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그럴 싸 하군’ -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
글|조영수_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부문 수상자. 1985년생
오늘날 대한민국(혹은 그 어떤 나라라도)의 화두는 ‘진실게임’인 듯하다. 정권 교체 과정에서의 진실 공방, 한 거대기업의 직원이 퇴사 후 폭로한 기업의 숨겨진 진실, 총선 뒤 이어지는 공약에 대한 거짓과 진실에 대한 논란 등……. 하기야 언제 한 번 진실과 거짓이 명백하게 드러난 시기가 있었을까마는 요즘에 와서는 이 게임이 더욱 흥미진진해진 것 같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이야?’ 하는 궁금증 자체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그저 서로 옳다고 일장연설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며 제법 그럴싸한 얘기군, 하며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던 한 남자가 살인 사건을 목격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읊조렸던 말처럼. “제법 그럴싸하군.”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은 일본의 인기 작가였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라쇼몽』 중 「덤불 속」이라는 단편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아쿠타가와의 이름도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공부를 좋아하는 수재였고, 중산 계급에서 자라 세속적인 고생의 경험은 거의 없던, 전형적인 서재인(書齋人)이며 도회인(都會人)이었다고 한다. 다른 동시대작가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초현실과 신비, 기괴한 이야기에 강한 관심을 보인 작가였고. 나스메 소세키의 큰 기대와 사랑을 받은 후배 작가이기도 했다.
구로자와 아키라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일본의 영화감독 중 한명이다. 이 두 거장의 만남만으로도 50년 대 영화 <라쇼몽>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며, 종종 옛것에서 삶의 힌트를 얻고자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침서가 될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의 재치 있는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영화 <고스트 독>에서 포레스트 휘테이커가 연기한 고독한 킬러 고스트 독은 『라쇼몽』을 숭배한다. 이 책은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젊은 백인 여성의 손에서 고스트 독의 손으로, 다시 흑인 여자 아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들에게 ‘라쇼몽’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끼치게 될 것이다. 영화 <라쇼몽>이든, 소설 『라쇼몽』이든 ‘라쇼몽’은 거쳐 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영화는 억수 같은 폭우와 라쇼몽-일본 헤이안 조의 수도였던 교토의 중앙로 스자쿠 대로 남쪽 정문-에서 폭우를 피하고 있는 나무꾼의 읊조림으로 시작된다.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긴 침묵 후 다시 이어지는 대사,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 말을 들은 한 사내가 나무꾼에게 다가와 도대체 무엇을 모르겠다는 것인지 묻는다. 나무꾼의 옆에 있던 승려는 나무꾼과 함께 겪은 사건과 사람들의 진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소설과는 달리 시체를 최초로 목격한 나무꾼과 승려의 회상(플래시백)으로 진행된다. 소설은 ‘누구누구의 자백’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한 사람씩 차례로 목격담을 진술하는 것으로 서술되고, 영화는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는 이들과 남자의 죽음,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진술을 오가며 진행된다. 이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재판관을 향해 진술한다. <라쇼몽>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는 일정 부분 진실일 수도 있지만 역시 신뢰가 가지 않는 기억을 꺼내 놓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의 기억만을 허용한다. 그것은 의도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산 속을 걷던 나무꾼은 무언가에 걸려 발을 헛딛는다. 영화는 기괴하게 굳어있는 팔을 클로즈업 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 나무꾼을 시체의 팔과 팔 사이에 배치하여 나무꾼이 마치 팔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무꾼의 진술이 이어진다. 그렇게 자신은 시체를 발견했다고. 보이지 않는 재판관이 묻는다. 칼을 보지 못했는가. 나무꾼은 칼 같은 건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나무꾼의 진술 중 “왕파리 한 마리가 제 발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상처 자리에 딱 붙어 있더구먼요” 하는 표현은 아쿠타가와 특유의 서정적이고 재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다음은 승려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죽은 남자가 아름다운 부인과 동행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승려는 시체를 보면서 “참으로 인간의 목숨이란 아침이슬만큼이나 덧없군요” 하며 안타까워한다. 소설에서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처럼 허망하고 번개처럼 순식간이다’라는 말로 죽은 이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승려의 마음을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살해당한 남자의 장모인 노파의 진술이 삭제되어 있다. 소설에서도 큰 기능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잘 된 각색이라고 생각한다.
허세로 시작되는 도적 다조마루는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한다. 남자를 죽인 건 자신이지만 산들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남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강한 햇빛을 느끼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 떠올랐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없는 두 인물이지만. 다조마루의 자백은 간단하다. 숲을 지나가던 부부를 보고는 아름다운 부인을 차지하고 싶어 꾀를 내어 남편을 묶어 두고 여자를 범했다. 그랬더니 여자가 미친 사람처럼 매달려 당신이 죽던지 남편을 죽이던지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그러나 비겁한 수를 쓰지는 않고 남자를 풀어준 뒤 결투를 벌였고, 스물세 번째에 남자의 가슴팍을 뚫었다 한다. 영화에서는 다조마루의 표정과 말투 때문에 단 번에 그가 거짓을 이야기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가의 문체 때문인지 인물의 목소리 때문인지 오히려 다조마루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된다.
해학에 능한 작가 아쿠타가와는 한 번, 다조마루의 입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재판관, 즉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다조마루의 진술 중 “우리는 사람을 죽일 때는 허리의 검을 쓰지만, 당신들이야 칼 대신 뭐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아니면 그럴싸한 거짓말로 죽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래도 이미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누가 더 죄가 깊은지 따지고 들자면 당신들 쪽이 더 나쁜지 내가 더 나쁜지, 사실은 모르는 일이라고요”가 그것이다. 이런 무거운 말 때문에 영화에 비해 소설 속 다조마루가 다소 신뢰감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는 영화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다. 부인의 진술은 슬프다. 도적에게 욕보인 자신을 시종 혐오스럽게 보는 남편의 눈빛에 상처를 받아 남편을 단도로 찔렀다고 한다. 한 번의 겁탈과 선택으로 이리저리 짐승 취급을 받게 되는 여자를 보는 건 꽤 불편했다. 심지어 죽은 남편은 무당의 입을 빌려 자신을 변호하기에 나선다. 부인에 대한 허망함에 스스로 자결을 택했다고. 그리고 말한다. “그런데 내 가슴팍에 꽂혀있던 단도가 뽑혀져 나간 느낌이 들었다!”
소설은 남편의 진술에서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으로 이어진다. “그 자에게 꽂힌 것은 단도가 아니라 장도였소!” 승려의 목격담을 재미나게 듣던 남자가 묻는다. “보지 못했다던 칼이 장도인지 단도인지 어떻게 알지?” 나무꾼은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칼을 훔쳤던 것이었다. 라쇼몽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버려진 아이에게 덮여져 있던 옷을 챙긴다. 나무꾼이 호통 치며 말리자 칼을 훔치고 위증한 당신과 어차피 누군가 가져갈 옷을 훔치는 내가 다른 게 뭐냐고 남자는 묻는다. 남자는 그렇게 떠나버리고, 나무꾼은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고 한다. 승려는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승려는 감독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사건의 혼돈을 느끼며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세상은 지옥’이라며 괴로워하고, 아이를 맡아 키우기로 한 나무꾼을 보면서는 그래도 아직 세상에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반면 아쿠타가와는 그저 인물들의 자기 변을 통해서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기다린다. 어쨌든, <라쇼몽>은, 원작을 영화화하는 데 애를 먹는 요즘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다고 할 수 있다. 2008년의 지금을 사는 내가 새삼 1922년의 소설과 1950년의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앞에서 언급했던 일련의 사건들로 ‘진실게임’에 대한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글쎄, 정확히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지켜보면서 혀를 차는, 완전히 투명한 척 하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라고 말하는 편이 편하겠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의식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고 있는 사이 몸이 먼저 나서서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몸으로 진실을 주장하는 인간을 같은 인간이 쉽게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것이 아마도 진실과 거짓을 명백하게 밝히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누군가(나를 포함한)의 거짓인지 사실인지 모를 자기 방어를 보고 들으면서, 무기력한 우리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법 그럴 싸 하군’이라고 읊조리며.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