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르파의 성 마리아 대수도원
(L'Abbazia di Santa Maria di Farfa)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베네딕도 성인이 태어나신 노르치아와
로마 사이에 있는 아쿠치아노 (Acuziano) 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들이 끝없이 심어져 있는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다 보면
푸른 숲 사이에 둘러싸여 나타나는 수도원과 마을이 함께
같은 장소에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살아온
옛 중세도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수도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중반 시리아에 있던 한 은수자가
아리우스 이단(1)의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들어와 이곳 사비나 지방에서
이교도의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의 성인’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주교가 되어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처음 이곳에 수도원을 세웠던 성 로렌조 시로 (Lorenza Siro)입니다 (사진 1).
하지만 이 수도원은 북쪽에서 내려온 이민족이었던 롱고바르디족에게
6세기 말에 파괴 되었고, 두 번째로 수도원을 다시 세웠던 사람은
680년경 마우리엔네의 성 토마스 (San Tommaso di Maurienne)였습니다 (사진 2).
이탈리아 북부 사보이아 출신인 토마스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
예수님 무덤 성당에서 어려움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를 하던 중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태리에 있는 사비나 (Sabina)라는 마을로 돌아가
그곳에 당신의 이름으로 성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는 성모님 말씀에 따라 사비나 마을에 있는 다 부서진 수도원을 찾아
스폴레또의 군주였던 파로알도 2세의 도움으로 성당과 수도원을 짓고
성모님의 이름으로 봉헌하게 됩니다.
프랑크 족의 왕이었던 카를로가 800년에 레오 4세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내려가던 중 이 수도원에 머물렀고
황제의 수도원 보호에 대한 약속을 받으며 사람들은 이곳을
일명 ‘황제의 대수도원’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때부터 파르파 수도원은 황제의 권력 아래 경제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중세 시기에 한 수도원이 가지게 되는 권력과 땅으로 따진다면
이탈리아 안에서는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두터웠던 카를로 황제는 무지했던 자기 왕국의 백성들을
문명화 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적 수준이 높았던 교회와
수도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땅에 당시 지식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수도원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고, 더욱이 이 파르파 수도원은
교황청과 가까이 있었음에도 많은 특권과 혜택을 받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교황령 땅과 비잔틴 제국의 영토와 접해 있었던
최 전방의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사법권과 행정권이
모두 이 수도원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를로 황제 시절 파르파 수도원은 600개의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300군데 이상의 마을에 대한 사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를로 황제의 친척이었던 시카르도 (830-841)가
파르파 수도원장을 맡으면서 권력은 절정기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카를로 황제의 사후 제국이 불안정해지면서
파르파 수도원은 사라센(2)의 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버리고 세 군데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 무리는 이탈리아 동쪽 해안과 붙어 있는 마르케 (Marche) 지방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고,
한 무리는 로마 근교 리에티 (Rieti)에서 사라센 사람들에게 학살을 당하였고,
한 무리는 로마로 피신했다가 사라센이 물러간 후 다시 파르파로 돌아와
부서진 수도원을 재건하였습니다.
이들은 913년도에 수도원을 세 번째로 다시 세우고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우고 1세 수도원장 때에는 개혁 수도회로 탄생한 클루니 수도원에 합쳐졌지만
세속에 대한 수도원 독립성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독일 황제들의 보호와 권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황청과는 다시 가시를 세우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주교 서임권 문제로 다투던 시기에는 그레고리오 7세
(재위 1073-1085) 교황 편이 아니라 또다시 하인리히 4세 황제 편에 서며
카를로 황제 시절의 권력과 부를 되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1118년도에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발표한 칙서 내용에 적힌
파르파 수도원이 소유한 내역을 보면, 로마에서는 에우스타키오 성당과 마다마 궁전,
라찌오 지방에서는 비테르보, 오르테, 타르퀴니아, 티볼리, 치비타베키아 도시와 항구,
움브리아 지방에서는 뻬루지아, 테르니, 아시시, 나르니, 스폴레또, 토디,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피사와 시에나, 그리고 마르케 지방과 아브르쪼 지방,
몰리세 지방까지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대부분이 파르파 대수도원장 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과 부는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칼리스토 2세 교황과 하인리히 5세 황제는 주교 서임권에 대한 싸움을
보름스 조약 (1122)으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 조약에 따라 세속의 권력을 갖고 있는 황제는 더 이상
영적인 권력에 관여를 하지 않으며, 특히 주교와 대수도원장에 대한 서임은
오로지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협약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파르파 대수도원도 자주권을 상실하여 교황권 아래 놓이고
1125년에 교황이 서임한 아데놀포 (Adenolfo) 수도원장이 부임하면서
수도원 소유의 경제력과 권력은 내리막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5세기 로마에는 부와 권력을 갖게 되는 귀족 집안들이 등장하여
교회와 수도원 전반에 걸쳐 경제적인 투자라는 이름으로 장악을 하였습니다.(3)
파르파 수도원도 로마의 오르시니 가문의 영향 아래에서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되었고,
이때에 수도원의 모습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동쪽으로 제단이 향해 있던 원래의 성당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압시대쪽은 수도자들의 고유 좌석인 기도석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성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내부 뒤편에 최후의 심판 그림 등 르네상스 양식의 그림들이
성당을 채우게 되었고 이 새로운 성당은 1496년에 다시 축성되었습니다.
그 후 300년 동안은 큰 변화 없이 지내다가
1798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이 수도원도 약탈을 당하였고,
1919년에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당의 베네딕토 수도사들이 오면서
까씨노의 베네딕도 연합회에 속해져, 2020년 당시 6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1500년의 시간을 지나온 파르파의 성모 마리아 대수도원은
중세의 역사 안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모습과
신성로마제국의 발전 안에서 베네딕도 수도원이 끼쳤던 역할,
그리고 교황청과의 관계 안에서 수도원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붉은색 선 : 8세기 성당
푸른색 선 : 10세기 성당
초록색 선 : 15세기 성당
1. 수도원 입구
2. 롱고바르도 정원
3. 공동 식당
4. 르네상스 정원
5. 도서관
6. 대리 수도원장 궁
카를로 황제 시절인 8세기 때 만든 성당과
사라센의 파괴 이후 10세기 때 만든 성당의 제대는
북서쪽을 향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수도원 각 장소와 조화를 이루며 수
도자들 만이 사용하는 성당이었습니다.
이 방형으로 성당을 놓고 본다면 8세기부터 있었던
수도원의 롱고바르도 사각 정원과 그 주변 붙여 만들어진 각 방들의 위치는
수도원의 전형적인 구조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종탑도 지금의 성당과 왜 동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옛 성당들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대 앞 성당 바닥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는 부분에 남아있는
모자이크 바닥은 8세기 카를로 황제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진 3),
제대 아래 보이는 것 역시 같은 시기의 성당 벽 일부와
휘장 스타일의 벽화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4).
수도원으로 들어가 르네상스 시절에 만들어진 큰 정원과 붙어있는
성당 쪽을 보게 되면 역시 이 시절에 만들어졌던 크립타를 볼 수 있고
이곳에서 로마시대 석관과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진 5).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있는 정원에서는
10세기 때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성당의 벽과 종탑이 보입니다 (사진 6).
이 문을 통해 수도원 내부로 들어갈 수 있고 두 군데의 사각 정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명 '롱고바르도의 정원' (사진 7)이라고 부르는
8세기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정원이고 나머지 하나는
르네상스 시절에 만들어진 ‘큰 사각 정원’ (사진 9)입니다.
롱고바르도의 정원은 옛 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주변으로 지금은 회의실로 사용되는 옛 수도원 식당 (사진 10)과
규칙의 방으로 사용된 장소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정원 안쪽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들과
오래된 프레스코화 일부도 남아 있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의 ‘큰 사각 정원’은 현재의 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장소이고
옛 성당의 크립타를 볼 수 있는 문과 수도원 도서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르파 수도원에는 수도자들이 손노동을 주로 하였던
'스크립토리움'이라는 필사실이 있었고, 현재 이곳에는
양피지에 만들어진 공동 기도서 및 고문서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는데
이탈리아에서 이 인쇄술로 처음 책을 만든 곳이 수비아코에 있는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던 파르파 수도원이었기에, 이 도서관에서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서 처음 만들어진 활자본의 책도 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자료 중 제가 본 흥미로운 것은
1686년도의 파르파 수도원과 주변의 집들 (사진 8)을 볼 수 있는 인쇄물입니다.
이 그림 하나로 중세 시절 사람들의 삶에 수도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성당
좌우 대칭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지붕과 중앙 지붕이 솟아 있는
전형적인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은 15세기에 다시 만들어진 성당 정면 (사진 11)입니다.
세 개의 지붕과 세 개의 창문 그리고 세 개의 문이 보이는 성당의 얼굴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강하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리석으로 장식한 문양이 들어간 중앙문은 이태리에서 흔하지 않은
알프스 넘어 북쪽 나라들의 수도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딕 양식의 문이라
로마에서 늘 봐왔던 성당과는 다르다는 생소함을 주는 듯하면서도
이슬람 사원의 문 같은 이국적인 느낌도 주고 있습니다.
중앙 문 위쪽 반달 모양의 틀 안에는 15세기 때 그려진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스티카 사이에 파르파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프레스코화가 있고 그 위에는 이 성당을 만드는데
재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르시니 가문의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진 12).
그리고 큰 원형의 창문 주위에는 고대 로마 시절 그리스도교인들의
석관 부조들이 있고 성당 지붕 쪽 두 기둥 위에는 9세기 카를로 황제 시절에
만들어져 성당에 사용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두 마리가 놓여 있습니다.
성당 왼편 사각으로 된 탑같이 생긴 건물은 카를로 황제가
이곳 수도원에 왔을 때 머물렀던 건물이라고 하고
1477년부터는 교황 대리 수도원장이 사용하였습니다 (사진 13).
성당 내부로 들어서 먼저 뒷면을 보면, 1561년 벨기에 사람 Henrik van der Broek가
플랑드르 화법으로 그린 최후의 심판 (사진 14)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의 화가는 미켈란젤로가 식스틴 소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심판자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중앙 구름 위에 앉아 팔을 벌려
오른편 선택받은 사람과 왼편 벌받을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고,
예수님 머리 위로는 자비를 상징하는 백합과 정의를 상징하는 칼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바로 아래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아래 정문 양옆에 있는 구약의 두 인물도 같은 작가가 그렸고
왼쪽은 욥 오른쪽은 이사야입니다.
욥과 이사야를 그려 넣은 것은 최후의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며
그의 행동과 말은 하느님의 정의를 상징하고 있고,
이사야는 주님의 분노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보통 벽화를 그릴 때는 프레스코 화법을 쓰게 되는데,
나무판이나 천 위에 그리는 유화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벽에 유화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넓은 공간을 이 방법으로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 있는
도메니코 수도원 식당 벽에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에
변형이 얼마나 쉽게 일어났는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플랑드르의 미술가들에게는 그 당시 유화로 벽에 그리는 것도
일반적인 방법이었기에 이 그림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 화가가 이곳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수도원장이
플랑드르 사람이었던 에라스무스였고 또한 이 수도원에 수비아코 수도원에서 온
많은 북유럽 수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가는 10년 후인 1571년도에 바티칸의 식스틴 소성당의
‘예수님의 부활’을 그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성당 뒷벽에 그려지는 이유는 교회의 시간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
동쪽에 있는 제대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표현한다면
해가 지는 서쪽은 세상의 끝 날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성당 밖으로 나가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과 공심판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고, 성당 밖에서도
이웃에 봉사하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할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 아래 라틴말로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심판자께서는
악한 자들에게는 두려운 분노로 선한 자들에게는 순수한 은총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비오 4세 교황이 재위하던 시절에 파르네제 가문은 이곳 수도원을 관리하였고,
수도원장과 수도자들은 플랑드르인의 능력 있는 손을 빌려
이 위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주문하였다’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성당에 들어서서 제대 쪽을 바라보며 드는 첫 번째 생각은
로마 4대 성당 중에 하나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진 15).
15세기 때 새롭게 만들어진 성당이고 또 로마의 명문 가문들인
오르시니와 파르네제 가문 출신의 교황 대리 수도원장들의 주문에 만들었으니
로마 미술이나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입니다.
현재의 성당은 제대 방향을 90도 오른쪽으로 회전을 하면서
원래 있었던 수도원 성당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수도자들만이 사용하는 성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문의 방향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방향으로 만들었고
수도자들의 기도하는 장소는 제대 위쪽에 코로 (Coro, 기도석)를 따로 만들면서
성당의 세 복도는 신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원 성당에 사실 필요 없었던 소성당들이 양옆 벽 쪽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신자들을 위한 15세기 때 성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기둥들은 수도원 근처에서 가지고 온 로마 신전 기둥을 사용하여
왼쪽에 이오니아와 오른쪽에 도리아 양식의 주두를 가지고 있는
이 열 기둥으로 나누어진 세 개의 복도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 16).
성당 내부의 그림들은 16세기와 17세기 때에 그려진 것입니다.
기둥 위에는 베네딕도회 출신 교황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그 위로는 창문들 옆에 12사도들과 창문 밑에는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의 모습이
흉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진 17).
제대 위 아치형으로 된 부분에는 주님 탄생 예고의 그림으로
왼쪽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메쎄지를 전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종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겸손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가브리엘 천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아래에는 성 베네딕도와 쌍둥이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 큰 복도 천장은 오르시니 가문에 의해 1494년에 만들었고
천장 중앙에는 이 성당의 재정을 담당한 오르시니 가문의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진 18).
이 성당도 파르파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이기 때문에 천장의 모양은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Santa Maria Maggiore)의 것과 유사하게 만들어졌고
사각으로 만들어진 틀 안에는 하늘색의 표면에 금색을 입힌
마리아를 상징하는 장미꽃 조각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제대 왼쪽에는 13세기 때부터 공경 받은 파르파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그리고 천사가 그려진 이콘이 있습니다 (사진 19).
원래 이콘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종교개혁 이후 바로크 시절 때부터 이콘에 대한 공경의 의미가 강하게 부여되면서
너무 과할 정도로 주변 장식을 하게 됩니다.
파르파의 이 이콘도 얼굴만 남기고 장식으로 덮은 것은 19세기 때의 일입니다.
양옆 작은 복도에는 세 개씩 여섯 개의 소성당이 있습니다.
왼쪽 작은 복도 쪽에 있는 소성당들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Orazio Gentileschi)와
그의 협력자들에 의해 1598년과 1599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첫 번째 소성당에는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그린
성녀 우르술라(4)의 제단화 (사진 20)가 있고,
두 번째 소성당에는 아마도 그의 협력자 시모네에 의해 그려진
‘성녀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정’ (사진 21),
마지막은 다시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그린
‘성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사진 22)가 있습니다.
제대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기도석 (Coro)은
17세기 초반에 만들어졌습니다 (사진 23).
이곳에 있는 그림들은 수도원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오르비니오 출신의 화가들이 그렸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인 만큼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목동들의 아기 예수님 경배’,
‘성모님 하늘로 들어 올려지심’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그 위 반달형 벽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가 그려져 있고,
네 장의 벽화 사이에 조개 모양 그림의 벽감 안에는
베네딕도회 출신의 교황들, 주교들 그리고 수도원장들의 모습과 함께
순교자들과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그려 넣었습니다.
기도석 중앙 파이프 오르간 위에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계신
성부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천장은 로마의 크로테스키 화법으로 장식을 하면서
가장 중앙 부분 수도원 성당 지붕에 아기 예수님과 함께
앉아 계시는 모습이 로레토의 성모님을 보는 듯합니다.
성당 중앙 복도 자리를 신자들에게 내어주면서
수도자들의 충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계란 모양처럼
긴 타원형을 가지고 있는 이 후진의 기도석 모양은
다른 수도원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기도하며 어떤 수도자들은
세상과 교회 권력자들의 도움을 받거나 타협하기도 하였지만,
스승인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에게 엄격한 삶을 살았던
더 많은 수도자들의 침묵과 열정이 제게는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1) 예수님의 신성은 하느님의 신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325년 니케아 1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지만,
그 추종자들은 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분쟁과 싸움을 야기했다.
(2) 기원후 2세기경부터 아라비아반도의 사람들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다가
중세 시절엔 이슬람교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3) 이 시기 등장한 라 콤멘다 (La commenda)라는 제도는
수도원을 교황청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수도자들에 의한 수도 원장의 선출을 금지시키고
수도원의 경제권을 교황청에서 위임한 사람 (교황의 가문 추기경)에게
기한 없이 맡기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침략전까지 이 제도는 계속되었고
이 제도권의 추기경을 콤멘다타리오 (il commendatario)라고 불렀다.
(4) 4세기 때 영국 왕의 딸이었던 우르술라는
11명의 처녀들과 로마 순례 후 퀠른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이교도인 훈족 왕 아틸라의 화살에 맞아 순교를 하였다.
[출처] 파르파의 성 마리아 대수도원 (L'Abbazia di Santa Maria di Farfa)|작성자 Roma Vian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