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 10. 31. 17:31
■ 왜장 구로다를 무찌른 이정암 의병장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 36)~1600(선조 33))은 1561년(명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서 두루 벼슬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로 있었다. 이후 의병장이 되어 황해도 연안성에서 왜군 구로다군과 싸워 승리하고, 정유재란 때도 초토사로서 수양산성을 지켰다.
이정암(李廷馣, 1541(중종36)~1600(선조33))은 1591년 임진왜란 때 연안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유명하다. 이정암은 임금을 따라가기로 했으나 5월 18일 주력부대가 임진강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5월 말까지 개성 부근의 전포리(錢鋪里)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그에게 동생 이정형이 황해도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당도한 곳이 황해도 연안이었다. 그러나 연안은 이미 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해주로 향했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7월 10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다닌 지 오늘로 70일이다. 동서로 피난을 다니며 난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데다가 더위를 먹고 비를 무릅쓰고 산에 들어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려니 촌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소식 하나 들을 수가 없다. 죽음이 닥쳐와도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번민을 가눌 길이 없구나.”라고 했다.
이에 이정암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생각했다. 7월 24일 의병을 모집할 것을 모의하고 각 지역으로 통문을 돌렸다. 8월 초 황해도 각 지의 일본군 주둔현황에 맞추어 군사조직을 구성하고, 작전도 짰다. 이때 왕세자 광해군이 이정암을 초토사로 삼는다는 전갈이 왔다. 8월 중순에는 각지의 의병을 이끌 의병관을 지정하였고 군량 등 군비수집에도 힘썼다.
그리고 각 지의 의병들이 소규모 접전에서 거둔 승전보를 장계로 갖추어 올리는 등 의병 활동을 장려하였다. 이렇게 황해도 지역에서 의병 체제를 갖춘 후 8월 22일 연안성에 입성했다. 이정암이 의병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여럿 있었다. 그중에 아들이 왜군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며느리와 손자는 피살되었다. 또 일본군의 회유책으로 인해 백성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왔다.
8월 24일 성을 순시하면서 보니 10가구에 7~8가구는 성으로 돌아와서 의지할 곳을 찾고 있었다. 이에 의병을 모으는 한편 군량을 모으게 했다. 27일 아직 채 방어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연안으로 몰려왔다. 28일이 되자 일본군 4천여기가 와서 연안성 밖에 진을 치고 종일 조총을 쐈다. 이때 일본군이 이정암에게 사신을 보내 작은 성으로 대군을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정암은 사신에게 “너희는 병사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라는 글을 써 보냈다. 적병 하나가 말에 올라타고 성 쪽으로 엉덩이를 까고 볼기짝을 두드리며 도발을 했는데, 활을 꺼내고 발사해서 화살이 적병의 엉덩이에 명중해 말에서 떨어지니, 폭소가 터졌고, 이날 오후엔 왜군의 장수 같은 자가 백마를 타고 성 주위에 접근하자 수문장 장응기가 활을 쏘아 적장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재빨리 성문을 열고 나가 적장의 목을 베어와 의병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날 밤, 왜군이 사다리차를 타고 접근해 성 안에 불화살로 공격해 화재가 났으나, 때마침 역풍이 불어 바람이 바뀌어 화재는 진압되고, 오히려 불이 왜군 진영에 번져 왜군이 당황했다. 29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어오려 했으나 이정암의 의병이 불화살을 쏘며 저항해서 막아냈다. 9월 1일 왜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직접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다. 의병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집어던지며 왜군에 저항했으나, 수가 열세였던 조선 의병과 백성들은 수세에 몰렸다.
왜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정암은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올라앉고 아들 이준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지르라. 왜군의 손에 모욕을 당하느니 여기서 불에 타 죽겠다." 군사들은 이를 보고 더 힘을 내어 전투에 임했다. 9월 2일 일본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전투가 끝난 후 이정암은 아주 간략한 장계를 올렸다. “적이 28일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이 장계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집필자 이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