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혜가를 만나 말했다. “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니 문자를 세우지 않느리라” 달마대사의 이 말은 선종의 종지가 되었다. 견성성불로 마음을 밝혀 부처가 되고 일체 중생이 삼계(三界)의 생사대몽(生死大夢)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선원을 탄생시켰고 그곳에는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말했듯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종풍이 살아 숨쉰다.
김천 직지사(直指寺)는 선종의 종지를 아예 이름에 새긴 유일한 가람이다.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황악산 기슭에 자리한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이 창건하고 선덕여왕 14년(645) 자광 율사가 중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도 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했으니 직지사가 신라불교의 서막을 연 셈이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 탄 뒤 대대적인 중수를 거듭했지만 쇠락해가는 나라와 함께 직지사도 옛 영화를 되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격(寺格)이 기울어갈 뿐 견성성불하겠다는 납자들의 의지는 날이 갈수록 더 불타올랐다. ‘직지’라는 사명(寺名)에 걸맞는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사진설명: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종지를 사명(寺名)으로 삼은 직지사는 천불선원을 통해 선맥을 이어가고 있다. 1910년대부터 당대의 뛰어난 고승이 한번씩 다녀간 유서 깊은 이 곳 천불선원의 산철 방선시간 선방내부 모습이 그 역사와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지난 10월27일 단풍에 물든 직지사는 고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내 곳곳에 심어놓은 나무들과 이리저리 난 물길은 어느 공원에 들어선 듯 아름다운 정취를 연출했다. 세조에게 진상했다는 감나무에는 감이 풍성하게 열렸고 까치 한 마리가 그 많은 감을 독차지 하고 앉았다.
도피안교를 건너면 선원이다. 온통 나무에 둘러싸여 큰방인 극락전 지붕만이 살짝 보이고 그 뒤로 황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극락전과 요사채인 서상당(西上堂), 향경다실(香經茶室) 등으로 이루어진 천불선원 영역은 황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와 숲으로 둘러싸여 직지사 속의 직지사를 나타낸다. 도피안교를 지나 안양루 계단을 올라서자 눈앞에 안양이 펼쳐진다. 먼지가 일지 않도록 잔디를 입힌 마당은 선원 수좌들을 대하는 사중 스님들의 정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부처님의 성도를 지켜본 보리수가 우뚝하게 섰고 대중방 뒤편에는 올 겨울을 날 장작이 가득하다.
동곡학조 스님 등 조선시대에도 명성
1910년 ‘直指人心 見性成佛’ 종풍 부흥
1971년 건립한 극락전은 1999년 봄 참선 납자들이 수선할 수 있도록 개수하여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선원에는 산철 4명의 스님이 자유정진중이다. 조금 전까지 결가부좌한 듯 온기가 그대로 남은 좌복 위로 가사를 걸친 횃대가 장엄하게 걸려있다.
<사진설명: 직지사를 세운 고승들의 부도>
직지사는 사명이 말하듯 선찰의 맥을 면면히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도 조정에서 ‘고선총대가람’이란 첩문(帖文)을 내려 비호, 많은 선지식인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법계정심스님은 이곳 황악산에 몸을 숨겨 끊어질 듯 하던 법맥을 이었고, 세조대에 동곡학조스님은 직지사에서 선지를 폈다.
직지사가 선찰로 본격적인 이름을 떨친 것은 1913년 봄이다. 그해 당대의 뛰어난 선승 제산스님이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왔다. 스님은 17년 동안(1929년까지) 천불선원 조실로 머물면서 선원을 부흥시켜 선본 총찰로서 잃었던 옛 영화를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보다 몇 해 전인 1910년 ‘직지사염불회’를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바꾸고 5~6명의 납자가 결제에 들면서 직지사 선원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산스님의 뒤를 이어 퇴운, 탄응 같은 훌륭한 선사가 나오면서 천불선원은 조선 팔도에 명성을 떨쳤다. 1915년에는 경봉스님이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직지사로 왔다. 당시 천불선원에는 만봉, 남전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경봉스님은 남전스님 밑에서 참선 수행했다.
1918년 또 한명의 대선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좌는 선방 납자들과 화두를 들다가 상기병을 얻어 목에서 피가 나고 나중에는 핏기마저 없을 정도로 정진을 감행, 초견성(初見性)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분이 바로 전강(田岡)스님이다. 이 해에는 30여명의 납자가 제산스님 밑에서 정진했는데 ‘자비보살’로 불리는 전 종정 고암스님도 함께 했다. 1924년 4월 하안거부터 1926년 하안거까지 직지사에서 열린 3년 결사 때는 동산스님이 참여하여 용맹정진 했다.
제산스님과 손상좌 녹원스님 도량 정비
미래의 ‘佛果’ 발원하며 ‘천불전’ 중창
고암스님도 1924~1925년에 천불선원에서 정진했다. 1926년에는 비구니 성문스님이 서전에서 선방을 열었다고 한다. 1935년에는 금오스님이 직지사 조실로 주석하여 남자들을 제접했다.
1940~1950년대까지 납자들의 수행 정진이 끊이지 않았던 천불선원은 온돌 과열로 화재를 입어 전소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폐원되기에 이르렀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종지를 천년 넘게 이어오던 직지사는 화재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퇴락의 위기에 처했지만 이번에도 다시 일어섰다. 그 중심에는 제산스님의 손상좌로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조계종단의 기틀을 세운 녹원스님이 있었다. 1958년 2월 직지사 주지를 맡은 녹원스님은 반세기를 내다본 대대적인 중창불사에 착수했다. 첫 불사가 천불선원 중건이었다. 사찰에는 수선(修禪)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던 녹원스님은 불사에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온돌 과열로 대선실이 전소되고 그리하여 산새들은 아침저녁으로 빈터를 바라보며 울고 수선자들은 봄가을에 구름을 바라보며 탄식하는데 생각건대 선실 없는 선찰이 어디 있을 것이며 복전(福田)을 갈지 않고 무슨 불과(佛果)를 얻을 것인가”
스님의 정성과 원력에 의해 1971년 명월료 뒤편에 천불선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고암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영수스님 등 8~9명의 납자가 수선했으며 1981년에는 관응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0여 명이 정진하다가 중단했다. 그러다 1999년 여름 안거 때 현재의 자리에 선원을 다시 개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00년 후를 내다보고 건립한 천불선원은 비구계를 수지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관응스님 열반 후 아직 조실스님을 모시지 않고 있다. 선원장도 공석이며 현재는 입승 스님의 지도아래 공부한다.
큰방을 등지고 안양루 밑을 지나는데 수좌스님들이 한 명 두 명 모습을 보였다. 황악산이 어느새 성큼 가까이 와 있었다.
ㆍ천불선원 일으킨 제산스님
제산정원(1862~1930)스님은 경남 합천 가야면에서 출생했다. 1873년 14세 때 해인사에서 우신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은 경허스님이 해인사 퇴설선원 조실로 있을 당시 원주 소임을 보면서 참선 정진 했다. 이후 퇴설선원 조실로서 납자들을 제접했다.
41세때 황악산 직지사行
山門출입 끊고 후학제접
제산스님은 소년시절에는 탁주를 좋아하여 ‘탁백이’ 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파격적인 납승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는 보살행으로 수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중년에 이르러 스님은 모범적인 수좌가 되었다.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계행도 철저했다.
해인사 시절 경허스님은 “자네는 어디 가든지 50~60명의 수좌는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했다. 스님은 1913년 봄, 41세 때 대중들을 이끌고 황악산 직지사로 향했다. 스님은 직지사 벽안당에 앉아 평생을 정좌불와했다. 동구 밖 출입도 끊고 천불선원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하며 수행에 매진했다. 그리하여 제산스님은 수행제일로 존경 받았다.
1930년 8월24일 세수 69세, 법랍 56년으로 입적했다. 입적에 들기 전 누가 물었다. “생이란 무엇입니까?” “본래 불생(不生)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바람이 고동치고 불이 바다 밑을 태우니 천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일평생을 선사로 지낸 탄응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관응스님과 녹원스님이 탄응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니 두 스님은 제산스님의 손자가 된다.
[불교신문] 직지사=박부영 기자
첫댓글 관세음 보살_()_
나무 관세음보살 ....... ()()()
관세음보살 _()_
관세음보살_()_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