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구간 : ‘진짜’ 항해를 경험한 날
Ieshima 家島 -> Takamatsu 高松 (41.2nm , 2011.10.6 약 10시간 항해)
최근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일상생활 중에 창의성이 가장 높아지는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걷거나, 운전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수영을 할 때라고 한다.
어떤 문제에 골몰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
약간의 주의력이 동반되어 있는 반자동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을 할 때,
우리의 의식에서 심상을 통한 상상력이 극대화 된다는 이론이다.
김정운, [노는 만큼 성공한다] 중에서
우리가 오로지(!) 의지했던 전자해도 시스템.
소축척이긴 하지만 종이해도를 준비해 놓고 있어 일말의 백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스템이 망가졌다면 아마 항해는 지연되거나(야간 항해는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항해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생활태도(가치관? 라이프스타일?)를 방어하기 위해 ‘논다는 것’에 대한
책들을 집중적으로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20대와 30대를 보내면서 슬슬
‘이루어 놓은 것’의 미미함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31세에 겨우 무과에 급제한 충무공
이순신에 기대어 ‘대기만성’의 신화를 꿈꾸며, 또 37세에 18살의 어린 아내를 맞이했던 아리스토
텔레스를 빗대어 아직 늦지 않았음을 강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40대에는 누구를 끌고 와야
할까 고민스럽긴 하지만, ‘불혹’의 나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해 자기방어의 기제를
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0여 년 전,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할 때, 매일 저녁 캠핑장에서 그날의 유일한 ‘밥’을 위해 거대한
양(1인분 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의 쌀을 씻으며 그 짧은 시간 백과사전 몇 페이지 분량
의 온갖 생각이 솟아져 나와 스스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때로는 정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쌀씻기에만 몰입하기도 하고) 당시는 잘 몰랐는데 바로 그 쌀을 씻던 순간이 “약간의 주의력이
동반되어 있는 반자동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을 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요즈음, 내게 그와 비슷한 순간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으니 바로, ‘항해’의 순간이다.
‘진짜’ 항해란 무엇일까?
크로스홀드로 달리기 위해 웨더헬름과 리헬름 사이를 오가며 러더의 미묘한 감각과 뱃머리의
미세한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일까?
정확한 택킹/자이빙 포인트를 찾기 위해 바람, 파도, 주변의 위험물을 판단하는 순간일까?
(나는 주로 크루의 역할이니, 스키퍼의 호된 질책을 받으며 열나게 윈치 핸들을 돌리는 순간??)
아니면, 앞으로 가야 할 항로의 위험물, 수심, 조류 등을 연구하며 항해계획을 세우는
순간일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항해의 순간은, 약간 멍한 상태 (같은 자세를 유지한 체 콕핏에 하도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저린 건지 발가락이 저린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에서 가끔 배 앞쪽의
장애물이 없나 확인하고 나침반(혹은 전자차트에서)으로 현재의 코스를 점검하고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세일을 조금 풀어주거나 땡겨주고 엔진소리의 변화가 없는지 잠시 귀를 기울여
보는, “약간의 주의력이 동반되어 있는 반자동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을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전자해도와 GPS, 오토파이럿의 결합으로 현대의 요트 항해는 어느 때 보다 이런 순간을
우리들에게 많이 제공하게 되었고, 때때로 지루함과 따분함 그리고 엄청난 졸음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수 없이 긴 창의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도 있고 지루함에
온몸이 비비 꼬이는 (다시는 요트를 타지 않으리…!)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걱정이 많고 뒤끝이 긴 편이라 언제나 온갖 잡생각으로 뇌를 가득 채워
좀처럼 창의성이 발현될 기회를 주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문득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의 순간처럼 머릿속이 깔끔해 지는(살짝 비워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럴 때면 3일만에
다녀온 화장실 변기 속의 무엇이 시원하게 쑥 내려가는 것처럼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가슴을
통해 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른 아침의 Ieshima 항.
먼동이 터오는 바다로 향하는 기분이 상쾌했다. 웬지 부지런한 바른생활 사람이 된 듯한
뿌듯함도 느껴지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한량 컴플렉스'일까 ^^)
하늘도 바다도 아주 파~랗다. 어제의 비로 공기가 맑에 씻겨나간 것 같다. 시정이 족히 20마일
은 되는 듯. 멀리 관광지로 유명한 Shodoshima 小豆島 가 보인다. 이번 항해는 딜리버리의
성격이 강해 들르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꼭 들러보고 싶다.
Shodoshima 小豆島 를 오른쪽으로 끼고 한참을 돌아야 했다. 먹거리가 유명한 섬이라고 한다.
어느 작은 섬의 이름없는 포구. 일본내해 항해가 편안하게 느껴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작은 포구들도 거의 모두 완벽한 방파제 시설로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나라이기 때문에 SOC에 막대한 투자를 할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해양중심적인 사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난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부러운 모습이다.
삐쭉 솟아오른 Takamatsu 高松의 랜드마크 빌딩이 좀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시내의 풍경이
상당히 깔끔하고 댄디(?)해서 기억에 남는 항구도시다. 高松城은 공사중..
Takamatsu 시립마리나. 물위에 배가 거의 없어 처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 딩기를 위한
마리나가 아닌가 해서... 전자해도에도 수심이 그리 깊지 않은 곳으로 표시되어 있어 조심조심
배를 몰아 들어가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공간부족?) 거의 모든 요트를 육상에 올려놓고 그때그때 크레인으로 내려서
바다로 나가는 시스템이다.
Ube 宇部에서도 같은 방식의 마리나를 보았다. 일본에 이런 스타일의 마리나가 많은 것 같다.
폰툰시설을 만드는 것 보다 싸고 깔끔한 방식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에 2,400엔(36,000원)이라고 해서 냉큼 계류줄을 풀었다. 배를 댈만한 다른곳이 없냐고
물었더니 딱 잘라서 '모른다'고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지만 평소 친절하기 그지없는
모습과 다른 냉정한 일본인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 것 같다.
이번 구간의 check-point는 없다.
제1 구간과 같은 급류가 흐르는 해협도 없고, 항로 중간의 좁고 복잡한 수로도 없다. 그저
전자해도에 표시해 놓은 계획항로를 따라 오토파일럿의 +/- 단추를 가끔식 눌러주면 될 뿐이다.
‘진짜’ 항해를 마음껏 경험할 수 있는 구간이었던 것이다.
아침 6시 15분 Ieshima 家島 를 출발했다.
기압 995 밀리바, 기온 20도의 온화한 느낌, 시정 20마일 이상의 아주 맑은 날씨. 서풍이 적당히
불고 파도는 0.5미터 정도. 한마디로 Good Day다.
8시경 바람 방향이 드디어 맞아(우리는 기본적으로 서쪽으로 항해해야 했다) 세일을 올렸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 어제의 3단 축범 상태를 유지했다. 구간 중간에 위치한 Shodoshima
小豆島 근처에서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계획한 코스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 시간과 거리의
손해를 보았지만 대체로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갔다.
16시 15분 경 이번 구간의 목적지인 Takamatsu 高松 에 도착했다. 기압 998 밀리바, 기온 25도…
행운을 사리분별이라고 우쭐거리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 같은 항해만 이어진다면 딜리버리로
밥벌어 먹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바로 옆 Takamatsu 어항에 들어가 무작정 배를 묶었다. 이른 아침 시장에 어선들이 고기를
내리는 작업장이라 계류는 안된다고 사투리가 심한, 부산에 와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알아
듣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신나게 이야기 해 주었던, 친절한 어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어항
가장 깊숙한 곳, 폐어선을 모아 놓는 빈 장소를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오늘의 Home sweet home. 폐어선 옆 명당자리. 항구마다 이런 자리는 의례 있기 마련이란
생각을 하니 낯선 항구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잔잔한 Takamatsu 어항의 풍경.
첫댓글 윤석태 선장님..
뭐 하세요???
빨리읽어보시고 답글 달으세요..
시월의 마지막날..
편하신 밤 되십시요
윤선장님만 아직 Ieshima에 계신듯 합니다. ㅋㅋ
우리 책한권 냅시다. 글은 엄성용이 쓰고, 출판사 섭외는 박주용이 하고 인세는 윤석태가
챙기고...
음... 10권 정도는 팔리겠네요. 마리아/미리내 식구들이 모두 사 준다면요 ㅋㅋ
윤선장님 과분한 칭찬이시구요, 그냥 지루하지 않게 읽으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가 인세받으면 절반은 끄루져요트혐회에
내겠음...
협회에 절반 주신다는것 좋은 의견 입니다.
저두 5월달에 Takamatsu 요트 계류장에 들린적있는데 하루하고 2~3시간정도 초과한것때문에 이틀 계류 요금을 낸적이 있습니다. 유통성 없는 동네더군요... 항해기 잘 읽고 갑니다.
다음에는 Takamatsu 어항으로 들어가세요.. 폐선 옆자리가 넉넉하고 조용합니다. ^^ 아, 그리고 김호성님 올리신 글도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 어머.. 폐어선 자리에 손님을 안내하다니... " 생각 들었습니다. 실례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좋게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
폐어선 자리면 어떻고 근사한 마리나면 어떻습니까! 안전한 자리를 안내해 준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에 일본을 여행하며, 일본사람들의 친절과 깔끔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