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응 스님의 선가귀감
19. ‘간화선자’의 ‘일상 점검’
4은·4대·8풍을 날마다 점검하라
4은, 부모·임금·스승·시주 은혜
지·수·화·풍 4대 청정유지 노력
좋고 좋지않은 경계인 8풍 단속
각자의 생각 살펴 자만 없애야
22장은 “‘참선자’는 ‘4은(恩)’이 깊고 깊은 것을 아는가? ‘4대(지‧수‧화‧풍)’로 된 청정하지 못한 육신이 생각마다 쇠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불조’를 친견했는가? ‘위없는 법’을 듣고 ‘매우 귀한 마음’을 내었는가? ‘선원’을 떠나지 않고 ‘규칙’을 지켰는가? 친한 사람하고만 지내지 않는가? 시비하고 부채질하기를 간절하게 꺼리는가? ‘화두’가 하루 종일 분명해서 혼미하지 않는가? 사람과 말할 때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는가? 자기를 돌이켜 볼 때에 ‘불조’와 대적할 수 있는가? ‘금생’에 마침내 부처님 ‘법맥’을 이을 수 있는가? 편안히 일어나고 앉을 때 ‘지옥’의 고통을 돌이켜 생각하는가? 이 ‘과보’의 몸으로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겠는가? ‘8풍’에서 마음이 동하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인’이 날마다 점검하는 ‘도리’다. 옛 사람이, ‘이 몸으로 지금 살아있을 때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는가?’하시다”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태고(太古普愚, 1301~1382)의 ‘어록’에서 “천만번 간절하게 ‘어떤 것이 진면목인가?’, 조주 ‘무’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화두’에서 ‘무명’은 끊어진다”고 한 것이다.
해석하시길 “‘4은’은 ‘부모‧임금‧스승‧시주’의 은혜다. ‘4대’의 청정하지 않은 몸이란 아버지의 정기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니 ‘수대’의 습기다. 정기는 뼈가 되고 피는 피부가 되니 ‘지대’의 견고함이다. 정기와 피는 하나의 ‘정신’으로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으니 ‘화대’의 따뜻함이다. 콧구멍이 먼저 만들어져 숨이 들고 나가는 통로가 되니 ‘풍대’의 움직임이다. ‘아난’이 말하기를 ‘욕정의 탁한 비린내가 교류해서 만난다’하니 추한 몸이다. ‘생각마다 쇠한다는 것’은 머리 위의 시간이 ‘찰나’도 머물지 않고 저절로 얼굴은 주름지고 머리는 백발이 된다.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고, 미래도 지금과 같지 않은 것이 ‘무상’의 실체다. 그러나 ‘무상’의 귀신은 죽음으로 희롱하니, 진실로 생각마다 두렵다. ‘부는 것’은 숨의 ‘불’을 내는 것이고 ‘흡입하는 것’은 숨의 ‘바람’이 들어가는 것이다. ‘목숨’은 단지 ‘날숨’과 ‘들숨’에 있다. ‘8풍(風)’이란 좋고 좋지 않은 경계다. ‘지옥 고’는 인간 60겁(kalpa, 2592억년)이 지옥의 하루 낮밤이다. 뜨거운 가마솥과 화롯불, 칼산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다. 사람 몸 얻기 어려움이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연민해서 경계한다”고 하였다.
‘정자통’에서 장자열(1597∼1673)이 ‘사람은 코가 먼저 형성된다’고 한다. ‘능엄경’에서 아난(석존 10대제자 중 다문제일)이 출가하면서 ‘애욕을 떠나신 부처님’을 찬탄한 내용을 인용했다.
‘8풍(八風)’은 ‘아함경’에서, 이익·손실·칭찬·비방·칭송·비난·즐거움·고통 등 마음의 경계를 말한다. ‘본생심지관주’에서 “8풍은 세간의 애증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채질하니 바람이라고 한다. 잠시라도 ‘마음’의 주인이 되어 ‘정법’에 안주해서 ‘애증’과 ‘미혹’으로 혼란하지 않으면 ‘8풍’에 동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지옥’을 ‘초기경전’은 ‘8한·열 지옥’으로, 중국의 ‘지장신앙’에서는 ‘10지옥’으로 설한다. 모두 셀 수 없는 시간 속에 인간이 겪는 ‘인과응보’의 고통이다.
평하기를 “위에 말한 법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야 차고 따뜻한 것을 스스로 아는 것’처럼 총명해도 ‘업’을 막을 수 없다. ‘건혜’는 고통의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각자 생각을 살펴서 ‘자만’하지 말라”고 했다. 달마의 ‘혈맥론’에서 “‘깨달음(道)’은 본래 원만하게 성립된 것이다. 닦고 증득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소리와 물질이 아니다. 미묘해서 보기 어렵다”고 한 내용이다. 여기서 ‘건혜(乾慧)’는 ‘분별지혜’다. ‘경덕전등록’의 대달선사(大達無業, 761∼822)가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자만’이 없다. 마치 살얼음을 밟는 것 같고, 칼날 위를 딛는 것같이 한다”고 한 것이다.
[1537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