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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Croatia
11 문명과 자연이 만나는 곳, 크로아티아(9)
자르레브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1557년 이래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였고 그 후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었다. 자그레브 구시가지에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답게 다른 도시에 비해 컸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내가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현재 우리가 크로아티아의 내륙에 온 건 아시죠. 이곳은 해안의 크로아티아와는 음식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이러한 것이 사뭇 다릅니다. 내륙 쪽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선 비너 슈니첼이 전형적인 음식입니다. 반대로 아들이아 해 쪽은 생선요리, 와인, 이탈리아 파스타를 먹습니다. 내륙 쪽은 화이트 와인을 즐겨 마시고 해안 쪽은 딩가치(Dingac)같은 레드 와인을 즐겨 마시죠. 딩가치, 뽀십(Posip), 바빅(Bacic), 이곳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터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구시가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엘레나와 나는 주차를 하고 자그레브 대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성 슈테판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자그레브는 자그레바치카 산의 경사면과 사바 강의 범람원에 걸쳐 있다. 자그레브는 유럽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탁 트인 광장과 공원이 많다고 한다. 이곳은 문화, 경제, 과학 등 크로아티아의 모든 것의 중심지이다.
구시가지는 구릉 위에 있으며 두 개의 중세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덧 우리는 성 슈테판 성당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였다.
엘레나가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이 장소가 바로 모든 것의 시발점입니다. 자그레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바 강의 오른쪽이 뉴 자그레브 지역인데 2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됐고, 10-15층의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바란 이름은 달콤한 물(sweet waters)이란 뜻의 ‘사부스’라는 로마시대 골 족의 말을 이은 고트어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뉴 자그레브 지역에는 비즈니스와 관련된 건물들인 자그레브 국제전시장이라든지 석유회사 빌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분은 로워 타운(Lower Town)입니다. 1880년 자그레브는 심한 지진으로 파괴된 적이 있는데 로워 타운은 지진 후에 새롭게 계획 및 설계한 곳입니다. 자그레브 중앙역에서 시작해서 예닐곱 개의 공원을 거쳐 옐라치치 광장에 이르는 길은 자그레브 관광의 핵심 루트로서 U자 형의 모양 때문에 푸른 말발굽(The green Horseshoe)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30개의 공원이 이 도시 안에 있고 이것이 이 도시의 특색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퍼 타운(Upper Town)이라고 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구릉지 위의 두 개의 중세 도시로 구성됩니다. 바로 그라데쯔와 카프톨입니다.”
성당이 있는 광장은 넓었다. 이곳은 성 슈테판 성당이 있고 그라데쯔와 카프톨의 중심인 광장이다.
엘레나에게 말햇다.
“그라데쯔는 오스만 투르크인에 항거하고 오스트리아의 게르만화 정책에 대한 저항, 범 유고슬라비아 운동 등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의 중심이던 곳이지요.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인을 막기 위해 성벽으로 마을을 둘러싸면서 요새화된 곳입니다. 그리고 카프톨은 가톨릭교회의 통치로 16세기에 성직자 마을로 요새화된 곳입니다.”
이번에는 엘레나가 천천히 슈테판 성당으로 걸어가면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이곳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헝가리와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거기에 관련된 것이죠. 13세기에 몽골인들이 헝가리를 침입했는데 그때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은신처였던 곳이 그라데쯔입니다. 이에 대한 감사로 왕은 그라데쯔를 왕권도시로 선포하여 칙허장을 수여했답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크로아티아는 거의 80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왕국에 속해 있었는데, 성 슈테판 성당은 1093년에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Ladislas)가 짓기 시작해서 1102년에 완공, 1217년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것이랍니다. 13세기에는 몽골, 혹은 타타르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몽골이 물러난 후 주교가 고딕 양식으로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합니다. 보시다시피 거리 쪽을 보면 파사즈가 나 있는데 이것은 13세기 것입니다. 그 후 17세기에는 화재를 겪었고 19세기에는 지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880년에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을 지은 사람이 이 성당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첨탑이 있는데 남쪽의 탑은 104미터, 그리고 북쪽의 첨탑은 105미터입니다. 내부는 5,000명이 동시에 들어가 미사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엘레나와 나는 성당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당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문 앞에 계시는 수사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지금 로자리오 기도시간이라 성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엘레나와 나는 성당 정문 앞 성모 마리아 분수대를 지나 카피톨 지역으로 향하였다.
엘레나가 말했다.
“크로아티아 인구의 86퍼센트가 로마 가톨릭 신자인 거 아시죠? 합스부르크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그리고 이곳은 주교좌의 도시이지요.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저곳은 13세기에 설계된 왕권도시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와 똑같은 모습을 곧 보실 겁니다. 성벽과 탑에 둘러싸이고 의회 건물, 스톤게이트 이런 것들이 13세기 전형적인 왕권도시의 영토에 속했던 중요한 것들입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보았어요. 1991년에 일어난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내전이 아니라 크로아티아를 공격한 유고슬라비아 군인들과의 전쟁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여기 자그레브에서 남쪽 호수가 있는 쪽으로 가는 길에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많은 전쟁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정복했는데 그때 투르크인들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영토가 사바 강, 크로아티아와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다는군요. 그래서 그들은 강줄기를 다라서 정착하기 시작했고 보스니아 북쪽 땅에 거주했습니다. 1991년에 그곳은 정교회 지역이었는데, 크로아티아엔 30퍼센트의 세르비아계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슶니다. 16세기 중엽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크로아티아에 군사적인 경계선을 만들었고 그것은 군사기지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크로아티아 영토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오스만 쿠르크에 대한 방어시스템을 구축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크로아티아 군사 경계선이 350년 동안 크로아티아 의회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이죠.”
엘레나와 나는 크로아티아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선 시장광장을 거쳐 카피톨 지역으로 가기로 하였다. 시장의 모습은 어디나 활기찬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곳은 카피톨 시장입니다. 시장은 매일 오전 7시에서 오후 3시까지 장이 섭니다. 이 시장은 1930년에 생겼답니다. 이곳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잇는데 두 개의 시장이 계단을 통해 이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청과물을 파는 시장입니다. 그리고 계단 아래쪽에서는 다른 것들을 팝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손짓을 하며 동상을 가리켰다.
“이 동상은 과거 농사짓던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벽 2시-3시면 일어나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에 치즈, 우유, 달걀을 넣은 바구니를 이고 10킬로미터 넘게 걸어서 장이 서는 곳까지 6시에 정확히 도착했답니다. 그런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동상입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힘들었던 시절 서민들의 어머니 모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입었던 전통의상은 붉은색이었는데 전통적인 북쪽 마을 옷의 색이었습니다. 또한 붉은색은 자그레브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생강 빵은 자그레브시의 기념품입니다.
그 밖의 기념품이라면 네가이와 ‘크래쉬’라는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도 있습니다. 피퍼 쿠키도 16세기부터 만들어온 자그레브의 대표적인 기념품입니다. 모든 농부들은 이런 모양의 리본이 달린 빨간색 우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정돈된 시장은 보기 좋았다. 우리는 꽃을 파는 광장으로 갔다.
꽃을 파는 광장답게 많은 꽃들이 파라솔 아래 진열되어 있었으며 광장에는 기념비가 있었다. 엘레나는 나에게 “이 기념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하고 물었다.
“이 기념비는 구 유고슬라비아 시절 자유롭지 못했던 크로아티아인을 상징합니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이 남자는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지요. 그리고 이 뒤에 있는 사슬은 그 당시 크로아티아인이 해방되어 있지 않았음을 상징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양쪽으로 레스토랑이 줄지어 서 있는 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먼저 엘레나에게 말했다.
“아주 오래전 이 거리를 따라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천이나 조그만 운하쯤 되겠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군요. 그걸 기념해서 피의 다리 거리(bloody bridge street)라 부르고 있답니다. 불행하게도 중세에 다리는 없어졌고 대신 카페와 레스토랑만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건물들은 18세기 때 건물들입니다. 이 지역엔 히스토리시즘(historical style)이란 게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프랑스혁명 때까지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라는 스타일이 있었고, 혁명 후부터는 네오(neo)라는 것을 붙여 리바이벌되었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히스토리시즘’이라 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스톤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게이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왼쪽에 있는 저 건물은 크로아티아 최초의 저축은행 건물이죠. 저기 한 젊은 여인이 물레를 갖고 있는 게 보일 겁니다. 물레는 저축을 상징한다는군요. 천천히 조심스럽게 돈을 모으는 겁니다. 지금은 개신교 침례교회당으로 쓰고 있답니다.” 스톤 게이트 입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동상 하나가 있었다.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죽이는 이야기에 근거해서 만들었다는군요. 전설에 의하면 매일 용이 처녀 한 명씩 잡아먹었답니다. 결국 다 희생되고 공주까지 잡아먹힐 상황이 되었는데 성 게로르기우스가 그 용을 죽였기 때문에 공주는 살 수 있었고 성 게오르기우스는 그 후 위험에 빠진 아가씨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엘레나에게 “이것은 용이 아니라 메기같이 생기지 않았나요?”하고 물으니 그녀는 웃음녀서 동상을 한 번 더 보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다시 웃었다. 사실 동상의 모습보다는 스토리텔링이 있기에 조금은 봐줄 만하였다.
“이 스톤 게이트는 말했듯이 도시로 연결해 주는 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 입니다. 원래 네 개가 있었으나, 세 개는 파괴되었고 이 문 하나만 보존되었습니다. 이곳은 자그레브 시민에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와서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는 곳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지성소, 즉 성모 마리아를 숭상하는 곳이죠. 여기 와서 성모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라도 빈 다음 만약 성모 마리아께서 들어주시면 블록을 사서 감사하다는 문구를 넣고 벽에 넣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에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1731년에 화재가 나서 도시 전체가 불탔는데 저 성화만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믿음이 신실한 한 여인이 화재 현장에서 이 성화를 발견하고 대중들의 헌신적인 믿음을 위해 그것을 공개했답니다.”
철제문과 많은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성모 마리아의 성화는 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스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제 우리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같은 자유 왕권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주교의 도시를 본 것이고 이제부터는 13세기의 상인들, 교역가들의 도시를 보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하였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약국이었다.
“이 약국은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약국입니다. 1355년에 문을 연 후 지금까지 영업을 한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의 첫 번째 주인이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인 단테의 손자였는데 이름은 니콜로 알리기에리(Nicolo Alighieri)였다고 합니다. 또 검은 독수리가 약국에 걸려 잇는데 검은 독수리는 건강을 상징하고 건강을 찾아서 약을 받는 곳이 약국이라는 생각에서 검은 독수리를 내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바로 위에 있는 성 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의 광장이었다. 이탈리아처럼 이곳도 광장이 정치적,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이 광장의 정치, 종교적 기능 중 정치적 기능을 말씀드리면, 이곳은 자그레브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중세 때 이 도시에는 게르만인, 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네 개의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매년 여러 나라에서 온 자신들을 대표하는 시장을 뽑았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 당시에는 완벽했답니다. 그 당시 이곳 사람들은 국적과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햇다는 군요. 그러한 기능을 했던 곳이 바로 이 광장입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성 마르코 성당을 마주보고 설명하였다.
“오른쪽이 국회입니다. 그리고 왼쪽이 대통령궁이죠. 엘레나, 성당 지붕을 한번 보세요. 왼편에 세 지방의 깃발로 된 문장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과 흰색은 16세기 크로아티아 내륙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세 개의 사자머리는 이전 로마제국의 달마티아를 상징하죠. 그리고 아래를 보세요. 밑은 작은 동물은 쿠나라고 부르는데 현 화폐와 같은 이름입니다만 세르비아와 가까운 동부 크로아티아 지방 즉 슬라보니아를 상징합니다. 엘레나 씨, 아시겠지만 슬라보니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를 헷갈리지 마세요. 각기 다른 것입니다. 쿠나는 현존하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방패 모양의 문장은 자그레브 시의 문장입니다. 중세시대의 요새를 볼 수 있는데 자그레브의 대표 상징입니다. 문이 열려잇는 것은 환대, 자유, 그리고 자유 왕권도시를 의미합니다. 요새 밑의 갈색 지그재그는 강을 상징합니다. 그 똑바로 아래엔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산 이름은 메드베드니카(Medvednica)라고 합니다. 그리고 윗부분의 왼편에 초승달, 오른편에 샛별을 볼 수 있습니다. 샛별은 크로아티아가 현대적인 국가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여섯 개의 뿔을 가진 샛별은 가장 밝음을 상징하고 크로아티아가 현대국가가 되어서 재생하였음을 상징합니다.
현재 크로아티아 국기에는 다섯 개의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과거 세 개의 역사적인 지역에다가 이스트리아 반도와 두브로브니크 시의 문장이 들어갑니다.”
엘레나는 성 마르코 성당 대각선 방향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냐고 물었다.
“1991년 이 건물은 크로아티아 대통령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역사지구 밖에 있습니다. 1991년 이 대통령궁은 크루즈 미사일로 공격을 받았지만 마당만 파괴됐고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엘레나와 나는 광장에서 왼편 골목으로 갔다. 그곳은 과거 국립극장이 있었던 장소다.
“이 건물은 이 나라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곳인데 크로아티아의 첫 오페라, 드라마, 연극, 연설 등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880년 지진 전까지는 국립극장이었지만 지진 후 로워 타운에 새로운 국립극장이 지어졌습니다. 지금 여기 1층은 결혼식장인데 재미있는 것은 결혼에서 이혼까지 2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기 1층은 결혼식장이고 이 길 끝자락 왼편에 실연 박물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연박물관이요?” 하고 엘레나가 나에게 반문하였다.
“실연당한 많은 남녀들이 이곳에 와 이 박물관에서 사진, 편지, 반지 등을 주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박물관에서는 얼마나 당신이 슬퍼하는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려줄 것이라고 한다는군요. 재미난 박물관입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리 와보라고 하였다.
“이 편지에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쓰여 있스빈다. 헤어져서 더 기뻐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박물관인데 한 커플이 헤어진 후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무료는 아니지만 밤 11시까지 연다고 합니다.”
엘레나에게 골목에 있는 가스등을 보라고 하였다.
“이 가로등은 가스등입니다. 니콜라 테슬라라는 사람이 자그레브시측에 전기등을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미국에서 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일했었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거대한 수력 발전소를 만들기도 했었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당시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아직도 여기 역사지구에 있는 가스등을 매일 세 시간에 걸쳐 모두 켜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가스등은 스탠바이 상태에서 꼭대기에 갈고리가 달린 꼬챙이를 이요해서 파이프를 누르면 갈고리 때문에 가스가 자동으로 나옵니다. 217개의 가스등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덧 엘레나와 나는 거의 골목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박물관이 있었는데 이 박물관은 일본인들에게 인기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나이브(naive) 혹은 프리미티브 아트(primitive art)이것은 번역하기 애매하지만 소박한 화풍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들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인 듯하였다.
엘레나와 나는 골목 끝에 왔다. 골목 끝에 경찰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경찰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뒤에 자그레브 시장이 여는 공식 리셉션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골목 끝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이 광장은 17세기에 종교인들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17세기에 이곳으로 와서 아름다운 예수회 성당인 성 카타리나 성당을 건설했습니다. 다른 곳처럼 그들은 성당, 학교, 그리고 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광장의 왼편에는 성당과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교육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복합 건물 군을 만들었고 그것은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골목 끝 오른쪽에는 우스피냐차와 푸니쿨라가 있고 자그레브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로트르슈챠크 탑이 있다. 왜 로워 타운, 어퍼 타운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엘레나에게 설명했다.
“두 타운은 높이가 40미터나 차이가 납니다. 이곳은 남문이 있던 자리인데, 그러니까 지금 우린 구시가지를 막 나온 겁니다. 이 탑은 대포가 있는 탑으로 매일 정오가 되면 대포를 쏩니다. 로트르슈챠크 탑에 오르면 시내 전망을 감상할 수 있고 아름다운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대포도 구경할 수 있고 케이블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짦은 거로 유명합니다. 정거장은 하나이고 50초 만에 올라옵니다. 19세기에 이 도시는 이 성벽 타운에서 로워 타운 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50년 전에 저쪽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죠.”
엘레나와 나는 천천히 왼편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이제 다시 로워 타운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10월 짧은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밤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주로 이탈리아와 터키에서 수입합니다.” 아래로 내려가자 동상이 하나 있었다. 그는 안톤 구스타프 마토시로 유명한 작가요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사람이다. 보헤미안적 삶을 예찬하였던 사람이다.
나는 엘레나에게 앉아 보라고 하였다. 동상 곁에 앉지 말고 그의 무릎에 앉으라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싱글이 됩니다.” 엘레나는 웃음녀서 “그럼 좋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무릎 위에 앉아보죠.”하였다. 천천히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길은 아주 좁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갔더니 예라치치 광장이 나타났는데 그곳의 중앙에는 반 요셉 예라치치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다.
엘레나와 나는 주차장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