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5월4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교재 192쪽 요즘 날씨가 예전보다는 항상 윗도는 날씨라 오늘은 더욱 더 여름같았습니다. 지금 부터 벌써 덥기 시작하면은 올 여름 얼마나 더울런지요. 어떤 보도에 의하면 100년 만에 처음 찾아오는 더위다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뭐 예보가 잘 틀리니까 크게 믿을 것은 못 되지만 어째튼 징조가 좀 더운 여름이 되지 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화성유품이라고 하는 법화경 7가지 비유 가운데 화성유품, 화성이라고 하는 만든 우정 조화로 만든 어떤 그 마술로 만들어서 어떤 도시를 하나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하는 그런 비유인데 그 비유는 저 뒤에 나오죠 화성유품 중에서도 뒤에 나오고 어제 이야기가 있었듯이 수기품이 끝나면서 끝 말씀이 그렇습니다.
나와 그대들의 숙세의 인연을 내가 이제 말 하리니 그대들은 잘 들을지니라 이렇게 이제 지난 품이 끝났어요. 그런데 끝나면서 말씀이 그렇습니다. 대통지승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을 등장 시키면서 숙세의 인연을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이야기 가 대통지성불 이야기가 상당히 장황해요. 길고 그때 대통지성불이 어떤 법을 어떻게 설 했고 뭐 하는 것 그런 것 내용이 나오고는 그리고 나서 화성의 비유가 나오죠. 그리고 이 품이 끝나는데. 품의 제목인 화성유품인데 그러나 내용이 3분의 2 이상이 부처님의 숙세의 인연을 이야기 하는것인데.
보면은 우리가 보통 상상하기 어려운 길고 긴 세월을 이야기 하는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다,라고 하는 제한이 있지를 않고 또 그런 제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도 또 한 그 시간의 무한대와 같이 우리의 삶도 무한대다. 비록 우리는 뭐 몇 년 도에 태어났다. 지금은 몇 살이다. 그리고 몇 년만 더 살면 다른 사람의 예처럼 그렇게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해 할수있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짧은 순간만 이해하고 그것을 이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깨달은 분의 시각으로 볼 때 시간도 무한하고 그 시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도 역시 알고 보면 무한 한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과 이세상과 함께 무한 한 것이다.
비록 우리 지구가 생긴지가 46억 만년 되었다고 하고 생물이 10억년 후에 지구가 생기고 나서 10억년 후에 생물이 존재하기 시작 했으니까 그러니까 36억 만년 전쯤에 아주 초기 단계의 어떤 생물이 생기기 시작해서 그기서 조금씩 조금씩 생물이 발달해서 비로소 사람 으로 까지 이렇게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인간 사회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지만은 그러나 그런 위계 했던 때나 또 발전했던 때나 또 나중에 형편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그러한 때나 그 모든 것은 사실은 길고 긴 어떤 그 시한 속에서의 역사이면서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보면 우리의 한 순간의 마음속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을 요약해서 표현한 의상스님의 법성계에 보면 무량원겁이 즉 일념이요 일념즉시 무량겁이다. 이런 표현이 있고 그렇죠.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시각에서 공간을 보는것과 시간을 보는 것, 이것이 우리 보통사람의 상식과 다릅니다. 정말 멀고, 깊고, 광대하고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넓이와 깊이와 유현함을 가지고 있는데 깨닫지 못했더라도 이제 그러한 깨달은 사람의 시각을 우리가 자꾸 가까이 접함으로써 우리들 마음도 함께 커지고 한걸음 한걸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다가 갈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법화경 이야기를 아마 들어야 될 줄 믿습니다.
화성유품의 개요는 화성유라고 하는 것은 뒤에 화성유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성문이니 연각이니 보살이니 하는 그런 것은 변화해서 만들어 놓은 열반성 열반성 이다 그러니까 가짜 있지 않은 마술로 만들어 놓은 그래서 임시 쉬었다 가는 그런 열반성이다 하는 그런 뜻에서 화성이라 이런 표현을 해요.
그리고 이제 대통지승불 이야기가 처음 시작이 되겠는데. 대통지승불이 멸도 한지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세월 전에 있었다. 이래놓고 그 다음에 대통지승불이란 분이 돌아 가신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 전에 돌아 가셨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시 상기해서 이야기 본다면 대통지승불의 성도는 말하지면 한량없는 세월의 시간을 필요로 해서"십겁좌도량 불법불현전” 선문에서도 아주 잘 쓰는 그런 구절이 여기 화성유품에 나와요.
“십 겁 동안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십 겁이 지난 뒤에사 비로소 나타나더라”.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선구로서 어째서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느냐? 일체법이 개시불법인데 따로 무엇이 불법이 나타날 것이 있느냐? 그것을 인식 했을 때 그때 이미 불법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하죠
지금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선리 교리가 있듯이 선리가 있거든요. 선에서 말하는 이치를 말하는 건데 그런 그 선리를 많이 들으셔어 이런 이야기 충분히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부처님이 지난 품에서 말씀하신“나와 그대들의 지나간 숙세 인연을 말 하리니. 그대들은 잘 들어라.” 그 내용 입니다. 여기서 대통지승불의 멸도 라고 하는 것은 대통지승불의 열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멸도란 말 열반이라고 하는 말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은 그 깨달음 또는 번뇌가 사라짐 이런뜻으로 해석 될 때가 많이 있죠.
그러나 그 보다도 더 많은 뜻으로 쓰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큰 스님 열반하셨다. 하면은 큰 스님 돌아 가신것을 표현 하듯이 또 부처님 열반에 드셔다 라고 하면 역시 부처님이 돌아 가신 것을 뜻하는 거죠. 멸도란 말도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대통지승불이 언제 멸도에 했느냐 언제 열반에 드셔느냐 그 말을 지금 하려고 하는 거예요.
1.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의 멸도(滅度)
1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옛적 한량없고 그지없고 불가사의한 아승지겁 전에 그 때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이 대통지승(大通智勝)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시니라. 나라의 이름은 호성(好城)이요, 겁의 이름은 대상(大相) 이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가 매우 오래 되었느니라.
이 이야기를 하려는 거죠. 대통지승불 부처님의 이야기를 하는데 언제때 사람이냐? 언제 때 부처님이냐? 그 지난 세월 지난 시간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데. 참 인도 사람들의 어떤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아주 풍부하고 또 기상천외한 그런 표현들을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무슨 걸핏하면 삼천대천세계라고 하고 또 걸핏하면 황하 강 모래 수 그래요. 황하 강의 모래라고 하는 것은 해운대 모래나 한강 백사장 모래같이 그런 모래가 아닙니다. 완전 밀가루처럼 그러게 보드라운 모래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한강 모래 한 알이면 황하 강의 모래 열개 스무개도 더 되는 그런 아주 보드라운 모래죠. 그런 것을 가지고 어떤 그 숫자 상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번 보면은 "그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가 매우 오래 되었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땅덩이를 가령 어떤 사람이 갈아서 먹을 만들어 가지고 동방(東方)으로 가면서 일천 국토를 지나서 먼지만한 점을 하나 찍고, 또 다시 일 천 국토를 지나가서 또 점을 하나 찍고 이렇게 하여 땅을 갈아서 만든 그 먹이 다하도록 갔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국토를 수학을 잘하는 어떤 사람이나 그의 제자들이 그 수효를 다 알 수 있겠는가? 그걸 누구도 알수 없죠 누가 알겠 습니까.
예를 들어서 산하나 만한 저기 저 설악산 정도 뭐 서울에 남산 만한 것 가지고도 남산은 조그만한 산이죠. 그 작은 산 하나를 갈아 가지고 먼지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먼지를 만들었다. 그랬을때 그 먼지 숫자가 얼마겠습니까. 정말 상상도 못 할 숫자 아니겠습니까 아니 남산은 그만두고 남산의 백분의 일도 않되고 천분의 일도 않되고 만분의 일도 않되는 바위 덩어리를 하나 갈아가지고 먼지를 만들었다고 했을때 또 그 먼지 숫자는 얼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지구를 갈아 가지고 아주 작은 먼지를 만들어다는 거죠. 아주 작은 만들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그것을 갈아서 먹을 만들어 가지고 동방으로 가면서 먼지나 먹을 만든 것이나 결국은 뜻은 같은데 그런 표현도 같이 쓰니까요. 동방으로 가면서 한 국토를 지나서 찍는 것이 아니라. 일천 국토를 지나서 점 하나를 찍고. 또 일천 국토를 지나서 점을 하나를 찍고 삼천대천세계를 갈아서 만든 먹이 다 되었을 때 그 수요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 국토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이 말이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알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사람이 지나간 국토에서 그 점이 떨어진 것이나 떨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모아 부수어서 먼지를 만들어 그 먼지 하나로 한 겁을 친다 하더라도 그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신 지는 이 숫자보다도 더 오래되셨느니라. 여긴 또 이야기가 ...그 지나간 국토에서 그 점이 떨어진 것이나 떨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모아서 뭐라고 했죠? 일천 국토를 지나서 먼지만한 점을 하나 찍는다고 했죠.
그러니까 점 떨어진거나 떨어지지 않은 거나 모두 모아 먼지를 만들어서 그 먼지 하나로 한 겁을 친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뭐라고 상상 할 수도 없는 그런 어마어마한 숫자 입니다 이 지구를 갈아 가지고 삼천대천세계라는 표현은요 사실은 지구보다 훨씬 더 큰 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내가 삼천대천세계를 그만 지구다 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 지구를 갈아서 먼지를 만들고 그것을 또 수없는 그런 숫자의 먼지를 만들어서 그런 하나하나의 세월을 1겁을 친다 그랬어요. 1년을 치는 것이 아니구요. 1년을 친다 하드라도 그게 어마어마한 세월인데. 그걸 한 겁을 쳐다 그랬어요. 겁을 친다 하더라도 그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신 지는 이 숫자보다도 더 오래다. 그 숫자 하고 같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그 숫자 보다 훨씬 더 오래 오래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겁이란 것은 그동안 많이 나와서 내가 설명을 않했는데. 대게 다 잘 아시죠 보면은 그 반석 겁이 있고 겨자 겁이 있고 그런 여러 가지 겁이 있습니다. 사방이 각 40리 되고 높이도 각 40리 되는 그런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100년 마다 한번씩 신선이 내려와서 앉아서 놀다가 올라간다는 거죠. 또 선녀가 놀다가 올라 간다는데.
선녀들이 내려와서 그 가벼운 옷깃으로 한번 스치고 올라가고 또 한번 스치고 올라가고 해서 그것도 100년 마다 한번씩 그래서 그 거대한 바위가 가로 세로 40리가 되는 그런 거대한 바위가 다 닳아서 없어질 때가 일 겁 그래요. 이것을 반석겁 이렇게 이야기 하죠. 뭐 다른 겁 이야기도 많지만은 그런 오랜 세월입니다.
그 몇 년이나 되겠어요 도대체가 그 달기나 하겠습니까 그 부드러운 옷이 바위를 스친다 한들 바위가 달겠어요. 일 겁이라 하드라도 수 억만년이라 말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한 겁은 수 억만년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오래다. 그랬어요 그 숫자보다 더오래니라.
한량없고 그지없는 백천 만 억 아승지 겁이나 되지만 나는 여래 지견의 힘으로써 그렇게 오래 된 일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환하게 보느니라." 그랬습니다. 그야말로 무량원겁이 즉 일념이고 또 일념즉시 무량겁이고 한 생각 속에 한량없는 시간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고 한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다 그속 포함되어 있고 이런 것을 깨달은 분들은 일찍이 다 아셔서 그런 표현을 이제 아주 쉽게 거침없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세존이 이런 오랜 세월을 다 안다. 모른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간이 무한하고 따라서 우리의 삶도 무한하다. 그 속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숱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고 많은 한량없는 인연들이 이합집산에 의해서 이리 모이고 저리 모이고 하는 그런 일로 인해서 오늘날의 우리의 이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저러한 삶이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삶을 사는 사람도 있기도 하고 별별 각양각색의 삶을 연출 하는거죠.
무한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속에 또 무하나 인연을 가지고 그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고 하면서 별의별 삶을 우리가 연출 해간다 하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은 분들은 훤하게 그야말로 어제 일처럼 여기 표현대로 오늘의 일처럼 훤하게 보느니라. 그랬습니다. 이제 그것을 게송으로 다시 설하죠.
2.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2 이 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해보니 지나간 세상 한량없고 그지없는 겁전에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신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은 대통지승불이니라.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기운이 세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땅덩이를 다 갈아서 전부 먹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 먹을 가지고 일 천 국토를 지나가서 먼지만한 점을 하나 찍고 이와 같이 점점 나아가면서 점 하나씩을 찍어 그 먹이 모두 다한 뒤에 먹이 찍혔거나 찍히지 않았거나 그 모든 국토들을 모두 모아서 다시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을 때, 그 먼지 하나로 한 겁을 친다 하더라도 이 많은 먼지 수보다 대통지승불이 열반한 지는 훨씬 오래되었느니라. 길고 긴 세월전에 대통지승불이 열반 하셨다 그럽니다.
대통지승불이 열반한 것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겁인데 여래는 걸림이 없는 지혜로 그 부처님의 열반하신 일과 성문 대중들과 보살 제자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지금 열반하신 것같이 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의 지혜는 청정하고 미묘해서 새어 흐름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한량없는 겁을 통달하여 아느니라. 그랬습니다.
마치 지금 열반하신 것과 같이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는 석가모니의 부처님의 생애를 그대로 하나의 모델로 해서 과거 이야기를 쓰고 미래 부처님 이야기를 쓰고 과거에 수 많은 부처님이 계셔다 하는데 그 삶의 형식을 보면은 거의 석가모니의 형식과 같습니다. 모두가 왕자로 서 출가를 하고 또는 왕으로서 출가를 하고 그래서 성도를 하고 그렇죠.
그와 같이 미래 부처님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온 그 형식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여부를 우리가 떠나서 하나의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인데, 그런 설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뜻이 있는거죠. 그 뜻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뭐 깊은 뜻이 있다 이렇게 표현들을 하는데. 그걸 우리가 잘 이해 해야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런 사실이 그런 많은 세월 전에 있었는가? 서두에 지구가 46억년 전에 만들어졌고 생물은 대게 화학적인 그런 연구에 의해서 나온 그런 공통된 설명이니까. 생물 이라고 하는 것은 36억년 전에 겨우 이제 생겼고 처음에 아주 미세한 생물이 차츰차츰 발전 해서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 까지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북경의 원인 인가요? 제일 사람이 오래 되었다고 증거가 될만한 그런 화석을 사람의 화석을 이제 발견한 것이 한 백만년 정도로 그렇게 치잔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연구한 그런 과학적인 근거에 의한 횟수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이런 횟수는 비교가 안 되죠. 여기에서 말 한 이 횟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길고 긴 세월 입니다. 무슨 46억 만년 정도가 아니예요. 36억만년도 아니고 이건 뭐 무량 아승지 뭐라고 헤아릴 수 없는 억만년 그런 세월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생각을할 필요도 없어요. 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요.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건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보면은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요 사실은 모든 존제가 그렇습니다. 불자 들은 아마 그런이야기 잘 이해 하실 거예요.
없는 것 가운데 있고 있는 것 가운데 또 없고 있으면서 없고 없어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지고 어떤 현상학적으로 설명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한 삶이 또 무한한 인연 으로 해서 각양각색의 삶이 펼쳐진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들 이것을 이제 우리는 염두해 두면 되리라고 생각 합니다.
여기 이제 보통 선문에서 잘 쓰는 십겁좌도량 불법불현전 표현이 나오는데. 대통지승불의 성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십겁이 찰 때 까지는 불법이 안 나타났는데, 십겁이 지나자 비로소 현존 했다 그 뜻입니다. 십겁 (十劫)이 지나고 불법이 현전(現前)하다. 십 겁이 찰때 까지는 불법이 않 나타났는데. 십겁이 지나자 비로써 이제 현전 했다. 그런 뜻이죠
3.대통지승불의 성도(成道)
(1)십겁 (十劫)이 지나고 불법이 현전(現前)하다
3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통지승불의 수명(壽命)은 오백 사십만 억 나유타 겁이니라. 그 부처님이 처음 도량에 앉아서 마군들을 깨뜨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느나 불법(佛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일 소겁으로부터 십 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지마는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이것을 승가에서는 금강경 구절을 통해서 그러죠. 금강겨에서 뭐라고 했죠.일체법 개시불법 그런 말이 있습니다. 나 참 금강경에서 그 말을 듣고 아주 편안 해졌어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불법만 불법인 줄 알았어요 어릴때는 그리고 그외에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전혀 불법 밖의 존제로 생각이 들어서 솔직한 표현으로 좀 불쌍하게 보고 아주 유치하게 보고 천하게 보고 또 가엽게 보고 그런 그야말로 그런 생각이 유치한 것인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내가 좋아 하고 금강경에 대해서 쓴책도 여러 가지죠. 금강경 전서라고 해서 금강경 여섯 가지 번역이 있는데 그걸 다 비교하구요. 또 그기서 오가해 까지 역고 은혜사에 있을 때 금강경 전서 라고 하는 책을 학인들과 함께 합작으로 낸 적도 있고 한데 그것과 뭐 금강경 강의. 금강경 이야기. 금강경 오가해 또 금강경만 단순하게 번역 한 것 그건 크게 출판 된게 아니였지만 교재로 쓰기도 하고 등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하는 그말에 그만 나는 아주 마음이 편안해 졌고 정말 그동안 한참 뭐라고 합니까? 말뚝신심 그러지요 에 처음 입문해 가지고 불교가 아주 좋고 신나고 그리고 불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 만이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속인들은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이상한 잘못된 우월감에 되어서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한참 그렇게 살았을때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어느 것 하나 불법 아닌 것이 없다 하는 그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그 다음 부터는 세속에 살든 뭐 사찰에 살든 기독교를 믿든 불교 를 믿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지간에 최소한도 내가 보기엔 다 도인이고 그대로 잘 살고 인생을 그대로 정말 출가해서 이렇게 독특하게 편협하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오이려 모자라 는 삶을 살고 부족한 삶을 살고 더 훨씬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드라구요.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 얼마나 편안 합니까.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설정 해놓고 그 기준에 가까워 질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기분이 좋고 뭔가 뿌듯하고 무슨 뭐 하루에 천배를 했든지 삼천배를 했으면 비로서 그때사 마음이 뿌듯하고 그렇게 못 했을때는 그만 무슨 푸리 죽은 사람같이 아무것도 못한것 같고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고 산것이 참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초심자에게는 물론 그런 것또 한 때 필요 하긴 하죠 그런 거 잘못 된 우월감도 간혹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얼른 거기에서 벗어나야 되죠.
그래서 비로서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그대로가 사람의 삶이고 진리의 삶이고 부처의 삶이다 라고 하는 이 경지까지 되어야 하는 거죠. 금강경 하나 만 제대로 우리가 소화해도 바로 그런 입장이 됩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 기가 막히잔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십 겁을 앉아 있어지만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체법이 개시불법 인데 따로 나타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겁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불법이 나타났다 하는 소리는 어떤 특별한 불법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두두물물이 그대로 불법이다 라고 하는 거죠. 무슨 불법이 특별한게 있어서 나타 났겠어요. 니타났다면 그럼 석가모니 이후로 지금까지 아둥바둥 애를 쓰가지고 그 인생을 다 받쳐서 수행에 몰두한 그런 분들이 성취한 불법이 세상에 가득 찼을 것 아니예요. 세상에 가득 찼을 거라구요. 저기히말라야 산보다도 훨씬 더 큰 산들이 이 우주안에 꽉차야 될거예요
그런데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온 생애를 다 받쳐서 터득한 불법이 지만은 하나도 어디 먼지 많난 것도 어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먼지 만한 것도 어디 따로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두두물물이 개시불법이야 일체법이 개시불법이야 여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법화경 구절 중에서 선사들이 가장 호감을 갖고 선문에 잘 활용되는 것이 바로 이 구절 입니다. 십 겁을 앉아 있었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아니했다. 기가 막힌 소리다. 모든 것이 다 불법인데 불법 않 나타 났다는데 그 얼마나 근사한 표현이냐 이 말이죠. 그럼 십 겁이 지난 후에 불법이 나타 났다는 말은 뭐냐. 비로소 모든 것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나타나기는 뭐 특별히 없든게 쑥 내밀어가지고 나타난 것. 그런 건 아니라는 거죠. 이 이야기가 선사들이 좋아하고 선문에서 많이 인용을 하는 그런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 소겁으로부터 십 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지마는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않나타 나야죠 나타날게 뭐가 있습니까 일체법이 다 불법인것을 그때 도리천신(忉利天神)들이 먼저 그 부처님을 위하여 보리수 아래에 사자좌(獅子座)를 펴놓았는데 높이가 일 유순이니라. '부처님이 여기에 앉아서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하니, 마침 이 사자좌에 앉으셨느니라. 그 때 여러 범천왕들이 온갖 하늘 꽃을 비오듯 내리니 그 꽃의 넓이가 일백 유순이며, 향기로운 바람이 때때로 불어와서 시들은 꽃은 날려보내고 다시 새 꽃을 내려서 십 소겁 동안을 쉬지 않고 부처님께 공양하였느니라.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항상 이렇게 꽃을 내렸느니라. 여러 사천왕들은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항상 하늘의 북을 치고, 그 외에 다른 하늘에서도 하늘의 풍류를 연주하여 십 소겁이 차도록 하였으며 열반 하실 때까지 이렇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아주 과거에 대통지승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아주 까마득히 멀고먼 세월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결국은 그 이야기는 대통지승불이 출가하기 전에 16왕자가 있었는데 그 16왕자 중에서 최후의 마지막 왕자가 석가모니불이라는 16왕자 중에서 마지막 왕자가 석가모니불 그런 이야기가 이제 연결이 되어 가요 이 야기가 결론 말씀드리 자면은 그렇게 연결이 되어 갑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멀리서 부터 만들어 오는 거지요. 법화경에 어느 구절에 선가 나는 있는 이야기도 하고 없는 이야기도 하고 내 이야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도 하고 그게 누구의 이야기고 또 있는 이야기든 없는 이야기든 누구의 이야기든간에 그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 앓고 있는 중생들의 병을 고치면 그것으로써 끝이다 이거죠. 그것으로써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그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알려고 하지마라. 내가 없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들려 줘서 깨우치게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참 그런 걸보면 아주 속이 후련해요 그래서
뭐 그렇게 보면 특히 법화경같은데 대승경전이 다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특히 법화경은 이런 대통지승불 같은 경우 그렇게 오래고 오랜 이 지구의 역사 보다도 수 억만배 더 오랜 역사를 이야기 하고 그 때 부처님이 있었다.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그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 해야 되겠는가? 알고보면 이해 하기가 간단 하고 너무 쉬운거예요.
이것은 무한 세월 속에서 또 무한한 공간 속에서 사람의 역사도 또 무한히 이렇게 있어 오고 또 무한한 인연들이 거기에 개제 되어서 또 모습의 삶을 연출해 가고 있다 하는 그런 취지를 이해하면 그 뿐인거예요. 대통지승불이 지구의 역사보다 수 억만배 더 오래고 아니고 그까지것 별로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의 인연을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그 뜻입니다.
4 여러 비구들이여, 대통지승불께서는 십 소겁이 지나고 나서 부처님의 법이 앞에 나타나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느니라. 불법이 나타나기는 나타날게 어딧습니까. 나타났으면 아까 이야기 한데로 한 사람 깨달았을 때 불법이 하나씩 나타나고 그랬으면 지금 뭐 수 억만 명이 깨달아을텐데 그분들것이 지금 지구상에 쌓여 가지고 비좁아서 어디 견딜수나 있겠어요. 그 나타나는 것은 없어요. 그냥 말을 하자니 나타났다 그러는 것이지 본래 그대로가 불법이예요
일체법이 개시불법 그것 알면 간단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든간에 특히 불자 들이 신심이 좀 있다고 하는 불자들이 이러저러한 생활을 해야 되는데. 이 세속에 억 매여 가지고 그런 생활을 못하고 이렇게 있다 해서 늘 마음 조리고 그런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분들을 흔히 보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은 잘못 생각 하고있는거죠. 바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서있는 그 자리가 불법의 자리고 또 그기서 그대로가 불법인 줄 알면 그걸로 끝이예요. 어디 이상 세계가 유토피아가 따로 있습니까?
극락세계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전혀 그런 것은 아니죠 바로 이 순간 우리 사는 이땅 이 자리 여기에서 우리가 갈구하는 이상적인 삶이 있고 또 거기에서 발견해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대통지승불이 멸도한 열반하신 그 오랜 세월을 그리고 또 대통지승불 께서 성도 하신 이야기 이것은 십겁좌도량 불법불현전”한문으로 그렇게 표현해요.
대통지승불이 십겁동안 도량에 앉아 있어도 불법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십 겁이 친 뒤에 십겁이 지난 후에 비로서 불법이 나타나드라 라고 하는 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숫한 선사들이 아주 뭐 신이 났어요 재미가 있고 신이나서 이리 이야기 하고 저리 이야기 하고 아 그렇게 다연히 불법은 나타나지 않아야 되는거지 또 나타난다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도 아 그렇지 나타났지 본래 나타나 있는거야 그럼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 뜻이나 나타났 다고 하는 뜻이나 똑 같은 뜻이 되는 거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나타 날것이 없고 본래 그대로니까 나타날것이 없으니 나타나지 않았 다는 뜻이고 그럼 십 겁이 지난 뒤에 나타났다는 뜻은 뭐냐. 그대로 알고 보니 그대로가 불법이드라 이 뜻이죠 참 묘하죠. 그리고 그 사건을 그 이야기를 선사들이 아주 재미있어서 어록에 여기저기서 우리가 발견하고 하는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소재만 가지고도 금강경의“일체법이 개시불법”이다. 하는 이런 이치와 아울러 아주 좋은 설법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 또 사유하는 불법작 어떤사유의 좋은 소재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합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 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_()()()_
감사합니다._()()()_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그대로가 사람의 삶이고 진리의 삶이고 부처의 삶이다...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