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권
병인박해(丙寅迫害)(1866)
철종(哲宗)임금의 승하(昇遐)에서 불국원정대(佛國遠征隊)의 귀환까지
〔1864~1866〕
제 1 장
고종(高宗)초의 한국교회(韓國敎會)
철종(哲宗)임금 승하(昇遐) 당시의 조선교회(朝鮮敎會)의 실정(實情) -
브르뜨니애르(de Bretenieres), 도리(Dorie), 볼리외(Beaulieu), 위앵(Huin)
신부들의 입국(入國) - 전 사베리오와 이(李) 요한의 순교(殉敎)
1. 철종(哲宗)임금 승하(昇遐) 당시의 조선교회(朝鮮敎會)의 실정(實情)
① 철종(哲宗)이 승하(昇遐)하자, 권력(勸力)이 다른 손으로 넘어갔다. 그때까지 전권(全權)을 쥐고 있던 대신(大臣)들은 면직(免職)이 되고, 다른 대신들이 임명되었다. 이 궁중혁명(宮中革命)이 천주교(天主敎)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結果)를 가져올 것이던가? 맨 처음에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선교사(宣敎師)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가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희망(希望)을 품기도 했었다.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에 대한 백성(百姓)들의 정신(精神)에 일어났던 명백한변화(變化), 계속 늘어나는 개종자(改宗者)의 수효, 중국인(中國人)들의 오만(傲慢)에 가해진 무서운 교훈(敎訓)의 여파(餘波) 따위는, 모두가 희망(希望)을 품게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에 박해(迫害)를 가했던 당파(黨派)가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한 것, 비교적 온건파(穩健派)로 알려진 시파(時派) 사람들을 물리치고, 항상 복음(福音)을 적대시(敵對視)하는 벽파(辟派) 사람들 중에서만 고관(高官)들을 뽑는 새 정부의 제도(制度), 그리고 또 다른 징조(徵兆)들이, 새롭고 무서운 폭풍우(暴風雨)를 점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1864년 8월,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 神學校)에 보낸 아래의 편지가 이 상황(狀況)을 설명한다(1864년 8월18일 서한. AME: Cause 1866, HB 25`34)).
※ 베르뇌(Berneux) 주교의 1864년 8월의 편지
『㉠ 오래지 않아 조선(朝鮮)에서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보리라고 바랐던 우 리의 희망(希望)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근절(根絶)시키려는 박해(迫害)의 위협(威脅)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왕은, 조선의 거의 모든 왕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같이, 과음(過飮)과 방탕 (放蕩)으로, 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죽음을 애석(哀 惜)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음이 착하고 신민(臣民)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줏대가 너무 약 해서, 자기를 감독(監督)하는 사람들로부터 해방(解放)되지 못하고, 백성(百 姓)을 견딜 수 없는 불행(不幸)으로 몰아넣는 갖가지 직권남용(職權濫用)과 공금회령(公金橫領)을 묵인(黙認)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후사(後嗣)가없이 세상을 떠났고, 최고권력(最高權力)은 선왕(先王) 들 중 한 분의 미망인(未亡人)인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의 손에 들어 가게 되었는데,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는 왕의 즉위식(卽位式)이 있는 날, 조선 왕족의 아들인 12세 소년을 양자(養子)로 삼았습니다.
㉡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는 나라의 정치를 새 임금의 아버지(흥선대원군 (興宣大元君) 이하응(李昰應)에게 맡겼습니다. 이 사람은 그가 좋은 것으로 아 는 천주교도 적대시(敵對視)하지 않고, 매우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선 교사(宣敎師)들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서양인(西洋人) 8명이 여 기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나와 안면(顔面)이 있는 관장(官長)에게 개별적 으로 주교(主敎)의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조선(朝鮮)과 통상(通商)을 요구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편지가 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만일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 교의 자유(自由)를 주겠노라고 그 관장(官長)에게 말했습니다. 즉 내가 이 나 라에 유익(有益)한 일을 하기를 매우 바라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나라가 다르 고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影響)을 미칠 수 없다는 것, 나는, 조만간에 조선 땅에 자리 잡을 길을 생각해내고야 말 이 사람들에게서, 이 나라가 받을 위험(危險)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한다는 것, 그러나 어떤 서양 (西洋)나라와도 관계 맺는 것을 마다하는 조정(朝廷)의 한결같은 거부(拒否) 는 - 이 거부를 비난하는 것은 삼갔습니다만, - 위험(危險)을 모면케 할 아 무런 방도(方途)도 남겨놓지 않는데, 그러나 이 위험은 시급히 예방(豫防)해 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답변(答辯)이 대원군(大院君)에게 전달(傳 達)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 그의 부인(婦人), 즉 임금의 어머니(여흥 부대부인(驪興 府大夫人)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문답(敎理問答)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祈禱文)을 외우고, 자기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른 것에 대한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 게 청했습니다(깔래(Calais) 신부의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멜 APF ⅩL, P. 28). 그러나 천성적으로 성격(性格)이 약한데다가, 특히 오늘날 위험(危險)을 무릅쓰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고, 결 코 세례(洗禮)를 받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결국 영세(領洗)를 하기는 했으나, 그 것은 만년(晩年)에 이르러서였다. 즉 1896년 10월 당시 조선교구장(조선교구장) 뮈 텔(Mutel) 주교로부터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후, 1898년 1월 8일에 세 상을 떠나니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Comte Rendu(1898). p. 37~38).
궁중(宮中)에 계속 머물러 있는 왕의 유모(乳母)는 신자(信者)입니다. 올해 에 그 여인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주었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학식(學 識) 이 있고, 능력(能力)이 있다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입 니다. 왜냐하면 왕이 아무리 어리다 해도, 무엇을 원하면 감히 그것을 반대 (反對)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까지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유모(乳母)(박 마르타. 본고(本稿) p. 327 참조.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충청도(忠淸道) 홍천(洪川)으로 피신했다가 거기에서 잡혀, 서울로 이송(移送)되어 무진(戊辰) 2월에 순교(殉敎)했다.『치면일기(致命日記)』N. 43)는 내가 아는 사람 에서 가장 막힌 사람으로 진짜 바보입니다. 이 여인이 왕에게 천주교와 서양 선교사(西洋宣敎師)들 얘기를 했고, 왕은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고, 주교(主 敎)를 보겠다고 대답했다고들 합니다만, 나는 이 말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그럴만한 능력(能力)이 없습니다. 이제 또 다른 한편의 모습을 봅 시다.
㉣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증오심(憎惡心)으로 조 선에서도 유명한 조씨(趙氏)(풍양조씨(豊穰趙氏. 이 조씨는 조만영(趙萬永), 조인영 (趙寅永) 등이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김씨(安東金氏)와 대결, 조씨(趙氏)의 세도(勢道) 를 누리게 되었고, 결국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했다.) 집안 출신입니다.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는 권력(權力)을 잡자, 선왕(先王)시절에 전 권(全權)을 잡았던 김씨(金氏)집안 사람들을 물리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저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어,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호의 적(好意的)이었는데,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는 이 사람들 대신에, 우 리에게 가장 극단적(極端的)인 조치(措置)를 취할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앉혔습니다.
㉤ 호의적(好意的)인 사람들과 적의(敵意)를 품은 사람들의 이 혼합(混合)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릴 수 있을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3월에 상소(上 疏)가 여러 장 조정(朝廷)에 들어왔는데, 나라가 옛날의 순수(純粹)한 풍습(風 習)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천주교(天主敎)를 뿌리 채 뽑아버리라는 것이었습 니다(과연 장령(掌令) 강진규(姜晋奎)가「면성학(勉聖學) 등 6조항을 소청(疏請)하였 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천주교에 관한 언급(言及)은 없다.『고종(高宗)』1년 3월 5 일).
그와 동시에 전국에 박해(迫害)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所聞)이 퍼졌습니 다. 그 날짜가 3월 15일로 정해졌으니, 모든 서양인(西洋人)과 모든 회장(會 長), 그리고 좀 유력(有力)한 모든 신자를 온 교구(敎區) 안에서 체포(逮捕)해 서 사형(死刑)에 처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3일에는 포청(捕廳)이 알고 있는 내 집에 와서, 나를 붙잡으라는 명령이 내리기까지 했었는데, 그 명령이 곧 철회(撤回)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근거(根據)가 있다고 믿어지는 이 소식(消息)은, 포교지(布敎地) 안에 커다란 공포(恐怖)를 불러 일으켜, 아직 신앙(信仰)이 약한 많은 예비신자가 이 위험 (危險) 앞에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왕들의 마음을 좌우하시는 천주께서 폭풍우(暴風雨)를 몰아 내셨으 니, 박해(迫害)는 일어나지 않았고, 또 우리는 새 조정(朝廷) 밑에서 아주 평 안(平安)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