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종’이란 말은 사람이 사라져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사용한다. 행방불명은 실종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실종과 관련해서 가장 답답한 일은 왜 사라진 것인지 그리고 어디로 간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을 수도 있고, 살해당했을 수도 있고, 생존해 어딘 가에서 살아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죽어 어딘가에 암매장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스스로 가출한 후에 연락을 끊고 지낼 수도 있다. 생사를 알지 못하니 사망신고도 못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답답한 상태가 실종상태가 아닐지 싶다. 특히 전쟁에서 혹은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혹은 사고에서 실종은 종종 일어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그렇다.
‘실종’이라는 말에는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 것을 찾는 행위가 전제되어 있다. 찾지 않으면 실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찾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찾지 못했을 때 비로소 실종임을 알게 된다. 실종 상태가 오래 되어 더는 찾지 않는 일도 있지만, 실종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이미 어느 정도는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실종신고는 공공 기관이 공권력을 동원해서 찾아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이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실종자에 대한 각종 행정 처리(세금, 보험 등)와 관련해서 고려해 줄 것을 부탁하는 일이기도 하다.
2.
그런데 실종자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나를 잃어버린다면? 내가 나를 찾지만 더는 찾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꿈에서나 가능할 일일 뿐 이런 일은 사실 가능하지 않다. 강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잠시 정신을 잃을 수 있고, 때로는 내가 평소의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실종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느낌을 유발할까?
그런데 만일 실제로 내가 나를 실종한다 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사실 치매 상태나 정신 분열증 환자가 아닌 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실종은 정체성 상실이며,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행한 것은 분명해도 그것을 행한 나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또한 나를 실종했다 함은 나의 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진실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다를 때,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각인된 나를 통해 진정한 나를 보고자 하지만 볼 수 없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실종 상태를 경험한다. 내가 아닌 나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실종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특징은 아닐지 싶다. 그만큼 현대인은 과중한 스트레스에 눌려 자아 실종의 상태로 살아가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일의 성과에 매여서나 관계에 종속되어서나 혹은 다양한 필요에 의해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살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영화 <실종>은 자아 실종이 유발하는 끔찍하고 가공할 만한 느낌을 잘 표현한 영화이다.
3.
백색 도화지에 얼룩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처럼, 영화 <실종>은 노르웨이의 설경을 배경으로 바로 이런 끔찍하고 가공할 만한 정서를 영화로 표현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상황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놀라움의 느낌을 관객이 실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스릴러/공포에 담아 넣었다.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상실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아보지만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하나 둘씩 들어 알게 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모의 모습일 뿐이다. 대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간 걸까?
아버지 사망 후 유물로 남겨진 집을 처분하기 위해 고향으로 갔던 그녀는 집 주변에서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한편으로는 음산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맑은 모습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은 듯한 흔적도 있다. 그녀는 집이 팔릴 동안 며칠간 머물면서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을 겪는다. 그러나 그녀는 속히 아버지 집을 처분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만 집중하고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다.
그러는 중에 의문의 소녀 아이가 실종된 이모의 어린 시절임을 깨닫고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마침내 소녀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고, 동시에 자신에게서 죽은 엄마의 모습을 본다. 그동안 깊이 숨겨져 있어 결코 그 흔적조차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직면하면서 그녀는 실종된 어린 시절의 자신을 힘겹게 찾아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정신분열증을 이겨낸 것이다. 이전에는 임신한 아이를 낙태하려고 했으나, 그 일이 있은 후, 곧 실종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찾은 후, 그녀는 두 아이를 갖는다. 물론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딸과 관련해서 섬뜩하게 마무리 되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한다.
4.
감독은 영화의 이야기와 메시지가 장르와 잘 어울리도록 연출하였다. 반전은 매우 설득력 있으며,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화면상의 진실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연출력에서 매우 돋보인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었던 노르웨이의 설경을 영화 속에 담은 것은 영화의 백미중 하나라 말할 수 있겠다.
5.
끝으로 기독교인의 자아실종에 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영화 <실종>이 일반인의 자아 상실을 공포 분위기로 표현하였다면, 기독교인의 자아 실종은 ‘종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공포는 지나가는 일이지만, 종말은 끝이다. 종말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인의 자아 실종보다 더욱 가공할 결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것을 믿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자아를 실종했다 함은 ‘하나님의 형상을 실종했다’ ‘예수를 실종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곧 하나님을 잃은 것이다. 기독교인은 많아도 정작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다. 하나님을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한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상태다.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면서 이런 일을 겪는다는 건, 가장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비판을 받는 시대에 자아 실종은 비난의 화살을 피해갈 수 있는 전략일 수 있지만,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