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660, 재위 641~660)이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로 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났던 것인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리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요’로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가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고, 유난히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진평왕의 딸로 천명과 덕만 두 명의 이름만 기록했을 뿐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해 언급해놓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무왕 33년)의 일이다. 정확한 출생년도가 전하지 않지만 아들의 나이로 추정해보건대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견제 속에서 무사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행실을 반듯하게 해 좋은 평판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까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당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했다는 인물이다.
효(孝)를 강조한 증자(曾子)의 상, 의자왕은 어린 시절 '해동의 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있었다. / 정림사지 5층석탑,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에 백제 공략의 공로를 자랑하는 글을 새겨놓아 '당 평제비'로 불렸었다.
즉위 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지다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해 국내를 순무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는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대야성의 성주 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고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며 벽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 뒤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록 당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고, 그것을 안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일곱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했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러나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의 치세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657년(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마흔한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렇듯 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에 대해서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이라는 주장도 있고,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안정된 왕권에 안심하여 긴장감이 풀어진 데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한편, 이 무렵의 기록들에서는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든가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흉흉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법, 신라에게는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필요했고 특히나 백제 말의 역사는 그렇게 각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왕권강화에 귀족층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백제 지배층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하고, 성충이 투옥되고, 좌평 흥수가 귀양간 것이 모두 그 즈음의 일이다.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700년 역사의 백제는 무너지고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후 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났다.
이때 달아난 곳이 웅진성이었고, 이곳은 선왕인 무왕 때 임시 수도로 쓰이기도 했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게다가 가까이 임존성이 있어 두 성이 서로 지원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듯하다. 실제로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 세력들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3년간이나 지켜낸 성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들어가 지방군을 모으고 적들이 차지한 사비성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특별히 적들이 공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의자왕은 항복을 하고 만다. 그 닷새 동안 웅진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자왕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단서
2008년 의자왕의 마지막에 대한 단서를 주는 유물 하나가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에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 출신이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부터 좌평을 지냈던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인데 우리 역사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 편에서 다시 그 이름을 찾아냈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
여기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당나라에 항복한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이라는 말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백제 멸망 과정과도 이어진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이 두 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게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했음을 증언한다. 의자왕이 예식진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으로 들어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했다는 말이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은 뒤, 태자 효, 왕자 융∙연 및 대신과 장병, 그리고 백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700년 역사의 백제는 이렇게 무너지고, 의자왕은 망국의 주범이 되었다.
‘삼천궁녀’를 거느린 호색한으로 낙인찍힌 의자왕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지금까지 대중가요에 삼천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니까 삼천궁녀는 방탕했던 호색 군자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