느니라.
This Prakriti is My lower energy. My other higher energy is the Purusha by
which this entire universe is sustained, O Arjuna. (7.05) ( Purusha is the
consciousness that observes, witnesses, watches, and supervises Prakrti. It is
the spiritual energy or the efficient cause of the universe. This is
also referred to as Sat, imperishable, Atma, consciousness, spirit, self, soul,
energy, field knower, creator, and the unmanifest state. Prakriti
and Purusha are not two independent identities but the two aspects of
Brahman, the Absolute Reality.)
오 아르쥬나여, 이 '프라크리티(小我,自性)'는 나의 낮은 에너지이니라.
그리고 나의 다른 높은 에너지인 '푸루샤(眞我,道,大我,聖靈)'는
이 전체 우주를 지탱하고 있느니라.
- 원저자주
(Purusha is the consciousness
that observes, witnesses, watches, and supervises Prakrti.
It is the spiritual energy or the efficient cause of the universe.
This is also referred to as Sat, imperishable, Atma,
consciousness, spirit, self, soul, energy, field knower, creator,
and the un-manifest state.
Prakriti and Purusha are not two independent identities
but the two aspects of Brahman, the Absolute Reality.)
'푸루샤(眞我)'는 주시자, 목격자, 보는 자인 자각 의식이며
그리고 '프라크리티(小我)' 의 감독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영적인 에너지 또는 우주의 실제적인 기인(起因)이다.
이것은 또한 참인 것(Sat), 불멸의 것, 진아(Atama), 의식, 정신,
자아, 영혼, 에너지(氣), 공간(場)을 인식하는 나(我), 창조자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는 따로 독립된 개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절대적 실체인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Brahman)'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다.
(다른판본)
Besides these, O mighty-armed Arjuna,
there is another, superior energy of Mine,
which comprises the living entities
who are exploiting the resources of this material, inferior nature.
This is the inferior Prakriti, O mighty-armed (Arjuna)!
Know thou as different from it My higher Prakriti (Nature),
the very life-element by which this world is upheld.
얼 지바(jiva), 생명의 정수(vital essence).
이 우주의 인격적인 주재자를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그는 의식적인 얼(ksetrajna)과 무의식적인 성격(ksetra)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들을 그의 높은 모습과 낮은 모습이라고 부른다. 그는 만물의 생명이요 또 형식이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그 낮은 천성 속에 무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그 높은 천성 속에 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얼이 우리 몸, 목숨, 감각, 마음, 이성 속에 들어 있어 우리에게 나(ego)라는 생각을 주고, 그 나가 저 물질적인 배포를 그 활동의 무대로 쓴다. 모든 개인은 다 얼과 모습, 즉 크세트라즈나와 크세트라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슈바라의 두 바탈이요, 그는 이 둘을 다 초월하고 있다. 구약은 창조가 없음 속에서 나왔다고 가르쳐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시적인 물질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거기 형식을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창조자이기보다는 제작자 혹은 건축가라고 생각했다. 원시적인 소질은 영원한 것이고 지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그 형식만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의 사색가들에게는 하나님은 미리부터 있던 물질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질과 형식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와 비슷한 견해가 이 절 속에 나타나 있다. 지바(영혼, 얼)는 최고자의 한 부분적인 나타남밖에 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의 옹글고 갈라지지 않은 참이 다수한 얼의 갈라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된 것이 참이고 다수는 그것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낮은 참이지, 환상이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6. 알지어다. 모든 만물이 이 둘에서 나왔느니라. 나는 이 세계의 근원이요 또 그 풀어짐이니라.
Know that all creatures have evolved from this twofold energy, and Brahman
is the origin as well as the dissolution of the entire universe. (See also
13.26) (7.06)
모든 만물은 이 두 겹의 에너지로부터 펼쳐져 나왔고,
'브라만'은 이 전체 우주의 근원이면서 만물이 녹아드는 끝이니라.
(13장26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All created beings have their source in these two natures.
Of all that is material and all that is spiritual in this world,
know for certain that I am both the origin and the dissolution.
Know that these two (My higher and lower Natures)
are the womb of all beings.
So, I am the source and dissolution of the whole universe.
길 길이라 할 수 있으면 떳떳한 길 아니,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떳떳한 이름 아니, 이름 없음이 누리의 비롯이요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母)다.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 그 묘(妙)를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 그 교(徼)를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이 다르니, 다 까맣다 할 것이다. 까맒의 또 까맒이 뭇 묘의 오래니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徼 常有欲以概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7. 오, 다난자야야, 나보다 높은 이는 아무도 없느니라.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구슬꿰미가 실에 꿰여 달려 있듯이 내게 달려 있느니라.
O Arjuna, there is nothing higher than Brahman. Everything in the universe is
strung on Brahman like jewels on the thread of a necklace. (7.07)
오 아르쥬나여, 브라만보다 더 높은 것은 없느니라.
우주의 모든 것들은 마치 목걸이 실에 꿰인 보석들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Brahman)에 줄지어 매달려 있느니라.
(다른 판본)
O conqueror of wealth, there is no truth superior to Me.
Everything rests upon Me, as pearls are strung on a thread.
오, 부(富)의 정복자여, '나'보다 더 높은 것은 진정 없느니라.
세상 만물은 실에 꿰인 진주들처럼 나에게 의지하고 있느니라.
There is nothing whatsoever higher than Me,
O Arjuna! All this is strung on Me as clusters of gems on a string.
COMMENTARY:
There is no other cause of the universe but Me.
I alone am the cause of the universe.
나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우주의 원인이 없다.
오직 나만이 우주의 원인이다.
다난챠야(Dhananjaya) 가멸음(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위의 네 절 속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론적인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다음 절들에서는 그 같은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삼캬 철학의 설명은 이렇다. ① 이 우주에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원소가 있다. 즉 첫째, 무생(無生) 혹은 거친 물질(prakriti)과 둘째, 생각하는 정신(puru놈)이다. ② 모든 것은 이 원소로써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타」는 이원론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같은 파라메슈바라의 두 나타남으로 보는데, 그중에 프라크리티, 곧 물질은 낮은 나타남이고 푸루샤, 곧, 정신은 높은 나타남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정신의 형태를 갖는 가장 높은 프라크리티가 곧 아트만이라는 것을 13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남는 거친 물질에 관해서는,「기타」는 그것을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나 모든 창조물이 다 파라메슈바라의 감찰 아래 거기서 지어져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기타」는 프라크리티 거친와 같이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면서, 삼캬론의 프라크리티의 분류를 다소 차이를 두고서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기타」는 물질이 생긴 이후 무명(無明) 곧 마야(maya)로 인해 파라메슈바라에서 만물이 나오게 됐다는 삼캬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삼캬론에 의하면,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로 되는 원소가 합해 스물다섯인데, 그중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 스물셋이고, 그 스물셋 중 5대(五大. 地 水 火 風 空)와 열 감각과 마음, 합하여서 열여섯은 나머지 일곱 원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원소를 말할 때는 그 열여섯은 고려 속에 두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기본적인 원소는 일곱뿐이다. 즉 마하트(mahat, 知性의 근본)와 아함카라(ahamkara, 個性의 근본)와 다섯 탄마트라(tanmatra, 色 聲 香 味 觸의 본질)다. 이 일곱을 삼캬론에서는 프라크리티 비크리티(prakriti-vikriti)라고 부르는데,「마하바라타」에서 이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기본적 프라크리티를 합해서 여덟 가지 프라크리티라고 부른다. 그러나「기타」는 기본적인 프라크리티를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한 열에 놓은 것은 마땅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기본적인 프라크리티가 있고 거기서 변화하여서 일곱이 나온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류에 대하여서는「마하바라타」와「기타」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기타」는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마음을 합해서 프라크리티(自性)의 여덟 갈래라고 한다. 간단한 말로,「기타」는 삼캬론의 독립된 프라크리티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후 프라크리티의 성장에 대한 설명은 양쪽 다 근본에서 같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틸라크
8. 쿤티의 아들아, 나는 물에 있어서 그 맛이요, 해와 달에 있어서 그 빛이며, 모든「베다」에 있어서 그 ‘아옴’이니라. 나는 공중에 있어서 그 소리요, 또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그 바탈이니라.
O Arjuna, I am the sapidity in the water, I am the radiance in the sun and the
moon, the sacred syllable OM in all the Vedas, the sound in the ether, and
the manhood in men. (7.08)
오 '아르쥬나'여, 나는 물의 맛이며, 해와 달의 빛이며
모든 경전 주문 속에 들어있는 성스러운 소리인 '옴(OM)'이며,
진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이며
인간 속에 들어있는 인간다운 성품(本性)이니라.
(다른 판본)
O son of Kunti, I am the taste of water,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moon,
the syllable om in the Vedic mantras;
I am the sound in ether and ability in man.
I am the sapidity in water, O Arjuna!
I am the light in the moon and the sun;
I am the syllable Om in all the Vedas,
sound in ether, and virility in men.
‘아옴’(aum)이란 힌두교나 그밖의 종교에 있어서 신성한 낱말이요, 진언(眞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는 말이다. 이것은 ㅏ,ㅜ,ㅁ 세 음이 한데 합해져 있다. 산스크리트말에서 모음 ㅏ와 ㅜ는 마지막에 ㅗ와 합해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아옴(aum)이라는 말은 (혹은 om으로 쓰기도 한다) 여러 가지 세트리를 대표하는 말이 된다. 가령 예한다면, 하늘, 땅, 허공의 삼계, 브라마, 비슈누, 시바의 삼신,「리그」「야쥬르」「사마」의 베다 3경 같은 것이다. 이리해서 ‘아옴’은 온 우주의 짬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기도나 찬송이나 명상의 시작과 끝에 이것을 외고, 불교나 쟈이나교의 의식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6세기 이후로는 어떤 경문의 시작의 표시로 이것을 사용하게 됐다.⎯「대영백과 사전」
9. 나는 흙에 있어서 그 맑은 향기요, 또 불에 있어서 그 불꽃이니라. 나는 모든 생기 있는 것들에 있어서 그 목숨이요, 또 고행자에게 있어서 그 고행이니라.
I am the sweet fragrance in the earth. I am the heat in the fire, the life in all
living beings, and the austerity in the ascetics. (7.09)
나는 대지의 달콤한 향기이니라.
나는 불의 열기이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이며,
구도수행자들 참회이니라.
(다른 판본)
I am the original fragrance of the earth, and I am the heat in fire.
I am the life of all that lives, and I am the penances of all ascetics.
I am the sweet fragrance in earth and the brilliance in fire,
the life in all beings; and I am austerity in ascetics.
10. 오,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나는 모든 산 물건의 ‘영원 한씨’임을 알라. 나는 지성(知性) 있는 자의 지성이요, 광명 있는 자의 광명 이니라.
O Arjuna, know Me to be the eternal seed of all creatures. I am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and the brilliance of the brilliant. (See also 9.18 and
10.39) (7.10)
오 아르쥬나여,
너는 내가 모든 창조물들의 근원인 영원한 씨앗임을 알아야 하리라.
나는 지혜 중의 지혜이며 빛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빛이니라.
(9장 18절과 10장 39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O son of Prtha, know that I am the original seed of all existences,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and the prowess of all powerful men.
11. 바라타족의 임금아, 나는 힘센 자의 힘이지만 욕망과 애착은 없으며, 산 물건 속에 있어서의 욕망이지만 올바름에 거슬린 것은 아니니라.
I am the strength, that is devoid of lust and attachment, of the strong. I am the
lust (or Kaama) in human beings that is in accord with Dharma (for
procreation), O Arjuna. (7.11)
오 아르쥬나여, 나는 강한 것 중에서 가장 강하며
육체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는 벗어나 있느니라.
그리고 모든 존재들 속에서는 자연의 법칙에 응하여
생식의 욕망으로 작용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는 않느니라.
(다른 판본)
I am the strength of the strong, devoid of passion and desire.
I am sex life which is not contrary to religious principles,
O lord of the Bharatas [Arjuna].
Of the strong, I am the strength devoid of desire and attachment,
and in (all) beings, I am the desire unopposed to Dharma, O Arjuna!
Dharma(다르마) : 법, 정의, 진리
12. 또 모든 착한 성질과 사나운 성질과 게으른 성질의 물건들은 다른 것 아니고 오직 내게서 나가는 것임을 알라. 내가 그것들 안에 있지는 않으나, 그것들은 내 안에 있느니라.
Know that the three Gunas, Saattvika, Raajasika, and Taamasika, also
emanate from Me. I am not in (or dependent on) the Gunas, but the Gunas are
in (or dependent on) Me. (See also 9.04 and 9.05) (7.12)
또한 만물이 지닌 세 가지 바탕 성품(Gunas)인
착한 성품(Sattva)과 활동성(Rajas)과 수용성(Tamas)
또한 나로부터 방사(放射)되어 나옴을 알아야 하리라.
나는 그 바탕 성품들 속에 있지도 의지하지도 않느니라.
하지만 만물의 바탕 성품은 나에게 의지하느니라. (9장4절과 9장 5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Know that all states of being
-- be they of goodness, passion or ignorance --
are manifested by My energy.
I am, in one sense, everything, but I am independent.
I am not under the modes of material nature,
for they, on the contrary, are within Me.
Whatever being (and objects) that are pure,
active and inert, know that they proceed from Me.
They are in Me, yet I am not in them.
욕망, 애착(kama-raga)에 대해 샹카라는 카마(kama)와 라가(raga)를 구별하여서, 카마는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고, 라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애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의 욕망은 죄악은 아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망은 뿌리뽑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죄가 아니다.「찬도갸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으로 참되면서(satya) 참되지 못한 것(anrita)에 가리워져 있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이나 행동은, 우리 안에 있는 영(靈)의 발표이기만 하면, 그리고 참된 영적인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기만 하면 거룩한 뜻의 순수한 넘쳐흐름이 될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묻는다. “이른바 도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한다. “없는 데 없지.” 동곽자 말한다.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씀을 해야지요.” 장자 말한다. “도르래, 개미에 있지.” “왜 그렇게 아래로 내려갑니까?” “가라지, 피에 있지.” “왜 점점 더 그렇게 내려가십니까?” “개와장 조박에 있지.” “거 왜 그렇게 점점 더 내려가십니까?” “오줌, 똥에 있다.” 동곽자가 아무 소리도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장자가 말한다. “당신의 묻는 것이 어찌 그리 알맹이가 없는가? 정획(正獲,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 일을 맡아 하는 벼슬아치)이 제사에 쓸 돼지에 대해 감시(監市, 돼지 사는 것을 맡아보는 사람)에게 돼지 밟아보는 것을 물을 때에 그 밟는 것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짐작이 가는 법이다. (살이 얼마큼 졌는가 알려면 될수록 발끝 같은 아랫부분을 밟아보는 것이 쉽다. 발쪽 같은 아랫부분에 살이 있으면 등심이나 엉덩이에 살이 많을 것은 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대로(도를) 어디라고 한정해놓고 말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어떤 물건이라도 없는 데는 없다. 지극한 도란 그런 것이다.⎯장자(知北遊)
‘그들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의 뜻은 매우 깊다. 첫째로는 즉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만물이 지극히 높은 자아(parameshvara)에서 나왔으므로 지극히 높은 자아는, 마치 모든 구슬이 실에 매달려 있듯이, 바탕의 형식으로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으로 지극히 높은 자아의 널리 퍼지고 스며드는 성격은 그것으로만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은 자아는 그 모든 것을 뒤덮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 의미가 후에는 “나는 다만 내 자신의 한 부분을 가지고 전우주를 점령했다” 하는 말로 나타나게 된다.(10:42) 그러나 그밖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삼계로 구성되는 이 우주의 여러 모양의 성격이 내게서 나온 듯이 뵈지만, 그렇지만 그 여러 모양의 성격은 바탈 없음(nirguna)의 ‘나’의 형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후에 가서는(13:14~16) 지극히 높은 자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서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둘째 의미의 기초가 된다. 말하자면 9장 4절, 5절은 같은 말이다. 그와 같이 만일 지극히 높은 자아의 편만성(遍滿性)이 우주보다도 큰 것이라면. 우리가 지극히 높은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마야의 우주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13절 이하다. ⎯틸라크
‘착한 성질, 사나운 성질, 게으른 성질’ 등 힌두교 철학에서는 만물과 사람이 가지가지의 성질을 가지는 것은 구나(gunas)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구나를 한자로는 성(性), 영어로는 네이처(nature 혹은 mood)로 번역한다. 그러나 그 성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중용」의 이 성은 차라리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혹은 “코에다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 혹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어졌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러라” 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나는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온다. 구나를 셋으로 나눠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라 하는데 그것을 각각 선성 (善性, goodness-mood 혹은 harmonious mood), 동성(動性, 혹은 riery-mood 혹은 passionate mood), 암성(閣性, gloom-mood 혹은 slothful-mood)이라 번역하고 있다. 어떤 물건도, 어떤 사람도 그 세 가지 성질을 다 가지지 많은 이는 없다. 그러나 그 비례는 천차만별이다. 거기 따라 제각기 특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 자아 곧 영혼은 아니다. 이를 나의 참 바탈이 아닌 줄을 깨달아 거기서 해방이 되는데 참 자아 곧 아트만이 있다.
힌두교에서 프라크리티니, 마야니, 구나니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을 기독교 신학에서 찾아본다면, 사탄이니, 타락이니, 원죄니 하는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둘의 설명 방법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나 체험 혹은 계시가 나오는 경로는 비록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런 설명의 근본이 되는 사실에서 서로 다른 둘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설명 방법의 차이라고 알고 그것을 이해하여서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행동을 주로 하는 셈적인 자리에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고, 사탄이 유혹을 했고, 아담이 범죄해서 그것이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원죄가 됐다. 그러나 명상을 주로 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를 목적하는 인도식으로 하면 맨 첨은 첨 없는 첨에서 누구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 영원의 진화하는 과정을 따라 물질이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선악이 나왔다. 거기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논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카르마라 했을 것이고,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높은 차원의 정신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없다 하여서 모크샤니 니르바나니 했을 것이다. 이 우주는 복잡하다. 우주 자체가 그런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은 그렇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라지만,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배타적으로 내쫓아가지고는 성질상 도저히 불가능하고 다만 분별없이 옹근 채로 하는, 혼연일체하는, 통전하는 태도로만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큰 것보다 뵈지 않는 작은 것, 유익한 것보다 아무 소용없는 것, 나와 가까운 것보다 먼 것, 정반대에 선 듯이 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고마운 것이다. 무한 작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무한 큼이 있고 지극히 미운 것을 이해하는 데 지극히 어짊이 있다.
사탄이다 타락이다 원죄다 용서다 할 수 있다면, 또 프라크리티다 자연이다 법칙이다 이해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사꾼이 반드시 먹어봄으로써만 이해하는 능금이지만 그가 시인이라면 왜 나무에 달린 채 두고 무한히 바라봄으로써 못하겠는가. 만물을 엿새 동안 다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안식에 드셨다는 하나님이 왜 “그 착한 것, 사나운 것, 게으른 것이 다 내게서 나갔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내 안에 있어도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으니라” 하지 못하겠는가. ⎯함석헌
이 말의 저자는 프라크리티는 독립자존 한다는 삼캬의 주장을 반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는, 모든 만물이 세 구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해서 자존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홀로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만물을 포괄하고 포함하지만, 만물은 ‘그’를 포함 포괄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차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어떤 변동을 일으켜도 거룩한 이의 항구한 모습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그의 밑에 속해 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라다크리슈난
13. 이 세 가지 구나의 나타나는 꼴에 매혹되어서 온 세계가 저희들을 초월하고 불멸인 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Human beings are deluded by these three Gunas of nature; therefore, they do
not know Me who is above these Gunas and eternal. (7.13)
인간은 이 세 가지 근본바탕 성품에 의해 미혹(迷惑)되어 있느니라.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세 가지 근본바탕 성품과 영원을 넘어
존재하고 있는 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라.
(다른 판본)
Deluded by the three modes [goodness, passion and ignorance],
the whole world does not know Me,
who am above the modes and inexhaustible.
Deluded by these Natures (states or things)
composed of the three qualities of Nature,
all this world does not know Me as distinct from them and immutable.
나타나는 현상이 ‘그’ 때문인 것은 우리가 12절에서 본 대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와 현상 두 사이에 서는데 그 현상이 사람의 눈을 안개로 가리고 빛으로 어지럽게 한다. 그리하여 미혹된 사람은 ‘그’를 등지고 서게 된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빛을 등지고 빛에 비쳐진 물체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빛에 비쳐진 그 물체를 보고 분별하고 있는 내 얼굴 자체는 빛에 비쳐짐을 받지 못했다.”⎯마하데브데자이
우리는 변하는 현상을 볼 뿐이요 그 영원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 있는 사람이 벽 위의 그림자를 보고 있듯이, 우리는 흔들리는 형상을 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그림자들을 생겨나오게 하는 그 빛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보아도 뵈지 않으니 그것을 이(夷)라 할까,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그것을 희(希)라 할까,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그것을 미(微)라 할까. 이 셋은 따져 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왼통으로 하나로 할 것이다. 그 위라야 환한 것도 아니요 그 아래라야 껌껌한 것도 아니어서 줄줄이 잇닿았건만 이름 할 수도 없어, 다시 몬 없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꼴 없는 꼴 그림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요, 이것을 일러 얼떨이라는 것이다. 마주 가도 그 머리를 못보고 따라가도 그 뒤를 못 보는데, 옛 길을 잡아 이젯 있음을 이끌어가니 능히 옛 비롯을 아는 이다. 이를 일러 길날이라 하느니라. (視之 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ᅳ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 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노자
14. 이 구나로 이루어지는 나의 거룩한 마야는 뚫기 참 어렵다. 그러므로 내게 온전히 돌아오는 자만이 이 마야의 건너편으로 뚫고 건너갈 수 있느니라.
My divine Maya consisting of three Gunas or states of mind is difficult to
overcome. Only they who surrender unto Me cross over this Maya. (See also
14.26, 15.19, and 18.66) (7.14)
세 가지 바탕 성품 혹은 마음의 상태로 이루어져 있는
나의 신성한 무명(無明,Maya)은 넘어서기가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오직 나를 믿고 나에게 온전히 귀의하는 사람만이
이 무명의 바다를 건널 수가 있느니라.(14.26절 15.19절 18.66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This divine energy of Mine,
consisting of the three modes of material nature, is difficult to overcome.
But those who have surrendered unto Me can easily cross beyond it.
Verily this divine illusion of Mine made up of the qualities (of Nature)
is difficult to cross over;
those who take refuge in Me alone cross over this illusion.
마야(maya) 곧 무명(無明)은 힌두교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 낱말이다. 특히 정통적인 베단타(Vedanta) 교리의 비이원론(非二元論, advaita) 파에 있어서 그렇다. 마야는 본래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환상을 믿게 만드는 그 마술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가지게 된 거짓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비이원론자들에게 있어서 ‘마야’는 무한한 브라만을 유한한 현상의 세계로 나타나 보이게 하는 우주적인 힘이다. ‘마야’는 개인적인 지경에 있어서는 참 자아의 성격에 대한 무지(ajnana, ignorance)에 의해서 반영된다. 그러나 참 자아는 사실로는 브라만과 한가지인데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경험적인 자기(ego)로 오해한다. ⎯「대영백과사전」
이러한 빛이니, 더우니, 추우니 하는 경험들은 다 ‘구나’에 의한다. ‘구나’는 전에도 말한 대로, 어원적으로는 “밑에 들어 있는 것”(subordinate), 혹은 “(죽을) 인간적인 기구(mortal instrument)라는 뜻이다. 우리의 감각은 몬일(事物)의 낮은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는 그 근본적인 것은 우리에게 뵈지 않도록 해버린다. 즉 참은 숨기고 참 아닌 것을 보여준다. 피히테가 말했듯이, “우리의 봄 그자체가 물체를 우리에게서 숨겨버린다. 우리 눈 그자체가 우리 눈을 가린다”이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뵈는 것은 실체는 아니고 그 실체의 그림자뿐인데, 그 뒤에 숨어 있는 것, 즉 실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정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자아 속에 앉아 계시는 ‘그’를 보는 것은 도를 닦아 능히 자기를 억제할 줄 아는 수도자(yogi)뿐이다. 자기통제를 못하는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기타」가 그 말썽 많은 ‘마야’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마야는 우리들 실재에 대하여 미혹케 하고 속게 한다. ‘마야’ 는 환상이나 신기루가 아니요, 실재를 가리는 장막 혹은 장애물이다. 우리 속에 있는 ‘거룩하신 이’를 둘러싸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두꺼운 층이다. 우리 속의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요, ‘진리’의 얼굴을 가리는 황금 덮개다. 우리의 안, 우리의 밖에 있는 ‘구나’ 혹은 ‘프라크리티’ 가 우리 눈을 부시게 하고 캄캄케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루 헤매게 하는 것이 마야다. 겉에 두루 휘감음과, 서로 떨어지게 함은 이 ‘마야’ 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다. ⎯마하데브 데자이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창조는 ‘그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나는 말하거니와, 그것은 될수록이면 ‘그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Some think Creation's meant to show Him fouth
I say it is meant to hide Him all it can.)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서 바로「기타」의 말 그대로로 ‘마야’를 그려내고 있다.
대낮에도 신비는 있어
자연은 그 너울을 벗지 않는다.
우리가 아우성을 치건만,
그가 좋아 자진 보여주지 않는걸
지렛대로, 나사로. 망치로
억지로 뺏을 수는 없지 않으냐.
(Mysterious even in open day
Nature retains her veil, despite our clamours;
That which she doth not willingly desplay
Cannot be wrenched from her with leavers, screms and hammers.)
⎯마하데브 데자이
15. 어리석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인간 중에서도 최하에 속하는지라, 그 지각은 ‘마야’로 망가져버리고, 악귀는 버릇에 빠져 내게로 돌아올 줄을 아지 못하느니라.
The evil doers, the ignorant, the lowest persons who are attached to demonic
nature, and whose intellect has been taken away by Maya do not worship
or seek Me. (7.15)
악한 성품에 물든 무지하고 비천한 자들
악을 행하는 무리들
마야에 사로잡혀 자신의 지혜를 빼앗긴 자들은
나를 경배하지도 찾지도 않느니라.
(다른 판본)
Those miscreants who are grossly foolish,
who are lowest among mankind,
whose knowledge is stolen by illusion,
and who partake of the atheistic nature of demons
do not surrender unto Me.
어리석음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자들,
인간 중에서 가장 비열한 자들,
마야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지혜를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악마들의 무신론적 성품에 동조하는 자들과 같은
믿음이 없는 무리들은 결코 나에게로 귀의할 수 없느니라.
The evil-doers and the deluded,
who are the lowest of men, do not seek Me;
they whose knowledge is destroyed
by illusion follow the ways of demons.
악을 행하는 자가 지극히 높은 지경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것은 그 마음과 의지가 영의 기구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작은 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친 본능을 길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라쟈스 즉 암성의 하자는 대로 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착한 성질(사트바)을 활동시켜 그것을 억제하면, 우리 행동은 올바르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애욕과 무지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3성을 초월하려면 우선 선성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이 되기 전 먼저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 단계에서 우리는 이원(二元)의 세계를 지나 ‘영’의 빛과 능력 속에서 행동하게 된다. 그때에 가서 우리는 나의 좋고 언짢고에 따라 행동치 않고, 오직 ‘거룩한 이’의 기계로만 행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지극한 사람은 저란 것이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힘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느니라(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逍遙遊)
16. 오,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 아르쥬나야, 경건하여 나를 믿는 자 중에는 네 가지 사람이 있으니, 고통하는 사람, 지혜를 찾는 사람,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그것이다
Four types of virtuous ones worship or seek Me, O Arjuna. They are: the
distressed, the seeker of Self-knowledge, the seeker of wealth, and the wise
one who knows the Supreme. (7.16).
한 성품에 물든 무지하고 비천한 자들
악을 행하는 무리들
마야에 사로잡혀 자신의 지혜를 빼앗긴 자들은
나를 경배하지도 찾지도 않느니라.
(다른 판본)
Those miscreants who are grossly foolish,
who are lowest among mankind,
whose knowledge is stolen by illusion,
and who partake of the atheistic nature of demons
do not surrender unto Me.
어리석음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자들,
인간 중에서 가장 비열한 자들,
마야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지혜를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악마들의 무신론적 성품에 동조하는 자들과 같은
믿음이 없는 무리들은 결코 나에게로 귀의할 수 없느니라.
The evil-doers and the deluded,
who are the lowest of men, do not seek Me;
they whose knowledge is destroyed
by illusion follow the ways of demons.
고통하는 사람 아르다(artha).
지혜를 찾는 사람 지즈나슈르(jijnasur).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아르다아르디(artha-arthi).
지혜를 가진 사람 즈나니(janani)
17.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내 안에 있어 외곬으로 믿는다. 참으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다.
Among them the wise one, who is ever united with Me and whose devotion is
single minded, is the best. Because, I am very dear to the wise, and the
wise is very dear to Me. (7.17)
그 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나'에게 헌신하며
'나'와 영원히 하나가 된 현명한 사람들이니라.
그것은 그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아주 소중한 존재이며
'나'에게는 그 현명한 사람들이 아주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다른 판본)
Of these, the one who is in full knowledge
and who is always engaged in pure devotional service is the best.
For I am very dear to him, and he is dear to Me.
Of them, the wise,
ever steadfast and devoted to the One, excels (is the best);
for, I am exceedingly dear to the wise and he is dear to Me.
스스로 찾는 자일 때까지는 아무래도 이원(二元)의 세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지혜에 도달하면 이미 둘이 아니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이 ‘홀로 하나이신 자아’(The One Self)와 하나된 가운데 있다. ⎯라다크리슈난
18. 이들은 물론 다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그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나는 정말 바로 나 자신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온전히 요가를 닦는 그는 나만을 가장 높은 구경의 지경으로 알아 그 안에 머무른다.
All these (seekers) are indeed noble, but I regard the wise as My very Self,
because the one who is steadfast becomes one with the Supreme Being.
(See also 9.29) (7.18)
물론 모든 구도자들이 다 고귀하고 소중한 이들이지만
'나'는 그런 현인들을 나 자신과 같이 여기느니라.
그것은 그들이 지극한 도와 더불어 하나가 된 경지에서
'내 안'에 꿋꿋하게 자리잡고 머무르는 까닭이니라. (9장29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All these devotees are undoubtedly magnanimous souls,
but he who is situated in knowledge of Me
I consider to be just like My own self.
Being engaged in My transcendental service,
he is sure to attain Me, the highest and most perfect goal.
Noble indeed are all these;
but I deem the wise man as My very Self;
for, steadfast in mind,
he is established in Me alone as the supreme goal.
우리가 설혹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든지 기도를 날마다 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복을 받기 위한 부적 같은 것으로 알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종교적 신념이란 참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자는 노력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어떤 이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얻어진다. 기도를 늘 끊지 않고 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어떤 광명을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리석은 교만과 이기적인 탐욕과 두려움과 희망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인격, 즉 몸과 마음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법이다. 기도는 하나의 생활방식이다. 차차 해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의 길이 된다. 이것이 곧 즈나나, 곧 통전(統全)된 지혜, 곧 거룩한 생명이다. 즈나니(지혜를 얻은 이)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 모습대로 아는 이이므로 그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대로 사랑한다. 그는 그 거룩하신 이 속에서 산다. 그가 하나님에게 소중하듯 하나님은 그에게 소중하다. 처음 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나름의 이상대로 이용해보려고 하지만, 깨달은 자는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를 이용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그가 그 넷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다.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온전히 외곬이 된 마음으로 열심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기도가 들어주심을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 어두운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을 작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지혜에 도달한 이는 그 심정이 정결하고 그 의지가 통일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경륜을 능히 알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되어지이다.” ⎯라다크리슈난
19. 지혜를 가진 자는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에,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로 돌아오느니라. 그러한 위대한 혼은 매우 드무니라.
After many births the wise ones resort (or surrender) to Me by realizing that
everything is (a manifestation of) Brahman indeed. Such a great soul is very
rare. (7.19)
수많은 삶과 죽음을 겪은 후에 지혜로운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그대로 신(Brahman)의 모습임을 깨닫느니라.
하지만 그런 위대한 영혼은 아주 드물게 있느니라.
(다른 판본)
After many births and deaths,
he who is actually in knowledge surrenders unto Me,
knowing Me to be the cause of all causes and all that is.
Such a great soul is very rare.
현명한 이도 많은 윤회를 거듭한 후에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나'의 모습임을 깨닫고
모든 것이 '나(至高의 자아,Vasudeva)'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달아
'나'에게 진정으로 귀의하는 앎에 이르느니라.
하지만 그런 위대한 영혼은 아주 드무느니라.
At the end of many births the wise man comes to Me,
realising that all this is Vasudeva (the innermost Self);
such a great soul (Mahatma) is very hard to find.
바수데바(Vasudeva) 모든 근원의 근원, 바수천왕(婆蔽天王), 지극히 높으신 이, 그의 다시 태어난 몸(後身)이 곧 이 말을 하는 크리슈나다.
모든 것 일체(一切)의 존재.
돌아온다 귀의(歸依), 피난하다, 항복하다.
위대한 혼 마하트마(mahatma)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 라고 한 것은, 진리의 실현은 세월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경험의 깊은 밑을 충분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려면 시간이 든다. 하나님은 어떤 식물도 제 나름대로의 걸음으로 자라게 두신다. 태아가 완전히 자라려 해도 아홉 달이 드는데 정신으로까지 자라려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은 물론이다. 자연 전체가 변화하려면 길고 긴 과정이 필요하다.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수데바는 모든 것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주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두 성격의 힘으로 모은 것이다. 라마누쟈(Ramanuja)는 이 귀절의 뜻을 이렇게 본다. 즉 “바수데바는 나의 전부다.”(Vasudeva is my all.) 이것은 겸손하게 신뢰하는 신자의 마음에 느껴진 하나님의 불멸의 장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우리는 없음이다. 모든 만물이 다 그런 것처럼 사람은,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의지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그의 손에 바치며 그가 전부이시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겸허한 의식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며, 하나님은 참으로 계신다.
마드바()는 말하기를 “바수데바는 만물의 근원이다”(Vasudeva is the cause of all) 라고 했다.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설명, 기도도 다 의미가 없지 않다. 그것들은 제 나름의 상급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20. 그 마음이 가지가지 물욕으로 인해 비틀린 것들은 각각 제 성질에 이끌려 제각기 제나름의 의식을 지키며, 다른 신들을 섬기느니라.
They, whose wisdom has been carried away by various desires impelled by
their own Sanskaara, resort to other gods (or deities) and practice various
religious rites. (7.20)
그들 스스로 쌓은 숙업(宿業)에 강압적으로 이끌려
다양한 세속적인 욕망들에 미혹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본성이 이끄는 대로
각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신들이나 여신들에게 의지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종교 의식을 행하느니라.
(다른판본)
Those whose intelligence has been stolen
by material desires surrender unto demi-gods
and follow the particular rules
and regulations of worship according to their own natures.
Those whose wisdom has been rent away by this or that desire,
go to other gods, following this or that rite, led by their own nature.
Samskara(삼스카라) :
상습(常習), 전생(前生)에 축적되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업(業).
마음 즈나나(jnana), 지식(knowledge). 지(智).
의식 니야맘(niyamam), 계행(戒行)
신들 데바타(devatah), 천신(天神)들.
바가바타 신앙(비수뉴를 최고의 주재자로 믿는 종파)에서는 지성(知性)의 정도가 낮아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물질적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신들에게 귀의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절대 높으신 주재자한테로 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무지, 애욕 같은 어떤 특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 따라 가지가지의 신들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여러 신들의 공경자들은 낮고 작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구경의 지경을 지향할 줄을 모른다. 다만 최고의 주재자를 믿는 자만이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다.「베다」경전 안에는 가지가지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가지가지의 신을 믿을 것을 권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주재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주재자보다 다른 여러 신들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순수한 신봉자는 지극히 높으신 주 크리슈나야말로 만유의 주인임을 안다.「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Caitanya-caritamrita)에는 오직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만이 주시요 그 나머지는 다 그의 종이라 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자는 절대로 물질적인 것의 만족을 위해 천신(天神)들한테로 가지 않는다. 순수한 신자는 무엇이나 ‘그이’ 가 주시는 것으로 만족한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1.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케 해준다.
Whosoever desires to worship whatever deity (using whatever name, form,
and method) with faith, I make their faith steady in that very deity. (7.21)
그 누구든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신을 경배하기를 원하면,
그 신이 그 어떤 이름을 가졌거나 그 어떤 형태를 지녔던지 간에,
그리고 그 신에게 그 어떤 방법으로 경배하던지 간에
나는 그들이 믿는 바로 그 신의 모습으로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느니라.
(다른 판본)
I am in everyone's heart as the Super-soul.
As soon as one desires to worship some demi-god,
I make his faith steady so that he can devote himself to that particular deity.
Whatsoever form any devotee desires to worship with faith
That (same) faith of his I make firm and unflinching.
지극히 높으신 주는 각 사람의 신앙을 알아주시고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거기 응답해주신다. 그 영혼이 어느만큼 분투해서 일어섰느냐 하는데 따라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허리를 구부려 그와 만나신다. 가오타마 부다나 샹카라같이 명상력이 그렇게 풍부한 이들도 여러 신들을 믿는 통속적 신앙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초월적 신성(神性)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고, 동시에 무한 가지의 나타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표면의 모든 흙은 지심(地心)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든 그림자는 그 물체의 성질을 드러낸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 존경하는 것이 무엇이었든간, 그 존경이 진지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나밖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기독교 신관(神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또 반대로 인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유일신의 배타적인 생각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 만큼 정말 긴요한 것은 그 사이에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데 있다. 기독교도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들을 일으켰으며 가장 악랄한 제국주의를 행했다는 것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고.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란 것을 믿는 인도 종교는 자기네가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계급주의를 유지해 왔으며 가장 비겁한 식민지 백성 노릇을 최근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은 사색과 행동이라는 두 쌍동이 때문에 나오는 피치 못할 문제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서로 부족을 보완해줌으로써만 온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장자의 말을 빌어보자.
소지 (小知. 적은 앎)가 대공조(大公調, 큰 하나됨)에게 물었다. “마을의 말씀(丘里之言)이란 무엇입니까?” 큰 하나됨이 대답한다. “마을이란 것은 열 가지 성 백 가지 사람이 모여 한 풍속을 이룬 것이다. 다른 것을 모으면 한 가지가 되고, 한 가지를 흩으면 다른 것이 된다. 이제 말〔馬〕의 각 부분을 보면 말이란 것은 없어지지만, 그래도 내 앞에 선 것을 보고 말이라 할 때는 그 여러 부분을 하나로 세워놓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산이란 낮은 것이 쌓여서 높아진 것이고 강이란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커진 것이다. 큰 사람은 모두 한데 어울러서 하나됨(公)을 하는 이”(大人合 併而爲公, 장자, 則陽)다. ⎯함석헌
22. 그러한 신앙이 주어짐을 얻어 그는 특정한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고,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제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득은 나만이 주는 것이니라.
Endowed with steady faith they worship that deity, and fulfill their wishes
through that deity. Those wishes are, indeed, granted only by Me. (7.22)
굳건한 믿음으로 자신이 경배하는 신에게 마음을 바치면
그는 자신이 믿는 신을 통해 자기의 바램을 충족시킬 수 있느니라.
하지만 사실 그 바램을 들어주는 것은 오직 '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니라.
(다른 판본)
Endowed with such a faith,
he endeavors to worship a particular demi-god and obtains his desires.
But in actuality these benefits are bestowed by Me alone.
Endowed with that faith, he engages in the worship of that (form),
and from it he obtains his desire, these being verily ordained by Me (alone).
스스로 하는 법칙으로 움직이는 현상계의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은 원 인과 결과의 관계고, 뜻의 세계에서 보면 하나도 하나님의 주시는 것 아닌 것 없고, 토론의 지경을 벗어나면 일신(ᅳ神)도 다신(多神)도 범신(汎神)도 없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함석헌
23. 그러나 그러한 직은 지혜의 사람들이 얻은 결과는 유한하고 잠깐인 것이니라. 천신들을 공경하는 자들은 천신의 하늘로 갈 것이지만 나의 신자는 내게로 온다.
Such (material) gains of these less intelligent human beings are temporary.
The worshipers of Devas go to Devas, but My devotees come to Me. (7.23)
지적인 이해가 낮은 사람들이 기도하여 얻는
이런 물질적 충족들은 오래가지 못하는 일시적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늘의 신들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신에게로 가고
'나'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나'에게로 오느니라.
(다른 판본)
Men of small intelligence worship the demi-gods,
and their fruits are limited and temporary.
Those who worship the demi-gods go to the planets of the demi-gods,
but My devotees ultimately reach My supreme planet.
Verily the reward (fruit)
that accrues to those men of small intelligence is finite.
The worshippers of the gods go to them, but My devotees come to Me.
Deva(데바) : 신성(神性), 반인반신(半人半神)
오이 심으면 오이 얻고 콩 심으면 콩 얻는다. 하늘 그물 넓고 넓어 성기면서도 빠져나가는 것 없다. (種瓜得瓜 種豆得豆 天網恢恢 疎而不漏)
초월적인 신성을 쉽게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초월자의 가지가지 모습에 의해서 그를 예배한다. 우리가 우리의 찾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초월자가 우리 이상의 불안전한 것을 아시고 길이 참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어느 만큼 가까이 갔나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들어주신다. 어떤 정성도 보람 없지는 않다. 비록 무식한 신자라도 차차 자라 거룩하신 이 안에서의 자기의 최고의 선을 구하여 자라게 될 것이다. 모든 점을 다 포섭하고 초월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올라간 이는 최고의 지경, 곧 원만한 생명, 완전한 지식, 절대적인 사랑, 부족이 없는 의지를 실현 성취한다. 그밖의 모든 선은 부분적이요 유한한 것이요 발전의 낮은 지경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라다크리슈난
이런 설명은 반드시 오해되게 마련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은 세상 말을 쓰지만 그 뜻은 자기가 체험한 정신세계의 것인데, 듣는 사람은 보통의 의식을 가지고 듣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와서 말을 걸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벽두에 “새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여러 신이요, 천신이요, 천신의 하늘이요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우주의 어느 구석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자라는 정신세계의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드시 제 나름의 해석을 한다. 그렇게 해서 미신이 생긴다. 그러나 그럼 영은 어떻게 받나? 영의 말을 듣지 않고는 아니된다. 그래서는 순환론에만 빠질 것 같다. 거기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위에서 한 말에 “진지한 태도로 하기만 하면”이란 말이 있었다. 진지란 참인데, 참은 다른 것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함이다. 그러면 지식이나 경험이 모자라 혹 마음에 가리워진 것이 있어 잘못 알았던 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깨달아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것이 ₘ“내가 그 믿음을 튼튼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예배냐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무식한 인간의 찌꺼기인 사마리아 윤락 여성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 참이란 말을 더 넣은 것이 중요하다. ⎯함석헌
24. 깨달을성 없는 사람들은 나의 불멸, 무상(無上)인 최고의 지경을 알지도 못하고 나타남이 없는 나를 인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The ignorant think of Me, the Para-Brahman, as having no form or personality
and I can take (any physical) form; because (these) people are not being
able to comprehend My supreme imperishable and incomparable existence.
(7.24) ( The word 'Avyakta' has been used in verses 2.25, 2.28, 7.24,
8.18, 8.20, 8.21, 9.04, 12.01, 12.03, 12.05, and 13.05. It takes different
meaning according to the context. Avyakta does not mean formless;
it means unmanifest or a transcendental form that is invisible to our physical
eyes. It is used in the sense of unmanifest Prakriti, and also in
the sense of Para-Brahman. The Para-Brahman or absolute consciousness is
higher than both Brahman and the unmanifest Prakriti.
Para-Brahman (or Krishna) is imperishable, without any origin and end. Para-
Brahman is not formless. It has Divya Roopa, a transcendental
form and Supreme Personality. The ignorant think of the Lord as formless
because He is not visible. Because:)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Para-Brahman)이
그 어떤 형상이나 차별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물리적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영원불멸하고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지극한 '나'의 존재에 대해
잘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니라.
- 원저자주
(The word 'Avyakta' has been used in verses
2.25, 2.28, 7.24, 8.18, 8.20, 8.21, 9.04, 12.01, 12.03, 12.05, and 13.05.
It takes different meaning according to the context.
Avyakta does not mean formless; it means
unmanifest or a transcendental form that is invisible to our physical eyes.
It is used in the sense of unmanifest Prakriti,
and also in the sense of Para-Brahman.
The Para-Brahman or absolute consciousness
is higher than both Brahman and the unmanifest Prakriti.
Para-Brahman (or Krishna) is imperishable, without any origin and end.
Para-Brahman is not formless.
It has Divya Roopa, a transcendental form and Supreme Personality.
The ignorant think of the Lord as formless because He is not visible. Because:)
'아뱍타'는 바가바드 기타의 여러 장에서 나타나지만
그 구절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아뱍타'는 형상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정의할 수 없거나 초월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정의할 수 없는 프라크리티(自性)의 느낌이나 초월적 의식인
하나님의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님(Para-Brahman)이나 절대 의식은 '브라만'이나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프라크리티(自性)'보다 더 높은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님으로서의 '크리슈나' 신은
그 어떤 시작이나 끝을 가지지 않은 영원불멸의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형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신성한 존재(Divya Roopa)로서 초월적 형상 그리고
지고(至高)의 개성을 가진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형상이 아예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또 다른 무지한 자인 것이다.
Para-brahman :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의식 또는 하느님.
Prakriti (프라크리티) : 자연 혹은 물질의 본성 불교용어로 자성(自性)
Divya means Divine in Sanskrit and Tamil
Roopa means form or shape
(다른판본)
Unintelligent men, who do not know Me perfectly,
think that I,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Krsna, was impersonal before and have now assumed this personality.
Due to their small knowledge, they do not know My higher nature,
which is imperishable and supreme.
The foolish think of Me, the Unmanifest,
as having manifestation, knowing not My higher,
immutable and most excellent nature.
형상 없는 이에다가 여러 가지 형상을 가져다 씌우는 것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되는 일이다. 우리는 궁극의 실재에 대해서 하던 명상을 내던지고 상상으로써 재구성해낸 것들에 정신이 쏠리고 만다. 나타나 뵈지 않는 유일 영원하신 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들이란 것은 다 우리가 ‘그이’ 위에 가져다 씌운 형상들이다. 하나님은 여럿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는 항상 변하는 무수한 것들 뒤에 계시는 ‘하나이신 분’이요 변동의 불변의 중심, 모든 형상 너머에 서 계시어 끝없는 변동에서 부동의 중심이 되시는 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의 번역에 대하여는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이 구구하다. 샹카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지극한 자아로서의 최고의 지경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나를 이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지금 바로 나타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광명의 주재자다.” 힐(Hill)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수히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동조하고 있는 바네트(Barnett)의 말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오해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밑바닥이 되는 저 지극히 높으신 이를,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어서 가능적(可能的)으로 결정할 수 있는 아박타(avyakta)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실지로 결정적인 아뱍타의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근본적으로 절대요 비물질적이다.
간디의 번역은 틸라크의 것과도 라다크리슈난 박사의 것과도 서로 합한다.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 말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 아니고 6장, 7장, 8장이 다 같이 나타나지 않으신 형태로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대해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 뵈지 않는 형태에 대한 것이다. 이 절은 그릇된 길에 빠져 여러 가지 신들을 정말 있는 것처럼 믿고 예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절은 9장 10절과 같이 읽어야 한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일신관이다. 10장에서 12장에 이르는 부분은 일반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신 형태에 대해 예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타났거나 아니 나타났거나 ‘그’는 최고 불멸의 하나이신 존재다. 즉, 나타나지 않는 혹은 비인격적인 존재로는 초월적인 브라만이시고, 나타나신 혹은 인격적인 존재로는 주요, 지지자시요, 통치자시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창조주시다. 그렇지만 하나이신 하나님과 예배를 같이 나눠 받을 여러 신 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여럿이 있는 줄로 믿는 사람들은 잘못 안 것이고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앞에 있는 절들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한 편에는 이슬람같이 그것을 미혹이라 할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저주하는 종교도 있지만,「기타」는 그들에게도 한 자리를 허락하고 다만 “그들이 얻는 보응은 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와 그 목적이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25. 나는 내 요가마야에 의하여 가려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미혹된 세계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이 불생불멸의 나를.
요가마야(yogamaya) 유가(瑜咖)의 환력(幻力)
Veiled by My divine Maya, I am not known by all. Therefore, the ignorant one
does not know Me as the unborn and eternal Brahman. (7.25)
'나'는 '나'의 신성한 마야에 가려져 있기에,
그 무엇으로도 알려질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지한 자는 태어나지도 않으며 영원히 죽지도 않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Brahman)'인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느니라.
(다른 판본)
I am never manifest to the foolish and unintelligent.
For them I am covered by My internal potency,
and therefore they do not know that I am unborn and infallible.
I am not manifest to all (as I am), being veiled by the Yoga Maya.
This deluded world does not know Me, the unborn and imperishable.
26. 아르쥬나야, 나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생명과 현재에 있는 것과 또 장차 올 모든 것을 다 알건만 아무도 나를 아는 이는 없느니라.
I know, O Arjuna, the beings of the past, of the present, and those of the
future, but no one really knows Me. (7.26)
오 아르쥬나여, '나'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존재들과
현재의 존재들 그리고 미래에 있을 존재들에 대해 모두 아는 자이지만,
그 누구도 '나'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지 못하느니라.
(다른 판본)
O Arjuna, as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I know everything that has happened in the past,
all that is happening in the present,
and all things that are yet to come.
I also know all living entities; but Me no one knows.
I know, O Arjuna, the beings of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but no one knows Me.
생명 부타(bhuta), 생류(生類), 피조물.
27. 바라타의 아들아, 오 대적을 정복하는 자야, 일체의 산 것들이 좋다 언짢다의 두 갈라짐에 이끌려 나면서부터 미망에 빠졌느니라.
All beings in this world are in utter ignorance due to the delusion of dualities
born of likes and dislikes, O Arjuna. (7.27)
오 아르쥬나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좋아함과 싫어함이라는 상대적인 미혹된 생각(迷妄)으로 인하여
무지의 길로 들어섰느니라.
- 역자주
至道無難이니 唯嫌揀擇하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고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단지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지리라.
The Great Way is not difficult
for those who have no preferences.
When love and hate are both absent,
everything becomes clear and undisguised. - 신심명(信心銘)
(다른 판본)
O scion of Bharata, O conqueror of the foe,
all living entities are born into delusion,
bewildered by dualities arisen from desire and hate.
By the delusion of the pairs of opposites arising
from desire and aversion, O Bharata,
all beings are subject to delusion at birth, O Parantapa!
샹카라에 의하면 ‘나면서’(sarge)부터 좋다 언짢다의 애욕이 모든 생류속에 미혹을 일으킨다. 그렇게 미혹된 것에게는 현세의 참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참 자아에 대한 참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생기 있는 것이 나면서부터 이 마당에 잡혀 있고 그것이 그 심정을 아트만 곧 참 나에게서 떠나 속세로 기울어지게 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28. 그러나 모든 죄를 벗어버린 경건한 사람은 상대의 미망에서 벗어나 굳게 맹세를 지켜 나를 믿느니라.
Persons of virtuous (or unselfish) deeds, whose Karma has come to an end,
become free from the delusion of dualities and worship Me with firm
resolve. (7.28)
그러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덕 있는 행위들로
자신의 카르마(業)을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은,
좋고 나쁨이라는 상대적인 미혹함에서 벗어나
자유로워 질 것을 굳게 다짐하고 '나'를 경배하느니라.
-역자주
The self within me now is dead
And thou enthroned in stead
Yea, This I, Tuka, testify,
No longer now is 'me' or 'my'
이제 내 속에 있던 나는 죽고
그 자리에 대신 당신이 자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 '투카'는 증언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나'도 '내 것'도 없습니다.
- 라다크리슈난
대도는 어렵지 않나니, 편견에 치우치지 말지어다.
사랑과 미움이 없으매, 모든 것이 맑고 숨김 없어라.
털끝 만한 차별하나 일으켜도 하늘과 땅이 무한히 벌어지나니,
진리를 깨우치고자 한다면, 뜻을 펴지도 거스르지도 말지어다.
싫고 좋은 것으로 하여 버둥댐이 마음의 병이니라.
세상만사 깊은 뜻을 이해 못할 때, 마음의 평정을 이루려 해도 소용없나니.
도(道)는 광막한 허공처럼 완벽하여 남고 모자람이 없도다.
그러나, 도가 우리의 받고 물리침에 달렸으니, 세상만사 참 이치를 알지 못함이로다.
바깥 세상에 연연하지도, 공(空)의 내지각(內知覺)에도 빠지지도 말지어다.
사물의 일치 속에 아웅다웅하지 않고 잠잠하면, 허상이 스스로 사라지리라.
무위를 성취하고자 행위를 멈추려고 애쓸 때, 바로 그 노력이 행위로 가득 채우나니,
이쪽 저쪽, 어느 한 극단에 머물려 있는 한, 결코 하나를 알지 못하리라.
그 하나 속에 살지 않는 자는 행위와 무위를 모두 이루지 못하리다. - 신심명
(다른 판본)
Persons who have acted piously in previous lives and in this life
and whose sinful actions are completely eradicated
are freed from the dualities of delusion,
and they engage themselves in My service with determination.
But those men of virtuous deeds
whose sins have come to an end,
and who are freed from the delusion of the pairs of opposites,
worship Me, steadfast in their vows.
죄란 것은 법을 범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부족, 즉, 무지와 자기주장의 중심적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자아는 남을 해하면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이 죄를 벗을 때, 이 무지를 극복했을 때 우리 생활은 하나이신 이를 섬기는 데 쓰인다. 그러는 동안에 신앙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올라간다. 그리하여 나중에 십방(十方)에 두루 계시는 ‘하나이신 자아’를 보는 데 이른다. 그것이 영원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다. 투카람(Tukaram)은 이렇게 부른다.
내 속에 있는 나는 죽고
그 대신 당신이 그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 투카는 증거합니다.
이제 이미 ‘나’ 도 ‘내 것’ 도 없습니다.
(The self within me now is dead
And thou enthroned in stead
Yea, This I, Tuka, testify,
No longer now is ‘me’ or ‘my’)
⎯라다크리슈난
29. 늙음, 죽음의 해탈을 얻으려고 내게 귀의하여 힘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 브라만을 바로 그대로 알고 자아의 바탈 전체와 또한 카르마의 모든 것을 아느니라.
Those who strive for freedom from (the cycles of birth) old age and death by
taking refuge in Me know Brahman, the individual self, and Karma in its
entirety. (7.29)
늙어 죽고 태어나는
윤회의 바퀴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기를 갈망하여,
'참 나(眞我)'에 귀의(歸依)하여
헌신적인 수행으로 피난처를 구한 사람은
하나님(Brahman, 창조주, 알라, 道, 聖靈, 大我)과
진정한 자신과 자신의 업(業)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느니라.
(다른 판본)
Intelligent persons who are endeavoring for liberation
from old age and death take refuge in Me in devotional service.
They are actually Brahman
because they entirely know everything about transcendental activities.
Those who strive for liberation from old age and death,
taking refuge in Me, realize in full that Brahman,
the whole knowledge of the Self and all action.
So, I am the source and dissolution of the whole universe.
늙음, 죽음의 해탈(jaramaranamokshaya), 늙음(jara), 죽음(marana), 해탈의 목적(mokshaya) 즉 다시 나고 다시 죽는 생사의 바퀴를 벗어나려는 목적.
자아의 바탈(adhyatmam) 개개 자아의 밑바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양의 말로 하면 성(性), 곧 바탈, 그 바탈의 전체라고 하면「역」(易)에서 말하는 “이치를 다하고 바탈까지껏 하여 그로써 말씀에 이른다”(窮理盡性 以至於命)에 해당할 것이다.
30. 나를 모든 물질적 나타남의 속, 모든 신적 존재의 속, 또한 모든 희생의 속인 자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통일 된 정신을 가지고 비록 떠나는 순간에도 나를 알 수 있느니라.
The steadfast persons, who know that Brahman is everything, the
Adhibhoota, the Adhidaiva, and the Adhiyajna, remember Me even at the time of
death (and attain Me). (See also 8.04) (7.30)
'참 나'에 대한 온전한 의식의 깨어있음 속에서
하나님(Brahman, 창조주, 알라, 道, 聖靈, 大我)께서
지고(至高)의 성스러운 주(主)로서
모든 물질이 나타나게 하는 원리(아디부타, Adhibhoota)와
모든 신적 존재들(아디다이바, Adhidaiva)과
모든 희생들(아디야즈나, Adhiyajna)을 주재하는 분이심을 알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비록 죽는 그 순간이라 하더라도 '참 나'를 기억하고
'참 나'를 얻게 될 것이니라.(8장4절을 참조하라)
(다른 판본)
Those in full consciousness of Me, who know Me, the Supreme Lord,
to be the governing principle of the material manifestation,
of the demi-gods, and of all methods of sacrifice,
can understand and know Me,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even at the time of death.
나를 모든 물질적 나타남의 속 알맹이, 모든 신적 존재의 속 알맹이,
또한 나를 모든 희생의 속 알맹이인 자로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누구나 다 통일된 정신을 가지고
비록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알 수 있느니라.
- 함석헌 역
Those who know Me with the Adhibhuta (pertaining to the elements),
the Adhidaiva (pertaining to the gods),
and Adhiyajna (pertaining to the sacrifice),
know Me even at the time of death, steadfast in mind.
나를 이 모든 상대적인 본질로서 아는 사람,
나를 모든 신적인 존재의 본질로서 아는 사람,
나를 모든 희생의 주(主)로서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비록 죽는 순간일지라도 정신이 통일된 상태로 떠날 수 있으며
곧 나를 아는 사람이니라.
- 석진오 역
COMMENTARY:
They who are steadfast in mind, who have taken refuge in Me,
who know Me as knowledge of elements on the physical plane,
as knowledge of gods on the celestial or mental plane,
as knowledge of sacrifice in the realm of sacrifice,
They are not affected by death.
우주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의 갈피갈피 속에 들어 있어 그 근본 원리가 되는 힘. 노자의 도(道), 덕(德)의 덕에 해당한다 해야 할 것이다. 유교에서 한다면 도라 할 것이다. 노자는 도에서 덕이 나온다 했고, 유교에서는 하늘의 말씀하신 것이 바탈(性)이요, 바탈대로 하는 것이 길(道)이요, 길 닦음이 가르침(敎)이라고 했다.
희생은 물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기타」에서는 그것을 굉장히 넓게 해석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라고 하니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라 하면 어떨까? ⎯함석헌
이 절은 우리더러 임종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에서 만든 특정한 교리를 기억해야만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도 모든 면에서 ‘그’를 알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예배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러 새 말들을 썼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아르쥬나가 거기 대한 설명을 묻는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그 본체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 자연 속에 있어서의, 객관적 또는 주관적 현상 속에 있어서의, 행동과 희생의 원리 속과 속에 있어서의 ‘그’의 나타남에 있어서도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스승은 그것을 다음 장에서 모두 간단히 설명해준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