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미켈란젤로는 21세 때인 1496에 피렌체에서 로마로 갔다. 카톨릭 교황청이 로마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로마에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교양있는 피렌체의 은행가 야콥 갈리였다. 미켈란젤로가 살 곳을 마련해주었고, 작품을 의뢰받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에게 바쿠스 상을 주문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바쿠스 상은 균형과 조화를 맞춘 전통적인 조각상이 아니었다. 인체 비례는 균형이 맞지 않았고, 거의 비틀거리는 자세로 불안정해 보였다. 미켈란젤로의 생각에 술의 신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자세라고 보았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작품의 인수를 거부하자 야콥 갈 리가 그 작품을 사주었다.
야콥 갈리의 소개로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 비에레스 드라그롤리 추기경의 주문을 받아주었다. 이때도 중개인이자 재정 보증인으로서 주문을 받아 준 작품이 피에타 상이다. 추기경은 산타 페트로넬라 성당에 미리 자리를 잡아 둔 자신의 무덤에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표현한 조각상을 의뢰했다. 지금은 조각상이 바티칸 성당에 있다.
계약서에는 ‘살아 있는 어떤 화가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조건이 명시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은 종교 조각사에서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보다 뛰어나다, 라는 평을 듣는다. 미텔란젤로는 계약상의 조건을 지킨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사가인 바사리(1511-1574)는 그가 쓴 ‘예술가 열전’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이 예수처럼 시신의 느낌을 주는 조각은 없다. 그러면서도 팔과 다리는 묘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피부 아래의 혈관까지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신성한 미를 만들어 낸 예술가의 손에 끝없는 감탄을 한다.’
피에타에는 미텔란젤로가 조각했다는 것을 표시한 유일한 조각상이다. 성모의 어깨에서 가슴으로 가로지른 띠 부분에 ‘미켈란젤로의 제작’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원작자의 표시가 성모의 망토 뒤에 표시하여 눈에 쉽게 띄지 않게 한 것은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라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그러나 바사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미켈란젤로가 자기의 작품 앞에서 우연히 이 작품을 만든 조각가는 밀라노 출신의 솔라리라 라고하는 말을 들었다. 미켈란젤로는 밤에 몰래 들어와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했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상을 완성했을 때는 24세 때였다. 젊은 조각가의 작품이라선지 피에타 상도 영원히 젊음을 지니고 있다. 피에타 상은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아들 예수보다도 훨씬 더 젊어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유를 ‘순결한 여서은 그렇지 않은 여자보다 훨씬 더 오래 젊음을 간직한다. 음란한 욕망을 한 번도 가지지 않았던 성모가 젊게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반면에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가져보았으므로 나이가 들어 보인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미켈란젤로는 어머니를 여섯 살 때 여위었다. 미켈란셀로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는 젊은 어머니 뿐이다. 예수는 당연히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조각상의 특징을 들라면 주변을 압도하는 고요함이다. 성모는 다른 피에타 상에서 흔히 묘사하였던 것처럼 깊은 슬픔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니다. 깊은 사색에 빠져 있고, 감상자도 함께 명상 속으로 젖어든다. 성모는 왼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몸짓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세는 감상자가 무거운 감상주의에 일방적으로 빠지는 것을 절제하고,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통해서 신의 나라로 인도한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상을 많이 남겼다. 만디나의 피에타 상과 론다니니의 피에타 상은 바티칸 성당의 피에타 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어쩌면 미완성 작품처럼 보이는 론다니니 피에타 상에서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재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