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솨이잔디' 열매 앞에 앉아있는 소리야 씨의 조카 (사진: 소리야 제공) |
#01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비누 냄새가 난다고 했다. 비닐 플라스틱 제품을 제작하는 곳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분명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무궁화 비누를 담는 비누봉지를 만든다면서, 냄새가 좋다고 했다. 사출공장에서 포장까지 하진 않을 텐데, 소리야(Sorn Soriya) 씨는 거듭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완성된 견본품을 기억하는 것이겠지만, 사출공장에서 향기가 난다는 소리야 씨의 말 속엔 사실 너머 진실이 있지 싶다. 소리야 씨는 비누의 향기를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 비누봉지에서 향기를 맡는 걸 거다. 설탕봉지도 만들고, 치킨봉지도 만든다는데, 설탕봉지에선 달달한 내가 나고, 치킨봉지에선 기름내가 날까.
소리야 씨는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스물아홉 살이다. 2015년 경북 성주군 월향 농공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야간작업이 없어서 직장을 옮겼다. 지금은 김포 오리정에 있는 사출공장에서 일한다. 아침 8시 30분에 일을 시작하면, 밤 9시에 끝난다. 거의 매일 공장에서 12시간씩 일한다. 하루 12시간 씩 일하면 한 달에 270만 원을 받는다. 매월 150만 원을 적금하고, 고향 집에 생활비로 25만 원을 보내고, 20만 원으로 생활한다. 캄보디아 가족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면, 50만 원에서 100만 원씩 더 보내야 한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바짝 돈을 벌어야 해서, 야간작업이 없는 날이면 기운이 없다. 일할 수 있는 기한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는 날이 좋다. 일하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좋기 때문에 소리야 씨가 만드는 비닐봉 지에선 담겨져 있지 않은 비누의 향기가 나는 걸까. 비닐에서 향기가 나다니, 한국말은 떠듬거리면서 거짓말은 유창하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공장 노동자 소리야의 진심어린 거짓말이 다행스럽다.
#02 하루 12시간 노동은 열다섯 살에 시작됐다. 소리야 씨 집은 캄퐁참(Kampong Cham)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백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 문맹률이 높다고 한다. 1970년대 말 학살자 크메르루주는 안경 쓴 사람, 글 쓸 줄 아는 사람도 죽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소리야 씨 마을에도 캄보디아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손에 꼽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진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른들 가슴께까지 키가 자라면 모든 아이들이 일을 한다. 소리야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하교 후에 물소를 돌보는 일을 했고,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웃 동네에 있는 고무나무 농장에서 일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농장에서 오후 4시까지 일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이랑 같이 일하면 한 달에 22만 원을 벌었다. 한 사람당 월 5만 원을 번 셈이다. 캄보디아에서 교사 월급이 약 50만 원이라고 한다. 온 가족이 하루 12시간씩 일했지만, 가난했다. 일하다가 형은 허리를 다쳤고, 어머니는 소리야 씨가 스물네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다쳤고, 병들었고, 죽었다. 일하는 몸은 죽음에 이를 만큼 변했지만, 가난은 죽어도 변하지 않았다.
#03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가난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캄보디아에선 고무농장에서 12시간 일했고, 한국에선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12시간 일한다. 하루 12시간을 일한 뒤엔 숙소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다. 일과 후 하루 2시간씩 공부한 결과 한국어능력시험(TOPIK 1) 기초 단계인 1급을 받았다. 다음 단계를 위해 시험을 또 준비하고 있다. 한국 초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도 준비했었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멀리 이직하게 되면서 지금은 쉬고 있지만, 6개월 동안 토요일마다 민들레교회가 진행하는 ‘달팽이 학교’에서 공부했었다. 검정고시 문제집 여백이 새까맣게 되도록 한 단어 한 단어 사전을 찾아 캄보디아 글자로 옮겨 적어 놓으며 예습했다.
그냥 공부하는 게 좋다고 한다. 문제집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당최 외우기 어려운 나라들이지만 공부가 좋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전을 찾는 게 재밌다. 액체와 고체와 기체 같은 외국인들에겐 일상용어가 아닌 한국어가 신기하다. 캄보디아 초등학교에선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진 않았다. 한국에서 구구단을 처음 보았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서 수학 문제 풀기가 제일 어렵다. 캄보디아에서 책이나 신문을 접하지 못해 맞춤법에 맞게 캄보디아 단어를 쓰는 것도 완전하지 않은데, 한국어로 된 검정고시 문제집을 포기하지 않고 푸는 이유는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아침 7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수업하고 나면 어둑해질 때까지 물소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한국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이 설고 어렵다. 그래도 좋다. 한국 초등학교 검정고시 문제집을 풀면서, 물소에게 빼앗겼던 시간을 보상받는다.
#04 구체적인 소망도 있다. 입국한 지 4년 10개월이 지나 노동비자 연장 심사를 받을 때 검정고시 합격증을 심사 서류에 첨부하고 싶다. 비자 연장이 꼭 되면 좋겠다. 한국에서 더 일하고 싶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 한국에서 더 일해야 공부도 더 할 수 있다. 공부를 더 해야, 한국어를 더 잘해야 캄보디아로 돌아가서 장차 희망인 한국어 교사를 할 수 있다. 공부를 더 해야, 돈을 더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05 결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잘한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잘못 사람”이다. 김 목사가 “수리야 씨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말했더니, 눈을 크게 뜨며 부정한다. 단호하게 말한다.
“ | | | ▲ 세례 선서하는 소리야 씨 (사진: 소리야 제공) |
목사님, 나는 잘못 사람이었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 2년 가까이 교제했던 아가씨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1년 넘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헤어졌다고 한다. 실연을 이야기하며 “나는 잘못 사람이었어요”라고 다시 말한다. 무슨 뜻이냐 물으니 교제했던 아가씨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소리야 씨는 고무나무 농장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을 뿐, 마땅한 일도 없었고 돈도 없었던 “잘못 사람”이었단다.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했고, 공부도 초등학교까지 마치지 못했던 “잘못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잘못 사람”으로 살지 않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아가씨가 나이 들도록 마냥 기다릴 수 없어 헤어지게 됐다고 한다. 교제했던 아가씨는 결혼했고, 아기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잘못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소리야 씨는 가족들에게 보낸 돈으로 고향에 농장을 샀다. 고향 농장에서 아버지와 형과 누나 네 명이 함께 농사를 짓는다. 솨이잔디(Svay Chanti)라는 작물을 재배한다.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다며 사진을 보여준다. 갓 수확한 솨이잔디를 앞에 두고 민트색 바구니를 껴안은 조카가 웃고 있다. 외삼촌의 땅에 앉아 있는 조카는 분명 외삼촌을 “잘못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터다.
#06 경북 성주에서 일할 때, 캄보디아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었다. 예배를 드린 후 대구초전교회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교실에 참여했었다. 예배를 왜 드리냐 물으니, “기도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무얼 기도하냐 물으니, “오래 살게 해달라”고, “캄보디아가 행복한 나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단다. 하나님은 “잘못 사람”을 사랑하셔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다고, 캄보디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김 목사도 기도하겠다고 말해주었다. 비자가 만료되어 캄보디아로 돌아가게 되면, 교회를 찾아가겠다고 한다.
대구초전교회에서 찍은 사진에 세례를 받기 전 선서하는 모습이 있었다. 세례를 받았느냐 물었더니, 세례라는 한국말을 모른다. 세례가 무엇인지 모른 채, 세례를 받았지 싶다. 뭐, 어떤가. ‘죄인’이란 말을 몰라도 스스로를 “잘못 사람”인 줄 알고,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해도 “행복한 나라”를 소망한다면, 세례를 베푸는 데 거리낄 게 있겠는가. “행복한 나라”만큼 ‘하나님 나라’를 적실하게 표현할 다른 말이 없고, “잘못 사람”만큼 ‘죄인’을 대신할 진솔한 고백이 없다. 소리야 씨는 ‘세례’라는 한국말을 잊어버렸지만, 세례의 경험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소리야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으리라 김 목사는 믿는다.
#07 목사에게 토요일 저녁은 신경 다발이 팽팽해지는 시간이다. 피곤한 토요일 저녁, 주일 예배를 마저 준비해야 하는 토요일 저녁에 검정고시 강의를 하는 김 목사 목소리에 짜증이 배기도 한다. 문제집에 나오는 단어를 이해할 만큼 한국어로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사전과 사진을 검색하며 공부를 한다. 그런데 수리야 씨 손에 쥔 스마트폰은 액정에 금이 가 있고, 속도도 느리다. 게다가 포털이 제공하는 한국어-캄보디아어 사전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표나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김 목사 목소리와 표정에 짜증이 드러났을 것이다.
소리야 씨는 캄보디아어로 인사말 한마디도 못하는 김 목사 때문에 짜증난 적이 없다. 짜증 돋아난 한국인 목사에게 주눅 들지도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 문장, 단어를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다. 서툰 한국말로 질문하고 다시 질문한다. 약간 미안해하지만, 의문이 풀릴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결국 답을 찾을 때까지, 김 목사가 포기할 때까지 수리야 씨는 흔들림 없이 문제에만 집중한다.
과학문제집을 풀다가 ‘분해’라는 단어가 나왔다. 포털이 제공하는 캄보디아 사전을 찾아봤는데, 사전을 보던 수리야 씨가 물었다.
“‘분해’의 뜻이 ‘이사’에요?”
‘분해’와 ‘이사’는 전혀 다른 뜻이어서 잘못된 풀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해라는 명사를 이미지나 사진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겠어서 쥐고 있던 모나미 153볼펜을 스프링까지 ‘분해’하는 시연을 하며 ‘분해’의 뜻을 설명했다. 볼펜 심과 앞뚜껑과 스프링과 몸체를 나란히 늘어놓고, ‘분해’라 하였더니 이해했다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그러더니, ‘분해’의 뜻이 ‘이사’가 맞냐고 다시 물어본다. 분통 터질 일이다. 성질 더러운 ‘잘못 사람’ 김 목사는 포기하고 넘어가려는데 수리야 씨가 천연덕스러운 눈을 깜빡거리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서는 ‘이사’할 때, 전등이나 수도꼭지, 심지어 문짝까지 주택 내 시설을 전부 ‘분해’해서 가져간다고 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변기나 세면대까지 ‘분해’해서 ‘이사’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캄보디아에서는 ‘분해’에 ‘이사’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한국말 ‘분해’가 캄보디아 사전에서 ‘이사’로 풀이된 까닭이었다. 김 목사가 짜증 났던 이유는 소리야 씨의 서툰 한국말 실력 때문이 아니라, 사전 속 해설의 오류 때문도 아니라, 캄보디아 문화에 대한 김 목사 자신의 무지 탓이었다. 캄보디아 말도 못하고 캄보디아 문화에도 어두운 김 목사가 ‘잘못 사람’이다.
| | | ▲ 문제집을 풀고 있는 소리야 씨 (사진: 김영준 제공) |
#08 비자가 만료되어 한국에서 캄보디아로 이사할 때, 수리야 씨는 무엇을 분해해서 가져갈까. 한 달 용돈이 20만 원인 30대 총각의 세간이야 분해해서 가져갈 만한 게 없을 터다. 눈 내리는 한국에서 입었던 싸구려 겨울옷들이야 가져가봤자 따뜻한 캄보디아에선 짐만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잊어버린 ‘세례’ 증서도 이미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소리야 씨의 말대로 플라스틱 비닐봉지를 만드는 사출공장에서 난다는 비누 향기가 진실이라면, 여기 한국에서 만난 ‘잘못 사람’의 온기도 진실이 될 것이다. 토요일 밤, 공부가 끝나고 악수하던 ‘잘못 사람’의 지친 손에 남아있던 온기를 어떻게든 분해해서 이사하시라 부탁드린다. 빨랫비누의 향기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기였을까.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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