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안녕하셨죠? 벌써 서평도 한 번만 더 쓰면 쌍8번, 그러니까 88회가 되겠네요.
물론 지금은 87번째지만요.
한동안 서평 써서 이제 잠수 탈까 했었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그게요, 최근에 제법 재미난 책을 읽었거든요.
네, 맞아요. 그래서 냉큼 추천하려고 왔죠.
이번 도서는 역사추리물.
자, 이만 사설은 접고, 도서 서평 시작할게요.
도서명: 한복 입은 남자
지은이: 이상훈
* 이 책은 넓은마을 도서관 1번 소설에 4번 추리 코너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우연히 추리소설 코너를 둘러보다 ‘한복 입은 남자’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다. 사실 하마터면 무심코 그냥 지나칠 뻔했다. ‘한복 입은 남자’라는 제목이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도서를 다운받았다. 어쩌다가 보게 된 소개글의 공로가 100%였다. 조선시대의 과학자 장영실과 중세 서양의 과학자 다빈치와의 만남이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간단 말인가. 이제 와서 든 생각인데, 참 소개글도 예술적으로 작성됐다 싶다. 좌우간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서양의 르네상스, 그 역사는 장영실로부터?
진석은 방송국 PD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맡고 있다. 그가 이번에 기획하는 건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의 얽힌 역사물이다. 이 그림은 화가 루벤스의 작품으로 임진웨란 때 이탈리아에 노예로 팔려간 소년 안토니오 꼬레아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복식의 특징 등에서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감춰진 부분 말이다. 진석은 그를 단초로 다큐에 쓸 자료를 조사한다. 그러다가 조선복식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어린이 과학관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전시된 비차 모형을 발견한다. 그건 요즘식으로 말하면 비행기다.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 무악산에서 실험한 비차 모형이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비차’가 낯이 익다. 그렇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비차 설계도를 빼다 박았다. 설마 표절일까? 그런 의혹이 드는 가운데, 운명처럼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나 꼬레아.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유학 온 학생이었다. 그녀가 알고자 하는 것과 그가 찾고자 하는 것. 운명의 계시인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원하는 진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엘레나는 자신이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손이라며 진석에게 대대로 전해내려 온 비망록을 몰래 맡긴다. 그 ‘비망록’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본격적인 급물살을 타게 된다. 옛날 한글과 한자, 이탈리아어, 이렇게 총 3개 국어로 적힌 비망록. 복잡한 스케치와 메모도 많다. 진석은 헌책방을 운영하는 친구 강배에게 비망록의 해석 및 번역을 부탁한다. 이 시점부터 이야기는 과거와 현실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진실. ‘비망록’의 임자가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라는 거였다. 더욱 놀라운 건 조선의 장영실이 다빈치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인데 ..... 과연 동양과 서양의 두 천재간의 접점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동서양, 세기의 두 천재가 만나다!
‘한복 입은 남자’는 한마디로 역사추리물이다. 동서양 머나먼 거리를 격해, 서로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비차. 그를 발단으로 새로운 가설이 제기된다. 조선의 천재 ‘장영실’과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두 천재간의 접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번갈아 오가며 진행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스토리 진행이 좀 번잡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설정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 것 같다.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와 동서양의 거리차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모양의 ‘비차’, 그 두 개의 퍼즐은 ‘비망록’이라는 연결고리로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이런 구성 때문인지 읽는 내내 퍼즐을 맞춰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5품 상의원 벼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천재적인 과학 기술을 가지고 여러 발명품을 만들었다. 자격루, 혼천의, 측우기, 신기전, 간의, 풍기대, 앙부일구, 관천대, 일성정시의, 위부인자 등 발명품은 무수히 많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셈이다. 금속활자부터 해시계, 천문기술, 신무기, 농업기구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발명품이 없을 정도다. 이것만 보고 있자면,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구나 싶다. 세종의 전격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의 천재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금보다 뒤떨어지는 시대일진데, 따로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기술적 소양을 가질 수 있었는지 볼수록 신기하다. 그러나 장영실은 세종 때 석연치 않은 가마사건 이후로 역사상에서 사라진다. 국사책에서 배울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넘겼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애초에 천재 발명가가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좀 많이 수상하다. 작가는 이를 단초로 ‘장영실과 다빈치와의 사제관계’라는 설득력 있는 픽션을 구상했다.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만남이라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탈리아까지 갈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명의 항해사 정화 대장이 등장하면서 가설은 현실이 되었다. 더불어 소설 속 픽션에 불과했던 게 점차 ‘혹시나?’ 내지는 ‘어쩌면?’ 하는 논픽션이 됐다. 그저 추리역사물의 소설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사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분제와 사대주의가 뿌리깊게 내려앉은 조선시대. 그 시기에 노비의 소생으로 태어난 천재 장영실. 그까짓 신분이 뭐라고 자꾸 딴지를 거는 양반들을 보자니, 정말 주먹이 울었다. 더불어 우리가 ‘우리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역시 서양사 중심의 역사가 더 익숙했다. 콜롬버스는 알아도 ‘정화 대장’ 같은 위인이 있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비행기로 하늘을 난 건 ‘라이트 형제’다. 그런데 그보다 오래 전에 한국의 장영실이 ‘비차’를 개발하고 실험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런 대목을 읽으며, 우리나라 옛 선조들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한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솟았다. 그런 한편으로는 어째 과거보다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은 현실에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건, 과거 선조님들 중에 누군가 개발했던 걸 약간 개량한 것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더 세련되어졌을 뿐이 아닐까. 무엇보다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얷이, 또 이름없이 잊혀지고 지워버린, 또 다른 걸출한 인물이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에는 ‘사대주의’였지만, 요즘은 ‘서양주의’나 ‘서구주의’가 아닐는지..... 한번씩은 되새겨 볼 일이다. 예술, 음악, 천문학, 수학 등 다양한 문화와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유럽의 르네상스. 조선의 르네상스는 정조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는 두 번이 아니었나 싶다. 세종 때가 1차, 정조 때가 2차. 세종 때 등장했던 장영실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 그들은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인쇄기술을 발명했고, 비차를 탄생시켰으며, 무엇보다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이런 뛰어난 선조를 가졌음에도 외국의 것들을 더 부러워한다. 다빈치가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쉬워한다. 이제 와서 새삼 돌이켜 보건대, 참으로 씁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간 장영실은 교왕청의 핍박을 받는다. ‘장영실 일행’이 주장한 ‘지동설’ 때문이다. 그 당시 천동설을 믿었던 교황파에게는 ‘그들’은 이단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현실에서도 장영실과 비망록에 얽힌 역사는 학계에서나 사회에서나 인정받지 못한다.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불운이 닥치고, 결정적 증거인 비망록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진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장영실’을 잊지 않기 위해,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또 다시 잊혀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현실적으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결말이 좀 아쉽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은 있다. 작품 말미에 나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진리는 처음에는 배척받고 무시당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변하는 건 아니다. 진리는 바뀌거나 퇴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장영실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잊혀지고 잊혀져가는 인물들의 제평가를 해봤으면 좋겠다. 더불어 동양사, 아니 우리나라 중심의 역사가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서평을 접는 지금, 장영실과 어린 다빈치의 첫 만남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만족감과 더불어 역사의 재인식을 이끌어냈던,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