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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환(幻)
밥상을 차리는 여인
김 채 원
1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감정의 훈련도, 또한 그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하는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때부터 죽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서 분명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그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어떤 매혹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그 말에서 스스로를 여자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조금 어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입니다. 저는 이제껏 마흔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여자의 흉내만을 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 목욕을 하고 나서 새 속치마를 꺼내어 입을 때, 혹은 화장을 할 때, 혹은 생리 냅킨을 꺼낼 때 자신이 여자의 흉내를 낸다는 느낌에 젖게 됩니다만 그 외에는 언제나 나의 용모나 성 따위를 전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외부에서 보는 나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 그것일 뿐입니다(다른 여자들도 그런지 어떤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당신이 그 말을 하셨을 때 저는 젊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여자라는 성과, 그 성이 가지는 떨림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입니다. 그 말 자체에는 무언가 설레게 하는, 인생에의 어떤 신묘한 가능성까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가는 것이 단지 멸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떨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확연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서 비로소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늙어가는 사람의 떨림이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늙어가는 사람의 떨림이라기보다 늙어가는 여자의 떨림이란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보면 제가 스스로를 언제나 사람이라고 느끼던 것에서 저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된 것이, 그 자각이 이제라도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로소 여자에 눈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이 나 하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할머니, 이분들은 내가 실제 보았던 인물들이고, 말로만 들었던 증조할머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여자들까지도 생각해보게 되고, 인맥을 통해 면면히 흐르는 여자로서의 숙명 같은 것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모(母)라는 의미,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또한 그 중에서도 동양의 여자, 소나무가 크고 있는 지역의 여자 이런 의미들이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 받을 만한 서구의 자연, 그리고 그들의 깨어 있는 문화가 만들어놓은 개인주의, 저는 한때 그 개인주의에 공감하고 그를 따르려 했습니다만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미덕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그런 깨달음이 망연히, 그러나 어떤 확신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에서만 보던 서양의 잣나무와 솔바람을 품어 안는 소나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자각, 우리가 이 시간 그리고 동양권인 이 공간 속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운명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당신과 만났다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끌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몹시 흥분된 상태이고, 되도록 내일 새벽까지 이 글을 마쳐보겠다는 각오하에 펜을 들었으므로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전 마지막 뉴스로 산불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예비군이 동원되고 헬리콥터까지 소화제를 뿌리고 있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 산불은 오늘 할머니 묘소에서 집안 아저씨와 제가 낸 것입니다.
산불의 모습은 상상을 불허하는 장관스런 풍경입니다.
지진이나 홍수 그리고 산불 같은 자연의 모습 앞에 인간은 그저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렵도록 아름다운, 죄악과 천사가 함께 있는 듯한 그 모습을 그래도 인간이 감당해내야 한다는 일이 이상할 지경입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몫은 아니라고 보아야 옳겠습니다.
또한 그런 대자연 앞에서마저 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일이 내가 없으면 산불도 무엇도 다 없는 것이라는 그 사실이 꿈에서 깬 듯 이상하기만합니다.
뉴스를 본 아저씨가 내일 아침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노모를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고 하니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불을 끄고 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왔는데 불씨가 남아있었나 ……”
아저씨는 말끝을 흐리며 허둥거리셨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화면에 눈길을 주며,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전화인가 묻는 어머니의 소리도 묵살해버렸습니다. 제 눈앞에 지금 이 순간에도 산야의 송림 숲을 잿더미로 만들며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가는 불길의 환영이 투시력을 가진 듯 환히 보였습니다. 할머니의 묘가 다 타버린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망자들의 묘까지 전부 태운 것. 조상의 무덤을 잘 가꾸어야 하는 우리네 풍습에 묏자리가 다 타버렸다는 사실이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심히 두려우면서도 왠지 무덤 속에서 망자들이 훨훨 타오르는 불길에 가슴에 맺힌 응어리들을 다 녹여내린 후련함을 맛볼 것 같은 그런 기분 또한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왜 응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와서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보면 세상사가 모두 손바닥 안에 있다는 그 말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왜 마음은 이렇게 늘 괴로운 것일까요? 사람의 마음속은 기쁨·슬픔·평온·희열·고뇌·비애·공포·고요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하며 그러한 마음이 세상 속의 자연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베토벤의 9번 심포니를 듣고 사람의 감정의 폭이 어쩌면 저렇게도 무한한 것일까, 깊은 공감으로 엎드려 운 적이 있습니다만 천둥과 번개, 바다와 시냇물, 들판·꽃밭·비·눈 둥은 우리의 감정이 형상화된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그 자연을 닮아 우리의 감정이 형성된 것일까요?
그러니까 산 하나를 다 태우고야 꺼질 이 무서운 불길은 저의 마음이겠습니까. 그리고 꺼져버린 잿더미, 간혹 바람에 피식피식 흰 연기만 날릴 그 소화 후의 빈 산 또한 저의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불은 나버렸고 그 무섭게 타들어가고 있는 불기운에 힘입어 글에 대한 아무 지식이나 훈련이 없는 저로서도 이 밤 무엇인가 써 낼 듯한 기(氣)를 감히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향해 어떻게 써야 한다는 일에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2
어머니와 저의 손은 똑같이 생겼습니다.
실지 두 손을 맞대어본 적은 없지만, 마주하면 오른손과 왼손이 만난 듯 아마 꼭 맞을 것입니다. 가름한 손톱 모양과 매듭, 어느 순간 꼭 닭다리로 착각되는 손가락,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손금일 것입니다. 어머니와 저의 운명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 세상에 똑같은 손금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것 역시 확실하게 말할 수없는 것이 어머니와 딸의 운명은 한 줄기이기 때문입니다.
딸은 대개 어머니와 운명을 닮는다고 말하던가요. 제가 가장 어머니와 운명적임을 느끼는 것은 밥상에서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머니는 펄쩍 뛰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종종 자신의 손이 달아서 반찬이 맛이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하여튼 우리 집 김장을 가져다 먹어본 사람은 이 서울 장안에서 이처럼 맛있는 김치는 먹어본 일이 없다고 했지. 저기 어느 집 아주 격식 차려서 음식하기로 소문났다는 김장김치보다 우리 것이 더 맛이 있다고 했어.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식구도 없는데 김장을 백 포기나 했으니까. 그걸 나 혼자 조용히 앉아서 했지. 누구 도움 받는 것도 싫고 해서 말이야. 그렇게 해놓고는 겨울 내내 먹고 아마 초여름까지 먹었을 거야. 남한테 한 바께쓰씩 퍼주기도 했어.”
어머니는 이런 얘기를 자랑 삼아 기쁨 삼아 추억거리로 하십니다. 혹은, “우리 집 된장찌개를 먹어본 사람들 정말 맛있다고 했으니까. 서민음식을 만드는 데는 최고라고들 했어.”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은근히 반감이 솟아오릅니다. 왜냐하면 그 된장찌개는 어린 시절 바로 제가 먹던 것으로, 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김장김치 얘기 때는 무언지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으로 하여 그런가, 정말 그런 것 같다 하고, 긴긴 겨울 동안 광에 파묻은 독에서 김장김치를 꺼내 먹던 정경을 떠올리어 긍정하며 듣고 있지만, 된장찌개 부분에서만은 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잠깐 김장김치 얘기를 할까요.
아파트에서 겨울 동안 먹을 것을 열 포기 정도 담그는 요즘에 그 시절을 떠올리니 그 일은 정말 신선한 감회가 있습니다.
먼저 배추를 트럭으로 싣고 오지요. 혹은 손수레로 오기도 했지요. 그것을 마당에 부릴 때면 뭔가 큰일이 이제 시작되는 스산스러움과 함께 풍성함이 가득 차오릅니다. 우리 집은 층계가 있는 높다란 언덕 위의 집이어서 트럭이 힘들게 올라와 집 앞 길에 부려놓은 후 그것을 다시 큰 대야나 물통에 담아 날랐습니다. 검게 된 목면장갑을 낀 배추장수가 한 걸음에 네다섯 포기씩 나르기도 하고 어머니와 나와 동생도 끼어서 나르면 그 많은 배추가 어느새 다 날라집니다.
배추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잎의 두께가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았지요. 잎 자체에 달고 구수한 맛을 풍기고 있는 배추를 어머니는 잘 골라내셨습니다.
배추 끝에는 커다란 꼬랑지들이 그대로 달려 있어, 가마니에 묻어 두었다가 겨우내 그것을 깎아 먹는 일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커다란 무쇠 식칼로 배추를 쪼개는 일, 큰 포기는 네 쪽으로, 작은 것은 두 쪽으로 마당에서 쪼개었습니다. 머리에 타월을 덮어쓰고 돌아앉아 어머니는 배추를 쪼개었지요. 배추를 쪼개면 그곳에 고실고실한 연한 노랑과 연두색의 작은 잎들이 나타나지요. 그 부분은 따로 소금에 절여 양념을 속에 싸서 먹지요.
다 쪼갠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김장을 시작합니다. 우물가에서 배추를 씻어 커다란 소쿠리에 절여진 배추를 척척 걸쳐 놓으면 전날 그렇게 많아 보이던 배추도 양이 많이 줄어듭니다. 무를 채칼로 채를 쳐서 고춧가루·마늘·파·젓갈 등의 양념으로 버무리고 생굴도 넣었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며 특히 동태를 조금 잘게 썰어 함께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청각도 많이 집어넣으셨습니다.
앞부분이 파르스름한, 너무 크지 않고 맛있어 보이는 무는 동치미 감으로 따로 골라 내놓았지요.
할머니가 시골서 올라와 계실 때면 할머니도 함께 하셨습니다.
마당과 마루에는 김장거리로 즐비합니다. 그런 날은 창호지문을 닫아도 방문이 열린 듯 휑하니 스산스럽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스산스러움이 끝나지 않던 것입니다.
이윽고 어머니가 발을 구르며 들어와 아랫목에 버선발을 파묻고, 시뻘겋게 얼고 불어터진 손을 녹이며 손이 가려워하시던 것, 손이 매워 뜨거운 물에 담그시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둠이 찾아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기고 뒷마무리를 하시던 것, 곡괭이라는 말이 오가고 김칫독을 파묻을 일이 남아 있던 것, 그리고 김칫소를 해서 밥을 먹고 나면 깜깜한 한밤중이었어요.
며칠 후 어머니는 쇠고기를 몇 근 서다가 푹 고아서 그 국물을 식힌 다음 김칫독에 부어 넣습니다.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 김치가 장안의 어느 김치보다 맛이 있다고 하던 것은.
쇠고기 국물이 김칫국물이 되고, 청각과 동태·굴이 시원한 바다의 맛을 더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참, 여름에 담가 놓았던 오이지도 함께 김치 속에 통으로 집어넣습니다. 김치포기를 꺼낼 때 가끔씩 오이도 달려 나오고, 그 오이의 아삭아삭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치와 동치미는 어린 우리 입에도 이상하게 시원하면서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된장찌개 부분만은―된장찌개도 그렇게 맛있어서 서민적인 음식을 만드는 데는 내가 제일이라고들 했지―바로 이 부분은 어쩐지 은근히 반감이 솟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만은 전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싶어집니다. 오히려 바로 그 부분이 내 어린 시절 자라면서 늘 느끼던 갈증의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듦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교원생활을 오래 하셨으나 웬일로인지 잠시 방황하던 시절, 화투로 날을 지내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아버지가 우리 집에 얼굴을 보인 적은 없는데,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얻어 생활하셨고, 동생이 태어나던 해 객지에서 병사하셨다고 듣고 있습니다.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원은 대개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섰다가 아닌 민화투로서 작은 푼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판이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화투를 짝짝짝 다듬어 치시다가 늦은 저녁 때가 되면 다락문을 열고, 부엌에서 떨고 있는 동생과 내게 소리치셨습니다. 다락문을 열어야만 부엌에 그 소리가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얘 가혜야, 왜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 있잖니? 거기다 된장을 한 숟가락 떠다가 더 풀고 두부 한 모 썰어 넣고 마늘 다져 넣고 보글보글 끓여라. 그리구 며루치도 좀 집어넣어라. 그래서 밥하구 상을 차려서 좀 가지구 들어와라, 응. 김치는 새것을 썰어라.”
부뚜막에서 졸듯이 쪼그리고 앉아 연탄 냄새를 맡고 있던 동생과 나는 비로소 부스스 몸을 일으켜 어머니가 지시한 대로 막숟가락과 양재기를 하나 가지고 된장을 푸러 어두워진 장독대로 더듬어 갑니다.
그때 우리가 느낀 것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다 대고 소리치는, 교사까지 지낸 어머니의 교양에 대한 반감이었을까요. 더구나 신비감도 없이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가,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을 땐 방이라고는 화투 치는 방뿐인데, 아이들이 있을 곳이 없는 데 대한 배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바로 그 된장찌개를 이제 와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그 된장찌개가 맛이 있었다면, 첫째는 우리 집의 장맛이 좋았을 것이고(그것은 어머니의 손이 단 데 연유했을 것입니다만,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쑤어 오신 메주에 달렸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침에 먹던, 의 바로 그 먹던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 번 끓였던 것에다 다시 끓이면 그만큼 재료가 여러 가지 많이 들어간 결과가 되고, 아울러 푹 달구어진 맛이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음식에서 늘 영양가를 우선으로 생각했고, 또 아무리 조금 남은 것이더라도 절대로 버리는 일어 없으므로, 그런 것들이 늘 찌개에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두루뭉수리 독특한 찌개 맛을 자아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의 내리듯 생각해보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항상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즉, 된장찌개에 가장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는 일이 대개 빠져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의 음식에서 항상 그 파와 같은 부분이 빠지는 것입니다.
음식점에서 장국밥을 처음 먹어보던 날, 음식점 특유의 그 깔끔한 맛이 후춧가루와 깨소금, 파 같은 양념들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후춧가루라는 처음 맛보는 양념에 거의 경의마저 품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왜 후춧가루와 파와 같은 부분은 생략했는가. 가난했던 탓일까. 그 당시는 전후로 모두들 대강 그냥 끓여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해보려 해도, 그 후 이웃집이나 친구들 집이 그런 것들을 점점 갖춘 생활로 변해감에 비해 우리 집은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빛을 잃은 뭉뚱그려진 음식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을 제가 시큰둥하게 넘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뿐더러 어머니의 음식이 설혹 맛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늘 우리에게 먹게끔 해주었던 그런 따뜻한 밥상은 아니었다는 인상 때문입니다. 누구나 늘 따뜻한 손길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듯이 누구나 다 바로 그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여인, 조용히 묵묵히 끝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여인, 아플 때 와서 손을 얹어주고 물을 떠다 주고, 그리고 매일매일 밀물처럼 닥쳐오는 세 끼의 밥을 따뜻이 먹게끔 차려주는 여인이 비치어 옵니다. 대부분의 옛 여인의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떠오르는 할머니가 그랬으므로 실지 제가 본 생생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듭니다.
어머니와 저는 그런 여인은 아닙니다. 그런 여인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밥상을 깨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솔직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니, 깨부순다는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면 언제까지나 부엌과 밥상에 친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부엌에서 찬바람 같은 것이 돈다고 할까요.
이것을 가히 손금, 어머니와 저의 운명 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잠시 밥상에 대한 것을 접어두고, 긴 겨울밤 광으로 동치미 뜨러 다니던 일을 추억하고 싶습니다.
동생과 나는 촛불이나 남폿불을 밝히고 커다란 양은냄비를 하나 들고 어둠을 휘저으며 광으로 갑니다. 어둠은 회오리바람처럼 불빛 밑으로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우리들의 그림자는 크고 괴상하게 떠오르다가 없어집니다. 광문을 열면 광 속에서 나는 냄새, 습지고 새끼줄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김치 냄새와 어우러져 독특한 냄새를 풍깁니다.
독 위에 덮어진 가마니(그러고 보니 새끼줄 냄새란 바로 이 가마니에서 풍겼을 것입니다)를 치우고 독뚜껑을 열고 싸아한 동치미 내를 맡으며 무겁게 지질러진 돌을 옆으로 밀치면, 흰 동치미 무가 둥실 떠오르거나, 파뿌리·청각·무청·파란고추 같은 것들이 먼저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반들반들하고 너무 크지 않은 동치미 무를 몇 덩이 꺼내 올리노라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 시려집니다.
남폿불의 등갓이 비치는 영역 안에서 이런 일을 할 때면 비밀스런 일을 하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 재미있어지기도 합니다.
알리바바와 도적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는 아니더라도, 땅속에 묻은 것을 한밤중에 꺼내는 은밀한 재미가 있습니다.
김칫독에서 김치를 한 포기 꺼낼 때도 있습니다.
두텁게 덮은 우거지를 들치고 알맞게 절여진 익은 배추김치 한 포기를 꺼내 올립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와서 긴 겨울밤을 먹으며 지냅니다. 남폿불을 켜 들고 방문 밖으로 나설 때는 언제나 약간 싫은 기분이지만 적진을 돌파하는 기분으로 무찌르고 났을 때는 참으로 통쾌하고 후련합니다. 때 아니게 흰 눈이 사르락사르락 내리고 있을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내려버려 마당이고 장독대고 지붕이고 나뭇가지 위에 흰 눈이 쌓여 있는 때가 있습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발이 찬 고무신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뽀드득뽀드득 흰 눈을 밟아 발자국을 내던 그 음향과 감촉이 지금 전해져옵니다. 그때 느끼던 눈의 세계가 지금 갑자기 확 되살아나 가슴이 뜨거워지려 합니다.
방문을 열었을 때 온통 새하얀 눈의 세계가 보이면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반가움이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 집니다. 그 정경은 이 세상에 있는 기쁨이나 행복감을 미리 예견해주는 것 같습니다. 달도 별도 없는 밤이어도 눈의 빛은 제 스스로 인광과도 같은 빛을 발해 세상을 하얀 고요로 쌉니다. 어디선가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앉은 눈을 털어내는 소리가 들리고, 신발에 묻은 눈을 발을 굴러 털어내는 소리도 들립니다.
밤이 깊도록 눈의 고요가 적막 위에 쌓입니다. 그 적막을 더욱 적막 속으로 떨어뜨리는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밤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이 깊어집니다.
밤의 깊은 곳에서는 가만히 무엇인가가 울려 퍼집니다.
저는 동생과 동치미를 먹으며 촉수가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방학 숙제 그림일기 속에 눈이 내리고 있는 풍경을 그려 넣습니다.
벌판 위에 기와집이 한 채 서 있고 바둑이가 대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눈사람이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서 있으며 설빔을 입은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띄우고 있습니다. 눈 위에는 어디로인가 사라져버린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본 눈의 풍경이 아니라 달력이나 어린이 책에서 본 풍경 입니다. 눈송이를 확대해 보면 정육면체 혹은 팔면체의 예쁜 꽃송이라는 눈의 세계, 멍멍이와 눈 위의 하얀 발자국과 벌판 위에 서 있는 집 들창 속의 느낌,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림 속에나 있는 먼 세계로 느끼며 그려 넣었습니다. 그 나이의 내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쉬운 동요였건만, 그 정서를 왠지 벅차하며,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느껴 그리워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싸리문 여잡고 기다리는가, 기러기 달밤을 울고 간다. 이 노래를 생각할 때의 정서 또한 저는 아직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서 이 노래를 들을 때는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몸속에 익을 수 있는 감정이려니 했습니다. 그 세계를 감당 못하여 멀리 느끼기보다는 몸 안에서 우러져 나오는 그런 느낌의 세계이려니 했습니다. 기러기가 우는 달밤에 싸리문을 여잡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렇게 성숙한 여자의 세계를 가슴속에 품고 그리워하며 자랐던 것입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나이 들어가는 여자로서의 떨림, 그러고 보니 그 여자의 성을 저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님을 알겠습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 바로 방학숙제 속의 눈의 세계를 그려넣던 그 시절부터 저는 성숙한 여인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품고 커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그런 얘기를 했을 때 매혹까지 느끼며 처음으로 여자라는 성을 감지하는 느낌을 맛보았던 것은, 어린 시절 눈의 세계를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으로 그리워 했듯 여자라는 성을 그저 그리워만 했던 것인 듯합니다. 누군가 내게 여자의 성을 띄워놓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 속에 있는 무한한 여자, 심포니 9번을 들으며 사람의 감정의 폭이 어쩌면 저렇게 무한대일 수 있을까 생각한 바로 그 감정의 폭을 제게 띄워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뒤늦게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감지하고 무언가 스스로 북받쳐 오르는 어떤 격류에 휘말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것이 바로 이름하여 운명이라 부르는 것일까요. 어머니와 저의 운명이 한 줄기라고 하는 바로 그 운명 말이지요. 그 운명을 얘기하기 위해서 좀 더 저의 지난 시절들을 들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3
내 나이 그때 서른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다가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 퍼지는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 년 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가장 직접적 인 원인은 결혼예물 때문이려니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해가지고 가지 않았으며, 장릉은커녕 이불조차 변변히 해 오지 않은 제게 친척들은 따가운 눈총을 주었습니다. 무엇인지 쑤군쑤군대다가 제가 방에 들어가면 방 안 가득히 모여 앉았던 친척들은 말을 뚝 끊었습니다.
자기 그것만 믿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시집가려는 여자들, 이라는 구절을 요즈음 와서 어느 소설에서 읽었을 때 저는 저절로 얼굴을 붉혔습니다. 바로 제가 그런 꼴이었으니까요. 한 여자로서 성숙되지 못하게 그저 어리광 부리듯 결혼이라는 대사를 치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태도는 남편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긴 떳떳하고 정당하게 성의껏 자신의 예물을 준비하는 정성스런 태도가 요즈음 와서 좋게 보이기도 합니다. 예부터 사람들이 왜 예물을 그리도 중요하게 챙겼으며, 그런 일을 소홀히 하며 오로지 사랑을 우선으로 내세울 것 같은 서구에서도 지참금 운운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뒤늦게 새삼 깨닫기는 합니다. 인도의 어느 곳에서는 며느리가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아서 굶겨 죽였다는 일화도 있다던가요. 그리하여 저의 태도가 잘못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저는 아니, 라고 단호하게 부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젊은이가 아닌가. 무엇인가를 장만해 간다는 것은 젊은이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준비가 되어 있을 리 없다. 이제까지 길러준 부모에게 그것마저 어떻게 해 받아 가는가. 둘이 힘을 합하여 앞날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대신 나 역시 남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지 않는가. 오로지 내 뜻은 자신들의 힘으로 함께 살아가자는 것뿐이다. 이런 말들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대신 저는 버선과 속치마만은 넉넉히 마련해 갔습니다.
얘, 버선은 좀 몇 켤레 충족하게 가져가라. 집에서도 양말이나 스타킹보다 버선을 신고 있어. 그래야 발이 펴지지 않고 이뻐지기도 해. 그리고 버선은 벗었을 때 엄지발가락하고 둘째 발가락 사이에서 갈라진 금이 정말 얼마나 예쁘니? 그것처럼 섹시한 게 없어. 여자들 가슴 가운데 갈라진 선보다 더 그런 것 같애. 그리구 잠옷 대신 한복 속치마를 입어, 그게 훨씬훨씬 이쁘다.
시집을 안 간 사촌언니가 꼭 늙은이처럼 이렇게 말하며 제게 버선과 속치마를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음 씀씀이를 전혀 쓰지 않아 남편에 대한 예의를 아주 저버렸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첫출발하는 다른 모든 여자들처럼 그 출발에 꿈과 기대를 걸고 저대로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등한히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결혼예물을 의례적으로 해가는 사람들보다 버선이나 속치마에 색다른 꿈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신혼여행 중 바닷가의 횟집에 앉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남편이 제게 물었습니다. 수평선이 퍼렇게 일어서던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물새 우는 소리가 들렸던가, 바다 소금 내가 커다란 그물막처럼 한겹씩 한 겹씩 갯벌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며 살고 싶다고 저는 말했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가 지금 생각하면 의아스럽습니다. 그 당시의 저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싶다든가 그런 유의 말을 했을 법한데, 결혼 육 년의 생활을 청산한 뒤 결혼이라는 것을 뒤돌아 생각해볼 때 떠오르는 말을 그 당시의 제가 했다는 것이 이상스럽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아침식사 때 그는 토스트를 먹기 바랐습니다(아마 제게는 빵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토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렸나봅니다). 계란과 우유, 설탕을 넣고 휘저은 속에 빵을 담갔다가 버터로 프라이팬에 지지는 프렌치토스트를 접시에 담아 내놓자 그는 벌컥 성을 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음식이 잘못 되면 아까우면서도 지체 없이 버렸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살림이어서 간장 한 종지, 기름 한 방울 아껴야 한다는 생각보다 우선 그에게 떳떳한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과제가 앞섰습니다.
저는 생각했지요. 제가 요새 여자들처럼 호강을 하다가 온 여자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막숟가락을 가지고 된장을 뜨러 어둠 속 장독대를 다니던 여자다, 그때부터 죽 밥 짓고 반찬 하는 일들이 훈련되어 있다, 어머니의 말대로 격식 있는 음식은 못한다 해도 밥 지을 줄도 김치 담글 줄도 모르는 여자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왜 이렇게 숨쉬기마저 곤란한가. 저는 그만 가져온 버선도 속치마도 입지 않고 오로지 살림과 싸우기에만 분투했지요. 이 괴물 같은 살림아,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고 들러붙으며 저는 애꿎은 살림 쪽을 원망했습니다.
생일이나 환갑잔치 등으로 하여 친척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그는 항상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스스로 창피해지고 자존심이 상하여 잊고 있던 결혼 당시의 장면들이 되살아나는가봅니다.
샐쭉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초리를 보며 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썰렁해져서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울음을 삼키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곤 하였습니다.
제게 돌아올 용기를 직접적으로 부어준 것은 눈입니다.
홀시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때의 눈, 그 눈의 아우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관 가득히 벗겨져 있는 문상객들의 구두를 차례로 정돈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들었을 때, 현관문 하나 가득히 새까맣게 떨어져내리고 있는 눈을 보았습니다.
추운 엄동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그 사이로 눈은 내려오기에 고심하면서 비집을 틈이 없는 공간 속으로 새까맣게 떨어져 내렸습니다I. 저는 검은 치마저고리의 상복을 입고 구두 정리를 하던 그대로 허리를 굽힌 채 잠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마, 눈이, 라고 뜻도 없이 중얼거리며 주저앉을 때, 고무신이 벗겨져 나간 제 버선발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갈아 신지 못한 버선은 부엌 바닥에서 찐득한 때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시댁으로 올 때 갈아 신을 버선을 가져오지 않은 탓이지요. 이상한 불행감이 저를 휩쌌습니다. 제 인생이 바로 이 버선 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례차에 실려 장지로 가던 날도 눈이 쏟아졌습니다. 눈 때문에 세상은 환하고 장례용 버스 밑에 관을 싣고 우리는 잠시 망자의 일을 잊은 채 며칠간의 고된 밤샘으로 인해 반졸음 상태에서 눈의 벌판 속으로 그저 달리기만 하였지요. 눈이 떨어져 차창에 수북이 앉았습니다. 성에가 가득한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밖을 보았습니다. 눈은 먼 곳에서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와 제가 앉은 차창으로 다가왔다 멀어지고 다시 다가왔다가 멀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기도 하였습니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눈에서 육면체·팔면체·십육면체의 눈꽃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품었던 눈의 세계가 갑자기 되살아났습니다.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와 기쁨과 행복의 감정을 미리 맛 보여준다고 누꼈던 눈 오는 날의 정감 말입니다.
가까이 왔던 눈이 멀어지고 또 새로운 눈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공중에는 수많은 선들이 서로 얽히다가 하나의 뿌우연 면으로 변해버리기도 했습니다.
눈벌판이 지나고 나무들이 군데군테 서 있고, 흙더미가 검 게 뒤집혀져 있는 빈 들판이 계속되었습니다. 누군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부삽으로 흙을 뒤집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상을 찌푸렸습니다. 그 더러운 곳에서 제 더러운 버선발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눈 속에 저런 더러운 자국이 있다니, 그냥 무한한 흰 눈의 세계일 수 없을까. 이 세상을 하얀 고요로 쌀 수 없을까. 저는 장지로 가는 동안 점점 세찬 어떤 감정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드디어 저는 그를 원망하면서 짐을 쌌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다른 집 어머니처럼 내게 그렇게 잘해 보내지 못한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요. 그렇지 않았다면 일평생 모르고 살 뻔하지 않았어요. 일평생 남편을 제일인 줄만 알고, 제일 위에다 올려놓고, 그런 밑바닥에 깔린 감정을 볼 수 없었을 게 아니에요. 그런 것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게 무사한 결혼생활보다 훨씬 다행스러워요.”
이 말을 하고 난 직후의 그 자유스러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듯 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국 돌아오고 말았으며 그는 회사에서 파견되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남편의 파견이 구실이 주었으나 실은 저는 돌아온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돌아온 것은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이 결혼예물 때문이려니 했습니다. 어려운 인생의 관문인 결혼이 출발부터 잘못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차츰,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지엽적인 것이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 딸이 어머니 운명을 닮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 다시 말해 그것은 운명의 손길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버려두었듯, 즉 어머니가 남편을 섬기며 사는 여자이지 못했듯 저 역시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면 남편이 꼭두각시처럼 느껴져 멀리 떠나 있는 그에게 미안감과 아울러 차라리 측은한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그는 사우디에서 몇 통인가의 엽서―햇빛이 너무 살인적이어서 옆 건물에 잠시 갈 때 신문지를 머리에 펼치고 뛰노라면 우박 쏟아지듯 햇빛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를 보내기도 했으며, 그곳에서의 임기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인편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는 그냥 제 운명의 역할을 충실히 해준 저의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음식이 마음에 맞지 않아 화를 내고, 친척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눈을 샐쭉하게 내리떠야 하는 역을 맡은 것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밥상을 깨부순다는 표현처럼 너무 과격한 것일까요.
저는 왜 저 자신을 밥상을 깨뜨린다고 생각하려 드는 것일까요.
어머니와 살면서 저녁밥 짓는 시간을 가장 아늑하고 보람되게 느끼면서……종종걸음으로 달˙러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장에서 파를 한 단 사 올 때, 이런 아늑함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조바심 섞인 의구심마저 품으면서 말입니다. 집의 불빛이 창으로 보이면 저는 숨을 멈추듯 결음을 멈추고 아, 하는 감회와 함께 다른 인생을 찾아 남의 인생을 살아주기 위해 어디 멀리까지 헤매다가 이제 제 운명 속으로 돌아온 안도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시집가기 전에 쓰던 장롱과 거울, 조그만 책상 같은 것들이 그대로 놓여 있는 내 방에 누워 있으면 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제 어린 시절에 뿌리를 내린다고 할까요. 인생에 뿌리를 박는 것은 옛 시절이 배어 있는 내 집을 떠나서는 헷갈린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운명 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정말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요. 우주의 질서 그 안에 인간 개개인이 타고난 시간과 공간이 만난 어떤 한 점, 이것이 운명의 사슬이 되는 것일까요. 그러면 제 운명은 과연 어떤 것이며 거기서 해방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정녕 나보다 멀리 갈 수 없으며 나보다 창조적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제가 돌아온 후로도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갓 삼십을 넘기고 돌아온 저는 어느덧 노모와 단둘이 사는 아늑함에 젖어 있는 중년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헐벗지 않아도 될 집이 있고, 그리고 절약해가며 생활을 해나갈 만한 돈이 있어, 집과 시장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 누구의 간섭을 받거나 하지 않고도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기쁨이 큽니다.
알찌개를 한다거나 생선을 구워 남기지 않고 알뜰히 상 위의 것을 비워나가며 텔레비전을 즐기는 지녁시간의 안락함은 실로 이제까지 어머니와 제 인생의 어느 부분보다 빼어나게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명의 줄기에서 제 동생만은 제외되어 있는데 멀리서 행복한 가정을 꾸며 잘 살고 있는 동생 영혜를 생각할 때면 저는 항상 대견스럽고 가슴이 뿌듯해옵니다. 동생이 간호원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거기서 독일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저는 터지는 웃음을 참을 길 없었지요.
그러나 그런 안락함 속에서도 왠지 모를 갈증을 솔직히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울면서 달려들기도, 또 무언지 모를 불만을 한숨 섞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검버섯이 피어나는 칠순 노인인 당신과 내가 같을 순 없지 않겠어요. 그 한숨의 뒤끝에는 이런 속말이 저절로 중얼거려지는 것이었어요.
4
당신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返)의 이치라는 것을 그런 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일까요.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이치, 무엇인지 극에 달해 더 나아갈 수 없는 듯할 때 새로운 어떤 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날 가까스로 감자 두 알을 벗기며 제몸이 움직여주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이 진정 하기 싫고 몸이 움직여주지 않아 짜증스러웠습니다. 다른 아무런 생활도 없이 오로지 이 실내의 아늑함에만 젖어 방석커버를 만든다, 스웨터를 떠본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지내는 이 생활에 말할 수 없는 답답증을 느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된장찌개를 끓이거나 굴비를 구워 어머니와 단둘이 알뜰히 상 위의 것들을 남기지 않고 다 비워내는 일에도 저는 심한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제가 때로 외식을 하고 영화라도 구경하고 들어오는 작은 기쁨마저 생활에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감자를 벗긴 후 볶음을 하려고 보니 면실유가 떨어져 있기에 손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 슈펴마켓으로 향했지요. 현관문을 닫는데 어머니가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저는 왠지 심사가 사나워져서 못 들은 체 쾅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제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쾅 하고 닫히는 듯 어떤 어둠이 일시에 몰려드는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쾅 하고 닫히는 그것은 이제까지의 제 생활이 쾅 닫혀버리는, 어떤 새로움의 장을 기대해보는 소망의 마음이 깃든 소리로도 느껴졌습니다.
처음 어둠 속에 서 있는 당신을 발견했을 때 저는 당신이 저의 상상의 산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당신의 출현은 의외였으면서도 또한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길을 물었지요.
당신의 부름에 잠시 멈추는 순간, 길에는 아무도 없고 당신과 저 둘만이 있었습니다. 길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전부 멀어져간 것입니다. 당신은 물론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묻고 있는 집, 당신의 옛집을 충분히 잘 가르쳐드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담 밖에 서서 그 집을 넘겨다보았습니다. 등나무 덩굴이 드리워진 창으로 불빛이 흐를 뿐 집 안은 조용하였습니다. 그 집에서인지 다른 어느 집에서인지 간간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뒤꼭지에 미련을 남긴 채 몸을 돌렸습니다. 이상한 끌림, 이대로 돌아서고 싶지 않은, 한마디 얘기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이끌고 슈퍼마켓을 향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면실유와 몇 가지 물건을 사가지고 나오다가 그 골목에서 나서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레 조금 전 당신이 길을 묻던 그 지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지요.
당신은 미처 하지 못했던 인사를 제게 하였지요. 그리고 덧붙여 물었습니다. 그곳이 자신이 찾는 집인 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았는가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수학의 공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과 제가 만났던 일, 그리고 그 후에도 공중으로 떠도는 전자파와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수치를 끊임없이 제공하여 계속해서 이끌어왔던 걸로 생각됩니다.
당신과 처음 만난 삼 일 후 다시 그 장소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전자파와도 같은 수치의 공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저는 매일 저녁녘 어스름이 내릴 무렵 손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저녁 찬거리를 서 오는 길에 왠지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해지곤 했습니다. 골목 앞에서 골목 저쪽 당신의 옛집이 있는 부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늘 어둠이 몰려 있었고, 그러면 저는 당신은 제 상상의 산물인가 다시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외로운 나머지 제가 어떤 일을 스스로 꾸며낸 것이라고요. 밤에 꾸는 꿈처 럼 낮에 눈을 뜨고 꾼 꿈일 뿐이라고요.
그 당시의 저는 어머니의 검버섯과도 같은 그 칙칙함,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었으니까요. 밥상 위의 것들을 말끔히 남기지 않고 비운 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즐기는 그 즐거움이란 사실 내게 있어 허위가 아니었을까요.
아니, 이렇게 말한다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거기에도 일상의 아늑함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무엇보다 고마워했습니다. 이런 조용하고 아늑한 생활이 언제까지 가려나 스스로 조바심마저 쳐졌으니까요. 그러면서 한편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등줄기로 진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나보다 더 멀리, 나보다 더 창조적으로를 구호처럼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것인가 하고 허망한 심정이 자주 되어졌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그 당시의 저는 희망이 없는 노년과 같았다고 할까요. 칠순을 넘긴 저의 어머니와 같은 형편에 저를 몰아넣고는 이대로 먹고살 최소한의 돈만 있으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되고, 현관문을 닫은 후 그 안의 생활에서만 진정한 아늑함을 찾으리 했던 것에는 확실히 무언가 무리가 있었습니다.
삼 일째 되던 날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역력한 반가움의 빛을 저는 어둠 속에서로 잘 분간해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 생긴 동네 지하다방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그리고 위스키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좋았으므로 몹시 부끄러워했으며 당신이 제게 전화하겠다고 했을 때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당신은 또 제게 물으셨지요, 그날 당신이 찾는 집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었느냐구요.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쪽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무슨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묻는 일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체에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서 였을 거예요.
어린 시절 살던 집이 그때 골목에서 제일 막다른 집이었는데 그 위로 길이 트이고 새로 집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노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정말로 동네가 많이 변했군, 중학생 때 이 집을 떠났는데, 산 위로도 또 마을이 하나 생겼으니 못 찾을 밖에, 혼잣말처럼 하였지요.
그 후 당신은 보름간이나 제게 전화를 주지 않으셨지요.
저녁마다 찬거리를 사가지고 오는 길에 그곳을 지났지만, 저는 잠깐 머물러 살필 뿐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비운 그사이라도 당신이 전화를 걸면 안 되겠기에 말입니다.
저는 하루 종일 전화 옆에 붙어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했습니다. 목욕을 할 때면 물소리가 크지 않게 숨을 죽였습니다. 청소를 할 때나 빨래를 널기 위해 베란다에 나가 섰을 때일지라도 전화벨 소리가 잘 들리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간혹 전화가 불통인가 수화기를 들어 확인해보기도 했지요. 전화는 불통이기나 한 것처럼 계속 울릴 줄을 몰랐으니까요.
당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전화를 받을 때의 실망감, 드디어 저는 발광이 났습니다.
저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이 서고 있는 시장거리로 가서 동동주를 마셨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시장 한쪽에 장터가 서고 있었지요. 강원도 호박엿, 춘천막국수, 평양냉면, 전주비빔밥 등 팔도의 음식이 소개되고, 싸구려 옷가지를 벌여놓고 여러 가지 놀이도 벌어집니다. 혼자 마시는 것이 안 되었던지 제가 늘 가는 야채가게 아줌마가 상대를 해주어 함께 마셨습니다. 제가 술을 잘 마실 소지의 여자임을 처음 알았지요. 술은 얼마든지 제 허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별로 취기가 오르지도 않았어요.
동동주를 마시고 나오는 길에 기분 삼아 동그라미 던지기를 하였습니다. 천 원을 내고 링 다섯 개를 받아가지고 겨냥도 별로 않고 되는대로 던졌습니다. 콜라 한 병, 소주 한 병, 담배 두 갑, 해태 봉봉, 과자, 캐러멜 등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던진 링 하나가 제일 뒤에 있는 대두 한 되들이 소주병에 가서 걸렸습니다. 둘러섰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사진관집, 복덕방, 페인트가게, 과일가게. 슈퍼마켓의 젊은이들이 다 한 번씩 던졌지만 모두 실패였다고 해요. 물론 모두 다 그 대두 한 되들이 술병을 겨냥하고 던진 것이지요.
링은 무게가 전혀 없이 가볍게 만들어져 정확한 겨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겨냥도 없이 막 집어 던진 제 것이 덜컥 맞아떨어진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숨은 힘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는 바로 당신을 그리워하는 강한 힘이 작용했던 것이에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큰 술병을 들고 그곳을 빠져나와 집에 와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술이 올라 붉은 반점이 얼룩진 제 얼굴이 꼭 도깨비 같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마, 어쩌면 이렇게 도깨비 같을까, 도깨비가 꼭 이렇게 생겼겠지라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서가에서 동생과 제가 결혼 전에 읽던 최면술이나 무슨 마술, 염력, 심령술 등의 책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저의 간절한 마음을 전할 강한 주파수의 방법을 알고 싶어서지요.
아아 무슨 마술이 없을까, 그 어떤 묘법이 없는 것일까, 악마와 결탁할 수는 없을까, 어떤 흥정이 가능한 것일까. 제게 있어 중요한 어떤 것을 내어놓고, 그러고는 당신과의 연(戀)을 가능하게……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이란 무엇일까, 저는 숨 가쁘게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지요.
그러기를 며칠여 만에 드디어 당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저는 추운 바람이 불어오듯 몸을 흐읍 하고 떨었습니다. 정말 추운 바람이 제 몸을 강타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목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웃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어요. 그 순간의 행복, 그 찰나적인 행복, 어떤 불안의 요소도 있을 수 없는 첫 시작의 느낌.
분출되는 분수의 이제 막 솟아오르는 물줄기, 아직 절정으로 올라가기에 느긋한 여유가 있는, 아니 그런 것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저 자신 물줄기가 되어 뿜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탕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한 후 머리를 세트로 만 채 저녁을 지었습니다. 당신의 전화를 받고 집을 빠져나오기까지 저는 일 초의 여유도 없이 발을 동동동 구르며 바삐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러고는 집을 빠져 나갔을 때의 그 통쾌함이란.
외출다운 외출을 한 지 까마득한 지경이어서 신고 있는 구두나 옷차림에 몹시 신경이 써졌습니다. 왜 무리를 해서라도 옷을 장만하지 못했는가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당신의 전화에만 신경을 집중하느라고 다른 일을 염두에 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명한 어느 호텔 커피숍으로 가기 위해, 택시 운전사는 차에서 두 번이나 내려 사람들에게 장소를 물었습니다. 그 호텔은 이즈음 새로 지은 아직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가 봅니다. 고층빌딩과 널찍한 길이 뚫린 새로운 도시 강남은 제게 무척 낯설고 조금 두렵기도 한 곳
이었습니다.
그곳의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증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였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던가요, 같은 반의 부유한 친구가, 이것 우리 아빠가 미도파에서 사 온 거다라고 말하며 얼음사탕을 조금 떼어주었을 때, 미도파라는 처음 들어보는 그 리드미컬한 어음과,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친구의 아버지쯤 되는 부자,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탕이 아니고, 꼭 얼음처럼 생긴 얼음사탕의 모양도 무척 특이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커진 후 어느 날 중심가에 어머니를 따라서 나갔다가 미도파라고 씌어진 건물을 보았고, 그것이 백화점이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전함이 기억났습니다. 바로 그렇게 강남의 거리는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곳이겠지요. 그럼에도 제게는 어쩐지 자격이 모자라는 것같이만 여겨졌어요.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아름답게 단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젊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새로 생긴 이곳 길이라기보다 당신 앞에 나타나기 위해 저는 무척이나 모자란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당신에게 애정을 구하면서도 이런 부수적인 것들이 자리하는 것을 쓸쓸히 느꼈습니다.
커피숍은 사람들로 몹시 붐비었고, 당신은 그곳 이 인용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전부 비어 있고, 한적하고 그렇게 좋았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당신의 그 말에 내 속에서 품었던 의문이 비로소 살아나며 저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바로 이런 곳으로 오기 위해 운전사까지 택시에서 두 번 내린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났던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온 첫 장소가 어디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도떼기시장 같은 곳, 당신은 사람들에게 떠밀리듯 겨우 가장자리 이 인용 조그만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있어야 했으니까요.
당신은 몽상가라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살던 집을 세월이 흐른 뒤 찾아보는 그 행위도 보통 사람으로선 있기 힘든 일이지요. 한바탕 웃고 나자 당신과 저 사이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급격히 간격이 좁혀진 것 같았습니다. 예부디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 생각되어지기도 했지요. 하긴 우리는 그 옛날 한번 스친 일이 있지요. 당신은 기억 못하시지만 저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날 우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걸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저녁 후 산보 나온 부부로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름 내 자란 플라타너스의 밑가지는 우리의 키보다 낮게 잎을 드리워 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허리를 굽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며 나뭇가지가 우리의 키보다 밑으로 내려올 때마다 허리를 굽히는 그 리듬은 일정하게 반복되었고, 우리는 그저 간간이 몸을 서로 스치기도 하며 걸었습니다.
당신과 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어느새 3년이 지났습니다. 횟수로 따지면 불과 서른 번을 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나는 일을 두 달이고 석 달이고 건너뛸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크나큰 차이이지요. 오로지 그것이 중요하지요.
만나지 않아도 누군가 저기 어디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의 생활은 달라지며 매일매일 노력하게 됩니다. 손지갑을 챙겨 들고 저녁에 시장에 나갈 때의 행동 하나만 보더라도 예전과 다릅니다. 감자를 벗기는 일, 빨래를 너는 일 하나에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 바로 그 떨림이 배어 있는 그런 표정과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조심스럽고, 남자를 그리워하는 몸짓이란 그렇지 않은 행동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5
쓰기를 멈추고 팔을 뻗어 담배를 찾습니다.
어느새인가 제게는 담배 피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책상에서 잠시 내려와 방바닥에 앉아서 담배연기를 후욱 내뱉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옛날 할머니들이 담배를 피우던 기분 그대로가 제 숨 속에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밖은 괴괴하고 간혹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방에서 나는 밭은기침 소리도 들립니다. 늦가을의 바람은 예상 외로 차고 매워서 아까 저녁 무렵 빨래를 걷으러 베란다에 섰을 때 헝겊에 얼음이 낀 듯 빨래들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바람이 계속 일어 소화 작업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생각나서 불안스러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불은 아직도 타고 있을까요.
시커먼 밤 속으로 타들어가는 거대한 불더미를 떠올리며 저는 두 개비째의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실은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만, 지금 입에 술을 댄다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셔버릴 것이고, 그러면 이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기에 참습니다. 지금 펜을 놓아버리면 다시는 잡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타고 있는 동안만 바로 그 기운에 힘입어 저는 무엇인가 제 안에 있던 것, 제 안에서 나오고 싶어 하던 것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어마어마.
허둥거리며 음식을 싸가지고 갔던 무명보자기와 벗어 놓았던 코트로 불길을 향해 내려치면서 그 순간이 요원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설명하기 힘듭니다만 여기가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인지, 이 세상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내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으면서도 정신은 말짱하였습니다.
처음 여유를 가지고 삽으로 불길을 내려찍던 집안 아저씨도 갑자기 우리를 에워싸고 바람 부는 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불길을 향해 정신없이 부삽으로 흙을 퍼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산불을 낸다, 그 무서운 산불이 우리에게 닥쳤다, 꿈이 아니다, 정말 어이없이 우리 앞에 벌어진 일이다, 아저씨도 저도 허둥거리며 점점 빠른 속도로 움직여지는 팔놀림에는 이런 뜻이 담기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느낌은 또한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 당시의 느낌과도 흡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게 다가온 일이다 꿈과 같이, 라고 저는 중얼거렸지요.
어머니와 현관 안에서의 생활로 인생은 지나가 버리는가보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이제 마감을 하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이 나타났던 바로 그 느낌과 흡사합니다.
저는 조금 높은 지대, 마을과 논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서 소리쳤습니다. 여보세요오, 불이 났어요오, 얼른 와주세요오, 불났어요 불이요오―나무들 사이로 제 목소리는 퍼져나갔습니다만 올려 미는 바람 때문에 곧 내게로 되돌아오는 듯했습니다.
무덤들 사이로 불길이 퍼져나가는 소리, 군불 지필 때와 비슷한 냄새, 아저씨가 삽으로 내려치는 소리 속에 서 있으면서 잠시 순간이 영원으로 멎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당신을 처음 만나던, 당신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길에 있던 모든 것이 멀리로 물러나고 오직 당신과 저 둘만이 있는 듯 느껴지던 그 순간과 흡사합니다.
평화로운 산과 논밭·들판,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닭 울음소리 그리고 아이들 소리, 한낮의 햇빛과 바람 속에서 긴박감을 알리는 제 소리가 전혀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래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이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아마 이 세상이 아닌가보다. 도깨비방망이를 흔들어 어딘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잠시 열린 것 같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쯤 소리쳐 놓고 다시 돌아와 아저씨와 떨어져서 다시 외투로 내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논두렁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던 마을 사람 몇이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굵은 소나무가지를 꺾어 들고 익숙하게 불길을 다잡았습니다. 불길은 잡히는 것 같다가 다시 더욱 밀려나고 다시 마을 사람들 손에 잡히기를 계속했습니다. 산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더 달려왔고, 결국 불은 십여 분 만에 꺼졌습니다. 시계를 보니 그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참 오랫동안 불끄기 작업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타버린 할머니의 묘 주위 여기저기 앉아서 마을 사람들은 아저씨가 권하는 담배를 땀을 닦으며 피웠습니다. 불길이 그만해서 잡혔기 다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가을부터는 산에서 담뱃불 하나도 붙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산에 있는 마른 잎, 마른 가지, 마른 덤불, 모든 것이 불감인 것이라고요. 아저씨와 저는 처음으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런 것도 모르고 묘에서 키만큼 자란 억새풀들과 마른 잔디 봉분 가장자리로 제멋대로 뻗어간 밧줄 같은 덩굴들을 낫으로 잘라내어 한쪽에 놓고 성냥을 그어댔던 아저씨가 차라리 천진스러워 보였지요.
우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의 뜻으로 수없이 머리를 숙이고 막걸리나 받아 마시라고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돈과 저의 것을 합해서 오만 원을 그분들에게 드렸습니다.
타버린 흙더미 속에서 간혹 피식피식 흰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며 아저씨와 저는 안심이 안 되어 한 시간여를 더 앉아 있었습니다. 다 꺼진 불이라고 별로 걱정도 안 하며 내려가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자연의 익숙한 솜씨를 보았습니다.
저는 주섬주섬 김밥을 싸 왔던 찬합과 김치를 담아 온 스테인리스 통을 챙겼습니다. 그것들은 꺼멓게 그을리고 숯검댕을 묻혀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무명보자기에 그릇들을 챙기고 나서 그제서야 아까워하며 코트를 살피니 코트는 소매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검댕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것이지만 애착을 느껴 왠지 해가 갈수록 아껴 입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전적인 칼라의 선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만, 언젠가 당신도 잘 어울린다고 한 번 얘기해 주신 적이 있지요.
흰 연기가 솟고 있는 흙더미를 밟아주며 돌아다녔습니다. 흙더미는 따뜻한 기운으로 녹직녹직하고 한결 부드러워져 있으며 소나무에서 송진이 흘러내려 짙은 송진 냄새가 났습니다.
아직도 무언가 안정이 되지 않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에게 한 개비 얻어 같이 피우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그냥 꾹 참아 눌렀습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커다란 산줄기와 그리고 산의 능선을 따라 파랗게 일어나고 있는 하늘이 신선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줄기와 능선의 아름다움은 할머니의 묘를 찾을 때마다 돌아올 제 보게 됩니다. 묘를 향해 올라갈 때면 산봉우리를 뒤에 두기 때문에 돌아서서 잠시 멈추어 설 때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 내려올 때는 죽 산봉우리가 푸르른 하늘과 맞닿아 만들어내는 능선을 바라보며 내려오게 됩니다. 산줄기는 거대한 산맥을 이루어 아마 삼팔선을 지나 이북까지 그대로 뻗어나갔을 것입니다만 이곳서는 높다란 여러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태백의 줄기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북오도청에 등록되어 있는 단천군민묘지, 그런 고유명사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이곳이 단천군민묘지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건만 처음 그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더구나 이곳에 누워 있는 망자들이 전부 실향민이라는 사실도.
왜 이제까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의아함마저 들며 불시에 어떤 감정이 솟아올랐습니다.
실향민, 그렇습니다. 어휘 자체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짙은 이북지방의 색채, 그중에서도 함경도.
저는 우선 친척 중의 한 분인 순젱이를 떠올리고, 그리고 그 비슷한 내음을 풍기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어쩌다가 시장 포목점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무언지 모르게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경도 분이시죠? 라고 물으면 그쪽에서도 갑자기 얼굴을 펴며 어떻게 알았지요? 라고 묻지요.
저의 어머니가 함경도세요.
함경도 어디?
남도 단천요.
어이구 저어 위구마. 어쨌든 반갑소이, 애기 엄마.
이런 말을 쉽게 건네고는 값을 조금 깎아주기도 하지요.
서울에서 지낸 지 오래되어 이제는 거의 서울말을 쓰고 있어도 그 억양이나 어투 어디에는 꼭 특이한 꼬리를 달게 마련이지요. 저는 함경도를 가본 적도 물론 없고 얘기도 별로 듣지 못했으며 친척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한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나 어머니 고향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어떤 느낌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않다가도 함경도 사투리를 들으면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듦을 어쩔 수 없습니다.
고향이란 정 말 특이한 어떤 것인가 봅니다. 왜인지 그 훈훈한 냄새, 저절로 손을 잡고 싶어지는 마음, 그곳이 이남에 있지 않고 삼팔선 저쪽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아내는 그 실향민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절실해지는 건지 모릅니다.
“함경도 사람들 실루 측살하고* 인색하지비.”
제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는 함경도 사투리로 얘기하곤 하셨지요. 어머니는 밖에 나가서나 우리들에게는 표준말을 쓰다가도 할머니하고는 함경도말로 얘기하셨습니다. 할머니 먼 친척 되는 어떤 아저씨가 월남한 후 할머니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데 곶감을 한 꼬치 사 오셨습니다.
“그래, 그 곶감 한 꼬치가 뭐이요. 그만하면 살 만한데, 에구우 실루 측살하지비.”
어머니가 이렇게 얘기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실루라든가 측살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는지요. 첨관이라는 말을 알아들으실 수 있으세요? 새쓰개는 어떻고요?
그런 말들은 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말 자체로 그냥 이해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는 듯이 여겨집니다. 그것을 번안하는 즉시 거기에 끼인 독특한 특질이 없어지고 마니까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순젱이입니다.
그녀야말로 제가 잘 알 수 있는 실향민입니다. 생김새부터가 몽골리안을 여실히 나타내주고 있지요. 높은 광대뼈와 반듯한 얼굴, 그 이마에 띠를 두르고 새털이라도 하나 꼽으면 영락없이 인디언 추장의 모습이 될 그런 용모입니다. 피부는 햇빛에 그을어 반들반들하고 눈에서는 정기가 납니다. 거무스름한 쥣빛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으면 그 몸 전체가 무슨 산악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맑고 강인하고 그리고 용맹스럽습니다.
이름은 순정, 성은 무엇인지 모릅니다. 할머니 사촌언니의 딸이라고 하지만 할머니와 성은 다를 것이겠지요. 함경도 사투리로 그를 순젱이라고 부르는데 할머니의 손녀인 우리가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 모르는 채 어른들을 따라 순젱이, 순젱이 하고 불렀습니다.
순젱이는 어머니를 아지미라고 불렀지요.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줌마가 되는가봅니다.
그녀는 아들 흉을 한참 보고 돌아갑니다. 윗목에 앉아서 물 한 잔 청해 마시지도 않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무어라도 좀 대접하려고 하면, 지금 금방 밥을 먹고 와서 배가 너무 불러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말립니다. 아지미, 여기 가마아이 앉아 있소, 라고 절대로 못 일어나게 합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절대로 일어나지를 못하지요. 그런 모습을 바로 첨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리는 그 사양의 마음에는, 상대가 일어나서 무엇인가 먹을 것을 가져오는 그 일이 너무 미안한 것이지요. 절대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최고의 겸손한 마음입 니다. 적절한 예의, 사교 등 세련된 요즈음의 인간관계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구시대의 마음인지 모릅니다.
순젱이 아들을 흉보는 대범한 마음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경도 사람을 흉보는 그런 마음과 일맥상통한 데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대한 자랑은 간지러운 북방 여자들 특유의 강한 개성 이 거기에 숨어있습니다.
아들을 흉보는 내용은 대개 이런 것입니다.
아들이 양복을 해달라고 하도 졸라서 겨우 양복을 한 벌 해주었더니 이번에는 구두를 해내라고 해서 구두는 신던 것을 그냥 신어라,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 한꺼번에 그렇게 새 양복에 새 구두까지 하느냐고 하니 새로 맞춘 양복을 면도칼로 찢더라는 얘기입니다.
“면도칼로 쪽쪽 찢소”라고 기가 막힌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말리는 순젱이를 냅다 밀쳐 저만큼 나가떨어지게 하고 세간을 부수고 해서 파출소에 신고하여 순경이 나와 잡아갔습니다. 유치장에 들어가서 좀 반성하라고 순경한테 잡아가게 했지만, 또 너무 얻어맞지는 않는지 걱정이 돼서 그길로 담배 두 보루를 사가지고 뒤쫓아 갔더니 그 밤으로 풀려났더라는 얘기입니다. 너무 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그 밤으로 풀려나왔다고요. 아시겠어요? 이 얘기의 골자를.
이북에서 살다가 피란을 나와 갑자기 산 설고 물 설고 사람 선, 모든 것이 어설픈 상황에서 빚어진 그 당시 실향민의 진면목이 들어 있는 얘기입니다.
저의 외삼촌, 바로 할머니의 외아들도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할머니를 곧잘 마당에다 메어꽂곤 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삼촌이 6·25가 터지니까 월북했고 그 후 소식을 모릅니다(해방되기 몇 해 전 어머니네 식구들은 월남해 있었습니다). 삼촌이 왜 월북했는지, 삼촌에게 뚜렷한 사상이 있었는지 아니면 해방되고 남북으로 갈리는 그 시기에 편승하여 그냥 북으로 넘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제가 간간이 얻어들은 얘기로 보면 삼촌 역시 실향민이 낳은 실패자입니다. 아니, 저는 오늘 낮에 묘에 다녀온 바로 이전까지 그 실향민에 대해 별로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타고난 환경, 능력, 개성, 성격들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결코 사회나 어떤 제도에 연계를 갖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묘에 다녀온 후 우리의 실수로 묏자리가 타버린 지금, 비로소 실향민이라는 무리에 대해 눈이 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동네 산 위에 새까맣게 들어앉은 판잣집,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실향민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북 사투리를 썼습니다. 아이들은 억세고 야생의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좀체로 산 밑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요. 아니, 동네 아이들이 산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을 거예요. 어른들은 이른 새벽 집을 나가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므로 산동네에는 맨 아이들 뿐이었습니다. 간혹 산동네를 기웃거리노라면 집집마다의 아늑함에 놀라곤 했습니다. 저는 열려진 방문 안쪽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했지요. 그 속에 있는 농이랑 거울, 개켜 올려진 이불, 벽에 걸린 옷가지, 문 쪽에 놓인 방비와 쓰레받기, 요강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방 한쪽이 부엌 인 집도 있고 툇마루를 조금 붙여놓은 집도 있고 부엌을 따로 만들어 붙인 집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방 하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이, 소꿉장난하듯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어른들이 없는 산동네는 뭔가 특별한 나라같이도 여겨졌지요. 산은 어린 시절 우리의 놀이터였는데 전후 어느새 판자촌이 되어버렸지요. 그 판자촌은 밤중에 몰래 짓고, 날이 새고 나면 순경이 철근이나 몽둥이로 때려 부수고, 식구들이 울음바다가 되기를 거듭거듭 하여 생긴 동네입니다. 그런 장면들을 참으로 많이 보았지요.
그곳에는 이북서 넘어온 의사와 간호부도 있었는데 의사는 판잣집에 사는 사람 같지 않게 언제나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단정히 입고 의사가방을 들고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 뾰족구두를 신은 곱살하게 생긴 간호원은 점점 배가 불러와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요. 그러나 그들은 곧 결혼을 한다고 했습니다.
산동네의 어느 결혼식도 보았습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단 택시에서 신부가 내려 산동네로 올랐습니다. 신부는 흰 레이스 장갑에 꽃을 들고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산동네로 올랐는데 동네 조무래기들이 길게 신부 뒤를 따랐지요. 신랑 집에서는 음식을 장만하고 술상을 벌였습니다. 새색시는 큰절을 한 뒤 방 한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고, 신랑의 어머니는 부엌에 앉아 큰 다라이 안에 놓인 음식들에 달라붙은 쉬파리를 쫓으며 자꾸만 웃었습니다. 판잣집 단칸방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며 잠시 시름을 잊고 자꾸 웃던 것입니다. 그때 판자촌의 그 아이들도 지금은 나와 같이 중년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 나가서 깜깜한 밤에야 들어오던 어른들, 신랑의 어머니도 저의 어머니처럼 고령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들의 지난 세월은 타향에서 발을 붙여보려고 무척 힘겨웠을 것입니다. 포목시장이나 어디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반가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무리들, 그중의 한 사람이 할머니나 삼촌, 어머니 그리고 우리라는 것을 오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직 한 번도 고향을 잃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고향을 떠난 후 무엇인가를 잃었으며 끝없이 잃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삼촌은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독째로 퍼마시며 사람이 돌변하여 걷잡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세간을 부수고 있는 삼촌을 할머니가 말리려 하다가 냅다 마당에 내팽개쳐졌습니다. 할머니가 봉숭아 꽃밭 위에 나가떨어졌던 장면을 제가 실제로 본 듯합니다만 실지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얘기로 듣고 상상한 것인지 잘 분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삼촌의 혼인날 이발소에 간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일도. 웅성거리며 당황하는 어른들 속에서 빠져나와 뒷동산에 오르니 삼촌이 거기 푸른 하늘을 보며 소나무 밑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제 손에 난 물 사마귀를 면도칼로 밀어버리자고 위협을 하여 저는 그때마다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날 삼촌은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삼촌, 여기서 무어 하고 있어?”
“음, 가혜로구나.”
“할머니랑 엄마랑 사람들이 막 찾아.”
삼촌은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냥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 역시 저의 상상인지 실제인지 분간할 길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아득하게 외삼촌의 모습이 잡혀옵니다. 머리는 반곱슬로 숱이 많고 멜빵을 단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손에는 대두 한 되들이 푸른 병을 들었습니다. 삼촌은 저와 동생을 데리고 논두렁길을 걸어 논으로 벼메뚜기를 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벼메뚜기를 잡아서 푸른 병 속에 가득 집어넣었습니다.
논두렁길, 누런 벼 그리고 벼메뚜기의 빛깔, 이런 것이 정말로 아득하게 넘어가는 저편 하늘처럼 떠오릅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실체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일까요. 제가 삼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 무엇. 형상도 실체도 거의 잡히지 않게 아스름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뚜렷이 뭉쳐져오는 이 실체감. 제가 삼촌을 생각할 때 느끼는 아련한 실체감과 당신을 떠올릴 때 느끼는 실체감은 거의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며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닌, 거기에 뚜렷이 있는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일까요.
다시 순젱의 얘기로 돌아가, 순젱은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달러장사를 했습니다. 그 골목을 지나노라면 달러 있어요, 달러 있어요? 하고 묻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순젱의 모습이 갑자기 우뚝 솟아납니다.
쥐색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반듯이 쪽 찐 그 모습에는 생명력이 넘쳐 있습니다. 분이 뜨고 머리를 함부로 볶아 푸시시한 동료 달러장수들에 비해 순젱의 그 모습은 언제나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그래서 망나니 아들 하나를 너끈히 이기고 나와서 의연히 서 있는 바로 산악과 같았지요. 그러다가 아들이 이민을 갔고, 뒤따라갔다가 혼자 돌아왔습니다. 순젱에게는 딸도 셋이나 있다고 합니다만, 그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직 아들만을 기리는 옛 여자들의 마음을.
돌아온 후 갑자기 생기를 잃은 처진 모습으로 저희 집에 몇 번 오셨습니다. 이미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관절로 바깥출입을 거의 못하실 때, 그녀는 다리가 아파 이제 더 이상 못 올 것 같다면서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두고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생명력이 강해 보이던 모습이 어떻게 저렇게 빛을 잃을까, 돌아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함께 살던 같은 방 사람이 순젱이 죽었노라고 전화를 주었습니다.
순젱의 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묘를 쓰기나 한 것일까, 그냥 화장을 하고 말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밤낚시를 하려는 사람인지 낚시장비를 갖춘 남자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묘에 올 때마다 낚시하러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보면 이 등성이 너머 어디 저수지가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국도에 내려섰을 때, 산으로 난 오솔길 입구에 어둔리라고 쓴 푯말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동네 이름이 무엇인가고 묻는 아저씨에게 어둔리요, 외우기도 쉽지요 어둡다고 어둔리라고요, 말하던 마을 사람 얘기가 떠올라서 저는 그 푯말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왠지 오늘은 실향민의 묘지도 그렇고, 어둔리라는 그 마을 이름도 그렇고, 무엇이든 처음인 듯 새롭게 제게 들어왔습니다.
할머니가 묻힌 곳이 어둔리라는 마을인 것이―할머니야말로 바로 이곳, 이북으로 뻗어 나간 저렇게 높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누워있을 자격이 있는 듯 생각되어졌습니다. 그 무덤은 마루 끝에 나와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화하는 듯했습니다.
할머니가 마루 끝에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이 지금 환히 제게 되살아납니다. 이 세상 아무 데도 없으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이 세상에 한두 명 정도일, 그리고 기억하는 사람마저 없어져버리면 머잖아 할머니는 이 세상에 살다 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흔적조차 없어질 그런 존재입니다만, 바로 살아 숨 쉬던 그 생생한 존재로 지금 제 옆에 다가와 있습니다. 제가 보았던 할머니, 제가 느끼고 만졌던 할머니로 말이지요.
왜인지 늘 할머니 부분을 생각하기 싫고 어떤 죄책감을 느끼며 그리고도 무심히 강한 한 줄기 빛처럼 떠오르면 어쩔 수 없이 음, 하는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그 부분을 두렵지만 더듬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 얼마만큼 시련을 겪어야 하는 존재인가, 기쁨의 순간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흑인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서 느끼듯 말이지요.
역사는 구르고 사람들은 그 역사라는 것을 피를 흘리면서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할머니라는 어떤 한 생명이 구한 말기에 태어나 일제의 압박을 겪고 해방을 맞은 후 다시 6·25를 겪으면서 살아 나온 그 과정이 우리나라 역사와 꽉 맞물려 있으며 할머니를 통해 짓밟혀진 사람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제가 무엇인가 대단히 아는 듯 들릴지 모릅니다만, 저는 이미 할머니가 된 여자인 할머니를 그것도 저의 유년에 보았을 뿐 할머니의 시절들을 모르는 것이지만 역사책에서 배우는 역사가 아닌 그저 막연하게, 복사꽃 피어 있는 어느 마당에서 할머니는 유년의 짧은 한때 즐거움을 누렸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지요. 우리 할머니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여자들의 삶은 대동소이할 거예요.
제가 오늘 여기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할머니와 그보다 더 위의 선조들로부터 무등을 타듯 이어 내려온, 오로지 그 덕분이지요. 그것이 확실합니다. 당신과 플라타너스 밑을, 밑으로 처진 나뭇가지 때문에 간혹 허리를 굽혀 걷던 때 저는 문득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선조들의 피,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까마득한 그 너머 어머니들의 숨결을 느꼈지요. 그녀들이 무등을 태워 저를 여기 이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거리에 결국은 세워놓은 것이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맛보라고 말이지요. 훗날 어느 때엔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품었던 한을 꽃피우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운명조차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 혹은 한들이 뭉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저녁 어둠 속에서 부른 것도 그 누군가가 시켜서 그 누군가의 염원에 곁들여서 된 일이 아닌지요.
6
할머니의 존재가 제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 것은 피란을 떠나던 날 아침입니다. 할머니는 자루 밑에 조금 남아 있던 아끼던 쌀을 꺼내어 보리밥을 지어서 주먹밥을 싸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돌아앉아서 양손으로 밥을 뭉치셨어요. 주먹밥 속에는 소금을 조금 집어넣었습니다.
6·25 때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했던 우리는 아버지의 친구 분이던 군인의 도움으로 뒤늦게 피란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그대로 남겠다고 하셨습니다. 공산당들이더라도 늙은이 혼자 남아 있는 것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셨지요. 할머니는 대문 앞에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우리를 태운 지프차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서 계셨습니다. 우리를 실은 차가 안 보이게 되자 울음을 터뜨리셨을 것입니다.
온 동네가 다 피란을 떠나고 6·25 때 피란을 못 떠났던 사람들도 공산당 밑에서는 살지 못하겠노라고 몸서리를 치며 너도나도 다 떠나버리고 난 후의 텅 빈 마을 속에 할머니는 홀로 남아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얼씬도 않는 곳에서 아니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 않는 것이 차라리 덜 무섭지,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면 더 무서워 해가 진 뒤에도 등잔불을 켜지 못하고 지내셨습니다. 간혹 빈 마을을 털러 다니는 도둑이 그제까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과 저는 처음 타보는 지프차와, 어디론가 떠난다는 일에 들떠있었습니다. 지프차를 타고 당도한 육군본부가 우리의 피란처인 줄 알고, 이렇게 가깝다면 할머니에게 자주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왜 할머니는 눈물지으며 주먹밥을 쌌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피란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요.
군인 가족을 위한 트럭 한 대가 육군본부 앞에 서 있었습니다. 벌싸 사람들이 트럭 위에 가득 올라앉아서 산봉우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구차하게 그 피란행을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때 내리던 눈, 그리고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주먹밥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할머니에 대한 뚜렷한 저의 첫 기억이니까요. 그 쌀과 보리는 깊이 감춰두었던 아주 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배고픔을 참고 새로 밥을 해서 찬물에 손을 적셔가며 뜨거운 밥을 뭉칠 때, 그 주먹밥이 참 먹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주먹밥으로 뭉치셨습니다.
트럭 위에서 어머니가 주먹밥을 내밀었을 때 김이 무럭무럭 나던 주먹밥은 어느새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배가 고프면서도 안 먹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트럭이 멈출 때면 마을에 들어가서 몇 번 사 먹은 따뜻한 국밥에 어느새 맛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언 주먹밥을 트럭 위에서 먹었습니다.
우리는 피란민들의 짐이 산봉우리를 이룬 그 맨 꼭대기에 타고 있었으므로 아주 위태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생 영혜가 굴러 떨어질까봐 두루마기 옷고름에다 잡아매고 제 손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며칠이고 계속해서 우리는 트럭에 실려 달렸습니다. 차가운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고 눈은 계속해서 내렸습니다. 밤과 낮을 끊임없이 내렸습니다. 트럭은 눈 때문에 하루 종일 굼벵이처럼 기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마을에 멈추어 서는 일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이른 새벽에 다시 떠났습니다. 트럭이 멈추면 사람들은 잘 곳과 허기를 면하기 위해 마을을 찾았습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같이 행동하면 좋으련만 언제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안타까웠지요.
왜 함께 가지 않는 것일까.
눈이 내 넓적다리 있는 데까지 쌓였습니다. 발을 옮겨 디딜 수가 없도록 늪 속에 빠지듯 한없이 빠져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제 손을 꼭 붙들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눈 속에서 솟아 나온 나무들만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나뭇가지의 형상은 어떤지 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나무는 눈 속에 허리를 박은 채 나무둥치의 가운데 부분만이 여기저기 유령처럼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봅니다.
눈 속에 박혀 있는 유령 같은 나무들의 형상. 그것은 무엇일까요. 막막하며 적막하고 깊고 고요한 그 풍경은. 전쟁도 폿소리도 추위도 배고픔도 어머니도 동생도 주먹밥도 그리고 나마저도, 모든 것이 멀리 물러가고 오로지 눈〔雪〕과 대면하던 그 눈〔眼〕이 보았던 것은……
그것은 이 세상이었을까요. 이 세상은 있는 것일까요 혹은 없는 것일까요. 당신이 저를 어둠 속에서 불렀을 때, 갑자기 거리의 많은 사람들, 모든 것이 다 물러가고 당신과 나, 아니 내가 아닌 내 눈만이 거기에 있던 것과도 흡사합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 인생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우리가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순간적으로 맛보게 해준 것이었을까요.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 아니 무엇인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열리고 더욱 열리며 아름다운 자유의 개념 같은 것,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자 하는 조건 같은 것, 그런 것에의: 형상화가 아니었을까요.
혼돈이며 땅으로 떨어지는 쪽이 아닌 최선의 것, 아마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과는 정 반대 쪽에 서 있었습니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날 밤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칠흑밤 속에서 우리가 두드리는 대문 소리에 할머니는 한참 만에 마루 끝에 나와 서서 게 누구 왔소? 게 누구 왔소?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는 허겁지겁 대문을 열러 나오셨습니다.
이게 누구냐, 이것들이 살아 있었구나, 결국 살아서 보게 되는구나, 이렇게 수없이 중얼거리시면서.
그 밤 이후 우리는 할머니와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몇 날이고 계속해서 그 기간 동안 지낸 일을 어머니에게 얘기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묘사력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눈에 본 듯이 환하게 장면장면을 그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에구우, 에구우 실루 고생두 측살하게 했구마, 하고 눈물지으며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밖에 나가서 놀다가 잠깐 집에 들렀을 때, 그리고 밤에 자기 위해 누웠을 때뿐입니다.
내가 얼핏얼핏 들은 얘기는, 할머니는 인민군들이 어디선가 가져온 쌀로 그들에게 밥을 지어주며 지냈다고 합니다. 여자 빨치산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할머니에게 어마이라고 부르며 딸처럼 따르다가 동상이 걸린 발을 절룩이면서 며칠 만에 떠났다고요. 인민군들이 후퇴하고 나자 다시 텅 빈 마을에 할머니 혼자 몹시 무서웠습니다. 우리가 피란지에서 오기까지 (그때는 피란민들이 돌아오기에 아직 조금 이른 시기로 마을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 때문에 일찍 돌아왔던 것이지요) 할머니는 텃밭에 배추와 무를 심어서 김치를 담가 시장에 나가 파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김치를 무겁게 이고 가다가 미군 지프차에 치어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그 후 조금 절게 되셨지요. 그래서 무거운 것은 이지 못하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담배를 받아다가 파는 일을 하셨지요.
할머니는 안방이나 혹은 마루에서 방문을 열어놓은 채 허공을 향해 얘기하시고 어머니는 건넌방에 앉아서 듣습니다. 그들의 앉음새는 비슷합니다. 한쪽 무릎을 올리고 눈은 허공을 향한 채……
그리고 그 앉음새는 몇 년 뒤의 어느 봄날로 이어집니다.
피란지에서 돌아와 할머니는 몇 날이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얘기하시고, 어머니는 눈물지으며 듣던 그 자세대로, 이번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싸우고 계십 니다.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이모 집에 가서 좀 지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모네는 살기도 넉넉할 뿐 아니라, 어머니의 몸이 아파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요. 할머니는 싫다고 하셨습니다. 사돈이랑 있는 집에 남부끄러워 이제 어떻게 가 있는가 하셨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기력이 쇠하셔서 간혹 내려가 계시던 시골집을 정리하고 죽 저희와 함께 사셨지요.
“내가 아픈 동안만 좀 가 있소게나.”
어머니는 마구 역정을 내고 할머니는 노여움에 눈물지으셨습니다.
왜 맨날 나한테만 있는가, 남편이 없으니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고 어머니는 말하셨지요. 할머니는 네게 짐 지워주고 싶지 않아 피란도 가지 않지 않았는가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피란을 안 간 것이 어디 나 때문인가, 외삼촌이 이북에서 내려올까봐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닌가고 말했습니다.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보면 안방과 건넌방 문이 열린 채로 두 분이 싸우고 계십니다. 효녀라는 말을 들으시던 어머니가 어째서 할머니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신 듯 학교에서 돌아와 마루에 앉아 있는 내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모한테 가서 할머니를 모셔 가라고 전하라고. 꽤 먼 이모 집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이모는 경대 앞에서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와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할머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만난 듯 울면서 조그만 보퉁이를 하나 싸셨습니다. 그리고 이모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할머니는 진실로 가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늘 있던 곳, 더구나 사위가 없는 그 집이 자신의 집 같고, 있을 곳 같았던 것입니다. 아니 아들이 있다면 아들의 집이 바로 자신의 집이었을 것이지만.
할머니가 울면서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어머니는 저더러 따라가 보라고 했습니다.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흰옷이 햇빛에 눈처럼 반사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아픈 다리를 어기적 어기적 떼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떠난 할머니의 뒷모습에 이어 이번에는 마루 끝이 아니라 이모 집 문지방이 높은 방 안에 오두마니 앉아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끊임없이 일을 하시던 할머니가 이모 집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빗고 몸뻬 차림으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계십니다. 이모 집에는 방의 수가 많지만 아이들이 많고 또한 친척 대학생이 그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으므로 할머니는 일하는 아줌마와 함께 방을 쓰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그 집에 가서는 아마 할 일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니, 일이 하고 싶어도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잡혀오지 않고, 성수* 또한 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사돈이나 집안사람들 눈에 안 띄게 그저 조용히 숨고 싶은 심정으로 방 안에 앉아 계셨던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할머니의 생명을 갉아먹는 셈 이었을지 모릅니다.
저희 집에서는 끊임없이 아픈 다리를 끌고 고추를 널고 고추씨를 빼서 털고 방앗간에 가서 빻아 오고 메주를 쑤고 간장을 담그고 장독을 건사하느라고 붉은 고추와 숯검댕이를 장에다 담가놓으면 독 안에서 익어가던 그 풍성함. 집 근처 공터에 무와 배추를 심고 거름을 날라다 주시고 그러고도 끝없는 그 많은 일들. 우리가 밖에서 놀다가 집에 잠깐씩 들를 때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 일을 하시기 위해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셨지요. 우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 부를 때(그 시절 그 노래는 각 골목 속에서마다 고무줄놀이 때문에 울려 펴졌지요) 할머니는 일을 하시기 위해 언제나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할머니 젊었을 때 이뻤어? 이뻤겠네.”
바느질하시는 할머니 옆에 앉아 우리 형제가 물으면,
“얽은 게 이쁘긴 뭐가 이뻤게이냐”라고 말하셨습니다.
“어마, 할머니 곰보였어?”
우리의 놀란 물음에 할머니는 그냥 웃고 계셨지요. 할머니로서 손주들에게 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그저 조금 미안한 듯, 어쩐지 자기라는 것을 아직 간직한, 아니면 다 버린 그런 웃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른으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순젱이, 아지미, 여기 가마아이 앉아 있소, 라고 첨관을 떠는 바로 그런 웃음, 최고의 겸손함을 간직한 그런 웃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곰보라는 그 사실이 미안해서라기보다 할머니는 아마 언제나 그런 자세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 더구나 여자아이가 마마를 앓고 곰보가 되어 자라난 데서부터 연유한 성격 형성 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리하여 할머니는 순젱이보다 더 첨관을 떠는 사람이 아니었는가 지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타관에서 첩을 얻어 사시고 할머니는 일찌감치 체념하며 살아오신 것일 거예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자가 딸 셋에 외아들을 데리고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고난의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모 집에 가 계신 다음부터 할머니를 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외삼촌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전하러 갔던 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할머니는 단정한 몸뻬 차림으로 문지방 높은 방 안에 오두마니 앉아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어디선가 전해들은, 삼촌이 이북에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할머니는 주저하는 듯 살았대? 라고 한 번 반문하셨치요. 그것이 아마 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할머니는 이를 닦으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며칠 동안 의식 없이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7
그때 할머니가 울면서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꾸리던 모습을 보았으므로 저는 이즈음 어머니에게 곧잘 그 일을 들추며 달려듭니다.
어머니와 저의 싸움이 봄철에서 여름철, 가을철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겨울, 봄에 이르기를 몇 해인가 거듭했지요. 싸우고 또 싸우는 동안 어머니는 드디어 쓰러지셨습니다. 그날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밥을 드시다가 갑자기 핑 하고 쓰러진 것인데, 곧 의식은 회복되었으나 입이 삐뜰어지고 반신에 마비가 왔습니다. 오늘 같이 묘에 간 집안 아저씨에게 연락을 하고 이모님과 집안사람들 몇이 모여들었습니다.
한의원이 와서 침을 놓고 한약을 달인다, 손님상을 차린다. 한바탕 법석을 떨고 난 후 조용해진 저녁시간, 다른 친척들은 다 돌아가고 환자 시중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었던 시집 안 간 사촌이 목욕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선 마루에 나와 앉았습니다. 초여름의 시원한 저녁이었습니다.
사촌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말없이 산을 내다보던 사촌이 우뚝 숏은 먼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키며 아마 저기일 거야, 그래 저기가 맞아, 백운의 줄기였으니까, 거기다가 부적을 묻었어, 내가 부적을 묻었던 데가 바로 저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속치마와 버선을 많이 해주었던 바로 그 사촌입니다.
아, 하고 짧은 비명이 나올 정도로 충격을 느끼며,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남편도 없는 여자가, 더구나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안 나타내며 절에 많이 다니는 보살처럼 겉으로 무덤덤해 있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부적을 파묻은 것인가, 그녀의 원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어떻게 거기다 부적을?”
“나 절에 다니던 스님하고 같이 가서 묻었지. 그 스님은 중옷을 벗고 점괘를 보고 있었지. 올라갈 때는 괜찮았는데 내려올 때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니까 좀 이상하더라, 눈이 많이 온 뒤라 굉장히 미끄러웠는데 스님이 먼저 내려가서 여기 잡으시오 해. 그때 공연히 쭈뼛쭈뼛하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자, 하고 스님보다 더 씩씩하게 손을 내밀고, 또 자, 자, 여기, 하고 더 크게 소리치면서 손을 내밀었지. 부츠를 신었기 때문에 산에 익숙지 않아 많이 뒹굴었어.”
“무슨 부적?” 하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때에도 저는 베토벤의 심포니 9번에서 느끼던 사람의 감정의 폭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지요.
어머니는 비교적 쉽게 입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비도 풀렸습니다만 워낙 아프던 관절 때문에 다리에 더욱 힘을 잃고 침대에 드러눕게 되셨습니다. 화장실 출입만 겨우겨우 하셨지요.
어머니가 비뚤어진 입으로 저를 보고 웃으시던 그 처참한 몰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싸울 때는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지라 어머니도 저를 미워하다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웃으신 것입니다만, 저는 무엇인지 아직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 화가 난 듯 뚱하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머니, 나를 좀 가만 놔두시지요. 어머니 젊었을 때를 좀 기억해 보세요. 좀 뒤돌아보세요. 어머니는 정말 자유로웠지요.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무엇 하나 간섭을 했어요? 오직 말없이 어머니를 도와주기만 했지 않아요. 그런데도 할머니를 쫓아내셨지요. 어머니는 제 생활을 전부 박탈해 가요. 제가 사는 일에 가지는 열정의 부분을, 가장 힘 기울이는 부분을, 바로 그 부분을 어머니는 타락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저보고 만날 미치광이라고, 새쓰개라고.
어머니와 저의 싸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싸움이 한창 고조될 때면 어머니는, 니가 결국 나를 죽이고 말겠다, 나는 다 알 수 있다, 자식이 아니고 원수다, 나가라, 라고 하십니다.
항상 그 나가라는 말에 저는 주춤합니다. 그것은 결혼에 실패해 돌아온 여자의 가장 약점을 찌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지 나가보려고 이 근처 방을 얻으러 다니기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만 방값이 예상 외로 비싸고, 제가 생각던 방이 아닌, 남의 집 가정 한가운데 들어가서 앉게 되는 그런 방들뿐이었습니다. 화장실이나 부엌 또한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제가 없으면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아드릴 사람도 없으면서 저는 그런 것을 사고할 여유도 없이 복덕방을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당신과 처음 시작의 무렵 악마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을 내어놓고 당신과의 연(戀)을 가능하게…… 라고 저는 분명 중얼거렸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악마의 짓인가, 악마가 우리 모녀를 이렇게 싸움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렇다면 그 끝이 도대체 어디인가, 당신과의 끝도 모르겠고, 어머니와의 끝도 모르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이 되어, 울어서 부은 눈을 손등으로 가리고 슬픔을 잔즐르기에 고심하였습니다.
당신을 얻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도대체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꿈의 시간은 바로 언제인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은 지금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꿈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련만 아직도 어디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어린 시절 눈을 보면서 왠지 반가운 일이 이제 앞날에 올 것 같던, 그 앞날이 아직도 온 것 같지 않으며, 아직도 이제 앞날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이런 의문을 당신에게 한 번 실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를 위해서 사는 것일까 하고요. 그때 당신은, 어차피 사는 일은 하나의 준비과정 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명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사는 일은 하나의 준비과정, 정말 그런가봅니다. 어딘가로 향해서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 일 뿐입니다.
이제는 어머니와의 싸움을 화해로 이끌어가고 싶은 기분이 조금씩 들기도 합니다. 이 화해를 하고 싶은 기분이란 당신과의 결별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에게로 가졌던 저의 열정이 고조됐을 때 어머니와의 싸움 또한 극에 달했지요. 저는 매일 매일 머 리를 싸매고 어머니에 게 울며 달려들었습니다. 무엇인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되곤 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의식처럼 되풀이하였지요.
이제 보니 그것은 악마의 내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분명 악마의 짓이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내게 있어서 어떤 중요한 것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런 행복감을 쉽사리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맛볼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저는 그 두 가지를 저울에 달아 어느 것이 더 무거웠다고 그 형량을 달지는 않겠습니다. 후회 또한 하지 않습니다. 후회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시간 그렇게밖에 되지 않는, 않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있는 힘껏 당신에게 달려갔고 당신 또한 저를 기꺼이 받아주셨지요.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당신은 저만큼 먼저 걸어가고,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뒤를 멀리서 따라 밟아갈 때 그 형용할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고독감을 봅니다.
호텔을 찾아들기 위해서지요. 저는 언제나 술을 많이 청해 마셨고 어떤 격정 속으로 숨을 몰아쉬며 떨어져가기까지 술을 마셨지요. 부끄러움, 혹은 두려움 같은 것을 이겨내고자 한 짓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한 그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제가 있을 자리에 와 있다는 확신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따라서 어디까지 가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꼭 술을 마셨으며 한바탕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난 후 호텔 문을 나서서 걸을 때―할머니와 어머니가 긴긴 봄날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눈은 허공을 향한 채 앉아 계시던 바로 그처럼 당신과 저는 긴긴 날들을 앞서고 뒤를 밟으며 걸었던 것이에요. 길디길게 줄을 이으며 마치 밤의 순례자와도 같았습니다―그때 저만큼 멀어져가는 당신의 그림자를 보며 저는 죽으리만큼 외로워하지요.
무엇 때문일까요. 당신은 얘기하셨지요. 참말만 하기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언제 거짓으로 살 시간이 있느냐고요. 당신의 그 말을 좋아하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그럼에도 전해져 오는 허기, 어린 시절부터의 갈증이 고스란히 내 몸을 둘러쳐 혁헉거려지는 것이에요. 무엇으로인지 일그러진 저의 얼굴을 살피며 당신은 버릇처럼 어디 가서¡뜨거운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합니다.
이렇게 안개 끼고 습지며 축축한 밤, 어딘가 밤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정수로 느끼고 싶으면서도 왜인지 그 부분을 사양한 채 돌아서지요.
함경도 사람들의 첨관, 그것일까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내력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없어서 일까요. 내가 나의 몫이 없다는 것, 바로 이 부분을 양보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없는 데서 얻어진 상황 탓이 아닐까, 영혜와 내가 크면서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사달라는 말을 하면서 컸다면 나는 지금 그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저는 택시를 붙잡아 탑니다.
택시를 타고 차창으로 그 넓은 어두운 거리에 서 있는 당신을 보면 당신의 주위에 얇은 종잇장 같은 것이 찢어져 날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냥 서 있을 뿐인데 당신 주위에 어둠을 밀치고 흰 종잇장들이 날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몹시 애수 어려 보이며,:무엇 인가 잃어져 가고 있는 듯 제 눈에 비칩니다.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은 무엇을 찾기 위해 옛집으로 오신 것인가요.
언젠가 옛날에 먹던 동치미에 대해 얘기하신 적이 있지요. 어느 한식집에 가서 저녁을 먹던 때로 기억되어요. 당신은 무심코 동치미에 수저를 넣어 한 입 뜨다가˙내려놓고 얘기하셨지요. 옛날의 동치미 맛을 이제 어디 가서도 찾을 수 없다고요. 그 동치미를 먹기 위해서도 지금의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꼭 옮기고 싶다고요.
“고모님이 한 분이 남아 계시거든. 그 고모님을 모셔다가 동치미를 꼭 좀 담가달라고 부탁해야겠어요. 땅속에 묻어두고 겨우내 먹었으면 싶어”라고요.
당신은 그 일을 꼭 그렇게 하실 양으로 얘기하셨어요. 그 말에 저는 속으로 얼마나 공감하였는지요. 아, 이이는 무언지 나와 아주 같은 것 같다, 심지어 어린 시절을 함께 공유한 듯이도 느껴지고,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왜 좀 더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가,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의 것일까, 그것 역시 준비과정일 뿐일까, 정말로 사랑하기 위한 준비과정밖에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그라는 대상보다 나라는 존재의 문제가 우선이고 나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지요.
밀려드는 나른한 피곤감과 함께 또 한 번의 만남을 치러냈다는 생각을 하며 저는 택시와 함께 당신을 뒤로하고 미끄러져 갑니다.
언제 언제까지일까? 저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것 또한 악마의 짓일까요. 모래시계 속에 인간을 가두어버리는 악마의 짓일 거예요.
당신은 저의 이런 의중을 잘 간파한 듯 가혜 씨가 오십이 될 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만나겠다고 얘기하셨지요. 그리고 육십, 칠십이 될 때까지 가끔 카페에서 만나 얘기하는 좋은 여자친구로 지내고 싶다고요. 그 말은 저의 마음을 살펴주는 뜻에서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오십 이 될 때까지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를 상상할 수 없으면서도 솔직히 제 마음속으로는 오십이라는 나이의 한정을 두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오십, 하고 구체적인 실감이 들이닥치며 삼팔선이 가로막히는 기분이었지요. 언제 언제까지 ?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는 의미 속에서 일 년? 이 년? 아니 혹은 삼 년까지는?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삼 년을 지난 것입니다.
당신은 저의 이런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 하신 것인지요.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저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부둥켜안습니다. 집안 아저씨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새벽같이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라고요. 불은 할머니 무덤 반대편 등성이에서 붙기 시작했으므로 우리가 낸 것이 아니라고요. 아베크족*의 담뱃불이 원인임이 판명이 났다고요. 아저씨는 밤새 스스로 시달렸는지 목소리가 쉬어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려 하다가 지금 첫눈이 오고 있다고 얘기하셨어요.
눈이오?
반문하는 동안 전화는 끊겼습니다.
제가 눈이오? 라고 묻는 순간 저는 어린 시절의 눈의 느낌, 그간의 세월을 거치지 않고 맞바로 그때 그 순백의 느낌이 되살아났습니다.
어제 저녁 빨래에 끼었던 엷은 살얼음으로 보아 바깥 날씨가 성큼 차진 것 같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불은 꺼지고 다 타버린 잿더미 속으로 흰 연기만 푸슬푸슬 날리고 있는 영상이 제게 잡혀 왔습니다. 불이 붙고 있는 동안만 무엇인가 그 기운에 힘입어 내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던 것들을 끌어내었는지, 과연 제 속에 재만 남도록 스스로를 연소하여 태웠는지 의문을 느끼며 저는 허탈감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북쪽으로 난 조그만 들창도 어느새 환해져 있고, 특히 눈이 온 날의 그 환한 느낌이 들창으로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들, 제 주변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랐습니다. 그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어떤 끈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것인지,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안에 함께 혹은 엇갈려서 태어난 그 운명의 끈을 찾아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 것인가.
제가 사랑하는 동생 영혜는 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가장 가까우면서도 자랄 때 이외에는 모르는 사람보다도 더 멀리, 일생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까지는 남편이 외국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리고 서로 편지를 쓰고 하니까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건만 이 새벽, 그것은 정말 크나큰 이별로 다가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짚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와 이제 화해를 한다고 해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삶을 제가 사는 것이겠지요. 소멸해가는 어머니를 담당하는 것이 저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몸이 아파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할머니를 이모 댁에 가시게 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봅니다. 점점 소멸해가는 할머니를 감당하기 벅찼던 것이 아닐까 하고요. 거기에는 제가 몰랐던 어머니의 고통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지금 비로소 생각이 듭니다.
또 기억 속에 아무런 영상도 없이 오직 무(無)인 아버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없는 것과는 다른 뚜렷한 존재지요. 아버지가 계시다면 저의 성격, 저의 운명들은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는 좀 더 삶을 신뢰하고 당신에게도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 제게 갑자기 잡혀져 오는 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군불을 지피며 밥상을 차리는 장면입니다. 소박한 나무상, 칠이 번쩍이지 않는 다갈색의 네모진 조그만 수반 위에 할머니는 아들의 수저를 놓고 콩자반, 무말랭이, 호박오가리 등의 밑반찬을 놓으십니다. 국이 끓고 있고 밥도 뜸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삼촌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삼촌은 옛 모습 그대로 멜빵바지에 푸른 와이셔츠, 숱이 많은 반곱슬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모두가 피란을 떠난 후의 아무도 없는 빈 동네, 빈집에서 할머니는 삼촌을 만나보았던 것일까요? 어머니 말대로라면 할머니는 삼촌을 기다리느라고 피란을 가지 않으셨지요. 어머니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혹서 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두 마음이 함께 있으셨을 거예요. 그리고 그 밤 다시 떠나는 삼촌을 문 앞에 서서 배웅하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할머니는 문 앞에 붙박이듯 서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영상이 참으로 조용히 다가와 제 안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무엇인가의 열쇠를 끌어 쥐듯 그 영상을 소중히 끌어안습니다. 제가 제 안에서 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까요. 바로 이 두 개의 영상, ‘밥상을 차리는’과 ‘싸리문 여잡고 기다리는’ ……이 두 개의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지난밤 새 진통을 하며 이 많은 말들을 쏟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삶의 열쇠를 찾은 기분입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떨림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으로, 저의 성을 찾아 여기에 서는 일은 이리도 힘이 든 일입니다.
할머니가 제 손에 쥐여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먹게끔 차려진 따뜻한 밥상에 대한 갈증과 이제 앞날에 다가올 기다림에 대한 소망의 마음이 그 두 개의 영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잃어가는 것은 무엇 인가요.
당신은 왜 옛집에 찾아오셨나요(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실향민이라고 느껴집니다).
혹시 당신도 저와 같이 그런 소망을 품고 지내온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이제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이런 만남이 오십까지라고요?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아니 삼 년까지는, 하고 시간을 정 해놓고 있는 제게 오히려 과분한 시간일 터이지만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 글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더한 조바심 속에 있었습니다만 그런 모래시계 속에 저를 가두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제 그런 힘을 얻었습니다.
누구인가 제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끝까지 기다려주었으면 하는 저의 소망의 마음을 이제 제 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사람으로 자리 잡은 때문입니다.
저는 굳건하게 여기에 섭니다. 그것은 여자로서 서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할머니나 순젱이, 그 이전의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으로서이기도 하지요. 피란하던 때 본 눈 속에 서 있던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
당신이 만약 원하신다면 원하실 때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으세요.
참,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찾는 집이 그곳인 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았냐고 물으셨지요.
그 엣날 제가 어렸을 때―저희가 살던 집 자리도 지금은 아파트가 세워져 우리도 그중 한 호에 살고 있지요. 그리고 그 옛날 산 위의 실향민촌도 지금은 불도저로 밀려 아파트나 연립주택이 세워져 있지요―당신은 야구공을 던졌고, 길을 지나던 제 이마에 땅 하고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국민학생으로 밤이면 동생과 동치미를 뜨러 다니던 시절이었을 거예요. 그때 중학생이던 당신이 뛰어와서 야구공을 주워 가며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금방 혹이 부풀어 오르는 이마를 싸쥐고 돌아서다가 뒤돌아보니 당신은 유유히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그때 아팠던 야구공의 기억 때문에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서 몇십 년이 지났을까요.
어둠 속에서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저는 당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고 자신 있게 그 집을 가리킬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제 한 자도 더 쓸 수 없도록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저는 조금 눈을 붙여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때 일어나서 들창을 열고 눈의 세계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현대문학』 416호(1989. 8): 『가을의 환(幻)』 열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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