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젊은 때(1) -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 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하려고 안 진사 집 사랑에를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기로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金亨鎭)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이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9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 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 보자는 결심이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물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로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서 여비를 만들어 가지고 청국에 가는 길을 떠났다.
우리의 계획은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 - 만주 -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화장수로 차리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장이한테 까닭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신(韓信)이 회음(淮陰)에서 어떤 젊은 놈에게 봉변 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의 이태조가 말갈을 쳐 물린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길다란 남대천 나무다리와 또 네 가지 큰 것 중의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얼굴에는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이런 것 넷이 둘씩 둘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 있었다. 옛날에는 장승이란 것이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 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四大物)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함흥의 낙민루(樂民樓)는 이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성하게 남아 있었다.
흥원, 신포에서 명태잡이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 한 개가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 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홍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서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취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 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가위 문향(文鄕)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도청이란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 꼬기, 신 삼기도 하고, 이야기 책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供饋)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7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서 마치 사람이 안 사는 빈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봇껍질을 흙덩이로 눌러 놓으면 거기 풀이 무성하여서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혜산진(惠山鎭)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 개의 짓는 소리가 들렸다. 압록강도 여기서는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祭天堂)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재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눈 쌓인 유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또 용솟음친다. (六月雪色山白頭而雲霧 萬古流聲水鴨綠而 湧)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수,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마울산(帽兒山)에 다다랐다. 지나온 길은 무비 험산 준령이요, 어떤 곳은 70,80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데가 많았다.
나무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8명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할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가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 있었다.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와하여 얼마든지 묵여 보내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나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 호밖에 없었다.
기구한 젊은 때(2) - 만주의 동포들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老人峙)라는 영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 리에 두어 사람이나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通化)로 갔다.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성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관사의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 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백 호라는데, 그 중에는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집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의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일부러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漢語)를 배워 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한 곳에를 가노라니 어떤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한 처녀가 있기에 이웃 사람에게 물어본 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 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寬甸), 임강(臨江), 환인(桓仁)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로부터 배로 물을 거슬러 올라와서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네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와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와서 본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들의 대개는 일청 전쟁에 피난간 이들이지마는 간혹 본국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흠포한 관속도 있었다.
집안(輯安)의 광개토대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어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金利彦)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 자사(瀋陽刺史)에게서 말 한 필과 '삼국지' 한 벌을 상급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이나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하루는 압록강을 앞으로 한 백 리나 격한 노중(路中)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 - 청국 군인의 모자 - 에는 옥로(玉鷺)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중국말을 모르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왜적과 더불어 평생을 같이 할 수 없음을 통탄한다 (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
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필담을 하려고 필통을 꺼내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서 왜(倭)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왜가 우리 국모(國母)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대도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 전망한 청국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와 본즉 그것은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虛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徐玉生戰死之地)'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錦州)요, 집에는 1천 5백 명 군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천 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백 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 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우리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할 사이 없이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게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 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이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는 것은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과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나는 근 1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 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 집, 저 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 지 5,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三道溝)에 다다랐다.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백 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의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金奎鉉)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기구한 젊은 때(3) - 강계성의 전투 김이언은 제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한 3백 명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과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乙未年)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강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策源地)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기고 몸이 온통 강 속에 빠져 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은 농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는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高山鎭)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지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불의(出其不義)로 강계를 덮치는 jt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고산리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禿魯江) 빙판으로 전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仁風樓)에서 10 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 남쪽 송림 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 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이 마주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정직한 말일는지는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하여서도 작전 계획에 김이언은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저의 진지에 돌아갈 때쯤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땅땅 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편의 천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인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큼직한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젯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어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 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虎列刺)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 모를 말씀을 하셨다.
"곧 성례를 하게 하자"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에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으로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相書)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들은 조상의 뼈를 파는 양반이지만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들이었다.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때에 강령에서 살 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들을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 생원 집에 갔다가 칼만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 붉은 물감을 꺼내다가 온통 개천에 풀어놓은 것을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주셨다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거나 덕행으로 보거나, 또 내 외모로 보거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 하시고, 창수는 범의 상이니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서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기구한 젊은 때(4) - 혼담이 나오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하셨다는 것과, 또,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 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정 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어든,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아직 성례(成禮)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며 반가와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해로 되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 형제가 되었다는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때는 마침 김홍집(金弘集)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 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新章程)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오 것이 단발령(斷髮令)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이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관아가 있는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에 군사가 지켜 서서 행인을 막 붙들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勒削, 억지로 깎는 것)이라고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民怨)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이 목은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이다'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寧爲地下無頭鬼 不作人間斷髮人)'는 글귀가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내 온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어니와 단발 반대는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되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 말을 아니 하시고,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되었거나 제 자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도 괴이한 일이어니와 그는 그렇다 하고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려거든,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혼인이나 하고는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만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자가 내 앞에다가 칼을 내어 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오.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자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장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사람을 찾으려고 많은 심력을 허비하여서 나를 얻어 손서(孫壻)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그러면 혼인 일사는 갱무거론(更無擧論)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들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 - 머리 깎이는 화란 -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하셨다.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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