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돈이 필요하다/ 김영희
영양제 보다 진통제가 더 잘나간다는 민 약국
골목에 줄줄이 앉아있는 아낙들
절이고 말린 보따리 봉지봉지 펼쳐놓았다
촌두부 이천 원 청국장 이천 원
무말랭이 시래기 깻잎장아찌 삼천 원,
어디에선가 본 듯
손대중으로 담은 삶의 무게들이 고만고만하다
속내 다 꺼내놓고
명태처럼 덕장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빈 생을 살아온 여인들
굴묵허리 내걸린 시래기 같이
한 줌 햇살에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생
사리돈이 필요하다
- 시집「저 징헌 놈의 냄시」(리토피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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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돈’은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는 특정 제약회사의 진통제 이름이다. 특정 약품을 홍보할 의도가 전혀 없기에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게보린, 펜잘 등의 이름도 함께 거명해 둔다. 모두 해열진통효과에 안정적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과 신경안정에 효과가 있는 ‘카페인’이 함유된 의약품들이다. 만성두통 환자들이 집에다 상비해 두고 복용하는 약들인데, 만성편두통의 경우 정신과 증상인 우울증과 불안증을 동반하는 일이 잦다.
‘영양제 보다 진통제가 더 잘나간다는 민 약국’이 자리 잡은 곳은 서민주거지역의 재래시장 골목 어귀 어디쯤이 되겠다.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내야 하는 골목시장의 아낙들 ‘손대중으로 담은 삶의 무게들이 고만고만’한 것처럼 고만고만한 일상의 두통도 ’사리돈’ 한두 알로 다스려가고 있다. 머리 수건을 두르고 좌판에 웅크리고 앉아 파리를 쫓거나 꾸벅꾸벅 졸면서 덕장에 매달린 명태처럼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한자리를 꿰차고자 하는 나리들이 제일 먼저 달려와서 방긋 웃으며 두 손을 공손히 잡아주고 가는 곳. 그러나 당선이 되면 가장 먼저 뇌리에서 사라져버리는 곳. 그러니 꼼짝없이 ‘빈 생을 살아온 여인들’이다. 뒷전 굴뚝 허리에 내걸린 물기 잃고 퍼석퍼석 말라가는 시래기 같은 여인들의 상설위로역이라고는 ‘사리돈’이 거의 유일하다. 약효가 다하면 통증이 다시 시작될지언정 그래도 지금은 ‘사리돈이 필요하다’
일수를 찍듯 위태롭고 부박한 생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니 우울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그들은 ‘촌두부 이천 원 청국장 이천 원 무말랭이 시래기 깻잎장아찌 삼천 원’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물품으로 ‘빅딜'을 영위하고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가.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대형마켓 주차장으로 송송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 눈에는 박복한 여인네로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 삶의 거친 호흡은 건강하다. 거짓웃음을 수습해야하는 일 따위도 없다. 자주 ’사리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권순진
도니제티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 Double Bass
첫댓글 [사랑니] ~ 선생님 발길 따라 오다보니 ... 샘 많이 감사 ... 졸시 기억 해주셔서 ... 음악도 제가 좋아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