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어깨에 쏟아지는
묵상의 빛"
김진수(화가/시인)
정희승은 나와 80~9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함께했던 후배이다.
정희승이 그림이라는 물색을 들고 나타나 처음으로 세상에 명함을 내민 전시회는
「한국미술 20대 힘전(1985, 서울 아랍문화회관)」이다.
이 기획전은 열리자마자 경찰이 난입하여 새내기 젊은 화가들의 작품 36점을 철거하고
19명을 연행하였으며 5명을 구속한 한국 민중미술 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나도 그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정희승은 스무 살 초반 나는 갓 서른.
이런 것을 시절인연이라 했던가.
업설에 의하면 우리는 전생의 어떤 기막힌 인연으로 금생에 화가지망생으로 만났는데
하필 뜯기고 잡히고 싸우는 그림시대를 만난 것이고
그 붓놀이는 각각 어슷한 길을 쫓아 생의 또 다른 업을 삼게 되었으니, 아닌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고 설한 조사의 말씀이 실감난다.
오월미술은 그렇게 우리에게 와서 살아남은 자로서 스스로
저 하늘의 검은 빚과 이 땅의 붉은 부채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지역작가 34인이 의기투합하여 창립했던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1988년)는
14년 후인 2002년에 해체된다. 90년대 우리 쪽 미술운동에 대해
“광미공의 당면의식은 5.18 상흔이 남긴 울분과 원한의 과거에 대한 집적의 기억, 심리상태이며
리얼리즘은 그것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무엇을 함축할까?
대답이 없다. 전망이 막힌 것이다. -「우리시대 작가들」”라고 쓴
당시 미술평론가 고 원동석 선생의 지적처럼 한때 100명 회원을 넘보던 조직은 서서히 동력을 잃어간다.
누적된 피로에 해마다 되풀이되는 주제와 기법의 타성을 고심하면서 또는
오월의 미술적 실천의지와는 별도로 당장 살아내야 할 생업의 하루하루가 바쁘기도 했을 터.
해체 이후를 돌아보면 면면이 헛헛하지만
5년 뒤 정희승처럼 해단을 원치 않았을 개인과 새로 합류한 미술인들이 이룬
(사)광주민족미술인협회로의 계승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서는 남북이다
산은 연하여 바다며 여기는 이어 저기이고
어제는 곧 내일이다
나는 바로 너다
그러므로 나는 어제 여기에서 산이었다
그러면 바다는 저기에서 내일 너일 터
동산 서산과 남해 북해에서 우리 꽃 하나였다
단둘이 우러러 하늘도 하나였다
- 졸시「쌍둥이자리」
정희승이 이번 개인전에 부친 그림편지의 화두는 『나는 너다』이다.
선언적이면서 자기 지시적 메시지를 가다듬었다.
오월의 내면화로 타오르던 첫길의 푸른 주문 같기도 하고,
그로부터 삼십 수년을 앓아온 외길의 독백으로도 들렸다.
그는 2003년 어느 날 마음을 다잡아 똑 같은 크기의 캔버스 여섯을 짜 와서
화가 허달용 최병진 김태삼 김우성, 조각가 김대성을 자신과 나란히 입상인물화로 불러낸다.
그동안 광미공과 함께했던 너나들이 벗이
뿔뿔이 흩어져 세파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가장 슬펐을 것이다.
운이 없어 광미공 해단의 소임을 떠안았던 자로서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처음으로, 후배들이 겪었을 지난 허기와 고독의 시간대를 의식했다.
이 그림에서 한 사람은 또 뒷모습이다. 어쩐 일일까?
누구냐고 물으면 김대성인데 왜 돌아섰냐고 물으면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고 ‘연막’을 친다.
이것은 의당 “오월 그날, 한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났다”와 같은
신호음을 추가한 중의(重意)의 수사가 아니겠는가!
실제상황이 아닌 이 불길한 설정을 대성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은근 조심스럽다.
어쨌든 우리들 인연사에 대한 대유적 알레고리를 육편일화(六篇一畵)에 담았다고 봐야한다.
또 다른 연결그림 「나는 너다(2018)」를 보자.
이 작품에선 오월광장에 쓰러진 한 시민의 얼굴그림 곁에
자신의 침울한 자화상을 나란히 세워 한 그림(二篇一畵)으로 말을 전한다.
마치 산자로서 망자의 혼을 불러 함께 묵상하고 해원하는 천혼(薦魂)의 제의를 보는 듯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기 얼굴 그리기’를 한다.
실상(자아)의 나와 허상(페르소나)의 나를 거울에서 끄집어내어
서로 끌어안거나 맞서게 하는 행위의 한가지다.
그의 자화상 탐색은 늘 자신의 내면을 살피면서 동시에 밖으로 난 창문을 더듬는다.
문앞에 어둠(부분)
그리하여 일상의 차창에 스치는 우리네 어미아비들「창 1」
아들들「창 2」 딸들「창 3」에서
나와 남, 내 가족과 이웃의 가족을 동일시하는 심리로 깊어진다. 예의 신앙적이다.
「유품 연작」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남긴 컵라면을 한 뚜껑도 버리지 않고 함께 젓가락을 나누면서
‘나인 너’를 다짐하는 것을 보라.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마음으로 그린 연민의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이다.
순금의 기억 - 유년시대
정희승의 만행(萬行)은 가끔
연어처럼 강을 거슬러 모천을 오르기도 한다.
세상모르던 유년시대의 나에게로 회귀한다.
그 시절은 진정 해맑고 순수했으며 따뜻하고 행복했다. 순금빛이다.
거기서 ‘나인 너’를 만나면 곧장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뜨듯해지는 것이다.
노모의 손에 진 동백꽃 한 송이, 먼데서 사는 그리운 조카 「재규」,
꽃처럼 곱고 착한 내 딸 「지원」, 이웃 엄마의 어린 아들 「서우」도 꼭 그려줘야지.
팔레트에 물감을 힘주어 짠다.
여울과 싸우고 폭포를 넘느라 그의 심장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그러매 필생에 고인 여정의 웅덩이도 많았을 텐데,
가엾은 것 애처로운 것들이 파고드는 감정이입의 문고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받는 마음의 상처 또한 점점 깊어지는 법.
알란 쿠르디
네 손
천 갈래 나누인
별들의 뼈마디였다
네 가슴
만 갈피 바늘 꽂힌
달덩이의 집이었다
잊었는가
나
오월 그날
네 머리 위에 앉았다가
한 마리 학으로
날아간
피 묻은 손수건이었다
- 졸시 「종이학」
하얀 기억 - 천호
작가는 이제 자신의 유년을 넘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하던 중 지중해에서 난파되었고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와,
‘카메라를 기관총으로 생각한 듯 갑자기 두 손을 번쩍 치켜드는’ 시리아 난민
네 살짜리 후데아와,
오월에 숨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다섯 살 아이 천호를 찾아 나선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옹,
공권력에 저항하다 실명한 홍콩의 의료인 여성,
일본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여사를 그림으로 대면한다.
그 길의 옛 광천동성당 교리실도, 전경의 방도, 구 국군통합병원 2층 정신병동도,
세월호 희생자 윤희의 신발도 교복도,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글귀가 박힌
미얀마의 티셔츠 같은 물성과도 영적 교감을 나눈다.
유품-네 개의 육개장(부분)
그의 ‘나는 너’ 관념의 확산은
세계 도처의 모순과 억압과 폭력과 죽임과 적대와 굴레의 너희가
광주민중항쟁을 넘어온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강변한다.
더는 빚이거나 부채의식에 갇혀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졌다.
“자, 힘내라. 영혼은 생명체로 살다가 죽어 더 큰 하나로 돌아가는 에너지체일 것이므로
‘나’라고 말하는 존재와 ‘너’라고 부르는 존재 사이의 적대와 차별을 허물다보면
반드시 현존의 ‘우리’ 속에 참다운 공생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 너희는 진정 우리다!”.
불로동
2002년,
정희승은 월산동 까치고개로 아틀리에를 옮긴 후 그의 3회 개인전을 준비한다.
그때 내가 발문을 띄웠던 정의도 있는바 출품작 몇을 새 화집에 실어보자 부추겼다.
“...정희승이 그 동안 세상을 향한 몸집 큰 시선을 거두고
이제 낮고 잔잔한 눈빛으로 별처럼 아름다운 사물들에 자신의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과거와 미래, 성과 속, 삶과 예술의 접경에 놓인 유리질의 벽에 매일 이마를 부딪치며
자기 세계의 안과 밖을 화해시키려는 어떤 창조를 꿈꾸고 있다.”
“...왜 그 불로동다리 건너 등나무 화실에서 짜부라진 창밖을 그린 설경.
사륵사륵하고 뽀오얗고 희부연한 집 지붕들 위로 떡가루처럼 하얗게 눈 날려주던 낭만과,
역시 다리 위 빛고을 서쪽으로 깔린 황혼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초기 미술운동에서 자주 등장하던 오월전사나 노동자 상이
종종 고원법적 시선으로 대상의 힘을 강조하였다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차츰 나와 타자 사이가 중경으로 밀쳐진 시원한 평원시법의 활용이 두드러졌는데,
근래는 드넓게 세상 사물을 굽어보는 방식으로 문득 환해졌다. "
그의 아틀리에를 들어서기 바쁘게 내가 다가가 쪼그려 앉은 그림은
1999년 작 「황사 1」이었다.
작은 그림 속 키 큰 여인은 그의 곁님.
그러니까 그녀와 어떻게 만나 가절을 노래했더냐 취조하는데
혐의자의 대답은 무유등등 어쩌고다.
또 같은 해 그린 「황사 2」는
화면을 꽉 채운 비슷한 키의 몇 사람이 무심히 버스를 기다리는듯한데
이 일상의 소소한 표정도 참 괜찮지 않냐 물으며,
「눈보라」「불로동다리」「천변풍경」「무등」「봄날」「세탁소 풍경」「한잔」같은
따숩고 달콤하고 쿰쿰한 추억들을 캐물었다.
사실 「안개」도 그의 「광장」안쪽으로 밀려와 옛 도심의 어떤 기억을 포근히 감싸준다.
사생한 곳이 도청 앞 분수대를 끼고 금남로 1가나 충장로 입구 쪽 어디일 것만 같다.
이런 완충지대가 있었으므로 해서
그의 역사적 개인의 불꽃이 쉬 사위지 않고 오늘까지 여울여울 타오를 수 있었으리라.
마침내 「빛-스미다」에 와서 정희승은 달라졌다.
번뇌가 닦이고 굴레에서 놓인 듯 얼굴이 평온하다.
필시 마음의 가운뎃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길에선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고 벽에 이마를 부딪지 않아도 되며,
몸이 굳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 그림이 「문앞에 어둠」을 위시한 그의 여러 자화상 중에서
맨 나중에 완성된 작품이 아닐까 기대하게 한다.
이 낯으로 금남로 탑승 불로동 경유 풍암동 하차까지 버스는
스치는 표정마다 한결 환한 기분으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상 좋아하는 단문이 하나 있다.
‘허리는 세우고 눈은 코를 보며 코는 배꼽을 향한다’.
이 묵상 그림이 보여주는 호흡의 새 지평이다.
광장의 배꼽에 쏟아지던 빛이
화가 정희승의 어깨에 내려 화두가 저렇듯 간절해지면
각성은 홀연히 터져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므로
기왕 잡힌 가부좌로 참선 좌복도 한번 앉아볼 일.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던은 생사가 갈리는 역병을 겪으며
‘죽음은 삶을 망치는 질병이 아니라
삶이라는 질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치료제’란 것을 깨닫게 된다.
오월의 혁명적 죽음은 이후 격변하는 한반도 새로운 삶들에 감작되어
생사가 갈리는 역병의 시대에 유력한 백신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상기하여
이번 외출을 너볏이 배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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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승
1963년 광주출생
개인전 5회,
전시기획 5회,
한국미술 20대 힘전, 오월에 본 미국 전, 일하는 사람들 전, 전국청년미술제, 민중미술 15년 전, 만인의 얼굴 전, 생명 나눔 공존 전, 오아시스 광주 전, 광장의 기억 그리고 전, 녹두꽃 떨어지고 그 이후 전, 바람의 길 전, 놈놈놈 얼굴 전,
검은하늘 붉은 눈물 전, 항쟁의 증언 운동의 기억 전, 직시 - 역사와 대면하다 전 등
단체전 기획전 초대전 - 100여회.
현, 광주민미협 / 광주민예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