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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0장 사탄 진영의 종말
계시록에서 해석상 첫 분기점은 4장의 “이리로 올라오라” 한 것을 교회의 휴거로 보느냐 여부에 있고, 두 번째는 5장에 나오는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갈라지게 되고, 세 번째 분기점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4) 한다는 “천년왕국” 설입니다. 전 천년설(천년 전에 주님이 오신다), 후 천년설(천년 후에 주님이 오신다), 무 천년설(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이다) 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천년”을 문자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상징으로 보느냐에 있는데, 어떠한 관점에서 보든지 유념해야 할 점은 환상과 상징이 주를 이루고 있는 계시록에 의해서 신약성경 전체가 지배를 받도록 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입니다. 천년왕국설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이 2-3번 강림하신다고 주장하게 되면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을 통해서 확립된 보다 분명한 진리가 뒤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많다는 것은 어느 관점이나 장점도 있는 반면에 단점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렇다면 구속사라는 큰 틀에서 봄이 가장 안전하다 할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20장의 중심주제가 “천년왕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체 15절 중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내용은 세 절에 불과합니다. 또한 성경 전체에서도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말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중심점이 어디에 있는가? 사탄과 그를 추종하던 자들의 종말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문맥적으로 보면 16:17절에서 마지막 화인 일곱 번째 대접을 쏟자, 보좌에서 “되었다” 합니다. 그런 후에 17-18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19장에서는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멸망을, 그리고 20장에서는 최종적으로, “사탄”의 멸망을 보여주는데,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짐 받게 됨으로 사탄 진영이 종말을 고하게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장에서는 놀라운 역전(逆轉)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탄의 진영은, 불과 유황 못에 던짐 받아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10) 되고, 반면 그들에게 목 베임을 당한 자와 정절을 지킨 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주제는 천년왕국이 아니라, 용은 무저갱에 갇히고, 주님의 전사들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역전”인 것입니다. “천년”이란 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도입된 상징적인 연대일 뿐입니다.
보십시오. 마귀는 천년 동안만이 아니라,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10) 합니다. 성도들도 천년 동안만이 아니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5) 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볼 때 인침을 받은 144000이 상징적인 수이듯이, 1000도 무한을 상징하는 수로 역전을 극대화하기 위한 연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는,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2:10) 하십니다. 그렇다고 서머나 교회가 문자적으로 “10일” 동안의 고난만을 받았겠습니까? “10일이라는 잠시의 고난과, 1000년이라는 영원”에 대한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계시록 20-22장의 세 장은 창세기 1-3장과 절묘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당했던 것이, 마지막 아담의 순종하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장에서는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 될 “사탄 진영의 종말”을 보여주고, 21장에서는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그리스도의 진영을 보여준 후에, 22장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6) 사탄의 결박과 성도들의 왕 노릇
둘째 단원(7-10) 사탄의 종말
셋째 단원(11-15) 사탄을 따르던 자들의 종말
첫째 단원(1-6) 사탄의 결박과 성도들의 왕노릇
①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1-2) 합니다.
논란이 많은 부분이라 먼저 20장의 구조부터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단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1-3)의 핵심은, “용, 옛 뱀, 마귀”라고 한 <사탄>에 있고, 둘째 부분(4-6)의 핵심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인 순교자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 한 <성도들>에 있습니다.
② 계시록의 여기제까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이 두 진영(陣營) 사이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이 어떤 상황이었는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4하)이 죽임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하여 목 베임을 받았으며, 누구에게 박해를 받았는가? 짐승 곧 사탄에 의해서입니다.
③ 짐승이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였다”(11:7)고 말씀했습니다.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5) 했고,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매매도 할 수가 없게 하였다(13:16-17)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왜 이런 박해를 받아야만 했는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20:4)이라고 대답합니다.
④ 그런데 계시록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대조와 역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7-18장에서 “이 세상 임금”(요 12:31)의 통치무대였던 바벨론은 멸망을 당하고, 19장에서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짐 받고”(19: 20), 20장에서는 그 머리인 사탄이 최종적으로 결박이 되어 무저갱에 갇히게 된(1-3) 반면에, 그들에게 순교를 당하고 박해를 받던 성도들은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왕 노릇(4-6)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은 이 두 종말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한 중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장면이 별 감동이 없을는지 모르지만, 요한과 초대교회 성도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원형경기장에 끌려가 사자들에게 찢기어 죽고, 화형과 목 베임을 당하는 그런 박해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는 이 장면이야말로 감격과 감동과 눈물의 극치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7:17, 21:4)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상 무슨 다른 위로가 필요할 것입니까!
5,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상징적인 이미지입니다. “천년왕국”은 신구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이 부분에만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보여주는 단 한 가지 이유는,
㉠ 사탄과 목 베임을 받은 자,
㉡ 무저갱과, 보좌,
㉢ 결박당함과 왕 노릇한다는 대조와 역전을 보여주려는데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만 하면 모든 난제는 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구조입니다.
천년왕국
① “또 내가 보매”(1상) 합니다. 본 단원에는 “또 내가 보니” 라는 말이 세 번(1, 4, 4)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보여주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보여주시려는 것,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장면이 무엇일까요?
②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2상) 합니다. 어떤 의도에서 “옛 뱀”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말을 듣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창세기 3장을 연상하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한 장본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③ “잡아서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2-3상) 합니다. 철두철미한 정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서두(序頭)를 통해서 20장에서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왜 마귀를 이렇게 가두는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3중)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미혹”이라는 말이 세 번(3, 8, 10)이나 나옵니다.
인류의 시조를 미혹한 것도 사탄입니다. 만국을 미혹(13:14, 18:23)한 머리가 사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3하)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의도를 8절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데,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합니다. 그런데 왜 놓아주시는가? 미혹하려면 “미혹”해보라는 것입니다.
④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4상) 하고, 보여주시는 장면은 무저갱에서 “보좌”로 바뀝니다. 그런데 장면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극과 극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중) 합니다. 이 장면을 주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은 “무저갱과, 보좌”의 대조가 아닙니다.
“큰 쇠사슬에 결박을 당해 무저갱에 던짐 받은 자와,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자라는 인격체(人格體)의 대조인 것입니다. 4-6절의 초점이 천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와, 거기 앉은 자들”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년 동안만 앉아 있다가 내려올 자들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게 된 요한의 감동이 어떠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들인가?
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4)이라고 말씀합니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란 순교자들인데, 6: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베드로도,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도,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잠수를 당한 바울도, 그리고 2:13절에서 “내 충성된 증인”이라 하신 안디바 등도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6:9절에서는 “제단 아래”에서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잠시 동안”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보좌”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순교를 당할 당시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 얼마나 비참하고 참혹해 보였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⑥ 또한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13장에서 “바다 짐승, 땅 짐승”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위협과 유혹”을 보았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도 못하게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요한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했기 때문”(1:9)에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당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승리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설”을 세우기 위해서 이들을 순교자로 한정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한 성도들을 배제한다는 것은 무리를 가하는 일인 것입니다.
⑦ 이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지금까지 영적인 싸움을 싸운 두 주체의 상반된 두 종말(終末)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 역전(逆轉)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탄이 박해하고 죽이고 그리하여 승리(11:7, 13:7)하는 줄로 여겼으나, 성경은 두 진영의 “마지막”이 다르다고 말씀합니다(롬 6:21-22).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5-6). 바로 이 마지막이 다른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⑧ 이런 맥락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한 것은 고난은 잠시지만 영광은 천 년, 즉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과 비교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묵시를 통해서 구속사의 틀을 다시 짜야 되는, 예를 들면 주님이 몇 번 재림해야하는 식의 새로운 교리인 “천년왕국”을 세우려는 것은 20장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⑨ 이들이 “살아서”(4하)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하면서, “이는 첫째 부활이라”(5) 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6상)고 말씀합니다. 여기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첫째 부활이란 둘째 부활을 전제한 말이요, 둘째 사망이란 첫째 사망을 전제한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점에서 정리가 필요합니다.
㉠ 첫째 부활과 첫째 사망,
㉡ 둘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입니다.
⑨ 본문에 분명히 드러난 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14)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이 열쇠를 가지고 풀게 되면 둘째 부활은 영원한 영광, 즉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된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첫째 부활”도 분명해지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한 죽은 영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요,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첫째 부활(거듭남)과, 둘째 부활(영화) 중 어느 사건이 더욱 크다고 여겨지십니까?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었는가를 설명하기를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 1:19)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20) 라고, 우리를 거듭나게 한 능력과 주님을 다시 살리신 능력이 동일(同一)한 능력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첫째 부활(거듭남)이 둘째 부활(영화)보다 더욱 큰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남은 생명에 대한 재창조요, 영화는 그 생명에 옷을 입혀주는 영광이라 할 것입니다.
⑩ 이를 깨달은 자라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6) 하신 1000년이 어느 기간인가도 자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제사장과,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두 면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첫째로 “제사장”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 것인데, 섬기는 직분입니다. 이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주어지는 직분이 아니라 거듭나는 순간에 제사장 신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 둘째로 “왕”이란 세상과의 관계에서 본 지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던지 그는 이미 신분상 왕족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계시록이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1:6)고 말씀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5:9-10)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는 천년왕국에 가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날 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4장에서, “24보좌가 있고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4)한 것은,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광경이요,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10)있는 장면은 제사장 노릇 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⑪ 이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았습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한 “천년”이, 성도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4하)한다는 기간과 동일한 천년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성경은 왕 노릇하는 것은 순교자들만도 아니요, 천년왕국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왕 노릇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하고,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자는 누구나, 그리고 거듭난 이후부터 왕 노릇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이란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전에는 사탄에게 지배를 당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한, 이후로는 도리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하라 호통을 치면서 지배하고 있다, 즉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계시록에서도,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9-10)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천년이라는 기간이 어린 양의 구속으로 시작되었다면,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갔다는 천년도 사탄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⑫ 그렇다면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혀있다는 사탄이 어떻게 활동할 수가 있느냐 하는 난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5:5절에서 “울지 말라 유다 지파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한 <이기심>이 십자가로 승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마귀는 이미 그때 결박당한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보기를 주저한다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승리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는 여전이 울고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점을 12장에서는 용이 삼키려던 아이는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가고,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9)고 한 절에서 세 번이나 <내어 쫓겼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패하여 결박당한 것이 분명하지만,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는 말씀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일은 인간의 이성의 잣대로는 잴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⑬ 여기에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은 아니다”라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이미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분명하지만,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교회와 함께 싸우시는 대장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계시록에 등장하는 “전쟁”을 종말의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날 전쟁으로만 인식한다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면 최대의 전쟁은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결판이 났으며, 이제도 11장의 증인들, 즉 교회를 통해서 벌어지고 있고, 또한 종말에 심판으로 대단원을 이루게 될 전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눅 12:52) 하신 가정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이며,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하신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기도 함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이를 받아드리지 못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만 말해두고 싶습니다. 만일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려고 한다면 이에 비할 수 없는 엄청난 무리와 뒤틀림이 따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단원(7-10) 사탄의 종말
①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7-8) 합니다.
이 장면을 주님께서 재림하셔서1,000동안 다스리신 후(전 천년설)에 일어날 일로 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님의 재림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이, “살아서 천년 동안 왕 노릇”(4)한다는, “살아서”가 몸의 부활이 맞는다면 이는 영화롭게 된 것인데, 천년이 찬 후에 영화 된 이들이 곡과 마곡으로 더불어 싸우게 된다(9)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② 문제는 천년 후에 사탄을 그 옥에서 놓아주는 의도가 무엇이냐에 있다 하겠습니다. 역설적(逆說的)인 말 같지만 이는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고, 말할 뿐 성도들은 미혹하지를 못합니다.
이점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사탄이 탈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예가 있는데 욥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신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렇게 자랑을 하시고, 그리하여 사탄은 욥을 시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욥의 순전을 꺾지를 못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 한 이들을 미혹할 수 있으면 미혹해보라는 일종의 자랑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사람 아담이 바로 그 사탄에게 미혹을 받아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철두철미한 패배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승리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영화에 이를 자들은 겨우 승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한 승리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③ 이 장면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대번에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19:20) 던짐을 받았으나, 사탄은 심판을 기다리는 대기소라 할 수 있는 “무저갱”(3)에 가뒀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곡과 마곡”이란 에스겔 38-39장의 반영인데 이 “곡과 마곡”은 패망했던 유다를 회복하시는 문맥에서 이를 대적하는 자로 등장하는데,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나라회복을 저지하려는 자로 등장합니다.
④ 결국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10) 합니다. 이점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벨론, 짐승과 거짓 선지자, 용”이 따로 따로 심판을 받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19장에서 심판을 하시고, “용”은 20장에서 심판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공동운명체로써 동시에 심판을 받게 되는데 19:20절에서 짐승과 거짓선지자,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했을 때, 용도 함께 심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20:7-10절은 사탄에 초점을 맞춰서 사탄의 멸망부분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⑥ 또한 이 전쟁(19장, 20장)은 16장에 나오는, 세 더러운 영이 큰 날의 전쟁을 위하여 온 천하 임금들을 미혹하여 아마겟돈으로 모으더라(16:13-14) 한, 소위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과 동일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19:18절에서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를…먹으라”는 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동일한 전쟁을,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속제물의 상징을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설명하고 있음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다른 전쟁으로 여긴다면 보좌로부터 큰 음성으로 “되었다” 하고 선언하신 16:17절의 말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 번의 전쟁을 행해야 할 이유가 전연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종말”입니다.
셋째단원(11-15) 둘째 사망에 참여하는 자들
①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11) 합니다. 본 단원은 “흰 보좌 앞 심판”의 장면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섰는데”(12상) 합니다. 이는 4:2절에서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한 말씀과 상응(相應)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에게 동일한 장면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4장에서는 “은혜의 보좌”(히 4:16)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4:4) 한 것입니다. 그런데 20장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인 것입니다.
② 그래서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섰는데” 하십니다. 여기서 문제가 대두되는데, “죽은 자들”이란 불신자들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14:13)도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한 것과, “책들이 펴있고,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12중)고 “생명책”이 펴져 있는 것을 보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근거는 마지막 절인데,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15)고 말씀할 뿐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 대해서는, 21장 마지막 절에서,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뿐이라”(21:27)고 말씀합니다.
③ 이로 보건대 20:11-15절의 중심점이 불신자의 종말을 보여주려는데 맞춰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10절의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한 말씀과 결부가 되는데, 사탄의 추종자들도 함께 “불못”에 던짐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20장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15)고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④ 12-13절 두 절 안에는 “죽은 자들”이라는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그렇다면 종말에 살아있던 불신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본문은 전연 이를 구분하려 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본문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묘사는 몸이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를 불문하고 불신자를 통칭(統稱)하는 묘사인 것입니다.
이는 4절의 “살아서” 라는 말씀과 대조되는 묘사로 볼 수가 있는데,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란 몸이 죽은 상태만을 가리키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영육이 죽어있는 자들의 총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11-15절의 심판 안에는 성도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요 5:24)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하신 상급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하) 합니다.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그들의 행위가 그 책들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심판 받게 되는 그 “행위”란 무엇이겠습니까?
“행위”하면 즉각적으로 윤리적인 죄만을 생각하는데,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같은 목석의 우상들에게 절하고”(9:20) 한, 경건치 아니함이 우선이요,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9:21) 한 죄는 그 다음입니다. 한마디로 어린 양의 피를 믿지 않은 죄입니다.
⑥ 요한은 이 장면을 보여주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여기서도 최후심판 자체를 보여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점은,
㉠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추종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던 자들의 비참한 말로와,
㉡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4하), 즉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될 영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12) 하고, “행위 책과 생명책”을 함께 언급하면서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⑦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14) 합니다. “첫째 부활”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 요한은 또한 “둘째 사망”이라는 독특한 용어로 설명을 합니다. 영의 부활이 첫째 부활이라면 몸의 부활(영화)은 둘째 부활이 될 것이요, 불 못에 던짐을 받게 되는 것이 둘째 사망이라면, 허물과 죄로 영이 죽은 상태란 첫째 사망인 것입니다.
⑧ 주님은 20장에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종말을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다음 장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받을 복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20장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15) 하고 끝을 맺고 있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에 참여할 자” 곧 불신자의 종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