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를 뽑으러 가는데 순규언니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초록리본이 드리워진 여름 망모자를 들고 오면서 저에게 줄 선물이라고 합니다.
순규언니는 아침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 어제 밤늦도록 '이의동이야기' 다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나 감동 먹었어요.
그런 줄 몰랐네. 이따가 가서 상담 좀 하려구요."
수지에 살고 있는 순규언니는 우리집 텃밭의 야채 단골손님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버들치 고개 천년약수터 등산로 입구에서 야채를 팔으셨는데 야채손님들은 자연적으로
우리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현동에 살고 있는 가정요리사 정실언니, 그리고 부부손님들도 있습니다.
안사람이 파평윤씨인 서울 손님부부, 어머니의 손자뻘인 정승교 부부가 있습니다.
야채손님들은 자가용을 타고 상추와 쑥갓, 머위대, 질경이, 두릅, 미나리, 등 어머니가 장만하시는
장거리를 사러 옵니다. 처음엔 인사만 하고 지냈는데 조금씩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제 친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야채손님들이 오면 무조건 밥 부터 먹으라고 하십니다.
어려워서 거절하던 야채손님 중에서 순규언니와 정실언니는 한 번 식사를 하더니
김치와 나물들이 너무 맛있다며 이제는 스스럼없이 밥먹기를 즐겨합니다.
거실의 나무의자에 앉으며 순규언니는 저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줍니다.
이태리제 망 모자라고 합니다.
손거울을 가져와 들여다보니 두상이 큰 저는 모자가 많이 작은 느낌입니다.
저는 어정쩡하니 머리 위에 리본모자를 올려 놓은 모습으로 칡즙 봉지를 잘랐습니다.
순규언니는 작년 가을에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 어머니 이야기를 너무 잘 썼어요. 어쩜 고부간에 그렇게 사이가 좋은지 평소에도 느끼긴 하였지만요.
맞벌이 우리 며느리는 밥을 못해 먹어서 요즈음은 내가 죽을 쒀서 갖다 주는데 아침에 렌지에 데워 먹는다고 해요.
집에 와서도 며느리가 거들기는 하지만 내가 밥을 해 주어야 하니 아들보고 자주 오지 말라고 하는데 뭘.
우리세대는 벌써 공경 받기가 어려워졌다니까. 자기들끼리 잘 살기만 해도 효도로 생각해야지.
자기도 사위를 보았지만 사위는 옛날부터 백년손님이니 말할 것도 없고."
순규언니의 밤색원피스가 잘 어울려 보입니다.
" 아니 그리고 쥐가 어떻게 새끼들을 매달고 간다는 건지 옛날 이야기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 고추를 따다가 어미쥐를 보았어요. 털도 안난 새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던데요."
"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어쩜 그렇게도 잘 그렸는지, 용중님도 요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고. 글 속에 자기 마음이 다 녹아 있어요. 뭐든 아름답게 보이는 그 눈이 부럽네."
저는 멋쩍어져서 모자를 들었다가 다시 써 봅니다.
" 아~ 그렇지는 않은데요. 현실을 그대로 쓰려고 하였지만 글 속에서는 미화되는 부분이 많이 있어요.
저 심술도 대단하답니다. 용중님에게 심술 부리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썼어요.
글 그대로 믿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