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남학생들의 고백
시인이 되어서
교정의 나뭇잎이 조금씩 변색되고 있다.
계절은 어김없이 또 한 번 자연의 선물을 내 가슴에 안겨준다. 하나님의 걸작품이 인간이지만,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들어주신 자연을 볼 때면,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가을을 그냥 지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 남학생 문학 시간.
날짜를 정하고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었다.
마침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공부한 이후라, 그것과 연결해 아이들의 고백을 듣고 싶었다.
“얘들아, 우리가 윤동주 시인이 쓴 ‘자화상’ 배웠잖아. 그분은 일제 때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그려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신’을 살피는 거잖니? 그래서 이번에 너희들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자작시나, 또는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를 한 편씩 준비해 오면 좋겠고. 그래서... 낭송하는 거야. 너희들이 고2까지 오면서 무대에 한 번도 못 서 본 친구들이 대부분일거야. 그래서 이 칠판 앞을 무대로 꾸미고, 교탁에 낙엽이나 꽃들로 꾸미고, 마이크 세팅, MR 깔고 낭송하는 거야. 어때? 연상이 되니?”
모두 낭송하는거야
속사포처럼 말을 하는 나를 보며, 아이들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얘들아, 정신 차려. 이건 한 사람도 빠지면 안되거든.”
그리고 나는 다음 수업 시간부터 아이들의 글을 걷고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진지하게 쓴 아이들도 있었고, 또 유치하지만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글도 있었다. 이것은 좋은 문학작품을 쓰기를 지도하는 의미도 있지만, 아이들이 자기를 표현하고, 또 친구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2주간 준비를 하는 동안 덩치가 큰 남자아이들이 제출한 시를 읽으며, 나는 아이들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순수하다는 것이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그것은 동일하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순수성을 훼손하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 어른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훼손되거나 사라진 순수성을 찾아주는 것도 어른들의 몫인 것은 당연하다.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 시 낭송회
낭송을 하기로 한 날, 약 30분간 아이들과 준비를 마무리했다.
칠판 앞에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썼다.
“영훈고 2-2반 가을 시낭송회, 자화상”
그리고 준비한 꽃과 낙엽, 나뭇가지 등으로 장식을 했다. 촛불을 켰고 모든 불은 껐다. 어느덧 미미하지만 가을의 분위기를 담은 작은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는 여러 선생님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먼저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오늘은 스스로를 찾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자화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쓴 시나, 또는 여러분 자신을 잘 드러내는 시를 읽은 후, 왜 이 시를 낭송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해주세요. 그리고 낭송하는 법을 잘 모를 테니까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시 속에 빠져들며
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시낭송을 시작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사뭇 가을에 스쳐지나가는 한 줄기 낭만의 바람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아이들과 같이 시를 읽고 낭송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나의 순서가 끝나고, 회장인 창현이부터 낭송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 순서가 이어졌다. 순서가 계속되는 동안, 아이들은 처음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즐기는 듯 했다.
선생님들도 감성이 풍부한 여학생들이 아니라, 남자아이들이 이렇게 시 속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시
아이들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돌고돌고 돌아본/나의 과거는/하얀 백지상태다./보고보고 또 봐도/나의 미래는/검은 깜지 상태다./과거가 하얗듯이/미래는 어둡다./그리고 그 경계선인 현재의 지금의 내가 있다./(‘자아성찰’, 이형식)
-작가 노트 : 제가 이 시를 쓴 이유는 과거를 보니 안 좋은 의미로 깨끗하고, 미래를 생각하니 그냥 답이 없는 것 같아 썼고, 그 중간인 현재의 자신이 무슨 일을 하냐에 따라 바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쓰러졌다./내 얼굴/충격.(‘거울’, 김형일)
“오늘도 나는 맞는다./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맞는다./힘들어 죽겠다.//오늘은 복싱 체육관에 간다./오늘은 다른 관장님이랑 하게 된다./나는 또 맞다가 끝났다./ 힘들어 죽겠다.//그만 맞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나는 샌드백이다.//(‘샌드백’, 최준혁)
“졸리면 자는 잠/살기 위해 꼭 자야할 잠/행복을 주는 잠/나의 친구 잠//때로는 화난 친구처럼 원망스런 잠/때로는 친한 친구처럼 즐거운 잠/슬플 때는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잠/기쁠 때는 모든 것을 간직해주는 잠//잠이란 매일 나와 함께 하는 친구.(‘잠’, 김원규)
-작가 노트 : 이 시는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입니다. 제가 잠이 좀 많고, 또한 유혹에 약해 잠자는 것이 싫을 때도 있고, 또한 잠잘 때의 편안함이 좋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새들의 지저귐 사이에는 홍진우가 있다,//홍진우가 지나간 자리에는 싸우던 개와 원숭이가 화해하고/개미와 개미핥기가 춤을 추고/고양이와 쥐가 치즈를 나눠먹었다.//나에게서 풍겨오는 평화의 내음은 서로의 천적과도 공존할 수 있는 악수와도 같다.//(‘홍진우’, 홍진우)
낭송 후 소감
아이들의 낭송은 40분간 계속되었다. 40명이 40분이니까 한 사람당 1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무척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시를 쓰기 어려운 아이는 노래를 준비해온 아이도 있었고, 몸짓으로 표현한 아이들도 있어서 이 시간이 더욱 다채롭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모든 순서가 마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오늘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 그렇지 않니? 그래서 너희들 소감을 들어보면 좋겠는데, 모두 핸드폰 꺼내렴. 그리고 소감 문자 한 통씩 나에게 날려~”
다음은 아이들이 낭송을 마친 후의 소감이다.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를 느꼈습니다.”(남병현)
“매우 떨렸지만 재미있게 시낭송을 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재미있었습니다.”(민경훈)
“다른 친구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구본석)
“최고였어요.”(남현우)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기억하기에는 이런 경험을 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배운 후부터는 좋은 경험도 많이 해보고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홍진우)
“처음으로 앞에 나와서 발표한 거라 긴장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한기준)
“아무 것도 아픔이 없던 애들도 다들 아픔이 있고 저마다 힘든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이었다.”(원호운)
“너무 좋았어요. 자기 마음을 말한 것 같아서 속도 후련하고 이런 무대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유범석)
“분위기도 좋았고, 힘든 수업 속에서 한 번 쉬어가는 것 같은 의미 있는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우대철)
선생님의 소감
이 수업을 참관했던 한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해주셨다.
“선생님,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괴물들이 시를 써보고 남들 앞에서 낭송도 해보고, 일생 최대의 사건이 아닐가요?
낄낄거리며 참여하는 데서 고민도 보이고요, 한 번도 주목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 얼마나 남들 앞에 서고 싶었을지, 아이들의 소감이 짠하네요.
여학생은 감성적이라 어느반이나 가능하지만... 남학생은 쌤이 잘 이끌어서 잘한 것 같아요. 우리 참관한 선생님들끼리도 시 읽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첫댓글 샬롬!아들만 둘있는 저희 집에서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