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름 모를 산길을 노경위는 한 색동옷을 입은 여자 아이의 안내를 받으며 걸었다. 춥지 않았다. 바람도 없었다. 아이의 색동옷은 상록하단(上綠下丹)이었다. 푸른 색감이 눈이 부셨다.
아이가 어느 한옥으로 들어갔다. 솟을대문에 팔작 지붕의 고가였다. 집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였다.
"우리 딸이구나. 우리 딸이 온게야?"
밤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소리가 저럴까. 대문이 열리고 미닫이문이 열리고 안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색동옷의 아이가 여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노경위는 또 다른 방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꿈인가? 꿈속의 꿈인가?
노경위는 꿈을 깨려했다. 그러나 어떤 노인이 먼저 노경위를 잡았다.
"여기는...?"
"일락도요."
"일락도요?"
"그렇소. 당신은 세상에서 떠내려 왔고 여기는 해와 별이 지는 일락도(日落島)요."
"... ...?"
집은 빈집처럼 조용했다. 노인 외에는 다른 가족은 없는지 지독한 정적만이 있었다. 초가였다. 안개가 가득하여 주변이 구별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노인도 없었다.
혼자인가.
노경위는 마당으로 나와 사립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개의 저쪽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노경위는 파도 소리를 좇아갔다. 그쪽으로 가면 혹시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 듯했다. 바닷가라면 어부들이 살지 않을까.
그러나 해안에 도착해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여전했다. 바다는 안개와 상간을 하여 안개의 아들 딸들을 낳는 듯했다.
"아!"
노경위는 해안에서 노인을 발견하고 놀랐다 . 노인은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투낙을 해 놓고는 안개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망태기 속에는 잡은 고기가 한마리도 없었다.
"젊은이 나는 어제 꿈을 하나 꾸었다우. 늙은이가 비몽사몽 하는거야 다반사지만 어제 꿈은 그렇지 않았다우."
ㅡ나는 영혼이 되어 내가 세상에 남겨놓고 온 후손의 사랑방에 가 앉아 있었다우. 눈이 왔습디다. 후손의 집도 하얀 눈에 덮혀 있지 않았겠수. 그때 손녀의 손녀쯤일까... 손녀딸이 한 사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옵디다. 색동옷, 아 그 붉고 푸른 색감이 눈에 선하다우. 아 나의 후손의 집에 무슨일이 생긴게지...
"... ...!"
노인이 자신의 꿈을 말한 후 다시 주낙을 응시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색동옷의 아이, 어떤 고가(古家)...
노인의 꿈 이야기. 아 꿈속의 꿈인가.
"어르신 이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어르신은 누굽니까?"
"일락도요. 해가 떨어지는 섬이지. 나는 떨어지는 해를 장사지내 주는 화부(火夫)지."
"화부라고요?"
"그렇수. 아 댁도 금방 눈물이 마르겠구려."
"아악!"
노경위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약한 꿈이었다. 식은 땀이 비오 듯했다. 속옷을 갈아 입어야 할 정도였다.
"어푸!"
노경위는 주방의 싱크대로 가 찬물에 세수를 했다.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노경위는 아이들의 방으로 갔다. 소영이와 다래가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불안했다. 집안에 어떤 불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노경위는 반복되고 있는 악몽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이 아이들의 평화를 지켜주실 수 없는지요...?"
노경위는 뜬금없이 하느님을 찾았다. 아이들의 몸에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소영의 머리맡에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너는 생리(生理)야
몽울지어 피었다가 진 너.
너에게로 가려면
무엇인가가 되어야 해.
8. 초승달의 죽음
노경위는 초혼기의 사본과 번역 내용을 들고 서교수를 다시 찾았다. 서교수는 한 학생과 상담을 하고 있다 노경위를 반겼다.
"아, 노형사님 어서 오세요."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학생이 서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교수실을 나갔다. 청바지에 울티가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잘 계셨지요?"
"그럼요. 앉으세요. 과 대표로 이번 가을 엠티를 상의하러 온 겁니다."
"네, 학생들도 맡고 계신가 보죠?"
"3학년 지도 교수죠. 아 이것이 초혼기라는 겁니까? 전화 하신..."
"네, 여기 한번 보시죠."
서교수는 노경위에서 초혼기를 받아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원문과 번역본을 차근차근 살피는 모습이 영낙 없는 학자였다.
"아 참, 차 한 잔 하셔야죠?"
서교수가 초혼기를 다 읽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두 잔을 뽑아왔다. 1회용 자판기가 교수실 복도에 있었다.
"감사합니다."
"드세요. 재미있는 내용이군요."
"내용이 재미있습니까?"
"네. 사실 우리 기록 중에 바둑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거든요. 간헐적으로 시가나 아니면 바둑을 폄하하는 글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본격적인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죠."
"기록이 있기는 한가요?"
"그럼요.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언급된 최고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입니다.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사로 인정하는 기록이죠. 그곳에 바둑이 나오죠."
"아, 도림이라는 승려 말이군요? 그 출처가 삼국사기입니까?"
노경위는 상식으로 알고 있던 고구려의 바둑 고수 도림을 떠올리며 물었다.
"맞습니다.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가나 산문 속에 단편적으로도 나옵니다. 허난설헌이나 허균 이순신장군 고려조의 정지상, 아 그리고 다산 선생의 글 등 엄청나죠."
서교수는 초혼기를 노경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조선 생활사를 연구하는 학자에게 있어 초혼기는 어떤 의미일까.
"다산 선생이라면...?"
"정약용 말입니다."
'아, 다산 선생도 바둑을 둔 모양이죠?"
노경위는 다산 정약용이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다산은 바둑이 사회를 망친다는 생각을 한 분입니다."
"네? 세상을 망치다뇨?"
"다산은 투전과 음주와 바둑이 성행한 당시의 사회상을 엄격하게 비판합니다. 사회 전체의 동력을 갉아 먹는다고 파악한 거죠."
"그건 좀..."
"한마디로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사회 풍조를 비판한거죠. 다산은 실용주의자 아닙니까?"
서교수는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책장에서 논문집 한 권을 꺼내 노경위에게 주었다.
"작년에 졸업을 한 제자가 쓴 논문인데 이곳에 미륵과 당래가 나옵니다. 이 초혼기를 이 친구가 먼저 보았으면 내용이 한결 충실할 뻔했군요."
"초혼기를 쓴 자도 중종 반정과 관계있는 자일까요?"
"여기 나오는 미륵 두령이란 단어를 볼 적에 맞는 듯하군요. 자명사의 초명보살이나 미륵 그리고 이 초혼기의 작자 등... 하하 노형사님은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논문을 한 편 쓰고 계시군요."
"정말 그런 듯합니다. '중종반정 연구'라 재미있을 것 같군요."
노경위는 논문집을 초혼기 위에 포개어 놓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교수님 저는 이해가 안가는 것이 조선시대 폭력집단이 혁명에 가담했다는 거 말입니다. 5백년이나 지탱해온 나라가 건달들이 낄 정도로 그렇게 얼벙했을까요?"
"사실입니다. 조선은 양반이니 사대부니 선비의 나라니 하지만 기실은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적당한 힘의 균형을 통해 공생해온 사회였습니다. 법도와 예절 등을 표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사회 저변은 나태와 문란으로 가득한 그런 사회였죠. 다시말해 비기득권층에도 숨쉴 공간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미륵 당래가 모델이죠."
"반정공신에 그들이 들어갔다면서요?"
"미륵과 당래는 원종공신입니다."
원종공신(原從供臣)은 중종이 연산을 몰아내고 조선의 11대 국왕으로 등극한 후 반정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첩이다. 조선이 태조 이성계가 개국을 한 이후 28대 500년을 넘는 동안에도 공신첩을 내린 경우가 겨우 30회 정도인 것을 보면 미륵과 당래가 받은 원종공신의 가치가 짐작되는 것이다.
"엄청난 기여를 한거군요?"
"그렇게 보아야죠. 특히 그 두 사람이 출신성분이 검계인이고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인물이었을겁니다."
"연산조나 중종 선조 등 왜 그 시대가 특별히 어려웠을까요?"
노경위는 조선 중기의 시대상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책이나 영화 등을 보면 언제나 그 시대의 백성들의 삶이 피곤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궁금했다.
"그때 지구는 소빙기였습니다."
"소빙기라뇨?"
"지구가 특별히 추웠을 때라는 거죠. 이건 기상학자들의 연구입니다. 11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약 3백년 간의 기간에 해당하죠. 곡물과 각종 작물이 얼어죽는 경우가 많았죠. 땅에 생업을 대고 있던 시대니 만큼 조선의 백성들의 삶이 힘든 것은 당연했겠죠. 정치는 다음 문제입니다."
"... ...?"
서교수는 조선 중기의 사회상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을 했다. 백성들의 삶의 피폐를 국왕이나 위정자들의 통치 잘못에 두지 않고 소빙기(小氷期)라는 기상 현상으로 해석을 하고 있지 않은가.
8. 초승달의 죽음
"위정자들의 정치가 잘못되어 나라가 피폐한 것이 아니라 기후 현상 때문이라는 이론은 생소하군
요?"
"이론은 그렇게 가정을 하고 논을 전개하는 겁니다. 노형사님은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들이 못 사는 것이 위정자들 때문이라고 봅니까?"
서교수가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노경위를 바라보았다. 저것도 역사학자의 호기심일까.
"그럼 아닙니까?"
"역사는 위정자들이 이끌어 온 것 같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나름대로의 제도와 규격을 만들어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 스스로 통제하고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조선은 엄격하고 철저한 통치 체계가 있던 나라입니다."
서교수는 조선의 통치 체계를 설명했다. 조선은 대명률과 경국대전과 형조규칙 등 그물망 같은 법 체계와 내조(內朝)와 외조(外朝)로 나누어진 완벽한 행정 체계를 갖춘 나라였다. 책대로 한다면 그야말로 이상국가가 만들어질 정도로 법과 체제가 문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였다.
"세상이 법과 제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저는 역사학자로 그런 고민을 합니다. 역사에는 영웅담이 있지만 역사의 현장에 영웅은 없죠."
"그게 무슨 말이죠?"
서교수는 역사의 각론과 개론이 같지 않음을 설명했다.
조선의 전기는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새로운 왕조를 연 조선이 통치 구조와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나름의 국가 체계를 완성시킨 시기였다.
태종의 철권통치를 통한 왕권 강화와 한글창제와 국경 정비 및 각종 문물 생산 활동을 장려한 세종의 통치기를 통해 나라의 틀을 확고히 한 조선은 성종에 이르러 경국대전의 완성과 8도 가 도 역(驛) 원(院) 정비 등을 완성, 법 행정 군사 등의 적어도 제도상으로 조선은 더이상 손볼 곳이 없는 나라가 된다.
그러나 제도와 법만으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성군이라는 세종마저 이런 한탄을 실록에 남겼을까.
ㅡ요즘 법이 3일을 가지 못한다. 오늘 만든 법을 며칠 후에 다시 손을 보아야 한다면 그건 이미 법이 아니다. 법의 제정도 중요하지만 한번 정해졌다면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초혼기가 쓰여진 시기는 연산조와 중종 때인데요. 역사는 연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죠."
"폭군이 아닌가요?"
"폭군이였죠.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나 때로는 여러가지 제도를 신하들과 상의 없이 만들거나 혁파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연산은 자신이 폭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찬성을 하지 않을겁니다."
"무슨 말씀이지..?"
"연산이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시대에 두번의 큰 사화가 있었고 또 왕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죠. 그러나 조선의 국왕들이 사람 죽이는 것은 일종의 통치 행위라 보았을 때 연산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것을 빌미로 폭군으로 모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이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것 아닙니까?"
노경위는 학교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상식을 떠올리며 물었다. 연산군은 폭군이며 백성들을 학대하는 정치를 펼치다 반정을 당했다는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질문이었다.
"백성들이 살기 힘든 것은 연산조뿐만이 아닙니다. 세종조와 성종조도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백성들의 기록이 수없이 나옵니다. 특히 성종 때에는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스스로 거지떼가 되어 유리걸식하는 일이 잦아 온 조정이 그 일로 골머리를 썩는 기록이 나옵니다."
"살기 힘든 이유가 있을거 아닙니까? 탐관오리가 세금을 빌미로 갈취한다는 등..."
"그 또한 역사의 오해입니다. 우리가 옛날을 말할 때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들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탐관오리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제도와 사회적 기풍이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죠."
조선의 지방 통치 구조는 중앙과 지방의 협의체 성격을 띤 것이었다. 1년이나 2년을 임기로 내려오는 군수 현감 현령 등은 토박이인 육방권속들의 실무 보조를 받고 향반(鄕班)이라는 지역 양반들의 협의체의 견제를 받으며 짧은 임기동안 인사고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처지였다.
정 5품에서 종 6품에 해당하는 군, 현, 령 등이 평생 행정 실무에 종사해온 육방권속을 장악하고 사회의 특별 계급으로 인식되는 양반가의 견제를 무너트리고 군 현의 재정을 파탄낸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관찰사와 중앙의 철저하고 치밀한 이중감시를 받는 체계였다.
행정 법률에 해당하는 쟁(諍) 송(訟)의 모든 서류가 관찰사와 중앙 그리고 임지에 한 부씩 보관되고 수령의 임기가 끝나면 모든 서류가 한 곳에 취합되어 대조를 해보는 소름끼치는 감사 체계가 조선 전 시대에 걸쳐 유지되어온 상황에서 춘향전의 변사또는 글자 그대로 우화일 뿐이었다.
다만 조선이 멸망기에 다가온 순조 고종 때 파탄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지방 관직을 매관(賣官)했던 과오를 식민 사관으로 활용한 일본의 영향으로 조선의 전 시대가 모욕을 받는 것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
서교수는 특별히 조선 중기에 나라의 경제가 힘들었던 이유를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전 지구에서 일어났던 소빙기를 원인으로 꼽았다.
그 당시 3백년간이나 전 지구가 추웠다는 것이다. 냉해는 농업에 생산업의 거의 전부를 걸었던 지구인에게 악몽이 되어 조선뿐이 아니라 중국 유럽 대륙의 그 시기는 모두 참혹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재해를 극복할만한 인간적 지혜와 기술이 보급되기 이전 사회의 업보 속에서도 정치 행위는 존재했고 역사는 그 정치 행위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노경위는 서교수에게서 강의를 듣고 평창동의 강호명을 찾았다.
초혼기의 번역에 대한 인사와 함께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전문 한학자의 의견과 역사 교수 두 사람의 눈을 통한 초혼기의 내막이 궁금했다.
8. 초승달의 죽음
"초혼기는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더군요. 저는 바둑에 대한 이해는 없지만 초혼기를 남긴 사람의 바둑에 대한 애정과 승부 근성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독후감이 놀라웠습니다."
강호명이 노경위를 휴게실로 안내하여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며 말했다. 오나 가나 자판기 커피
였다.
"요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노경위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 다짜고짜로 초혼기를 묻기가 미안했다.
"승정원 일기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승정원 일기라면 왕조실록과 비슷한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실록보다 스펙트럼이 넓고 방대한 자료라 이제 겨우 번역의 첫걸음
을 떼기 시작했죠."
"왕조실록보다 더 방대한 자료가 있나요?"
"승정원 일기가 그겁니다. 실록이 국왕과 중요 대신들의 일상을 기록한 것이라면 승정원 일기는
각 부서의 정책과 집행 과정과 감사 내용 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행정 보고서라 할수 있죠. 당연
히 내용이 방대하여 실록의 다섯 배는 충분할겁니다."
"아 그정도입니까? 번역은 언제나 다 되나요?"
"부지 하 세월이죠. 30년은 족히 걸릴겁니다. 왕조실록도 겨우 몇년 전에 마친 실정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수사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강호명은 노경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경위는 그 질문에 마땅한 답변이 없었다.
"저도 답답합니다. 수사 단서라기보다는 무슨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듯 하군요. 참 전문가니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검계라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단체입니까?"
"검계요?"
"조선의 조폭 집단이라 하던데요."
"아, 강도단을 말하는군요. 맞습니다. 조선의 역사기록을 다루다 보면 그런 대목이 많이 나오죠. 강도(强徒) 절도(竊徒) 수적 화적 명화적 신백정 검계 등이 범죄단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 단어는 조선 전후기를 망라해 끊임없이 보입니다. 연산군 일기에 보면 유자광이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강호명이 흰 종이에 싸인펜으로 도표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성종과 연산군을 종횡으로 잇는 군왕도표가 그의 손에서 그려졌다.
ㅡ지금 강절도단의 발호가 한양 시골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 출몰하고 있어 쉬 막을 방책이 없나이다.
"강절도단이 검계입니까?"
"검계란 모든 일을 칼로 해결한다는 집단의 통칭입니다. 암흑가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 실록이나 정부 기록은 강도 절도 살인자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 원칙이죠."
"초혼기의 작가도 검계의 일원이라 하더군요. 미륵 당래 등이 이끄는 검계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노경위가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넣으며 말했다.
"미륵말이군요. 그렇지요. 중종반정에 참여해 원종공신에 들었던 인천 암흑가 사람이 그죠. 아, 이 초혼기에 나오는 미륵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강호명이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산군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연산군요?"
"네"
노경위는 뜬금없이 연산군을 물었다. 서교수에게 연산군의 간략한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역사 고문서를 번역 하는 실무자의 견해도 궁금했다.
"매력적인 캐릭터죠."
"캐릭터요?"
"한마디로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죠. 엄청난 카리스마와 저돌적 돌출 행동으로 역사의 곱지 않은시선을 받고있는 인물이니까요."
"사람을 많이 죽인 탓인가요?"
"아뇨.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든 군왕이 거의 다 하는거죠. 국가의 사형권의 최종 결정권자가 국왕이어서 조선의 왕들은 사람 죽이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죠. 오히려 연산군은 사대부를 희롱하고 농락한 것이 문제였다고 봅니다."
강호명은 서교수와는 약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사대부를 희롱하고 농락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득권층의 반발의 동기가 그것이란 말입니까?"
"네. 연산군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층에 반감이 있었죠. 그래서 관료들을 몹시 하고 죽이고 탄압을 가하죠. 그 과정에 술과 여자와 기타 과격하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일종에 겁을 주는 행동이죠."
"겁요?"
"겁을 줘야 사대부들이 공포를 느끼고 복종할거 아닙니까?"
"오히려 반정으로 실각을 당했지 않습니까?"
"적당한 자리에서 멈춰야 되는데 연산군은 그걸 모른거죠. 궁지에 최악으로 몰린 신하들이 반정을 도모했으니까요.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기에 검계에까지 손을 내밀었을까요?"
강호명의 설명은 정연했다. 당시의 최고 고기록에 접해 살고있는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식견은 대단했다.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폭군이죠. 조선의 군왕들이 서슬 퍼런 공포 정치를 펴기는 했어도 연산군처럼 직접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없었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렇지 않아도 산천초목이 떠는 절대 군주 아닙니까? 그런 자가 직접 칼을 들었다고 말입니다... 당시 신하들이 기겁을 한거죠."
"... ...!"
강호명은 몸서리를 치는 흉내를 냈다. 노경위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오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삼스럽게 조선시대의 절대 군주의 위엄이 느껴졌다.
노경위는 오늘도 별무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월급 타먹기가 미안한 날들이었다. 당초 서장에게 특명 수사를 받았을 때는 집에 들어오기는 틀린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한가한 날이 계속되어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았다.
"어... 다래야?"
노경위가 아파트 1층 출입구 계단에 나와 앉아 있는 다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다래의 몸이 굳어 있었고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다.
다래가 무엇인가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8. 초승달의 죽음
소영이 잠들어 있었다. 초저녁에 왜 소영이 잠을 자는 것일까.
"... ...!"
노경위는 아직도 몸이 굳어 딱딱한 다래를 안고 방안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소영을 보았다.
소영은 꿈을 꾸는 듯 했다.
"... ...?"
"아부 !"
다래가 노경위의 품을 파고 들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다. 그때서야 다래가 어느정도 정신이 돌
아와 있었다.
"소영아?"
노경위는 다래를 방에 내려놓고 소영의 침대 옆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소영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손이 따뜻했다. 소영은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있었고 침대와 방은 너무 도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소영아?"
"아부!"
노경위가 소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뜨거운 눈물이 소영의 볼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소영이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소영이가 흘린 눈물일 터였다.
ㅡ아빠, 술 조금씩 먹고 밥 굶지 말고 알았지...?
소영이 노경위에게 말하는 듯 했다. 언제인가... 아니 멀지 않은 시간에 이리 될지는 알았었지만 노경위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소영이는 그런 노경위를 위로하고 달래는 듯 했다.
"그래, 아빠 너와 약속했었지. 울지 않기로... 다래야?"
"아부."
노경위가 눈물을 삼키며 아직도 잔뜩 겁에 질려있는 다래를 불러 옆에 앉혔다.
다래가 그때서야 소영의 손을 꼭 잡았다. 소영은 이미 차디찬 시체였다. 온기가 빠져나간 시체는 이미 살아 있을 때의 그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경위는 다래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편안하게 보내주자. 다래야 우리 소영 언니를 신경 안쓰게 보내주자."
노경위가 다래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린것이 눈물도 많지...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난 다래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부 아부!"
다래는 오직 그 단어만을 할 줄 알았다. 다래는 지금 언니 언니 하며 소영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
哭)을 하는 것일까.
"다래야..."
노경위는 다시 한번 다래를 뜨겁게 안아 주고는 서에 전화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얼마전까지 고락을 함께 하던 반원들이 달려왔다. 노경위는 다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벌거 벗은 알몸으로
첫 새벽의 숲속을 거닐면서
별이 떨어지는 샘물을 마시고 싶다.
<법구경>
긴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파트 창으로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경위, 가세 떠나는 길은 새벽이 편하지."
경무과장이 반원들과 날을 밝혀가며 장례 준비를 해 주었다. 작은 장의차가 아파트 밑에 와 서 있었고 소영은 하얀 천에 덮힌 채 자신의 방을 나와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양복에 하얀 장갑을 낀 반원들이 소영을 들것에 태워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 가자꾸나."
노경위는 천을 들고 마지막으로 소영의 얼굴을 한번 더 바라보고는 눈가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영이 노경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말하는 듯 했다.
아빠 안녕,
그리고 엄마를 용서했으면...
"갑시다."
노경위는 다래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장의차에 몸을 실었다. 이미 어떤 화장터로 가기로 예정이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장례의 모든 절차는 윤형사가 알아서 챙기고 있었다. 반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노경위의 딸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그 아이가 죽으면 그 죽음을 바다에 뿌려 주겠다던 노경위의 결심을...
화부(火夫)의 손에 너무도 쉽게 소영의 육신이 꽃이 되어 있었다. 한줌의 재는 세상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처연하게 작은 자기 항아리에 심어져 있었다.
결국 이것이었다.
노경위는 지난 오랜 시간을 부녀의 연을 맺고 사랑하고 아파했던 인연의 실체를 두 손에 안고 아파했다.
"며칠 쉬게. 열흘쯤 휴가를 내 놓겠네."
경무과장이 반원들을 데리고 철수하며 말했다. 노경위는 한사코 남아 있으려 하는 막내 차형사를 동료들과 함께 철수를 시켰다.
남은 것은 다래와 작은 항아리에 담긴 소영이뿐이었다.
"다래야, 우리 바다로 가자."
노경위는 항아리를 다래의 무릎 위에 안도록 하고 차를 몰아 강화도로 향했다.
소영을 강화 바다에 뿌려 주고 그 영을 전등사에 맡길 참이었다.
불자는 아니었으나 소영이가 절을 좋아했고 특히 전등사를 편안해 했기 때문이었다.
"참, 다래야 바다에 가기 전에 한곳 갈 곳이 있구나. 소영이가 꼭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었단다."
노경위는 차를 돌려 안성으로 향했다.
그곳 어느 호수가에 한 여자가 울면서 살고 있었다.
8. 초승달의 죽음
작은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앉아 저녁 석양을 받고 있는 안성 호수는 편안하고 조용했다.
낭뜨.
커피숍 낭뜨는 그 호수가 끝나는 길의 마지막 곶(串)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어 호수가 전체적으로 조망되는 좋은 자리에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니... ..?"
여자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 서는 노경위를 보고 놀라며 행동이 굳어졌다.
여자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옛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행히 커피숍 안엔 한 두명의 아베크족이 있었고 여자의 남편과 아이들은 없었다.
"놀라지 마시오. 소영이가 차안에 있소. 당신을 한번만 보고싶어 합니다"
"... ...!"
노경위는 담배를 꺼내 들고 호수가에 서서 호수 저편을 바라보았다.
"... ...?"
여자가 열려 있는 승용차안을 보고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다래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영아!"
"... ...?"
다래가 들고 있던 상자를 더욱 당겨 안으며 여자를 쏘아 보았다. 그 눈빛이 차갑고 냉정했다.
"소영아?"
여자는 순간 다래를 소영으로 착각한 듯 했다. 지금 다래의 나이에 헤어졌기에 여자의 기억 속에 소영의 성장도 멈춘 것인가.
"아부!"
다래가 차문을 닫아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다래가 처음보는 여자에게 적개심을 품는 것일까.
ㅡ 보아라. 저 여자가 니가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엄마다. 너의 엄마는 이렇게 물가에서 잘 살고 있구나. 이제 그만 가자.
노경위는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차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서야 여자가 상황을 파악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석상(石床)이 되었다.
차가 출발한다.
호수에 드리웠던 저녁 노을이 거두어지자, 호수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어둠을 토해놓고 있었다. 두렵고 쓸쓸했다. 여자는 이 호수가에서 커피숍을 하며 어떤 남자의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어려운 시절 경찰관인 남편과 시한부 병마에 시달리는 아이, 거기다 줄줄이 딸린 시동생들을 못견뎌하다 뛰쳐나간 여자였다.
그 여자는 지금 이 물가에서 행복한가.
"아부..."
노경위가 차를 세우고 다래를 내려 주었다. 소변이 마려운 것이다. 노경위는 어느새 다래와 죽이 잘 맞았다. 소영이 어릴 때도 저랬다.
"아부."
다래가 깡총깡총 뛰어와 차에 탔다. 그런 것을 보면 어린 아이가 분명했다.
차가 다시 강화를 향해 달렸다.
전등사.
그곳이 소영이의 마지막 고향일까.
전등사에 도착한 시간은 밤이었다. 늦은 밤인데도 경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경위는 다래를 데리고 경내를 돌았다. 아직도 다래는 소영이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노경위가 몇번을 받아 들려 해도 다래는 그것을 거부했다.
법당 앞에서 노경위가 합장을 했다.
아침이 오면 서해에 소영의 유골을 뿌려주고 이 법당에 소영의 영혼을 맡길 생각이었다.
"... ...!"
다래가 법당을 보더니 스스럼 없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3대 보살상 뒤로 거대한 12승 탱화가 보는 이를 압도했다. 그중에 탱화의 좌측을 지키고 있는 4천왕의 부릅뜬 눈은 어린 다래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무서움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래는 게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3대 보살상에 참배를 하기 시작 했다.
오체투지였다.
아.
두손을 모으고 두손을 가슴에서 머리 위로 올려 바닥에 대고 손과 양팔과 양무릎을 차례로 내려놓았다가 일어서는 순환을 다래는 너무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 ...!"
노경위는 하늘로 붕 떠오름을 느꼈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떠있는 듯 했다.
천장에 프러시안 불루같은 하늘빛 단청이 보였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 같은... 아, 신디 싸이저의 맑은 음률이 들려왔다.
따르르.
따르르.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다래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목탁 소리가 법당 저 뒤쪽에서 들려왔다. 스님들이 탑돌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노래 소리 같았다. 천상의 소리가 저럴까.
아, 나의 딸 소영은 저 천상의 소리를 들으며 하늘 나라로 갔을까.
노경위 또한 다래의 옆에 엎드려 소영이를 생각했다.
8. 초승달의 죽음
네개의 풍경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내며 한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한 화음이 되자 천상의 소리가 되어 천지사방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
노경위는 가슴 속에 가득한 감동을 느꼈다. 산과 바다와 절집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 천상의 소리에 응답을 하는 듯 했다.
그것은 새벽을 맞는 소리였다.
아.
전등사에 새벽이 오고 있었다. 목어 소리가 들렸다.
바다에 사는 물속의 생명을 깨우는 소리였다. 하늘의 날짐승들을 깨우는 풍경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발 딛고 사는 모든 짐승들의 잠을 깨우는 법고 소리가 들렸다.
지이ㅡ 잉.
세상과 무간 지옥의 모든 정령들을 깨우는 범종 소리가 들렸다.
사물(四物)음이 교차하며 바다를 깨우고 사물음이 갈등하며 산을 일으켜 세웠다.
그 속에서 노경위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음의 북 소리였다.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었다. 그곳에 태초의 자궁이 보였다.
꽃가루가 날렸다. 눈이 오고 있었다. 밤을 새워 법당 밖에 한얀 눈이 난분분 휘날리고 있었다.
노경위는 그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음을 느꼈다.
"다래야, 이제 그만 가자."
다래가 느릿느릿 행하던 오체투지를 멈추고 방석 위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놔두구려. 아이가 부처님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지 않소?"
옆에 와 있던 스님이 말했다. 새벽 예불인 도장석을 위해 스님들이 와 있었다.
노경위는 스님의 말에 따라 처마밑으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치 4월 어느 봄날 꽃가루가 날리는 풍경을 연상시켰다.
"영매를 가져 오셨구려?"
스님들의 스승인 듯한 노스님이 소영의 골분을 눈치 채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세상 마지막 길에 절집을 찾음을 누가 뭐라겠소.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법... 그게 연기법이라오."
노스님이 그 말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잡고 정구업진을 외며 좌선에 들어갔다.
"아부."
다래가 잠에서 깨었다. 한손으로 눈을 부비며 다래가 물을 찾았다. 노경위는 법당 뒤쪽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한컵 받아 다래에게 먹이고 절을 나서 바다로 향했다.
날씨는 그리 춥지는 않았다.
이 눈이 그치면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노경위는 다래를 엎고 바다가로 내려와 소영의 골분을 내려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아브..!"
먼저 다래가 울먹거렸다. 노경위 자신도 복장이 터지는 아픔과 눈물샘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참을 일이었다.
"아브.."
다래가 노경위에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항아리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노경위의 완강한 행동을 어린 다래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래야..."
"아브...!"
다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소리를 쳤다. 결사 항전의 몸부림이었다. 무엇이 저 어린 아이의 순정을 저리도 자극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노경위는 사정없이 소영의 마지막을 바다로 보냈다. 눈발이 앞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쏟아졌다.
그만 내려 놓거라.
성긴 바람은 불고 무릎 걸음으로 다가온
풀이 눞는다.
못난 아비 손가락 타고
미끄럼 타는 너
소풍길 조잘대는 아이같구나.
돌아 보지 마라.
훠이
훠이
눈에 젖은 이 바다에
너를 묻는다.
<와이케이9423>
노경위는 다래와 함께 언양땅에 있는 일성암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얼마간 모든 것을 잊고 그곳에서 떠나간 소영을 추억하며 살기를 원했다. 물론 그리 될 일은 아닐 터였다.
9. 전등사
미륵이 말을 달려 제물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수원에서 고잔을 거쳐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온 것이다. 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입가에는 하얀 거품을 내 품고 있었다.
"... ...?"
초명이 일을 하는 색주가가 조용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가. 뒤따라온 비호와 가희는 먼저 적소로 보낸 탓에 집안으로 들어간 자는 미륵 혼자였다.
어느 방에서인가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생들이 버글거리고 술이 흥청이는 집에서 왠 책읽는 소린가.
"거센 바람 한나절에 그치지 않고 거친 소나기 언제 한나절에 그치리오?"
책의 내용은 분명 공자왈 맹자왈을 찾는 유가의 경전이나 미륵도장이나 관세음 보살을 찾는 불교 경전의 내용도 아니었다.
그 내용은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불온한 내용이었다. 권불십년을 운운하다 일가족이 적몰한 사대부가 있는 판이었다.
"아이고 두령 ?"
색주가의 주모가 미륵을 발견하고 뛰어나왔다. 마치 처가집을 온 사위를 맞이하는 품새였다.
"어찌 이리한가 한게요? 장사를 작파한 것도 아닐테고?"
"말마슈. 국모가 온다고 관에서 난리가 났다우. 우리집 애들 다 관에 끌려갔수."
"국모가 오신다니... 어디로 말이오?"
미륵이 평상에 앉으며 말했다. 어느새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졌다.
"전등사에서 법회를 연다는 게유. 그 뒤치닥거리가 인천부와 강화부에 떨어진 게지. 니미럴 백성들은 다 뒈지기 직전인데 무슨 복을 더 받겠다구 법회람 법회가..."
주모가 불평을 늘어 놓았다. 전국 어디를 가도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미륵은 알 듯 했다. 얼마전 군왕이 흥천사를 망가트리고 군기시 마굿간으로 만든 일로 불교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왕비 신씨가 나서 불교계를 다독거리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왕비 신씨는 작금의 왕실과 조정안에서 백성들이 신뢰하는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신씨는 인자하고 후덕했다.
폭군 군왕을 표나지 않게 모시며 어떤 때는 군왕의 난폭함을 그녀가 나서 진무하는 역할도 했다.
흥천사는 조선 선종의 마지막 보류이자 거대 사찰이었다. 그 사찰을 성균관 작폐와 함께 무너트린 군왕의 위력은 가히 사천왕급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임금이 당 시대를 버팅기는 두 개의 사상과 철학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었던가.
"그런데 저 방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데 저런 불온한 책을 읽고 있소? "
미륵이 아직도 책읽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있잖수? 전방산 두타라고..."
"뭐요? 오, 전방산 두타가 오셨구먼... "
미륵이 주모를 밀치고 그 방으로 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두타는 경기 황해의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용화세계의 도래를 예견하며 세력을 얻고 있는 신흥 종단의 교주였다. 미륵은 두타와 한가지 악연이 있었다.
"엥?"
"엥이라니?"
미륵과 두타가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쳤다. 두타는 거대한 몸집에 포대 화상을 연상시키는 인상의 사내였다.
"뉘신가?"
두타가 미륵은 안중에도 없는 듯 거만한 모습으로 물었다. 그들은 악연은 있었으나 서로가 처음보는 사이였다. 방안의 커다란 상위에는 삶은 돼지고기와 술병이 놓여져 있었고 미색을 갖춘 두 여자가 그의 앞에서 포덕 강의를 듣고 있었다. 여자들은 무녀(巫女)들의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용화교의 신자들일 터였다.
"임자가 요즘 서해를 들쑤시고 다니며 용화니 미륵이니 하며 다니는 바로 그 요승이란 말이지?"
미륵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두타에게 말했다. 시비를 건다해도 맞는 말이었다.
"왜, 니놈도 미륵 세상에 관심이 있는 게야? 그렇다면 전륜성왕인 내게 인사를 드려야지... 무슨 인사법이 이리 탁주 사발인게야?"
두타가 들고 있던 책자를 바닥에 던지며 미륵을 쏘아 보았다. 책표지에 덕도경(德道經)이라 쓰여 있었다. 덕도경은 노자의 도덕경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방금 두타는 도덕경을 읽고 있었음인가.
"하하, 내가 바로 미륵인데 니놈이 전륜성왕이라면 나의 아비라 이 말이네..?"
"미륵? 아, 형씨가 황단의 두령 미륵인가? 이거 반가우이."
두타가 미륵의 이름을 익히 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어 왔다. 수인사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으윽 !"
그러나 미륵은 두타의 손을 잡는 대신 손목을 꺾어 뒤로 젖혓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두타는 비명을 질렀고 미륵의 목에는 칼이 들어 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9. 전등사
"응...!"
미륵이 두타의 손목을 꺾는 순간 바로 울대에 칼이 들어올 판이었다. 칼을 댄 자는 여자중 한명이었다.
"호, 이것들이..."
미륵이 칼을 들이민 여자의 눈을 쏘아 보았다. 여자도 그에 지지 않고 두타의 손목을 풀라는 머리짓을 했다. 미륵이 피식 웃으며 두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두타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여자들에게 나가 있으라는 신호를 했다.
"앉아, 내집은 아니지만."
두타가 꺾였던 손목이 아픈지 다른 손으로 손목을 만지며 말했다. 여유가 있는 자였다.
"계집들이 제법 싸납소?"
"싸납기만 한가? 맛도 일품이지. 그런데 왜 나에게 반감을 보이나?"
두타가 술을 한사발 따라 미륵에게 주며 말했다.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는 사내였다. 능히 한 지역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자였다.
"용화세계를 내세워 사기를 치고 다니느라 애좀 쓰겠수?"
미륵이 두타를 계속 긁었다. 문란한 국정과 지리멸렬한 불교의 퇴락속에 조선은 무당과 이교도의 천국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두타는 단연 두각(頭角)이었다.
용화세계는 미륵이 세상에 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불교의 미륵신앙의 변종으로 조선 중후기를 두고 끈질기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종파였다.
"내가 사기로 종단을 운영하는 이단이라면 작금의 불교는 어떠한가? 어느 종파에 붓다의 근본이 있는가?"
두타가 탁주 사발을 들어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말했다. 그의 입안에서 안주로 집어넣은 깍두기가 우둑우둑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땡초가 감히 종단을 입에 담는가?"
"이봐, 지금 조선을 장악하고 있는 천태종도 따지고 보면 수많은 종파중 하나에 불과한 걸 모르나? 자네 붓다의 처음의 목소리를 아는가?"
"붓다의 처음의 목소리?"
"마찌니아 까니아, 천축 말로 처음 결집이란 말일세. 붓다가 입적한 후 5백년 후에 제자들이 모여처음 만든 경전 아함경의 실체도 아리송한데 금강경 천수경...우하하 웃기는 얘기 아닌가?"
두타가 불교 성립의 근본에 대한 의문을 말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 정리 완성된 종교이지만 부처 사후 그의 교리에 대한 정리를 놓고 상좌, 대중이란 근본이부(根本二部)로 양분하여 소승 대승이란 거대 강을 이뤄 실핏줄 같은 종단 분열을 하다 조선의 천태종에 이른다.
"이런 인사를 봤나? 니놈이 감히 부처님을 욕보인단 말이냐?"
미륵이 다시 술잔을 엎어 놓고 두타를 손을 보겠다는 자세로 나왔다. 혹세무민하는 이교도에 대한 반감이 있는 터에 불교를 욕보이는 두타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무엇이 도이고 구원인가? 지금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 마냥 소리만 칠게 아니라.."
두타도 조금도 지지않고 자신의 할말을 했다. 미륵의 검계의 위상도 두타에게는 별게 아닌듯 했다.
"웃기는 놈이군? 그래 니놈 화상이 말하는 백성에 대해서 좀 들어보자?"
"군왕은 패덕하고 신하들은 복지부동이지. 기근과 한발이 여름과 겨울을 순례하고 8도의 아전 서리들은 가렴주구를 하려 해도 빼앗길 살림도 없는 백성들 천지지... 이때가 미륵이 올 때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래서 니놈이 전륜성왕을 자처했다 그 말인가?"
"내가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이 뭔 대수야? 내가 감히 붓다를 자처한다 해도 무슨 대수냐 이 말이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무너진 강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나는 백번 천번 전륜성왕도 미륵도 부처도 자처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 ...?'
두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일도스님도 꿩잡는 게 매라 말하지 않았던가. 불의를 보고 행동하지 않으면 배운 자도 도인도 협객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또한 미륵 자신의 심원(心願)이 아니였던가.
두타의 말에는 의기가 들어 있었다. 그의 말에는 이 시대에 함부로 섞지 못하는 대의가 스며 있었다.
"지난번 해주에서 난리친것을 해명해 봐?"
"오, 해주 목사건으로 나에게 감정이 있군? 그것이 어찌 나의 잘못인가?"
두타는 파계승이었다. 그는 풍수와 천문지리를 아는 전직 승려로 8도에 무력(巫力)을 떨치고 있는 무당 염화(炎華)와 혼인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미륵이라 참칭하며 일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선의 무당은 기본적으로 용신을 믿는 이 땅의 토착 종교 세력으로 조정에서 세금을 징수하며 수효를 관리할 정도로 사회에 일정한 역할이 있는 무리였다. 염화는 그들 무당집단의 신망받는 신녀(神女)로 두타와 관계를 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도력 높은 승려와 용녀(龍女)가 결합하여 미륵을 낳았다는 신화가 되어 조선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타는 해주의 한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핑계로 집회를 열었고 삽시간에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이를 해산시키려는 해주 감영의 군사들과 충돌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핑계삼아 해주 목사 박명신이 파직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해주 목사가 미륵과 박영문을 연결시켜준 미륵의 후원자였다.
"끄응...! 여긴 어쩐 일인가?"
미륵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무엇인가 미덥지 않은 인사임은 분명했으나 달리 무슨 책 잡을 것도없었다.
"전등사 법회에 초대를 받아 왔지."
"뭐야? 전등사 법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왜 아닌가? 여봐라! 선녀들...?"
두타가 밖에 나가 있던 여자들을 불렀다. 선녀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은 옥황상제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