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백성호
관심
#궁궁통1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른바
천지창조(天地創造)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그림의 일부다. 신은 과연 흰 수염에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일까. 중앙포토
하느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곧장
하늘이 생겨났고,
땅이 있으라 하니
순식간에
땅이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있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있는 기록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문자로 기록된
그대로를
100% 믿으시나요?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표현법이고
거기에 담긴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보시나요?
#궁궁통2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서울대 천체물리학과) 명예교수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이기도 합니다.
장회익 교수는 성경에 담긴 종교적 직관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포토
그런데
그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을 대할 때도
문자주의를 경계하라며,
거기에 담긴
더 깊은 영성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에게
구약 창세기에 기록된
천지창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장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자세히 보라.”
다소 뜬금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물었는데
왜 피카소를 말하는 걸까요.
장 교수는
답을 이어갔습니다.
“피카소 그림을 보면
사람의 얼굴을
실제와 달리
찌그러뜨렸다.
왜 그런가.
피카소가 사실을 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피카소는
무엇을 그린 겁니까?”
“피카소는
예술적 직관을 그린 거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직관을
기록한 거다.
그게
창세기의 내용이다.”
이어서 장 교수는
구약의 창세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실제 얼굴의 사진이라
해석하고,
거기서 얼굴 모습만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작품성을 놓치게 된다.
화가의 예술적 직관을
놓치게 된다.”
장 교수는
성경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장회익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에만 매달리면 성경에 담긴 진수를 놓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포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표면적인 문자만 붙들면
성경에 담긴 진수를
놓치게 된다.
결국 본질은 놓치고
껍질만 붙드는 셈이다.”
#궁궁통3
사람들은 대부분
성경이
창세기부터
기록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세기가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기록됐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민족에 대한
해방 사건이
먼저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유대인은 이런 해방을 가능하게 한 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중앙포토
그다음에
이걸 가능하게 한 분이
누구냐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 민족에게는
옛날부터 전승돼 내려오던
천지창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단군 신화처럼 말입니다.
유대의 할머니들이
그 이야기를
자식과 손주에게 들려주고,
다시 자식이
자신의 자식과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계속해서
전승된 이야기입니다.
나라 안에 있는
그런 할머니들을 모은 뒤
옛이야기들을
추리고 추려서
기록한 게
구약의 창세기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창세기가
그저 예부터 내려오던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한다면
거기에 담긴
종교적 직관을
놓치는 셈이 되겠지요.
마치
피카소의 그림에 담긴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눈과 코와 입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성경에 기록된 글자를
한 자 한 자,
문자 그대로 믿는
분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의 정통이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들이 너무
문자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궁궁통4
저는
겉모습보다
속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눈ㆍ코ㆍ입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보다
화가의 직관을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을 비롯한
여러 종교의 경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흔히
진리를 기록한 책을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경전에 기록된 문자,
그 문자들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진리를 길어 올리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우리의 독서와 사유,
묵상과 궁리,
그리고 통찰이 동반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경전에 담긴 진리를
우리가
눈으로만 읽고
치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깊이 깨칠 수가
있을 테니까요.
고 차동엽 신부는 "차원을 넘어선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편협한 3차원적 사고 속에 가두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고(故) 차동엽 신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에 살고 있다.
하느님은
3차원 너머에 계신
초월적 존재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결국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3차원적 사고에
가두는 셈이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큰 잘못이다.”
저는
차 신부의 말에서
‘어떻게’가
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읽고
어떻게 성경을 묵상하고
어떻게 성경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하우(How)’가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생각의 울타리를
큰마음으로
한번 무너뜨려 보면
어떨까요.
차원을 넘어선 하느님을
3차원적 사고의 울타리에
가두려고 하지 말고
말입니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