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7월 12일 토요일]
《『대동야승』 中 조경남 『난중잡록』 趙慶男 亂中雜錄
1593년 2월, 전라감사 권율 행주대첩과 왜군 퇴각》 [60]
<계사년 1593년 2월 만력 21년, 선조 26년 >
○ 제독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부터 황해도를 지나서 바로 임진강을 건너는데 초마(哨馬)가 회보(回報)하기를, “선봉장 사대수(査大受) 등이 왜적 1백여 급을 창릉(昌陵) 밖에서 잡아 베었다.” 하니, 여송이 크게 기뻐하여 다만 수하의 장관(將官)과 가정(家丁)들만 거느리고 달려서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더니, 적이 유인하여 진흙 속에 몰아넣고 좌우에서 공격하니 용사들이 많이 죽었다. 여송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후진(後陣)이 되어 퇴각하는데 적이 추격하여 앞 고개에까지 이르렀다가 관군이 크게 이르는 것을 보고 달아나 경성으로 돌아왔다. 고사(考事)에서 나온다.
이보다 먼저 선봉 사대수가 부총병(副總兵) 이여남(李如楠)과 더불어 정예한 기병을 뽑아서 거느리고 승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경성 서소문(西小門) 밖에 이르렀다가 적병이 맞아 싸워서 어지러이 죽이니 관군이 패하여 여남이 사령(沙嶺)에서 죽었다 한다.
‘이보다 먼저’ 이하는 들은 바가 고사에서 나온 말과 다르니, 길에서 들은 것으로 믿을 수 없다. 중국 조정의 병부에서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 본국에 보내주어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들에게 주기를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얻었는데, “조선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에게서 족히 충용(忠勇)을 보겠으니 상을 주기를 허락한다. 국왕에게 전유하여 각 도의 장령(將領)을 엄하게 독려하고 힘껏 회복을 도모하여 중국이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라.” 고사에서 나온다.
○ 1월 15일. 성주의 적이 군사를 철수하여 퇴각하여 내려가므로 연로(沿路)에 있던 호남ㆍ영남 여러 군사가 본성에 들어가 점거하다.
○ 각 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아!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지에 뻗쳐 항상 있고, 충의의 마음은 천성에 뿌리 박혀 없어지지 않아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니 어찌 권하기를 기다리랴. 비록 군사의 많고 적음이 같지 못해 소탕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이제 이미 천자의 위엄이 떨쳤으니 어찌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랴. 공손히 생각건대, 성천자께서 우리의 조종이 대대로 충성을 도탑게 한 것을 생각하고 과인이 풀밭에 파천한 것을 민망히 여기시어, 이에 천하 대도독(大都督) 이여송에게 명하여 정예한 군사 수만 명과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의 화포수(火炮手)를 거느리고 이미 본월 8일에 평양성을 쳐서 함락시켜 전성(全城)을 수복하여 왜적 2만여 명을 무찔러 죽이고, 적추(賊酋) 행장(行長) 이하는 찍고 베고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어서 벗어나 도망한 자가 없었다.
원래 본국의 인민으로서 역(逆)을 버리고 순종해 온 자는 일체 죽음을 면하여 모두 복적(復籍)을 허락한다. 황제의 은혜는 천지와 같아서 초목이 다 자라나고, 황제의 위엄은 뇌성 번개와 같아서 부딪고 범하면 타고 부서지지 않음이 없다. 흠차경략 병부시랑(欽差經略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친히 명령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매 무릇 지휘하는 바가 일마다 귀신의 계산과 같고, 찬획경략 병부원외랑(贊畫經略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병부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이 마음을 한가지로 해 협찬하여 적을 멸하기를 맹세하고 본국에 와 싸우면서 격려하고 권유하기를 조목조목 타이른 것이 명백하고 간절하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라면 누군들 감동하지 아니하리오.
또 접견하는 날에 대면하여 군사를 불러 모으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 열 줄의 글을 내려 팔방의 사람들에게 두루 타이르노니, 너희 각 도의 대소 관사(官司)와 초야에 있는 충의의 선비들은 각기 마음을 분발하고 목숨을 바치며 몸을 잊고 순국(殉國)하여 혹은 의병을 소집하여 관군을 돕고 혹은 호걸들에게 타일러서 왕사(王師)을 맞이하며, 혹은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막고 혹은 적이 군량 수송하는 길을 끊어서 무릇 기회에 맞는 바를 모두 스스로 편한 대로 따르기를 허락하노라.
아! 국중의 풍진에 오늘의 충절을 바치면 능연각(淩煙閣)과 운대(雲臺)에 만세의 공훈을 함께 누리리라. 그러므로 이에 타일러 보이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 경상 우병사 김면(金沔)이 졸(卒)하였으므로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를 임명하고, 황진(黃進)으로 충청 병사를 삼고 고언백(高彦伯)으로 경상 좌병사를 삼다.
○ 전라 감사 권율(權慄)이 수원으로부터 군사를 나누어 두 패로 만들어 4천 명을 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산(衿川山)에 둔쳐서 응원이 되게 하고, 스스로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고양(高揚)의 행주 산성(幸州山城)에 나아가 둔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로부터 나와서 바닷가 언덕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쳐서 아울러 응원이 되었으며, 충청 수사 정걸(丁嵥)도 또한 응원 중에 있었다.
○ 2월. 각 도의 인민이 유리(流離)하고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ㆍ뿌리ㆍ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별첨]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가 고프면 저절로 먹이를 찾는다. 하루를 굶으면 눈에 먹을 것만 띄고, 이틀을 굶으면 정신이 팽팽 돈다. 사흘을 굶으면 환장한다. 선비도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는 속담이 있다. 정 먹을 게 없으면 사람고기도 먹는다.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다“는 말은 곧 힘이 센 어른은 안 되니 약한 아이들을 잡아먹었단 말이다.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ㆍ뿌리ㆍ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하물며 산짐승 들짐승들이랴! 전화를 당하면 인민들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산짐승들도 고초를 겪는다. 차마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 선량한 인민들의 목숨줄을 잇도록 해 주기 위해 풀잎, 껍질, 뿌리, 줄기를 희생해 준 이 땅 금수강산의 나무들과 풀들이 고맙다. 특히 도토리, 칡, 쑥, 송구, 나물은 대대로 흉년에 수많은 목숨을 살렸다. 산짐승 들짐승들과 뱀, 개구리, 메뚜기 등도.
○ 2월 12일. 전라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산성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이 때에 서북의 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세력이 더욱 치성하였다. 적이 호남 군사가 강을 건어 요해지에 있다는 것을 듣고 쳐부수려고 생각하고 길을 나누어 나오는데 그 수효가 헤일 수도 없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척후병이 경보(警報)를 알렸다. 권율이 군사들로 하여금 의혹하지 말게 하고 사람을 시켜 탐지해 본즉 성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적병이 가득 차서 호호탕탕하게 세력이 바람과 불길 같았다. 권율이 여러 군사들과 꾀하기를,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다가 문득 적을 만났는데 군사가 서로 대적이 못 되니 어찌 이겨내랴. 만약 한 번 죽지 않으면 국가에 보답할 수가 없다.” 하고, 또 마음을 합쳐 죽음을 같이하기로 모든 장수에게 타이르고 부대를 엄정히 하여 활을 당기고 기다리니 적이 이미 임박하였다.
선봉 1백여 기병이 먼저 이르러 위세를 뽐내더니 조금 있다가 대병이 덮치는데 세력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적이 세 패로 나누어서 나며 들며 번갈아 싸우는데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우리 군사가 죽도록 싸워서 화살과 돌이 비처럼 내렸다. 권율이 친히 밥과 장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며 배고프고 목마름을 막아 주었다. 묘시부터 유시까지 적병이 세 번 나왔다가 세 번 물러가더니, 마른 달대를 가지고 바람 따라 불을 놓아 목책(木柵)을 태우매 성중에서는 물을 가지고 막아냈다. 적병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며 외성(外城)으로 돌진하매, 승병(僧兵)이 붕괴되어 내성으로 들어와 일진(一陣)이 헤져지고 쓰러졌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여러 장수를 꾸짖으매 여러 장수들이 앞다투어 적을 맞아 싸우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저희들의 송장을 모아서 불사르고 달아났다. 머리를 벤 수가 1백 30여 급이 되고 기ㆍ투구ㆍ갑옷ㆍ칼ㆍ창을 버린 것이 수가 없었다. 한창 싸울 때에 화살이 거의 다되어 진중이 위태롭고 답답하였는데 정걸(丁嵥)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바다로부터 성중에 들여와서 이어 쓰게 되다.
○ 이때에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봉장 사대수 등이 행주의 대첩(大捷)을 듣고, 다음날에 그 부하를 보내어 싸운 자리를 둘러보았다. 또 수일간 권율을 만나고자 요청하므로 권율이 진을 정비하여 영접하니 대수가 이르러서 보고는 탄식하기를, “외국에 이렇게 참된 장수가 있구나!” 하다.
○ 16일. 개령(開寧)의 적이 철병하여 퇴각해 내려가다. 호남ㆍ영남의 모든 군사가 어울려서 또 선산(善山)의 적을 공격하다.
○ 권율이 행주로부터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사를 옮겼는데, 경성의 적이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갔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