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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 지옥에서 올라온 여호와
기독교의 신 여호와는 도대체 어떤 신인가?
여호와는 세계의 모든 종교의 어떤 신보다도 더 넓은 포용력과 자비로운, 고등종교의 신으로서
과연 자격이 있을까?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수준의 신인가?
필자는 여호와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듣기에는 수준 미달의 저질잡신이다.
목사들의 설교나 칼럼을 읽으면 '공의로우신 분'이니, '자비로우신분'이니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온갖 철학용어들까지 동원되어 여호와를 칭찬하기에 급급하다.
목사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히틀러'(Hitler)의 '나치즘'(Nazism)에 대해 입에 침을 발라가며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히틀러는 타민족에 대해 배타성이 강했는데, 특히 히틀러 집권전 독일경제를 장악했던 유대인을
극단적으로 증오하며 대학살로 그들의 씨를 말려놓으려고 했다.
그런 그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호와도 이방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강했는데, 이집트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들을 싹쓸이 죽여서
그들의 씨를 말려놓으려고 했다. 특히 아말렉과 모압족, 암몬족을 가장 경멸했고 전쟁을 일으켜 대학살시킨다.
히틀러는 우수한 인종의 씨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장애인들과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을 학살했다.
여호와도 신체에 흠이 있는 장애인들을 부정한 존재로 여기고 성전 근처에 얼씬 거리지 말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성도착 증세가 있었는데 육체적으로 건강한 젊은 남녀에게 조혼을 강요하며
우수한 인종을 이어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타민족과 피가 섞이는 것을 히스테릭할 정도로 두려워했다.
여호와도 성도착 증세가 있었는데 성불구자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과 함께, 형수를 물려받아서라도
대를 이어가라고 명령한다. 마찬가지로 이방인과 피가 섞이는 것을 히스테릭할 정도로 두려워했다.
히틀러와 여호와는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다.
하나는 독일민족의 파시즘(fascism)이고 또 하나는 유대민족의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히틀러는 여자를 차별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호와는 히틀러만도 못 한 것 같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다.
피 비린내 나는 고대 유대민족의 민족신에게 범신론(汎神論)이니 무소부재(無所不在)니 하는 온갖 용어로
치장해 놓는 것은, 돼지의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어 놓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처사이다.
이런 낡아빠진 유대 파시즘을 가지고 오늘날 입에 침을 발라가며 찬양한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위선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네들끼리 피터지게 싸우는 것도 모자라,
기독교와는 아무관계도 없는 종교와 사상에 까지 욕설을 퍼붓는다.
'마귀','사단'.'사탄','가라지','가증','이단' 등등등..........
온갖 아름다운(?) 단어를 동원하여 기독교가 가진 악마성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무슨 음악이 사탄의 음악이라느니, 미국의 모기업이 사탄교에 거금을 기부했다느니 하는
루머를 퍼트리고 다니며 사탄의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사탄과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교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여러분이 그토록 숭배하고 있는 여호와의 존재를 직시하라!
이제 필자는 목사들이 설교시간에 끄집어내기를 두려워하는,
어두침침한 성경의 한쪽 구석에 파묻혀진 성경구절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여호와가 사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여러분을 성경의 문자로 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이 인간의 손에 의해 씌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여러분은 목회자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하나님을 들먹이는 목회자의 정치집회에 따라가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마귀','사단'.'사탄','가라지','가증','이단' 등이니 하는 악성 루머를 퍼트리는 광신자들의 추태에도
동참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성경의 문자로 부터 해방되라!
▶ 여호와 산신령의 어원과 기원
기독교의 여호와(야훼)라는 신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
구약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신이 스스로의 이름을 야훼라고 자칭하며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그렇게 알고들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실상 허구의 인물이다. 역사에 따르면 이집트와 가나안지방에서 아피루라고 불렸던
셈족계열의 유목민들이 유대민족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은 4장에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최근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 등에 의하면 아피루들은 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고,
국가 조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얽매이거나 제 스스로 행동하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비정착인들로 등장한다.
즉, 다양한 씨족출신이면서, 이주 시기 또한 제각각인 셈족 이주민 부족들이 유일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타당치 않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히브리민족의 시조인 아피루들은 언제부터 여호와(야훼)를 숭배하게 되었는가?
출애굽 이전의 이야기를 제외해 본다면,
모세는 이집트인에게 학대받고 있는 동족에 대한 분풀이로 이집트인을 죽이고 탈출한다.
그리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서 사제의 집에 의탁했는데,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산(山)' 호렙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동포들을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이것을 시나이 계약이라고 부른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애굽기 6장 3절]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오류이다.
창세기 12장 8절과 창세기 21장 33절에는 아브라함이 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고, 창세기
22장 14절에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는 뜻으로 '여호와 이레'라는 지명(地名)을 짓는다.
어쨌든 그런 사소한(?) 오류는 넘어가고, 위에서 인용한 출애굽기 6장 3절에 나온 '전능의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원문은 '엘 샤다이'(El Shaddai)이다.
기독교인들도 많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엘'은 신(神)을 뜻한다.
'샤다이'라는 말은 산(山)을 뜻하는 아카드어(Akkadian)의 shad(um)에서 유래되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따라서 산신(山神)또는 산신령(山神靈)이라고 번역을 해야 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기독교 성경에서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산신(山神)이 어째서 '전능의 신(神)'이라고 번역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보수 기독교 학자들에 따르면 높은 곳(=山)에 있으니 전능의 신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산신(山神)이라고 하면 기독교에서 미신으로 취급하는 애미니즘(Animism)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원학적으로나 여러 가지 정황상으로 엘 샤다이는 산신령(山神靈)이 맞다.
예컨데 창세기 12장 8절에는 아브라함이 산(山)에서 여호와를 부르며 예배하고,
창세기 22장 2절에는 여호와가 "산(山)에 올라가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창세기 22장 14절에는 "여호와의 산(山)에서 준비되리라"라는 뜻의 '여호와 이레'라는 지명을 명명한다.
출애굽기 3장 1절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산(山) 호렙'에 올라간다.
특히 산(山)에서 예배나 제사를 지냈다는 일화는 물론, '여호와 이레'의 뜻이 '여호와의 산(山)에서 준비되리라'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던 호렙이 '하나님의 산(山)'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山)이다.
어원학적으로나 여러 가지 정황상으로 여호와의 정체는 산신령(山神靈)이 맞지 않는가?
어째서 '산신령'(山神靈)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는가?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엘 샤다이'(El Shaddai)를
'젖가슴이 달린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샤다이'라는 단어가 '유방'(乳房)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가지 정황상 '샤다이'는 산(山)이 맞다.
여호와는 복(福)의 형태로 젖가슴을 언급한 적은 있어도 자기 자신을 유방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계사회(父系社會)를 기반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젖가슴 달린 신(神)'은, 곧 여신(女神)으로 오해받아 거부되었을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유대교 경전)에서 여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최소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페미니스트 운동은 반드시 필요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경을 토대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나서야,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젖 달린 신'도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필자에게는 고추(男根)가 덜렁덜렁 달린 신(神)만큼이나 우습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 '산신령'인지 '유방 달린 신'인가 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민족의 신 여호와는 헤브라이 글자 4자음 YHWH(모두 자음이고 모음이 없다)로 표기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이름이 약 7,000번 이상 나온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전혀 나오질 않는다).
이스라엘의 신인 고유명사 '야훼'(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hayah. 어두의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가 변화한 말이며
'있게 하는 자, 살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한편, 학계에선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인 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여호와 신앙은 미디안인들로 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가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구약성경에는 미디안인들과 겐족속이 서로 동일하게 쓰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을 가르켜 '겐족속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느 학자는 여호와를 남쪽 네게브 지방과 아카바만 사이 지방에서 알려져 있던 신의 이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여호와는 분명히 사막과 산악지방의 신이었다고 할수 있다.
'야훼'가 '여호와'로 바뀌게 된 것은 마소라의 유대인 학자들이 자음으로만 구성된 히브리어에
모음표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24장 11절의 계명에 따라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이것을 읽어야 할 때는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라는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후에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과 '아도나이'를 표시하는 모음이 합해서 '여호와'라고 발음되었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붙인 것이다.
단, 제1모음은 제1자음, 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
따라서 그것이 16세기의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서 '여호와'(Yehowah)라고 잘못 읽히고,
이 독법이 기독교에 전해져서 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이것을 여호와라고 읽게된 것이다.
근년의 여러 연구에서는 여호와(Yehowah)는 야훼(Yahweh)로 읽는 것이 바르다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본서에서 여호와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겠다.
개신교인을 주요대상으로 삼은 본서는 개역한글판 성경에 의거해서 여호와라는 명칭으로 지칭하겠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야훼'를 '하나님'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야훼신은 하나님이라는 우리민족의 숭고한 명칭을 들을 자격이 없는 고대의 편협한 신이다.
유대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사실, 전지전능한 신에게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부터 어이없는 일이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여 놓는것이 아닌가?)
▶ 복수와 저주의 신 여호와
여호와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신인가?
그러나 구약속의 여호와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현대인들이 봐도 도저히 신의 행동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화들이 등장한다.
협박의 하나님(God of intimidation)이라는 신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용어처럼,
구약의 여호와는 가히 폭군이라고 평가 할만하다.
구약속의 사무엘 상을 찾아보면, 여호와는 사울왕에게 아말렉족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어린이)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사무엘상 15장 3절]
여호와는 어린이와 젖 먹는 갖난 아기 까지 죽여 버리라는 참혹한 저주의 명령을 내린 셈이다.
사울왕은 아말렛의 왕 아각을 끌어왔고 대승을 거두었지만, 아말렉 사람을 죽이는데 보다 약탈하는데
치중하여, 사울은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가져왔다.
이것이 여호와를 화나게 했으며 명령에 순종치 않은 사울에게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
그가 왕위에서 물러남을 예언한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트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호세아 13장16절]
사마리아 지방의 사람들이 배신을 했다고, 어린이들을 죽이고 한 술 더 떠서
임신한 여자의 배까지 가르겠다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갖난 아기를 죽이는 대목은 또 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유명한 모세의 출애굽기의 일화이다.
출애굽기 11장~14장에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유대민족을 풀어주지 않자 여호와는 분노한다.
여러 재앙을 이집트에 내려도 파라오의 마음이 변하지 않자, 최후의 방법으로 파라오나 이집트의 어른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집트의 천진난만한 갓난아이들을 죽음의 역병을 풀어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
전 이집트의 집집마다 죽어버린 아이를 부둥켜안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눈물을 흘린 파라오는 유대인에게 굴복하여 그들을 떠나라고 말하게 된다.
어른들은 그렇다고 치자.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갖난 아기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그저 적대적인 이방인들의 씨를 말려 놓겠다는 저질스러운 저주에 지나지 않는가?
어째서 아기들까지 죽여야 하는지는 출애굽기 20장의 여호와가 모세에게 내린 계율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20장 5절]
오늘날에는 아기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하지만, 고대인의 관습중 연좌제(緣坐制)라는 것이 있어서
죄인의 가족은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죽여서 대를 끊어 놓겠다는 실정법이 있었다.
성경속의 여호와 역시 그 당시 고대인의 사람들의 생각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매우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갖난 아기까지 죽이라는 저주는 새 발의 피일 뿐이다. 이방인들에 대한 여호와의 저주는 끝이 없다.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신명기13장 13절~1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20장 13절~17절]
이방인 남자는 전부 죽이고, 여자와 재물은 약탈하라는 여호와의 거룩한(?) 말씀이다.
하지만 신명기13장에 있는 약탈한 물건은 전부 태워버리라는 구절과는 어긋난다.
이방인들을 죽여 버리고 약탈한 물건은 태워버리던지 소유 하던지는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하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로 삼아 부려라.....(중략).....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붙이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중략)....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말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살려 두었다가는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해 올리는 발칙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어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신명기 20장 10~17절 / 공동번역판]
이 구절은 '공동번역판'에 의거했다. '개역한글판'이 이상하게 번역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개역한글판'을 제외하고 'KJV','공동번역판','표준새번역'은 모두 같은 내용이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 [신명기 13장 7~10절]
다른 종교를 믿자고 하는 자들은 전부 돌로 쳐 죽이라는 내용이다.
위에서 제시한 '개역한글판'에서는 비교적 온건하게 번역해 놓았지만, 'KJV','공동번역판','표준새번역'을 보면
더욱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나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신명기 7장 1절~5절]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상을 파괴하고 절에다 불을 지르는 목사들과 광신자들은
위의 구절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킬 수 있다.
이방신의 기드온이 바알상을 파괴한 아래대목에도 나와 있다.
".........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사사기6장 25절]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역대하 34장 7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신명기 7장 16절]
위 구절은 그다지 잔인해 보이지 않지만,'공동번역판'과 '표준새번역', 'KJV'를 보면
원문에 충실하게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엽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아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가미가 되리라." [신명기 7장 16절 / 공동번역판]
이처럼, '개역한글판'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잔인한 부분을 순화시켜서 조작을 한 흔적이 드러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 죽이고.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불 살랐으며,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수아 11장 6~14절]
여호와가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타 민족을 멸망시키는 내용이다.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이라는 말이 정말 압권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신명기19장 1절]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예레미아 19장 9절]
예레미아서의 18장, 19장에 보면 예레미아가 여호와에게 원한을 갚아달라는 저주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의 기도를 들은 여호와는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그들 일족의 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끔찍한 저주를 선고한다.
특히 끔찍한 저주는 신명기 28장이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된다.
신명기 28장에서는 여호와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데
지면관계상 일부만 요약해서 쓰기로 하겠다.
신명기 28장 15~69절에서 여호와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는 다음과 같다.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고, 치질과 옴과 습진에 폐병과 열병과 염병에 걸리고,
무더위와 열풍을 몰아오고 깜부기병을 받고, 장님이 되고, 약혼녀가 다른 사내에게 강간당하고,
악질 종기가 무릎과 허벅지에 나서 발바닥에서 정수리에까지 퍼지고, 전염병이 퍼지고, 원수에게 노예로
팔려가려고 해도 사주는 사람도 없고,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고, 자식과 곡식과 소 새끼와 양 새끼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고, 너의 시체를 짐승들이 뜯어먹고, 씨를 뿌려도
메뚜기 떼가 먹어치우고, 곡식을 거두어도 다른 사람이 다 먹어치우고, 자식을 낳아도 포로로 끌려가고,
자기 아들딸을 잡아먹고, 자식의 고기를 아무에게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고,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태째 몰래 먹어치우고.......마침내 미쳐버리고.........
내용이 너무 길어서 요약을 해서 올리는 점을 양해 바란다.
특히 '종기','메뚜기', '망한다'등의 똑같은 단어와 내용이 계속 반복되어서 엄청나게 길다.
여호와의 욕 잔치를 제대로 음미해보고 싶으신 분은 어서 빨리 성경책을 펴고
신명기 28장 15~69절을 탐독하기 바란다.
여호와는 이렇게 욕을 퍼붓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신명기 28장 63절]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욕 잔치는 걸죽한 판소리로 한마당으로 구성해서 올리면
최고의 명작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더니." [사사기 20장 23절]
자신의 형제와 싸우라고 오히려 신이 시킨다.
화해와 용서가 아닌 자신에게 거역하면 전쟁으로 모두 휩쓸어버리라는 것이 구약속의 여호와인 것이다.
이방인들을 가르켜 죽여야 할 대상, 전멸시켜야 할 대상, 갖난 아기까지 죽여서 씨를 말려야할 대상으로
명령을 내리는 여호와는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흉을 보는 바알신만도 못한 고대의 잡신이다.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과연 이것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신이 할 만한 말씀과 행위들인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장 24~25절]
구약에서 보여주는 여호와의 말과 행동들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
[마태복음 5장 39~40절]는 예수의 말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이번엔 율법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무시무시한 저주를 살펴보자.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장 27절]
웃기게도 박수무당이라고 번역을 해놓았는데 어쨌든 무속인을 죽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민수기 15장 32절~36절]
율법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이라고 여호와가 명령했다고 한다.
이런 사소한 일로 사형을 선고 하다니 너무 어이없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 명을 찢었더라." [열왕기하 2장 23~24절]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려 대자 엘리사는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고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사무엘상 6장 19절]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인들은 언약궤를 손에 넣었지만 여호와의 재앙에 못 이겨 다시 유대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언약궤를 처음 발견한 벧세메스 지방의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여호와께 번제를 올리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언약 궤안을 보았다는 이유로 여호와는 5만 70명을 죽였다고 한다.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역대상 13장 9~10절]
다윗이 수레로 언약궤를 운반할 때 갑자기 소들이 뛰게 되었다.
그때 언약궤가 떨어질까봐 손으로 붙잡은 웃사는 언약궤를 손으로 만졌다는 이유로 여호와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
열왕기하에서는 아합왕의 후계자인 아하시야가 병에들어 점을 보게 되었는데,
왕이 선지자 엘리야가 아닌 다른 신에게 묻게 하자 분노한 여호와가 왕이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
그러자 겁이 난 아하시야왕은 엘리야를 만나고 싶어서 오십부장(五十夫長)에게 엘리야를 만나 보도록 명한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 찌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열왕기하 1장 10절]
결국 이런 짓이 두 번 반복되어 순식간에 100여명의 사람이 여호와의 불에 타죽는다.
허구(虛構)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포악한 여호와와 사악한 선지자의 모습이
과연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 [민수기 26장 61절]
아론의 두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집안에서 피우던 불로 제단의 불을 피우려다가
여호와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사사기 1장 19절]
여호와의 힘으로도 철병거로 무장한 강력한 원주민은 몰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사기 2장 2~3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은 대가로
이방인들을 쫓아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꾼다.
그건 그렇다 치고 3장에서의 다음 구절은 가관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사사기 3장 1~2절]
중동 일대를 다 정복하지 않고 적을 남겨 놓은 이유는 전쟁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전쟁 교육을 시키기
위한 자료로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게 신(神)의 자격으로 할 수 있는 말일까?
여호와는 과연 공의로운 신인가?
그리고 이제 엉뚱한 사람들이 벌을 받는 내용을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사무엘하 12장 11절]
다윗왕이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자 여호와는 예언자 나단을 보내, 이에 대한
벌로써 다윗왕의 부인들을 빼앗아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웃들과 동침하도록 하겠다고 위협하는 구절이다.
죄를 지은 것은 다윗왕인데, 그 벌은 아무 죄 없는 그의 부인들이 당하여야 한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다윗의 부인들이 다윗에게 간통을 저지르라고 부채질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사무엘하12장 15~18절에는 다윗의 간통으로 태어난 아이를 분노한 여호와가
병에 걸려 죽게 만든다. 죄를 지은 것은 다윗인데 왜 철모르는 갓난아기가 죽어야 할까?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사무엘하 24장 15절]
다윗왕이 여호와가 시키지도 않은 병적 조사를 한 죄의 대가로 벌을 받게 된다.
여호와가 제시한 세 가지 벌 중에서 다윗이 선택한 벌은 전염병이었다.
이로 인해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무고한 백성들이 죽게 된다.
그것도 7만 명밖에 안 죽은 것은 여호와가 인정이 많아서라고 한다.
천사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려고 했는데 인정 많은(?) 여호와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손을 거두어라."고 말했다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대로 병적조사를 한 다윗왕인데 정작 벌을 받은 것은 아무 죄 없는 백성 7만 명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아무래도 이건 너무 멍청한 판단이 아닌가?
여호와는 다윗을 너무 편애한다. 너무나 관용적이다.
오히려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해서 왕위에서 물러난 것보다 다윗의 죄가 더욱 크다.
백성을 7만명이나 죽일 정도의 죄와 간통죄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만 죽인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간통을 저지른 불륜목사들을 물러가라고 말하면,
그들은 안티 기독교인인 필자가 위에서 지적한 성경구절을 들먹거린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 목사들이야 말로 진정한 안티 기독교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믿음의 시험은 어떠한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시험을 위해 노경에 얻은 귀한 아들을 죽일 정도의 모진 마음가짐을 요구하는가 하면
(비록 죽이게 하지는 않았지만), 욥기에서는 그의 믿음의 시험을 위해 자식들과 그의 종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성경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윗왕의 죄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7만 명의 백성들과 다윗의 자식(솔로몬의 형),
그리고 욥의 시험을 위해 희생된 욥의 자식들과 노예들에 대해서는 보상은 커녕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시험을 하거나 벌을 내리는 것은 좋은데 왜 하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성경에서의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인간일 뿐이다.
결국 성경이란 인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란 한낱 파리 목숨일 뿐이다.
단지 하나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나의 시험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까?
오죽하면 초대기독교시대 부터 시작되어, 5세기가 될 때까지 약 400년 이상 소아시아에서 득세했던
마르시오니즘(Marcionism)의 주장에 따르면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는 다른 존재이다." 라는 주장을 펴면서
구약을 없앨 것을 주장하기도 했겠는가?
(이점에 대해서 12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마르시온(Marcion. A.D 144)은 구약의 여호와는 열등한 유대인의 잡신으로 제시하고,
대신 신약의 예수는 자비와 사랑이 많은 진정한 하나님으로 제시를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정말 허튼소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기이하게도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신약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7,020회나 나와 있고, 여호와 닛시(출17:15)로 1회,
여호와 살롬(삿6:24)으로 1회, 여호와 삼마(겔48:35)로 1회, 여호와 이레(창22:14)로 1회 나와 있는데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이유는 신약이 헬라어로 적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대교인들이 말한 하나님은 구약속의 유대인의 고대잡신 야훼보다 더욱 보편적인 신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기독교인들이여, 제발 눈을 뜨라.
오히려 비기독교신자인 본인이 기독교인 여러분들께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목사가 설교시간에 읽어주는 성경구절만 편식하지 말고 성경을 전부 읽어보라는 말이다.
성경의 어두침침한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사악한 구절들을!
그리고, 여러분이 추종하는 신을 제대로 보라.
여호와(야훼)는 유대종족의 토템신일뿐이다.
여호와는 구약의 신이다.
유대교의 율법 속에 갇혀 있는 신이다.
구약의 여호와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낡은 약속 속의 폐기되어야 할 고대 유대인의 잡신이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여호와
종교의 발달 과정을 보면
- 자연 현상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애니미즘(animism)과
- 초자연적 존재와 접촉할 수 있는 주술적인 제사장이 등장하는 샤머니즘(shamanism)과
- 동물과 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totemism)이
종교의 시원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내용들이다.
기독교의 여호와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야훼의 경우 시나이 반도에 있는 산(山)에서 비롯된 애니미즘(animism)에서
기원된 듯하며, 원시 유대교의 형태를 보면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전형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떤 형태이든 생물의 피와 고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레위기1장, 출애굽기 29장등에서 보면 여호와는 끊임없이 흠 없고 온전한 재물을 제물로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동물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각을 뜨고, 콩팥과 내장을 분류해내는 것과 회막에 피를 뿌리는 행위도
기가 막히지만, 짐승을 태운 냄새가 여호와에게 향기로운 냄새라는 대목에서는 아연실색케 한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1장 9절]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단 윗 불 위의 나무 위에 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장 17절]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애굽기 29장 18절]
이 얼마나 고대적인 발상의 낡은 신이란 말인가?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 끊임없이 희생 제물로 가축의 피를 요구하고,
짐승을 태운 냄새 따위에 향기로움을 느낀단 말인가?
피를 흘리고 희생제물을 바쳐야 신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샤머니즘 시대의 발상인가.
게다가 솔로몬은 여호와에게 14일 동안 제사를 지내면서 제물로 바친 가축의 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열왕기 상 8장 63절]
14만 2천 마리의 가축을 제사에 사용했다면 나라살림이 거덜 날 정도가 아닐까?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짐승들을 태우는 것은 고대의 야만적인 믿음으로 거의 세계 어디서나 행해졌다.
또, 성경에는 동물공양뿐만 아니라 인신공양도 등장한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구절에 대해,
목사들은 단순히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예언서에 이방인들이 인간을 그모스나 바알 등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쳤고
여호와가 그것에 진노하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지, 인신공양 때문에 진노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에게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 사람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는 전쟁터로 가기에 앞서 암몬족을 자신의 손에 붙여 주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자신을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여호와에게 번제로 바쳐 올리겠다는 맹세를 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사사기 11장 30~31절]
암몬족에게 승리한 입다는 돌아오는 길에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며 집에서 마중을 나온 자신의 외동딸을 만났다.
그녀를 보자, 입다는 절망감에 옷을 찢으며 딸에게 여호와와 한 맹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호와에게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기에 그녀는 처녀로 죽는 것을 애통해 하는 것의
2달의 말미를 준 후, 입다는 딸을 여호와께 번제로 바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 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사사기 11장 36~39절]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목사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한 설교를 할 때
여호와 이삭을 죽일 마음이 없었으며 여호와는 그렇게 잔인한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어째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목사들은 어째서 이 구절에 대해서 쉬쉬하는가?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 찌니라."
[레위기 27장 28~29절]
물건이든, 가축이던, 사람이던 일단 여호와에게 바치고 나면 팔지도 못하고
가축과 사람의 경우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한다.
민수기 31장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가 노략질한 전리품과 포로를
이스라엘 회중의 진지로 가져왔다.
모세가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민수기 31장 15절]라고 꾸짖으며,
처녀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여호와에게 헌납된 사람은 32명이었다고 한다. [민수기 31장 40절]
여호와에게 바친 포로들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의 딸처럼 제물로 삼아 살해한 것이 아닐까?
위에서 언급한 레위기에서는 여호와에게 아주 바친 사람들은 반드시 죽여 버려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명학적으로 이러한 인신공양은 후대에 이르면 동물 희생 공양으로 바뀐다.
이것은 문명학적으로 볼 때 합당한 가설이다.
고대종교에서 인신공양은 강력한 왕조의 등장에 따라 동물공양으로 바뀌어진다.
주인이 죽으면 노예들도 함께 생매장 시키는 순장(殉葬)의 악습도, 후기로 가면서 토우(土偶)등을
매장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즉, 야만적인 법에서 보편적인 법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또한, 샤머니즘적인 신들은 대부분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는 진노뿐만 아니라 인간과 같이 후회와 한탄과 뉘우침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느니라."
[창세기 6장 5~7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상 15장 35절]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사무엘하 24장 16절]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사사기 10장 16절]
*빙혼도 모르는 용어
곤고하다 [困苦] : 어렵고 고생스럽다
어째서 전지전능한 신이 지난 일을 후회하고 근심하고 뉘우치며 한탄한단 말인가?
구약 속에서의 여호와의 모습은 분노와 질투, 오해와 사랑 등 모든 인간적인 신격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 재난이 이들 신격에 반영된 경우가 많아서
특히 분노와 변덕, 질투가 이들 신격의 주된 성격 묘사로 나타난다.
분노와 질투와 자비의 적절한 안배가 이들 샤머니즘 신들이 경배 받는 주요인인 것이다.
신앙인들은 신의 자비를 구하고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신앙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신의 인격화는 신의 명칭에 따라 다르다.
야훼라고 기록되어진 신의 성격은 인격적인데 반하여, 엘로힘이라고 기록된 신의 성격은 그러한 인격이 없다.
자료 비평법에 따르면 구약은 4개의 전승 층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뒷부분의 15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이집트 땅에서 유대인들을 풀어주지 않는 파라오에 대응한 여호와의 행동은
샤머니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12장 13절]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집 문과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이 비켜간다는 구절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있는 동지날에 붉은 팥죽을 먹거나,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붉은 고추를 매달아서
악귀를 물리친다는 전형적인 샤머니즘의 성격을 보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출애굽기 25장 1~7절]
신전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여호와는 돈과 재물을 내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뒤에 이어지는 여호와의 요구조건은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윗 구절을 필자가 패러디를 해보면, 신이라는 작자가 교주에게 교회를
새로 건축해야하니 시멘트, 벽돌, 최신 펜티엄 컴퓨터, 벤츠 승용차, 마이크, 에어컨.....등등의 물건을 바쳐라고
명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구질구질하게 필요한 물건의 목록을 열거해 놓고 내놓으라는 신,
이것이 과연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일까? 아니면 샤머니즘의 신격일까?
이런 야만적인 여호와의 신격은 구약의 후반부, 이사야서 이후에나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유입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고 볼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의 신학계에서도 유대교가 제대로 정립된 시기가 이사야서이후로 본다.
이사야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뒷부분의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조로아스터교에서 천사개념, 사후세계, 메시아 사상 등이
유대인들에게 유입되었다. 바빌론 유수때 조로아스터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의 민족신 여호와는 구약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점차 보편적인 신으로 변모해 간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의 배타성과 동물 제사 행위는 구약이 끝나고 로마에 정복당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결국 낡아빠진 여호와가 폐위되고 새로운 신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사라고 볼수 있겠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와 신앙의 모습을 한 번 되돌아보자.
주요 종교로 성장했음에도, 덩치가 그렇게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토템과 샤머니즘적인 신에서
얼마나 더 신격이 나아졌는가?
개신교가 카톨릭에서 독립하면서 주장했던 만인제사장설(萬人祭司長說)은 쓰레기 통속으로 던져진지 오래다.
한국의 개신교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성전중심의 제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이름을 빌어 주술사들이 목사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미신행위를 하고 있다.
과거 과학과 인문지식이 체계화되기 전 모든 현상들은 주술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해 왔다.
작은 악마나 신들이 모든 자연 현상과 인간 세상에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리고 신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다가 그런 관습은 차츰 동물공양으로 바뀌어갔다.
그 후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킴에 따라 종교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만은 그 발전을
외면하고 있는듯하다. 아직도 기독교가 구약의 신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는 분명히 자기가 유일한 신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출애굽기 12장 12절]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 [역대하 2장5절]
이방신들을 인정하는 참으로 흥미 있는 구절이다.
또한 '개역한글판'에서는 잘못 번역되어 나오지 않지만 '공동번역판'과 '표준새번역판'의 욥기 38장 36절에는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주었느냐?"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따오기가 무슨 지혜가 있겠는가?
이글에 등장하는 따오기는 이집트의 토트신(Toth)을 말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지혜의 신인 토트신은 현생에 따오기로 나타나며,
"따오기가 한 번에 물고기를 정확하게 잡아먹듯이 토트신은 틀리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신교인이 가장 많이 읽는 '개역한글판'을 사용했지만,
'개역한글판'은 너무 많은 조작과 잘못된 번역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출애굽기 15장 11절]
마찬가지로 이 구절에서도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민족신들 중의 하나인
'유대민족의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출애굽기의 구절은 기원전 13~12세기경으로 추산되는
전형적인 가나안 종교시를 흉내 낸 것이다.
"오, 바알이시여, 당신과 같은 자 누구니이까? 신중에 당신과 같은 자 누구니이까?“
[W.F. Albright /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P.12]
구약의 여호와는 자신이 자기 하나만 섬겨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지,
나 홀로 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구약에서는 야훼와 엘로힘이라는 두 가지 단어의 혼용으로 인해서 생기는 기록상의 미묘한 문제가 있다.
여호와(야훼)가 이방인들의 신인, 엘(El, Elohim)과 만나서 융합되어버린 사실을 통해,
유대교의 신이 어떻게 유일신 사상으로 변해 갔는지에 대해서 분석해 보기로 하자.
편의상 이번 단락에서는 '여호와'라는 명칭대신 '야훼'라고 지칭하겠다.
우선 구약에서 신(神)을 지칭하는 단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야훼이고, 또 하나는 엘로힘이다.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도 '엘로힘'으로 표기된 부분을 '하나님'으로,
'야훼'로 표기된 부분은 '여호와'로 표기해서 쉽게 구분할 수가 있다.
명칭은 다르지만, 둘 다 똑같은 신이 아니냐며 반문 하실지도 모르나, 그 두 가지 명칭의 신은
성경속에서도 서로 엇갈리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즉, 야훼로 기록된 신은 분노와 한탄, 뉘우침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데,
엘로힘이라고 기록된 신은 그런 인간적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극단적으로 창세기의 1장과 2장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창세기가 두 번이나 기록되었음은 물론이고, 1장과 2장의 창조순서도 엇갈린다.
이것은 자료비평방법으로 히브리원문을 보면 1장에는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2장에는 야훼로 기록되어있다.
우선 말해두자면 “바알, 엘, 엘렐, 엘로힘” 이러한 명칭들은 실은 동의어이다.
물론 세부적인 신의 성격은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이름들은 모두 가나안인과 페니키아인들,
히타이트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모두 위대한 신을 지칭하는 동일한 단어였다.
그리고 야훼를 숭배하던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지방의 신(神) 엘, 바알, 아도니스와 탐무즈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엘의 경우는 유대민족의 신 야훼와 혼합, 융화 되었다.
그것은 유대인이 실상은 다수신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으며,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유대인의 야훼는 모든 민족의 신이 아니었다.
히브리 12 지파가 다 야훼를 신봉 했던 것도 아니었다.
(12지파도 점성술의 12궁도에서 비롯된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가나안의 신 엘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엘은 모든 신들과 인류의 아버지로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이며, 황소로 상징되기도 했다.
렐산에 살며 술을 많이 마셨으며, 젊은 시절 두 자매를 유혹하여 아내로 삼아 자손을 보고,
사막에 피난처를 장만 하여 온 식구가 그 곳에서 8 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바알은 엘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엘의 성격은 오늘날의 기독교의 신(神)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야훼를 섬겼던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의 '엘'과 만나면서,
그 '엘' 종교가 놀랍게도 '야훼' 종교와 별 투쟁 없이 만났음을 창세기 14장 19~22절에서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사웨 골짜기에 도달했을 때,
엘을 섬기는 제사장 살렘왕 멜기세덱이(고대에는 제정일치시대였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세기 14장 18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히브리 원문은 '엘 엘룐'(El Elyon: 엘의 존칭)이다.
여기서 가나안 사람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 구절 바로 뒷부분인 22절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왕에게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세기 14장 22절]
이것은 엘과 여호와가 확실히 구분되는 구절로,
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융합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명기 32장 8~9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원문은 '엘룐'(Elyon 엘의 존칭)이다.
이 구절에서 본문은 분명 엘을 가리켜 모든 사람들에게
땅과 영토의 경계를 정해 주시는 최고의 신으로 부르고 있다.
이어지는 다음구절에서의 야훼는 여기서 단지 이스라엘을 그의 몫으로 배당받았을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른바 엘의 신격이 야훼보다 상석에 있다고 볼수 있다.
다신론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 [시편 82장 1절]
윗 구절을 그냥 읽는다면 "자기가 자기 모임에 서서 재판했다"는 모순된 구절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공동번역판에서는 윗 구절을 "하느님께서 신들을 모으시고 그 가운데 서시어 재판하신다"라고 번역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이고, 두 번째 하나님은 '엘'(El)이다.
즉, 유대신(야훼)이 가나안신(엘)의 법정에 재판장으로 출석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어지는 시편 82장에서부터 엘로힘이 엘을 상대로 재판 한다.
그 엘로힘은 당연히 유대신 야훼이다.
엘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자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엘로힘)이여 일어나소서..."라고 외친다.
여호와가 신들의 모임에 나가서 다른 신을 심문 했다.
유일신 사상을 고수하는 현재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대목이다.
이제,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 천사와 싸워 승리한 일화를 살펴보자.
야곱은 천사와 싸워 승리한 후, 이스라엘(Israel :신을 이긴 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충한 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징벌을 내리는 야훼가,
어떻게 '신을 이긴 자'라는 매우 불충스러운 이름으로 개명하게 만들겠는가?
이것은 가나안의 신 엘과 유대인의 신 야훼가 싸워, 야훼 신앙이 승리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가나안의 엘 신앙과 동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에 엘이라는 이름은 인명과 지명에 무척이나 많이 쓰이게 된다.
예를 들어, 엘리야(Elijah)의 이름은 '엘은 여호와이다'라고 음역되며(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이다),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는 길에 신의 역사를 꿈에 본 후 '벧엘'(Bethel :신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일화 등이 있다.
여호와의 경우, 유대교에서는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게 했는데,
엘의 경우는 인명이나 지명, 심지어 '신을 이긴 자'라는 이름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융합은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그들 민족을 지칭할 때 '이스라야(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가나안 만신전(patheon)의 최고신인 엘과
잘 융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가나안족의 엘 종교와의 일치운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야훼 종교의 가나안 토착화 과정에서 일어난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동화, 일치 운동으로
토착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초반부에서 신(神)명칭의 혼재는 모세오경에 대한 4문서설(J,E,D,P 자료)로 분석을 하면 명확히 파악된다.
즉, 오경은 4개의 전승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전승이 하나로 합쳐져 오늘날의 경전으로 형성된 것이다.
4문서설은 뒤에서 언급하겠다.
알트(A. Alt)의 연구에 의하면,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섬기는 신들이
엘 별칭(El epithets)을 공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약의 문맥에서 본다면 초창기의 유대신들은 일반적(Generic Name) 신명(神名)인 엘(El)과 설명구가 결합하여
이뤄진 XXX엘이라는 모습으로 잠시 비춰진다.
예컨데, 종족동맹(種族同盟)간의 엘 별칭(El epithets)인, 엘샤다이(Elshadai :창세기 17장 1절28장 3절, 35장
11절,43장 14절,48장 3절, 출애굽기 6장 3절, 에스겔서 11장 5절), 엘엘룐(El Elyon : 창세기 14장 18절~24절),
엘올람(El Olam : 창세기 21장 33절), 엘로이(El Roi: 창세기 16장 13절), 엘베델(El Bethel: 창세기 31장 13절,
35장 7절) 등은 산, 강, 나무, 돌등의 일정한 땅과 결부되는 '토지신'(土地神)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엘 별칭(El epithets)은 이름 없는 신들(Nameless Gods)이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족장이나 조상들의 이름으로 잠시 동안 등장했다는 점이다.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장 13절31장 42,53절),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을 돌보시던 두려운 하나님'(창세기 31장 42.53절) '야곱의 하나님'(창세기 49장 24절)등의 호칭에
족장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신은 족장의 이름과 결부시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엘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신은 족장 개인에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 정착한 부족간에 엘 별칭(El epithets)을 공유함으로써
서서히 야훼신앙이 정립되어 가기 시작했다.
[A. Alt / Essays on Old Testament History and Religion / Oxford: Basil Blackwell, 1966]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전승(창세기 12-25장)은 헤브론, 이삭 전승(25-26장)은 브엘세바,
야곱 전승(25-26장)은 베델, 세겜, 드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주요 무대가 중부 팔레타인의 일정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이들 지명이 중기 청동기시대의 중부 팔레타인의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은 각각의 족장들의 전승이 가나안의 특정장소와 연결되어 생성, 형성, 전개된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각 족장의 전승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전승의 재료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대를 거쳐서 만들어지고 편찬되어 현재의 문서가 된 것이다.
즉, 유대인의 야훼신앙은, 애니미즘(Animism)과 다신론(Polytheism)의 초창기 상태에서,
단일신론(Henotheism)으로 변했고, 마지막에 가서 야훼 유일신론(Mono Yahwism)으로 진화(進化)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구약학계에서 연구하는 가나안 정복설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 아피루(유대 민족의 시조)들이
산악지대를 점거하면서 가나안 민중들과 종족동맹(種族同盟)을 형성했다는 연구로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시대 상황은 초기 유대인들에게 종교혼합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가나안에서 흡수된 엘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정확히 따지면, 구약 속에서 엘이라는 단어는 신(神)이라는 일반적인 명사로 사용되어졌다.
바알과 같은 이방신을 가르켜 엘로힘이라고 하거나, 사무엘의 영혼을 가르켜 엘로힘이라고 사용하기도 했다.
엘로힘은 그 사용범위가 광범위하였고, 정확하게 따지자면 '엘로힘=야훼'가 아니라 '엘로힘>야훼' 인것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명기 5장7절]라는 구절에는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씌여졌다. 즉
, 원문에는 "내 앞에 다른 엘로힘을 너는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엘로힘은 신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였음을 알수 있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시편 95장 3절]
원문을 보면, "야훼는 크신 엘이시며, 엘로힘중에서 가장 큰 왕임을 선언하노라."
여기서도 엘은 신을 지칭하는 단어로, 엘로힘은 신들이라는 성격으로 씌여졌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열왕기상 18장 21절]
원문은, "만약 야훼가 엘로힘이면 그의 뒤로 가고, 만일 바알이 엘로힘이면, 바알뒤로 가라"
역시 엘로힘이 신이라는 일반적인 명사로 사용되어졌다.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엘과 엘로힘은 신과 신들이라는 단어로 흔히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엘은 처음에는 가나안인들의 그들 신의 고유명사였지만,
히브리민족에게 흡수되면서 신이라는 단어로 보통명사화하게 된 것이다.
엘이 일반적인 신이라는 명칭으로 쓰였다면, 어째서 복수적인 엘로힘이 자주 쓰였는가?
유대인의 신은 자기의 이름은 '야훼'라고 말했을 뿐, 그들의 신 '야훼'는 단수형으로 취급된다.
반면에 엘로힘은 '복수형'인데, 이것은 복수로 기록되어진 것은 존엄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혹시, 이것이 삼위일체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9장에서 설명하겠다)
'엘로힘=야훼'라면, 어째서 '야훼'라는 명칭에는 장엄복수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또 하나의 의문은 장엄복수를 사용할 일부 부분엔 그것대신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6~27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장 22절]
창세기 에서 신은 '우리중 하나'(One of Us) '우리의 형상'(Our Image)','우리의 모양'(Our Likenes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따라서 장엄복수설의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이미 엘로힘으로 표기가 되었으므로,
'우리'라는 단어는 '나'로 바뀌어져야 한다.
이것은 복수형의 의미가 정말로 복수의 신을 의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또, 아래 구절을 살펴보자.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창세기 35장 7절]
위의 창세기 구절의 원문을 보면, "............ha-elohim(신이) niglu (모습을 나타냈다)"
ha는 정관사이며, niglu에서 u는 영어의 s처럼 복수형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말에서는 "나타났다"라는 동사의 복수형을 표현하기가 애매모호 하지만,
신은 자기 자신을 엘로힘, 즉 복수형으로 표현하고 복수형으로 나타났다.
유대인들은 가나안의 신 엘을 흡수했지만 이것은 다신교 사상이었다.
다신교 사상이었으므로 여러 엘이 나타날 수 있고,
엘을 믿는 사람들은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변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엘로힘을 사용할 때는 복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막연한 신들이라는 단어로 바뀌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야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장엄복수로 착각된 엘로힘의 사용은 그냥 일반적인 신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창세기의 '우리'라는 단어와, 신의 복수형인 '엘로힘'이 자주 사용된 이유는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이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출애굽당시 네겝지역에 잠시 정착한 히브리인들은
미디안족외에도 모압족, 에돔족, 아모리족과 계속해서 접촉했으며,
모세가 자리를 비운사이 금송아지(아피스 신상으로 추측된다) 숭배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 후로도 이방신숭배가 끊이질 않았다.
여로보암왕은 두 개의 황금송아지를 만들고는 히브리인들에게 건네며,
"이스라엘아, 여기 너희들의 신들이 있다. 바로 너희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한 신들이니라.“
[열왕기상 12장 28절]라고 말한 적도 있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는 히스기야 왕이 아세라 목상과 모세의 놋뱀을 부순다.
출애굽 때 모세가 잠시 신통력을 발휘 했다는 놋뱀이 히스기야왕 시대에까지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대기에 있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신전에 장식한 두 개의 황금 지품천사의 모자이크는 이
방종교의 영향이었으며, 열왕기상 11장 6~7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신전을 만들면서 예루살렘 동쪽언덕에 모암족의 그모스신과 암몬족의 몰록신을 위한
신전을 세우게 했다는 점은 유대인들의 다신교주의를 확인시켜준다.
물론, 이점에 대해서 솔로몬이 이방인 왕비들을 맞으면서 타락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기독교신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 속에서의 여호와는 끊임없이 현실에 나타나서 가혹한 벌을 주는 신으로
이미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여호와로부터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진다.
여호와는 어째서 솔로몬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일까?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성경은 유일신을 기초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 속에서 복수적인 형태로 표기된 기독교의 신은
신들 중의 신일 따름이었고, 신들 중의 하나인 유대인의 민족신 야훼를 섬기는 것일 따름일 것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성경에서는 '신들 중의 신'이라는 표현은 생각 외로 많이 발견된다.
물론 신명기 6장 4절 같은 곳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이 나온다.
위의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문은 '엘로힘'이고,' 하나'의 원문은 '에하드'(E had)이다.
히브리어 '에하드'란 복수단일을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연필 12자루 묶음을 한 타스라고 부르고, 마늘 100개를 1접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바빌론 유수 때 4개의 전승이 하나로 합쳐져 오늘날의 성경의 모습을 갖춰가게 된다.
그렇게 성경은 4개의 전승이 억지로 합쳐지면서, 창세기1장과 2장의 모순 같은 치명적인 모순까지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신교의 관습은 이사야서에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유일신 사상이 이사야서 이후에나 정립되었음을 정설로 삼고 있다.
이때는 바빌론 유수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이다. 유일 신 신앙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 통치 때,
제 2 의 이사야에 의해 소개 되었다. (이사야서는 제3의 이사야 까지 분류된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여러 명이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야 유대의 신은,
부족신 엘샤다이(El-Shaddai : 산신령)에서 벗어나 전지전능의 유일 신이 되었다.
페르시아 왕들은 그들의 유일 신 신앙을 강요 하였고 유대의 신앙, 역사, 법과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유물로도 이것은 충분히 증명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은 예루살렘에 야훼의 성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나안적의 신들을 숭배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고학적으로 바빌론 유수이후에도 이방신들을 숭배했던 가나안 신들의 유물들이 계속해서 발견된다.
원래 가나안의 신들은 농사와 관련된 풍요의 여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쉐라'(Ashera), '아쉬토렛'(Ashtoreth), '아낫트'(Anat) 등의 풍요와 생산을 상징하는 가나안적인
여신들뿐만 아니라, 멀리 페니키아의 한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출신의 '타닛트'(Taanit)
여신의 신상까지 고대 이스라엘에서 숭배되었다.
이스라엘 지역의 도시들 발굴에 있어서 흙으로 빚어 만든 신상들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의 주거지 집터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당시 청동 등의 금속이 매우 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 신앙 차원에서 개인이 손에 지닐 수 있는
부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작은 크기의 신상(神像)들이 대량으로 발굴 되었다.
일종의 가신(家神)으로 여겨지는 이 조각들은 당시에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소장품으로 추정된다.
아쉬토렛 여신상들은 머리 부분을 틀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하였고 몸통에 끼워 넣었다.
어떤 신상들은 빚을 때 머리를 새 모양으로 단순화시키기도 하였다.
타닛트 여신은 가슴에 독특한 상징의 리본을 달고 있으며 오른손은 숭배자들을 반기는 듯이 위로 펼쳐 들고
왼손은 풍요를 상징하는 두 가슴 사이에 가져간 모습을 보여준다.
아낫트 여신상은 대부분 막대기에 끼워 약간 높은 곳에 세워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 가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을 정립시켰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집트 종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모세는 거의 허구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모세오경은 바빌론 유수이후에나 등장하기는 했지만,
출애굽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이집트의 제19대 왕조 무렵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보다 대략 1세기전의 제18대왕조의 이집트에서는
아케나톤(Akhenaten : BC 1337~1354년 통치)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아몬호텝(Amenhotep)이었으나,
"그는 아톤의 마음에 든다"라는 뜻의 아케나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케나톤(Akhenaten)은 다신교였던 당시의 이집트에서 모든 신들을 폐지하고 유일신 아톤만을 숭배하도록
신학적 혁명을 감행했는데, 이것이 세계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톤(Aten)이라는 명사는 태양만을 지칭할 뿐이며, 그것은 태양신 라의 발산물이다.
그의 통치하에서 이집트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여 국력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조카인 투탄크 아몬(투탕카멘, 또는 투탄카몬)이 옥좌에 앉았는데
역시 젊은 나이에 돌연사하게 된다.
아케나톤의 제자인 아이가 뒤를 이어서 잠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유일신론자들이 정권을 잡았던 18대 왕조는 국가의 지원금이 끊겨버린 사제계급들의 격렬한 반항에 의해
몰락되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 호렙헵에 의해 19대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세계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던 유일신론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이러한 유일신론이 야훼 유일신 사상을 체계화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유일 태양신 아톤 숭배를 전파하기 위해 아케나톤왕이 직접 지었다는
'아톤 찬나가'는 창조주 야훼를 찬미하는 구약성경의 시편 104장과 놀랄만큼 닮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유일신으로의 신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일치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은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유대민족에게도 바빌론의 유수 이후에나 일신론(一神論)이 굳어진다.
중국에서도 진시왕 때에 와야 '상제' 등의 통일된 신의 개념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