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1398년) 1398년 8월 26일.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는 방과와 방원 등 아들 6명과 딸 2명이 있었다.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는 아들 방번 방석과 딸이 있었다. 신의왕후는 개국 1년전에 승하하였고 신덕왕후와 정도전이 개국공신인 방원을 제치고 11세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왕권보다는 신하들의 신권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고 왕권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방원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 또한 방석을 예뻐하여 방석에 의중을 두었고 신덕왕후가 방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대성통곡하기도 하며 태조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자책봉 이후 정도전이 만주를 정벌하기 위해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방원이 위기를 느꼈고 정도전의 음모설을 계획하여 (정도전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핑계로 이방원 등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경복궁으로 불러 몰살하려 한다는 음모)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영추문으로 무장하여 들어갔다. 정도전은 남은의 집에서 남은과 술을 마시다 기습공격을 받고 민부의 집으로 도망했으나 잡혀 참살 당하였다. 방석은 폐세자가 되어 영추문 밖에서, 방번은 김포에서 유배를 떠나던 중 피살되었다. 방원이 저지른 왕자의 난에 의해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동지인 정도전을 잃자 태조가 정치에 환멸을 느껴 왕위를 아들 방과에게 양위하고 고향 함흥으로 내려가 버렸다.
정도전 (1342-1398) 호는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로 노비 출신이었다. 그런 연유로 정도전은 외가의 신분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우왕의 친원정책에 반대하다 친원파에 의해 나주에서 9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고 중앙정계에서 배제되었다. 동북면 지휘사 이성계를 찾아 인연을 맺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후 정도전이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때 이성계 정몽주와 함께 9공신에 들었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명나라에 다녀오던 왕자 석을 마중나간 길에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옴싹달싹 못하게되었다. 시중 정몽주의 역살을 모의하고 이방원이 나서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으며 정몽주가 정도전을 동북면 지휘사 이성계에 소개하였다고 한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주살하고 난 후 정도전, 조준, 남은 등 50여명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집필하였고 한양건설을 주도하며 궁궐과 문루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 도감을 설치하여 새 도읍지에 도성을 건립하나 검소한 궁궐을 지향하였다. 정도전은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를 확립하고 사병을 혁파하였다. 재상중심의 정치를 꿈꾸고 대관과 간관이 직언하는 대간제도를 만들어 잘못되는 왕을 쫓아 낼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이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가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고 말했듯이 자신이 이성계를 세워 조선을 건국했다고 생각하였다. 표전문사건으로 명에서 정도전 등의 압송을 수차례 요구하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장했다.
표전문사건이란 1396년 조선에서 명황제 주원장에 올린 표전문에 경박한 문구가 있다하며 명에서 표전문을 작성한 정도전 유구 등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주원장은 홍건적 출신으로 자신의 과거와 연관된 글자의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명에서는 홍건적과 연관된 盜 賊자 등을 사용하여 문신들이 화를 당하는 문자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건국공신이자 막강한 실세인 정도전을 보내기가 어려워 명의 요구에 답을 하지 못하였고 명에서 정도전의 압송을 계속해서 요구하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구상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진법을 훈련하고 군량을 준비하며 사병을 혁파하여 병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병혁파로 인해 태조7년 남은의 첩 집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세자책봉에서 밀려난 이방원이 사병혁파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가 약화될 위기에 처하자 정도전을 제거하게된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고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시키고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왕조에 대한 그의 업적과 공적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에야 복권되었다.
[출처] 본 게시물은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xkschung/ 에서 스크랩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