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고나)
해변가를 달리고 달려 우리는 타라고나에 도착하였다. 바르셀로나 가기 전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들른 곳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유명하지 않은 곳은 절대 아니다. 지금의 2천년 마드리드 인구가 3백 5십 만 명이고 1천년 코르도바의 인구가 백 만 명에
육박한 도시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천 년 전 스페인에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은 없었을까. 바로 이 타라고나에 백만 명이
모여 살았었다. 이곳은 로마시대 때 최대 영광을 누린 곳이다. 아우구스투스부터 내노라 하는 로마황제는 꼭 이곳을 다녀갔다. 물론 시찰에 휴식 겸
해서 들렸겠지만 그만큼 이곳은 로마인들이 당시 자랑할 만한 도시였다. 기원전 814년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부에 세운 카르타고란 나라는
지중해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해상교역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카르타고는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하여 반도 내에 여러 식민도시를 건설하는데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이다.
그 무렵 로마제국 또한 이탈리아를 거의 차지하고 제국을 확장하기위해 밖으로 뻗어나갈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그들의 숙명적인 관계로 인하여
겨루게 된 전쟁이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니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들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1치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은 카르타고
인들이 시칠리아 섬을 점령함으로써 일어났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선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이곳의 승자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로 진출하기가
쉬워진다. 카르타고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시칠리아를 포기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손실은 그 후부터 로마제국은 해군력을 증강하여 카르타고가 우의를
점하던 해상권도 위협을 받게 된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제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조용히 지내게 되는데 그간 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도 원주민들과
융화정책을 하면서 와신상담하게 된다. 그러던 중 지금 발렌시아 바로 위의 도시 사군토가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는다. 이는 당시 카르타고와 로마가
맺은 평화협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바로 타라고나 바로 못 미쳐 있는 에브르 강을 경계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어긴 것이다. 이에 격분한
카르타고의 젊은 장군 한니발은 사군토를 점령하고 60마리의 코끼리와 강력한 군대를 끌고 에브르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해간다. 바로 이것이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 ~201)이다. 대단한 위용을 보인 한니발은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점령하게 되는데 그때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가 나타나 카르타고 본국을 쳐들어가 전세를 역전시키고 끝내 카르타고를 굴복시킨다. 그때
스키피오가 얻은 칭호가 아프리카누스이다.
로마가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되는 결정적인 전쟁이 바로 이 포에니전쟁이다. 이후 카르타고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고 기름진 북아프리카 땅은 로마 원로원의 사유지로 바뀌고 만다. 로마는 이로써 이베리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까지 얻은 땅으로 엄청난 부가
축적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에브르 강에 근접한 타라고나는 로마제국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뜻 깊은 땅이 아닐 수 없다. 속주로 만든 땅에
그들은 도로를 내고 법과 건축을 옮겨 번영된 도시를 만든다. 바로 그 대표적인 곳이 타라고나이다. 2세기 무렵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를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는데 당시 세 속주의 주도가 코르도바, 타라고나, 메리다이고 톨레도나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세고비아 발렌시아 알칸타라 세비아
이탈리카가 속주들의 도시로 활기차게 번성한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군단이 주둔한 곳은 레온이라는 곳인데 번성하던 도시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베리아 북쪽이다.
이 점에 대해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하였었는데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논한 글을 보고 나는 그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로마가 비록 포에니에서 승리의 주역이 되었지만 그들을 지배하기까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기원전 38년에 이르러 이베리아를
로마제국에 편입시켰다. 그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되어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스페인에 와서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스페인북부의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의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간 그들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으며 이에 북부인 레온에 그들의 주둔군단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가 당시의 프랑스를 점령하는데 9년이 걸렸는데 반해 이베리아에 들어와 저항세력과 무려 2백년 넘게 지속적인 싸움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끈질긴 보수적인 국민적 성향이나 지역주의 의식이 먼 옛날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가히 직감할 수 있다.
우리가 타라고나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나절이었다. 시내 중심으로 식사를 하러나온 사람들이 붐벼 차를 대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참 이채로운 것이 도심의 광장 바로 아래가 그들의 주차 공간이라 차를 대고 오르면 바로 광장 한 복판이고 연이어 이어지는 카페와
식당이다. 우린 광장의 맨 끝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이르러 사진을 찍고 야외 식당 테이블에 앉아 식사주문을 했다. 당연 바닷가이니 해산물을
시켜야 할 것인데 이름을 모른다고 주저할 것도 없었다. 식당 앞에 메뉴사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스페인 명물요리라 하여
소개하는 것을 TV로 본 적이 있는데 바로 빠에야 라고 하는 그 음식이 사진 속에 있다. 쌀과 새우나 오징어를 볶아 나오는 일종의 볶음밥이다.
그런데 오징어 먹물을 아예 밥과 함께 비벼 언뜻 보기에 자장밥 같이 보이는 빠에야도 있다. 우린 그것 먹을 용기는
나지 않고 해서 노란 색 나는 밥에 새우가 얹혀 진 것 하고 오징어와 꼴뚜기 튀김에 생선 구운 것을 시켰다. 아침도 굶은 참이니 나온 음식이
맛이 없을 리 없다. 색깔부터가 진노랑 옥수수 같이 구미를 돋는다 했는데 노릿하며 고소한 것이 스페인에 와 먹은 그들 음식 중 단연 최고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로마 때의 원형경기장이 있다는 곳으로 향하였다. 덩치가 작고 옆 돌기둥이 사라져서 그렇지 콜로세움과 생김은 똑같다.
속주라고 무시하고 로마라고 특별히 따로 반듯한 구색을 갖춘 것은 아니다. 내가 로마를 멋지게 보는 것이라 한다면 바로 그 점이다. 참 그러고
보면 스페인처럼 구석기 알타미르 동굴부터 시작해서 카르타고, 로마, 서 고트, 이슬람, 기독교, 절대왕정, 내란, 쿠테타, 독재 ,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지구상 온 풍상을 다 맞이한 나라가 또 있는가 싶다. 참으로 그들의 역사는 대단한 아픔이고 끈기이다. 포용과 수난, 반목과 대립,
투쟁과 쟁취 그리고 사랑과 용서이다.
여행시작 땐 그래서 그들의 정서를 쉽게 알 것 같았는데 갈수록 그들의 복합적인 정서가 어렵다 여겨진다. 이는 내가
어쩌면 획일적 의식에 이미 고착화되어 그럴 지도 모른다. 왜 그들은 못난 왕들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도 끝내 버리지 않았는가. 알고 싶은데 모를
것이다. 그들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그들에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의식을 별로 안하는 것 같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유색인종들이 유럽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편견을 지녔다는 것을 은연중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은 분명 다르다. 이곳이 많은 다수인종의 광장 격으로 변모하여 더욱 그럴 것이지만 습관처럼 굳어버린 다양성에 대한 포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양한 문화 창출. 참 마음에 드는 말이다. 이는 곧 열린 마음이고 포용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역주의만
탈피하면 그런 그들의 미래는 밝다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2천년전 뜻과 의미가 같다면 모두 로마인이라고 이 카르타고에 전하였던 로마의
통치방식이고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