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김진섭 백웅열 이성우 허정구 허헌구
1. 답사내역
도봉산역에 도착하여 1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서 연결 통로를 걷는데
웅열 헌구가 기다리고 있다 동두천행 승강장으로 가자 했더니 추운데 시간되면 가자 한다.
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한 날씨라 그러자 하고 기다리는데 정구 전화다.
승강장에 와 있는데 어디 있냐고 하여 우리도 승강장 위로 올라가 정구와 합류한다.
한참을 기다린 후 10시 15분 쯤 소요산행 전철에 오르고 평일인데도 승객이 많다.
덕계역을 지날때 쯤 진섭이 통화 하였는데 같은 차 두 번째 칸에 타고 있다고 한다.
잠시 후 덕정역에서 모두 만나 역 앞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한다.
2008년 11월에 왔을 때 78번버스를 탓는데 노선도에서 확인하였더니 변함 없다.
잠시 후 버스에 오르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단지를 돌아 송우리를 향하여 달린다.
한 참을 달린 후 우리들은 회암사입구 박물관 앞 정류장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걷기 시작한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7년만에 찾아가는 회암사지 주변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짓고 있던 박물관 2012년 10월 개관되어 어린이 체험학습 안내 현수막이 걸렸고 전나무 숲길은
가로 정비로 하늘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말끔히 정리되어 전나무 듬성듬성 보인다.
오대산 월정사입구 전나무 숲길 처럼 되려면 여러 십수년은 걸려야 될듯 싶어 보인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회암사지 사이는 농경지 또는 버려진 땅이였던 것같은데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또한 수년은 흘러야 인공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공원으로 답사객들의 쉼터가 될 것 같다.
이 길을 나옹 무학 태조 여러 선인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걸었을까 다시 찾는 내 발길 감동이 벅차오른다.
부지런히 걸어 양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 들렀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어 해설을 들을 수 없어 아쉬웠다.
우리는 전망대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계단식으로 잘 정비된 드넓은 폐사지 참으로 감동 그 자체다.
만 여평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왕즉불이라는 왕실의 불교개념과 어울리는 배치에 또 한번 놀란다.
궁궐 배치와 유사한 점이 우리들의 흥미와 궁금증 더해준다.^^
이 참에 회암사란 절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간략하게 소개 하고자 한다.
회암사(檜巖寺)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1174년(고려 명종4년)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 갔다는 기록이 있고 1313년(충선왕 5년)에 태고(太古) 보우(普遇)가 회암사에서 출가 하였다고 하며
1344년(충혜왕 복위 5년)에 나옹이 회암사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회암사는 늦어도 12세기 무렵에는 창건되어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사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에 지공이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창건되어 중창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372년(공민왕 21) 나옹이 공민왕의 명으로 회암사에 와서 지공의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1374년(공민왕 23년)부터
2년 동안 266칸의 대규모 중흥 불사를 일으켜 1376년(우왕 2년) 나옹의 제자 각전이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색(1328~1396)의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에 회암사는 승려 삼천여명이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4.55m)의 불상 7구와 10척(3.03m)의 관음상이 봉안되었으며 건물들은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 제일로 중국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라고 기록 되어 있어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하였는지 가늠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왕실의 원찰이였으며 태조는 1393년 무학대사(1327~1405)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많은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곱번이나 회암사에 다녀 갔다고 하며 왕위에 물러 나서도 계를 받고 수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405년 무학이 입적하자 그의 탑비를 세웠고 그 이 후에도 효령대군(1396~1486) 정희왕후(1418~1483)
문정왕후(1501~1565)를 비롯한 많은 왕실의 인물들이 후원하였는데 김수온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1472년세조비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명종 때 수렴청정을 하였던 문정왕후가
보우(普雨)(1509~1565)를 통해서 불교 중흥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웅장한 규모와 위세를 자랑하던 회암사는 문정왕후 사후 허응당 보우가 제주도로 귀양가
제주목사 변협에게 참살당하였으며 명종실록(1566)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 라는 기록이나
선조실록(1595)에 회암사 옛터에 불 탄 종이 있다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유생들의 방화로 없어 진 것으로 보인다.
동양 최대의 고려 조선의 불교의 총 본산 양주 회암사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손으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진섭이 여기 일렬로 늘어 서라며 폐사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준다.
아직까지 누구의 부도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아름다운 부도 한기가 오랜 세월 외롭게 지키고 서 있다.
우리는 현재의 회암사와 지공 나옹 무학 삼화상의 부도를 만나기 위해 한갓진 산 길을 오른다.
잠시 후 회암사에 도착하고 우측 능선에 자리 한 삼화상 중 하단의 무학대사의 승탑 앞에 서서 요모조모 살핀다.
왕릉 처럼 조성 되어 있어 태조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승탑 주위에 난간석을 둘렀고 그 앞에 혼유석 같은 석상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있다.
무학대사 부도와 그 앞에 있는 사각 석등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면 1821년 경기 광주 사람 이응준이 조대제란 술사의 꾐에 빠져 부도를 허물고
부친의 묘소를 쓰고난 후 발각되어 나라에서 1828년 부도를 다시 세우고
다례를 올리기 위하여 영성전을 지었는데 이 것이 지금의 회암사의 모체가 되었다고 한다.
지공 나옹선사의 부도 및 부도비를 돌아보고 나옹선사의 부도 앞에서 진섭이 직접 내려 지고온 커피와
정구가 지고온 귤 그리고 웅열이 내어 주는 과자 등 간식으로 추위도 덜고 허기진 배도 달래며 잠시 휴식취한다.
건너편 언덕에 있는 비록 복제품이지만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썼다고 하는
선각왕사(나옹스님시호)비를 돌아보며 우리 문화재의 수난사를 생각하며 더이상의 수난을 겪지 않기를 바래본다.
원래의 비석은 1997년 한 성묘객의 실수로 보호각이 불타며 산산조각이 나 이젠 진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대에는 예서를 별로 쓰지 않았던 모양으로 남아 있는 유물이 별로 없어 광개토왕비문 선각왕사비 정도이다.
내려 오는 길에 조사당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 보니 지공 나옹 무학 함허 진영 그대로인 것 같다.
왔던 길 돌아 나오며 다시 한번 회암사지를 돌아보며 새로 조성된 공원을 가로질러 회암사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주 전시실은 2층에 있고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 기와 잡상 자기 파편들 불화 몇점 등등 잘 정돈 되어 있다.
유물들로 볼 때 최 고급에 속하는 물건들 임을 느낄 수 있고 왕실 사찰이었음을 알아 볼 수 있는 품격을 느끼겠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잘 만들어 놓은 영상실의 작동이 부실한 점 옥에 티라고 하겠다.
박물관 안내 데스크에서 맛집을 알아보고 우린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한정식 집으로 들어간다.
취의 한 종류로 고려 엉겅퀴라고도 하는 곤드래 밥에 탁배기 반주하여 배불리 먹었다.
송우리에서 오는 78번 버스에 오르고 잠시 후 덕정역에서 전철로 도봉산역에서 헤어져
웅열이와 나는 7호선 5호선 8호선 갈아 타며 강동구청역에서 헤어졌다.
친구들이 있어 친구들과 함께 유쾌 상쾌 통쾌 웃음 가득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다.
글 작성 중 한 번 날려 먹고 강릉 갔다 오느라 후기 늦어졌읍니다.
그러다 보니 기억도 희미하여 글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어렵게 쓰다 보니 문맥도 어색하네요.^^ㅎㅎ
친구들 잘 들어갔겠지?
다음에 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낄낄대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