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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本紀 第二
고구려본기 제이
大武神王. 閔中王. 慕本王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大武神王立或云大解, 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
대무신왕입혹운대해, 주류왕 휘무휼, 유리왕제삼자, 생이총혜, 장이웅걸, 유대략, 유리왕재
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宋氏, 多勿國王松讓女也.
위삼십삼년갑성, 입위태자, 시년십일세, 지시즉위, 모송씨, 다물국왕송양여야.
대무신왕⟨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무휼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씨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이년, 춘정월, 경도진, 대사, 백제민일천여호래투.
2년,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名駏䮫, 冬十月, 扶餘王帶素, 遣使
삼년, 춘삼월, 입동명왕묘, 추구월, 왕전골구천, 득신마명거루, 동십월, 부여왕대소, 견사
送赤烏, 一頭二身, 初扶餘人得此烏, 獻之王, 或曰, 鳥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
송적오, 일두이신, 초부여인득차오, 헌지왕, 혹왈, 조자흑야, 금변이위적, 우일두이신, 병
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羣臣議, 答曰, 黑者北方之色,
이국지징야, 왕기겸고구려호, 대소희송지, 겸시혹자지언, 왕여군신의, 답왈, 흑자북방지색,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加知也, 帶素聞之,
금변이위남방자색, 우적오서물야, 군득이불유지, 이송어아, 양국존망, 미가지야, 대소문지,
驚悔.
경회.
3년 봄 정월에 동명왕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말을 얻어 거루라고 이름하였다. 겨울 10월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까마귀는 본래 검습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검정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 왕이 얻고는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舁鼎遊戱, 就見之只有鼎,
사년, 동십이월, 왕출사벌부여, 차비류수상, 망견수애, 약유여인여정유희, 취견지지유정,
使之炊, 불대火自熱, 因得作食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사지취, 불대화자열, 인득작식포일군, 홀유일장부왈, 시정오가물야, 아매실지, 왕금득지,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爾兵物等, 曰天賜也,
청부이종, 수사성부정씨, 저리물림숙, 야문금성, 향명사인심지, 득금이병물등, 왈천사야,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
배수지 상도유일인, 신장구척허, 면백이목유광, 배왕왈, 신시북명인괴유, 절문대왕북벌부
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 曰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여, 신청종행, 취부여왕두, 왕열허지, 우유인, 왈신적곡인마로, 청이장모위도, 왕우허지
4년 겨울 12월 왕이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러 가며 비류수 가에 이르러 물가를 바라보매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짓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 왕이 마침내 그에게 부정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하늘이 준 것이다.”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쯤 되었으며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가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이 따라가서 부여 왕의 머리를 베어 오게 해주십시” 왕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가지고 길을 인도하게 해주십시요.” 왕이 또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能, 扶
오년, 춘이월, 왕진군어부여국남, 기지다이도, 왕사택평지위영, 해안휴졸, 무공구지능, 부
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
여왕거국출전, 욕엄기불비, 책전이전, 함녕불능진퇴, 왕어시휘괴유, 괴유발검호후격지, 萬軍披靡不能支, 直進執扶餘王斬頭, 扶餘人旣失其王, 氣力嶊折, 而猶不自屆, 圍數重, 王以糧
군피미불능지, 직진집부여왕참두, 부여인기실기왕, 기력최절, 이유불자계, 위수중, 왕이량
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 咫尺不辯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
진사기, 우구불지소위 내걸영어천, 홀대무, 지척불변인물칠일, 왕영작초우인, 집병입영내
外爲疑兵, 從問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외위의병, 종문도잠군야출, 실골구천신마, 바류원대정, 지리물림, 병기불흥, 득야수이급식,
王旣至國, 乃會羣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
왕기지국, 내회군신음지왈, 고이불덕, 경벌부여, 수살기왕, 미멸기국, 이우다실아군자, 차
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 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三月, 神馬
고지과야, 수친조사문질, 이존위백성, 시이, 국인감왕덕의 개허살신어국사의, 삼월, 신마
駏䮫, 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거루, 장부여마백필, 구지학반령하거회곡, 하사월, 부여왕대소제, 지갈사수빈, 입국칭왕,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淥谷, 見海
시부여왕금와계자, 사실기명, 초대소지견살야 ,지국지장망, 여종자백여인, 지압록곡, 견해
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祭謂國人曰, 我先王두왕출엽, 수살지, 취기백성, 지치시도, 시위갈사왕, 추칠월, 부여왕종재위국인왈, 아선왕
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신망국멸, 민무소의 왕제도찬, 도어갈사, 오역불초, 무이흥복, 내여만여인래투, 왕봉위왕,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
안치연나부, 이기배유락문, 사성락씨, 동십월, 괴유졸, 초질혁, 왕친임존문, 괴유언, 신북
溟徵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
명징천지인, 누몽후은, 수사유생, 불감맘보, 왕선기언 우이유대공노, 장어북명산양, 명유
司以時祀之.
사이시자지.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군영을 만들고 말안장을 풀어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여 왕이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이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 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일만여 군사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 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 간에 사람을 구별할 수 없었다. 왕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을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자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이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
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부상자를 위문하며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스러움과 의로움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랐다. 3월 신비로운 말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함께 학반령 아래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여름 4월에 부여 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 왕 금화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海해두국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써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소. 나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소.”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絡(낙)씨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에 괴유가 죽었다. 전에 병이 심해지자 왕은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가 말하였다. “신이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두터운 은혜를 거듭 입었으므로 죽어도 사는 것 같아서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爲右輔, 委以軍國之事.
팔년, 춘이월, 배을두지위우보, 위이군국지사.
8년 봄 2월에 을두지를 우보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毌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
구년, 동십월, 왕친정개마국, 살기왕, 위안백성, 관로략, 단이기지위군현, 십이월, 구다국
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 拓地浸廣.
왕, 문해마멸, 구해급기, 거국래항, 유시, 척지침광.
9년 겨울 10월에 왕이 직접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爲左輔, 松屋句爲右輔.
십년, 춘정월, 배을두지위좌보, 송옥구위우보.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羣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 恃德者
십일년, 추칠월, 한요동태수장병래벌, 왕회군신, 문전수지계, 우보송옥구왈, 신문, 시덕자
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壇侵吾邦,
창, 시력자망, 금중국황검, 도적봉기, 이병출무병, 차비군신정책, 필시변장규리, 단침오방,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左輔乙豆知曰, 小適之强, 大適之禽也, 臣度大王
역천위인, 사필무공, 빙험출기, 파지필의, 좌보을두지왈, 소적지강, 대적지금야, 신도대왕
之兵, 熟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
지병, 숙여한병지다, 가이모벌, 불가역승, 왕왈, 모벌약하, 대왈, 금한병원투, 기봉불가당
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야, 개왕폐성자고, 대기사노, 출이격지가야, 왕연지, 입위나암성, 고수수순, 한병위불해,
王以力盡兵疲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 長
왕이역진병피위두지왈, 세불능수, 위지나하, 두지왈, 한인위아암석지지, 무수천, 시이, 장
圍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稿漢軍,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
위이대오인지곤, 의취지중리어, 포이수초, 겸지주약간, 치고한군, 왕종지, 이서왈, 과수우
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 師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
매, 획죄어상국, 치영장군, 사백만지군, 폭로폐경, 무이장후의, 첩용박물, 치공어좌우, 우
於是, 漢將謂, 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
어시, 한장위, 성내유수, 불가졸발, 내보왈, 아황제불이신노, 하령출사, 문대왕지죄, 급경
踰旬 未得要嶺,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籍口以報皇帝, 遂引退.
유순 미득요령, 금문래지, 언순차공, 감불적구이보황제, 수인퇴.
11년 가을 7월 한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소신이 듣기를 덕에 의지하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나는데 명분 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듯이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는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모략으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왕이 모략으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이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궁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대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하면서 글을 보내었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소, 후의를 감당할 길 없으니 보잘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하오.” 이리하여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 신을 둔하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습니다.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내온 글의 뜻을 보니 말씨가 공손하므로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 來投.
십삼년, 추칠월, 매구곡인상수, 여기제위수급당제우도등, 래투.
13년 가을 7월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가 그 동생 위수 및 사촌 동생 우도와 함께 항복해 왔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십사년, 동십일월, 유뢰, 무설.
14년 겨울 11월 우레가 울렸으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 逸苟. 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
십오년, 춘삼월, 출대신구도. 일구. 분구등삼인위서인, 차삼인위비류부장, 자탐비, 탈인처
妾. 于馬. 財貨, 恣其所慾, 有不與者, 卽鞭之, 人皆忿怨, 王聞之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
첩. 우마. 재화, 자기소욕, 유불여자, 즉편지, 인개분원, 왕문지욕살지, 이동명구신, 불인
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勃素, 代爲部長, 㪍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
치극법, 출퇴이이, 수사남부사자추발소, 대위부장, 발소기상임, 별작대실이처, 이구도등죄
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儕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
인, 불령승당, 구도등예전, 고왈, 오제소인, 고범왕법, 붕승괴회, 원공사과, 이령자신, 칙
死無恨矣, 殼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
사사한의, 각소인상지 공좌왈, 인불능무과, 과이능개, 칙선막대언, 내여자위우, 구도등감
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殼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夏四月, 王
괴 불복위악, 왕문지왈, 각소불용위엄, 능이지징악, 가위능의, 사성왈대실씨, 하사월, 왕
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 出行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자호동, 유어옥저, 낙랑왕최리, 출행인견지, 문왈, 관군안색, 비상인, 개비북국신왕지자호,
遂同歸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수동귀이녀처지, 후호동환국, 잠견인, 고최씨여왈, 약능입이국무고, 할파고각, 칙아이예영,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高角, 若有適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
불연칙부, 선시, 낙랑유고각, 약유적병칙자명, 고령파지, 어시, 최여장리도, 잠입고중, 할
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 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
고면각구, 이보호동, 호동권왕, 습낙랑, 최리이고각불명, 불비, 아병엄비성하, 연후지고각
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십일월,
개파, 수살여자, 출항, 혹운, 욕멸낙랑수청혼, 취기녀, 위자처, 후사귀본국, 괴기병물, 동십일월,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
왕자호동자살, 호동, 왕지차비갈사왕손녀소생야, 안용미려, 왕심애지, 고명호동, 원비공탈
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 憎疾乎, 妃知王不信,
적위태자, 내참어왕왈, 호동불이예대첩, 태욕난호, 왕왈, 약이타아, 증질호, 비지왕불신,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복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공화장급, 내체읍이고왈, 청대왕밀후, 약무차사, 첩자복죄, 어시, 대왕불능불의, 장죄지,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혹위호동왈, 자하불자석호, 답왈, 아약석지, 시현모지악, 이왕지우, 가위효호, 내복검이사.
15년 봄 3월 대신 구도, 일구 분구 등 세 사람을 파직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沸流部長(비류부장)이 되었는데 바탕이 욕심 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 우마, 재화를 빼앗아 마음대로 하고, 주지 않는 자에게는 채찍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이었으므로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내쫓아버렸을 뿐이다. 마침내 남부(南部) 사자 추발소를 대신 부장으로 삼았다. 추발소는 부임하여 별도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 등이 죄인이었으므로 당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우리들이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잘못을 용서하시고, 개과천선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추발소가 그들을 이끌어 올려 같이 앉아 “사람이 잘못이 없을 수 없소. 잘못하여도 고칠 수 있으면 선함이 매우 큰것이오.”라고 말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이 감격하고 또한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추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하니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고는 성을 주어 大室氏(대실씨)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 최리가 출행다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일 터이니,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지요?”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당신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찟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치 않으면 거절할 것이오.”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찌져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이에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아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첫째 왕비는 그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고 참언하였다. 왕이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아뢰었다.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 이리하여 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 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何則, 子之見責於其父
론왈, 금왕신참언, 살무고지애자, 기불인, 불족도의, 이호동불득무죄하칙, 자지견책어기부
也, 宜若舜之瞽瞍,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
야, 의약순지고수, 소장칙수, 대장칙주, 기불함부어불의, 호동불지출어차, 이사비기소, 가
謂執於小謹, 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위집어소근, 이매어대의, 기공자신생지비야.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武帝復其王號, 是建武八年也.
십이월, 입왕자해우위태자, 견사입한조공, 광무제복기왕호, 시건무팔년야.
史論(사론): 왕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하듯이 하여, 작은 매면 맞고 큰 매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이 이럴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으니 가히 작은 조심에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공자 신생(申生)에게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에 사신을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때가 건무 8년이었다.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이십년, 왕습낙랑멸지.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이십사년, 춘삼월, 경도우박, 추칠월, 운상살곡, 팔월, 매화발.
24년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헤쳤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 冬十月, 王
이십칠년, 추구월, 한광무제, 견병도해벌낙랑, 취기지위군현, 살수이남, 속한, 동십월, 왕
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훙, 장어대수천원, 호위대무신왕.
27년 가을 9월 한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三國史記 권 第十四
삼국사기 권 제14
高句麗本紀 第二
고구려본기 제2
閔中王諱, 解色朱,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太子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
민중왕휘 해색주, 대무신왕지제야, 대무신왕훙, 태자유소, 불극즉정, 어시, 국인추대이입
之, 冬十一月, 大赦.
지, 동십일월, 대사.
민중왕은 이름이 해색주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대사면을 실시하였다.
二年, 春三月, 宴羣臣,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이년, 춘삼월, 연군신, 하오월, 국동대수, 민기, 발창진급.
2년 봄 3월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三年, 秋七月, 王東狩獲白獐, 冬十一月, 星孛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삼년, 추칠월, 왕동수획백장, 동십일월, 성패우남, 이십일이멸, 십이월, 경도무설.
3년 가을 7월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에 살별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야 없어졌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必葬於此, 不須更作陵
사년, 하사월, 왕전어민중원, 추칠월, 우전견석굴, 고위좌우왈, 오사필장어차, 불수갱작능
묘,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 魚目夜有光, 冬十月, 蠶支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
墓, 구월, 동해인고주리헌경, 어목야유광, 동십월, 잠지락부대가대승등일만여가, 예낙랑투
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한, 후한서운, 대가대승등만여구.
4년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에 또 사냥하다가 석굴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듯이 이곳에 장사지낼 것이며, 절대로 새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 9월에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겨울 10월에 잠지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구라고” 하였다⟩
五年, 王薨, 王后及羣臣, 重違遣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오년, 왕훙, 왕후급군신, 중위견명, 내장어석굴, 호위민중왕.
5년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유명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민중왕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